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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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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KIA)
김철호 기아자동차 창업자

경성정공㈜기아자동차의 전신으로 1944년 12월에 설립되었다. 1952년에 경성정공㈜에서 기아산업㈜로 개칭하였다. 설립자는 김철호이다. 1952년 기아산업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후 삼천리자전거를 개업해서 자전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역사

일본에서 볼트와 너트 제조기술을 닦고 일본 기업인 삼화제작소의 경영을 이끈바 있는 기아자동차의 설립자 김철호는 해방 즈음 귀국하여 1944년 12월, 일본에서 기업을 경영하여 모은 재산 500만엔(현재 가치 500억원)으로 기아자동차㈜의 전신인 경성정공㈜을 설립했다.

이듬해 1월, 영등포 공장을 준공하고 새로운 운송수단으로 떠오른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기시작, 서울의 청파동과 원효로, 인천에 공장을 분사했다. 다만, 1950년에 있은 6.25 동란은 6년동안의 기업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고, 생명과도 같은 기계 설비를 두고 피난을 떠날 수 없었던 김철호 사장은 직원들의 도움으로 생산설비와 함께 부산에 피난길을 올랐다.

전쟁 와중에도 뜯어온 생산설비로 부산공장을 건설, 1952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자전거인 3000리호를 완성했다. 이때부터 상호도 기아산업㈜으로 바꾸고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1955년 시흥공장을 착공, 시세확장의 길을 걷는다.

1959년 본격적인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고자 일본 혼다와 동양공업(현 마쯔다)과 2륜 모터싸이클 및 3륜 자동차 생산을 위한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하고 1961년 기아혼다 C-100과 1962년 기아마스타 K-360을 생산하여 우리나라 3륜차시대를 열었다. T-2000과 T-600 삼륜 트럭의 연이은 성공으로 자금력을 확보한 기아는 1973년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공정 시스템을 갖춘 소하리 공장을 완공하고 이어 기업공개를 실시했다. 더불어 엔진 개발에 매진해 국내 최초로 2000cc 4기통 VA 가솔린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소하리 공장에서 새롭게 생산을 시작한 0.5톤 브리사 픽업 B-1000과 2.5톤 디젤 타이탄 E-2700, 4.5톤 E-4100 트럭은 최초로 해외사장의 문을 두드린 역군들이었다.

1970년대 초반 국내 자동차업계의 최대 과제는 자동차의 국산화였다. 이에 정부는 1974년 60%, 1975년 75%, 1976년에는 90% 이상 자동차 국산화를 이룬다는 목표 하에 기아와 현대, GMK 3개사를 육성하여 국민차 개발을 촉진시켰다. 이에 탄생한 것이 기아의 브리사와 현대의 포니, GMK가 제미니였다

1974년 등장한 기아 최초의 승용차 브리사(S-1000)는 마쯔다의 파밀리아 차체를 기본으로 생산, 초기 국산화율 63.01%를 달성한 모델로, 1976년에는 89.47% 까지 국산화에 성공했다. 브리사(S-1000)는 1983년까지 모두 31,017대가 생산된 인기 모델로 실용성과 경제성을 갖춘 승용차로 평가받아, 1,300cc의 S-1300 모델도 추가되었다.

1970년대 기아산업의 계열기업 형성에 있어 아시아자동차공업㈜의 인수와 ㈜기아기공의 설립은 가장 두드러진 업적으로 평가된다. 70년대 초반 아시아자동차공업은 기아산업의 만만치 않은 경쟁자였으나 무리한 시세확장은 부도로 이어졌고 결국 기아산업의 일원으로 거듭나 군수차량을 생산하는 전문업체로 성장했다. 기아기공 역시 공작기계 및 정밀부품을 생산하는 고급기술을 구현하기 위한 발판이 되었다.

1979년 기아산업은 프랑스의 고급 승용차 푸조 604와 이탈리아의 피아트 132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는 영업적인 측면보다 고급기술 흡수를 위한 시도로 이후부터는 독자적인 기술개량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이때부터 자전거 생산도 분리 운영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오일쇼크 등으로 모든 자동차 메이커가 고전을 겪었으나, 특히 기아산업에 있어서는 더없이 어려운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정부차원에서 현대자동차와 새한자동차는 승용차를 기아산업은 동아자동차와 버스와 트럭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발표되었다. 따라서 기아는 슈퍼 타이탄 2.5톤(E-3000)과봉고 1톤(E-2200) 등의 화물자동차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18개에 이르렀던 계열회사 중 5개사가 매각되었다.

이에 1983년 유상증자를 단행하고 일본의 동양공업과 이토츄의 외국자본을 수용하여 자본금을 확충했다. 또한 전사적으로 봉고 코치(E-2200)의 대대적인 판촉활동으로 '봉고의 신화'을 이루어냈으며, 농촌형 다목차 트럭 세레스의 성공으로 점점 회생의 길을 찾아갔다.

1987년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일부 해제되자 기아는 다시 승용차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마쯔다, 포드와 함께 리터카 개발계획을 착수, 우리나라 최초라 할 수 있는 월드카 '프라이드'가 탄생했다. 이는 포드의 자본참여로 현실화될수 있었던 일이었다.

1990년 기아산업은 기아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하고 독자모델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1991년 처음으로 독자모델인 세피아와 스포티지를 도쿄모터쇼에 발표했다. 기아가 1980년대 초반부터 관심을 가졌던 4WD차 스포티지는 1993년 열린 파리-다카르 랠리에 출전해 전 구간을 완주함으로써 신뢰성을 인정받아 세피아와 함께 본격적으로 미국에 수출되었다.

이후 기아는 프라이드의 후속작인 아벨라와 크레도스 등을 개발하면서 승용차 사업에 입지를 굳혔으며, 1996년 영국의 정통 스포츠카 제작사인 로터스사의 역작 엘란의 제조권을 사들여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방만한 경영과 노사갈등, 아시아자동차에 대한 투자 실패 등으로 부도에 이르렀고, 현대, 대우, 삼성, 포드 이 4개사의 인수 각축전 끝에 1998년 12월, 현대자동차에 합병되었다.

현재 기아자동차는 카삼형제(카렌스, 카니발, 카스타)의 성공에 힘입어 쏘렌토, 레토나 등의 RV 자동차 생산에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리오, 옵티마, 리갈, 엔터프라이즈 등 중대형 승용차시장에서도 적극적인 마케팅 정책을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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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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