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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사는 국제차량제작 주식회사. 국제차량제작소는 자동차 정비업을 하고 있던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가 세운 회사로 1947년에 설립되었다. 1955년 8월에 이 차를 제작했고 이 차 외에도 아래에 나오는 9인승 세단형 차량도 제작했다. 그러다가 1963년 5월까지 새나라자동차와 경쟁을 하다가 끝내 망했다.
 
제작사는 국제차량제작 주식회사. 국제차량제작소는 자동차 정비업을 하고 있던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가 세운 회사로 1947년에 설립되었다. 1955년 8월에 이 차를 제작했고 이 차 외에도 아래에 나오는 9인승 세단형 차량도 제작했다. 그러다가 1963년 5월까지 새나라자동차와 경쟁을 하다가 끝내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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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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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치로 두들겨 4개월에 걸쳐 손으로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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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8월, [[국제차량제작소]]의 창업자인 최무성 등 3형제가 6.25 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미군들이 버리고 간 지프의 잔해를 모아서 시발자동차를 만들었다. 시발 자동차가 처음 완성된 1955년 8월 무렵 국내 자동차 시장은 주한 미군이 얼마나 폐차하느냐에 울고 웃었다. 미군이 버린 폐차에서 주요 부품을 떼어 내 재생하고 드럼통을 펴서 겉을 입힌 개조차들이 굴러다녔다. 대부분 공장도 없이 천막에서 미군 지프와 군용트럭을 재생해 지프형 승용차와 버스를 만들어냈다. 시발 자동차 역시 외형은 미군 지프를 그대로 베꼈지만 내용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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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국산 엔진을 달았다. 첫 국산 엔진과 국산차를 선보인 곳은 신문기자 출신인 최무성씨가 동생 둘과 설립한 국제공업사. 자동차 정비 및 개조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던 국제공업사는 '엔진 도사 김영삼'을 스카우트한 뒤부터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국산 엔진 제작이 꿈이었던 기술자 김영삼은 사장을 설득해 엔진을 만들어냈다. 흙으로 만든 틀에 쇳물을 부어 주물을 제작한 다음 손으로 구멍을 뚫고 깎아내는 광경을 지켜본 미군 관계자들은 한국인들의 신기로운 손기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시발자동차의 차체는 드럼통을 펴서 일일이 망치로 두드려 만들어졌다. 이러한 제작 방식 때문에 시발자동차는 한 대를 완성하기까지 약 4개월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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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어려움 속에 세상에 태어난 시발 자동차는 초년 운이 좋았다. 1955년 10월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 창경궁(당시는 창경원)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경영진과 기술진을 초청해 격려하고 시발자동차를 시승까지 했다는 소식에 '사겠다'는 주문이 줄이었다. 대당 8만환 하던 차량 가격에 24만환의 프리미엄까지 붙고 부유층 부녀자들 사이에 차량 구입을 위한 '시발계'까지 등장했다. 차량 인수자격을 미리 달라는 선금도 1억환이나 쌓였다. 제작사는 밤낮없이 공장을 돌렸지만 도저히 수요를 맞출 수 없었다. 천막공장의 최대 생산량이 하루 한 대 꼴이었으니까. 쏟아지는 주문을 미처 감당하지 못하던 국제공업사는 원효로에 공장다운 공장을 차렸다.(현대자동차 원효로 서비스 센터의 일부가 바로 국제공업사가 마련했던 공장 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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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발세단, 시발 택시, 시발 트럭... 다양한 차종 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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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시발자동차는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아 전국을 누비는 자동차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기세를 몰아 1958년에는 6기통 엔진을 장착한 9인승 '시발세단'이 출시됐으며 이후에는 버스와 트럭, 트랙터까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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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발은 처음 출시된 지 10년도 되지 않아 하락세를 타기 시작한다. 정부 보조금 중단과 일본산 승용차 수입 허용이 맞물리면서 경쟁에서 뒤처지게 됐고 결국 1963년 5월 생산을 중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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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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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 투자를 늘린 시발 자동차는 성공했을까. 그렇지 않다. 우선 1958년 이승만 정부가 발동한 '5.8 대책'에 발목이 잡혔다. 주한 미군이 별다른 제한 없이 주던 휘발유 공급을 제한하자 급해진 정부는 기존의 차를 폐차시켜야 새로운 차를 살 수 있도록 정책을 바꿨다. 자동차 메이커로서는 타격이었지만 낡은 차의 교체 수요가 워낙 커 시발 자동차는 차츰 성장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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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시발 자동차의 앞길을 막은 것은 새나라 자동차 사건. 5·16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 아래 일어난 4대 의혹사건의 하나인 새나라 자동차 사건은 일제 승용차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국산차의 활로를 차단한 사건. '자동차 공업육성법'을 제정하고는 법의 이름과 정반대의 시책을 펼친 것이다. 말이 조립생산이지 일본 닛산의 완성차 '블루버드'를 들여와 이름만 바꾼 '새나라' 자동차의 성능은 시발과 비할 게 아니었다. 정치헌금설이 도는 가운데 정권의 비호를 받는 양질의 수입품에 시발자동차는 무너지고 말았다. 국민들에게 '국산품 애용'을 외쳤던 박정희 정권은 최초의 국산차를 만든 국제공업사 최무성 사장 주변을 세무조사로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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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자동차의 후속 모델을 제작하기 위해 국제공업사의 공장장으로 스카우트됐던 오원철(3공 시절 전 청와대 제2 경제수석비서관 역임)씨는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공업도 수공업적으로나마 버스나 시발차가 국산화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니, 이 것을 기초로 해서 서서히 발전시켜 나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차를 완제품으로 들여왔으니 국내에는 일감이 없어져 버렸다. 이 일로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은 완전히 일본에 내주어야 했고 우리나라는 상당기간 자동차 산업의 불모지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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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 참고자료 ==

2021년 4월 6일 (화) 10:22 판

시발자동차
시발(始發)

시발(始發)은 1955년 국제차량제작에 의해 생산된 한국 최초의 자동차다. 1963년까지 누적대수 2235대를 생산한 끝에 단종됐다. 시발자동차는 한국에서 최초로 생산한 자동차다. 1955년 8월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국제차량제작의 창업자인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에 의해 제작됐다. 당시 상표로 등록된 이름은 'ㅅㅣ-ㅂㅏㄹ'로, 첫출발이라는 뜻의 한자어 시발(始發)을 한글 자모로 표기한 것이다.

개요

6.25 전쟁 휴전 직후인 1955년에 미군이 내다버린 윌리스 MB 지프들을 주워다가 완전히 해체한 후 쓸만한 부품끼리 긁어모아서 다시 조립해 만든 영운기로, 당시 법제에서는 자동차로 인정받았다. 때문에 형태도 지프 스타일, 즉, SUV이다.

제작사는 국제차량제작 주식회사. 국제차량제작소는 자동차 정비업을 하고 있던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가 세운 회사로 1947년에 설립되었다. 1955년 8월에 이 차를 제작했고 이 차 외에도 아래에 나오는 9인승 세단형 차량도 제작했다. 그러다가 1963년 5월까지 새나라자동차와 경쟁을 하다가 끝내 망했다.

역사

망치로 두들겨 4개월에 걸쳐 손으로 제작

1955년 8월, 국제차량제작소의 창업자인 최무성 등 3형제가 6.25 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미군들이 버리고 간 지프의 잔해를 모아서 시발자동차를 만들었다. 시발 자동차가 처음 완성된 1955년 8월 무렵 국내 자동차 시장은 주한 미군이 얼마나 폐차하느냐에 울고 웃었다. 미군이 버린 폐차에서 주요 부품을 떼어 내 재생하고 드럼통을 펴서 겉을 입힌 개조차들이 굴러다녔다. 대부분 공장도 없이 천막에서 미군 지프와 군용트럭을 재생해 지프형 승용차와 버스를 만들어냈다. 시발 자동차 역시 외형은 미군 지프를 그대로 베꼈지만 내용은 달랐다.

무엇보다 국산 엔진을 달았다. 첫 국산 엔진과 국산차를 선보인 곳은 신문기자 출신인 최무성씨가 동생 둘과 설립한 국제공업사. 자동차 정비 및 개조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던 국제공업사는 '엔진 도사 김영삼'을 스카우트한 뒤부터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국산 엔진 제작이 꿈이었던 기술자 김영삼은 사장을 설득해 엔진을 만들어냈다. 흙으로 만든 틀에 쇳물을 부어 주물을 제작한 다음 손으로 구멍을 뚫고 깎아내는 광경을 지켜본 미군 관계자들은 한국인들의 신기로운 손기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시발자동차의 차체는 드럼통을 펴서 일일이 망치로 두드려 만들어졌다. 이러한 제작 방식 때문에 시발자동차는 한 대를 완성하기까지 약 4개월이 걸렸다.

온갖 어려움 속에 세상에 태어난 시발 자동차는 초년 운이 좋았다. 1955년 10월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 창경궁(당시는 창경원)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경영진과 기술진을 초청해 격려하고 시발자동차를 시승까지 했다는 소식에 '사겠다'는 주문이 줄이었다. 대당 8만환 하던 차량 가격에 24만환의 프리미엄까지 붙고 부유층 부녀자들 사이에 차량 구입을 위한 '시발계'까지 등장했다. 차량 인수자격을 미리 달라는 선금도 1억환이나 쌓였다. 제작사는 밤낮없이 공장을 돌렸지만 도저히 수요를 맞출 수 없었다. 천막공장의 최대 생산량이 하루 한 대 꼴이었으니까. 쏟아지는 주문을 미처 감당하지 못하던 국제공업사는 원효로에 공장다운 공장을 차렸다.(현대자동차 원효로 서비스 센터의 일부가 바로 국제공업사가 마련했던 공장 부지다)

시발세단, 시발 택시, 시발 트럭... 다양한 차종 출시

특히 시발자동차는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아 전국을 누비는 자동차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기세를 몰아 1958년에는 6기통 엔진을 장착한 9인승 '시발세단'이 출시됐으며 이후에는 버스와 트럭, 트랙터까지 만들어졌다.

하지만 시발은 처음 출시된 지 10년도 되지 않아 하락세를 타기 시작한다. 정부 보조금 중단과 일본산 승용차 수입 허용이 맞물리면서 경쟁에서 뒤처지게 됐고 결국 1963년 5월 생산을 중단한다.

좌절

시설 투자를 늘린 시발 자동차는 성공했을까. 그렇지 않다. 우선 1958년 이승만 정부가 발동한 '5.8 대책'에 발목이 잡혔다. 주한 미군이 별다른 제한 없이 주던 휘발유 공급을 제한하자 급해진 정부는 기존의 차를 폐차시켜야 새로운 차를 살 수 있도록 정책을 바꿨다. 자동차 메이커로서는 타격이었지만 낡은 차의 교체 수요가 워낙 커 시발 자동차는 차츰 성장해 나갔다.

결정적으로 시발 자동차의 앞길을 막은 것은 새나라 자동차 사건. 5·16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 아래 일어난 4대 의혹사건의 하나인 새나라 자동차 사건은 일제 승용차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국산차의 활로를 차단한 사건. '자동차 공업육성법'을 제정하고는 법의 이름과 정반대의 시책을 펼친 것이다. 말이 조립생산이지 일본 닛산의 완성차 '블루버드'를 들여와 이름만 바꾼 '새나라' 자동차의 성능은 시발과 비할 게 아니었다. 정치헌금설이 도는 가운데 정권의 비호를 받는 양질의 수입품에 시발자동차는 무너지고 말았다. 국민들에게 '국산품 애용'을 외쳤던 박정희 정권은 최초의 국산차를 만든 국제공업사 최무성 사장 주변을 세무조사로 뒤졌다.

시발 자동차의 후속 모델을 제작하기 위해 국제공업사의 공장장으로 스카우트됐던 오원철(3공 시절 전 청와대 제2 경제수석비서관 역임)씨는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공업도 수공업적으로나마 버스나 시발차가 국산화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니, 이 것을 기초로 해서 서서히 발전시켜 나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차를 완제품으로 들여왔으니 국내에는 일감이 없어져 버렸다. 이 일로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은 완전히 일본에 내주어야 했고 우리나라는 상당기간 자동차 산업의 불모지가 되어버렸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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