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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남동부지구는 선거구가 가장 적은 지역이다. 과거 [[영국]] 해협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영국식 지명이 많이 잔존해있다. 시장은 모드 파미이다.[[싱가포르]]는 작은 도시국가이기 때문에 지방자치제도가 없고 역사적으로 다양한 목적의 다양한 방식으로 세분화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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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남동부지구는 선거구가 가장 적은 지역이다. 과거 [[영국]] 해협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영국식 지명이 많이 잔존해있다. 시장은 모드 파미이다.[[싱가포르]]는 작은 도시국가이기 때문에 지방자치제도가 없고 역사적으로 다양한 목적의 다양한 방식으로 세분화되어 왔다.
  
 
그 대신 정부 주도 하의 사회발전이사회라는 행정단위가 존재한다. 사회발전이사회는 총 5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반적인 국가의 도시에서 구의 성격과 유사하다. 원래 사회발전이사회 의장은 원래 싱가포르 국회의원이 겸임했으나, 2002년부터 장관급으로 시장이라는 직급이 별도로 개설되었다. 5개 사회발전이사회는 총 87개의 선거구로 나뉘어져있다.
 
그 대신 정부 주도 하의 사회발전이사회라는 행정단위가 존재한다. 사회발전이사회는 총 5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반적인 국가의 도시에서 구의 성격과 유사하다. 원래 사회발전이사회 의장은 원래 싱가포르 국회의원이 겸임했으나, 2002년부터 장관급으로 시장이라는 직급이 별도로 개설되었다. 5개 사회발전이사회는 총 87개의 선거구로 나뉘어져있다.

2024년 8월 5일 (월) 09:32 기준 최신판

남동부지구싱가포르 남동부에 위치한 지역이다. [1]

개요[편집]

싱가포르 남동부지구는 선거구가 가장 적은 지역이다. 과거 영국 해협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영국식 지명이 많이 잔존해있다. 시장은 모드 파미이다.싱가포르는 작은 도시국가이기 때문에 지방자치제도가 없고 역사적으로 다양한 목적의 다양한 방식으로 세분화되어 왔다.

그 대신 정부 주도 하의 사회발전이사회라는 행정단위가 존재한다. 사회발전이사회는 총 5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반적인 국가의 도시에서 구의 성격과 유사하다. 원래 사회발전이사회 의장은 원래 싱가포르 국회의원이 겸임했으나, 2002년부터 장관급으로 시장이라는 직급이 별도로 개설되었다. 5개 사회발전이사회는 총 87개의 선거구로 나뉘어져있다.

성문헌법을 가진 영국식 의회 정부의 공화국으로, 행정권이 내각에 있는 의원 내각제이다. 총리가 모든 권한을 위임 받고 내각을 이끌고 있다. 1991년 개정된 의회의원 선거법에서 복수정당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적 투표로 의회가 구성되게 되었다. 다만 의회는 인민행동당의 영향력이 크다.

1959년부터 현재까지 리콴유가 이끌었던 보수주의 정당인 인민행동당이 여당으로 집권하고 있다. 야당으로 싱가포르 노동자당, 싱가포르 민주당, 싱가포르 민주연합 등의 많은 정당들이 있으나 여당의 장기 집권과 강력한 정권의 힘(검열, 게리멘더링(선거구 조작), 민주화 운동 탄압)으로 존재가 미미하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국가보다 더 강력한 독재국가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인민 행동당의 강력한 독재 체제에 야당들은 정치적인 역할이 엄청 약하기 때문에 보수주의적 일당 독재를 할 수 있으므로, 싱가포르 의회는 오직 인민 행동당의 정권 장악력이 크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모든 사법적 권한은 싱가포르 헌법에 의해 대법원과 그의 부속 법원에 부여되어 있다. 대법원은 항소심법원(the Court of Appeal)과 고등 법원(the High Court)으로 구성되며 항소심 법원은 형사 및 민사 사건의 항소심을 수행하고, 고등 법원은 형사 및 민사 사건의 원심과 상소심을 수행한다. 대법원장, 항소심 판사, 사법 위원(Judicial Commissioners)과 고등법원 판사는 총리가 제청한 후보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 총리는 판사를 추천하기 전에 대법원 판사와 협의하여야 한다.

헌법에 의해 사법권은 대법원에 있으나, 인민행동당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는 비판도 있다.

싱가포르의 법은 영국과 영인도의 법 그리고 영미법(코먼로)에 기반하고 있으나,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은 다민족 · 다종교 사회인 싱가포르의 국익을 이유로 서양의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그대로 따르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부분(표현의 자유)은 제한하고 있으며, 수많은 무거운 벌금 체계가 존재한다.

특히, 현재까지 태형이 존재하는 몇 안 되는 국가이며, 엠네스티에서는 싱가포르를 사형률이 높은 나라 중 하나로 보고 있다. 1994년 공공기물파손죄를 지은 미국인 청소년 마이클 페이에 대한 태형 논란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기까지 하였다.

싱가포르의 태형은 심장병이 없는 50세 이하의 남성을 대상으로 3대에서 24대까지 때리며 21세기 들어서는 기계로 때리기도 한다.[2][3]

역사[편집]

싱가포르 섬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경 중국 문헌에서이다. 말레이반도 끝에 있는 섬이란 의미의 말레이어 '풀라우 우종(Pulau Ujong)'을 중국식으로 표기한 '蒲罗中(Pu Luo Chung)'이란 지명이 등장하였다. 최초의 정착지는 1298~1299년에 세워졌는데, 당시 지명은 '어촌'이란 뜻을 가진 '테마섹(Temasek)'으로 불렸다. 이 섬의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가능성은 14세기 수마트라섬에 기반한 인도네시아의 고대왕국 스리위자야 왕국에 의해 발견되었다. 팔렘방의 한 왕자가 사냥을 하다 생전 처음 본 동물을 발견하였는데, 그 동물이 발견된 자리에 도시를 세우고 '싱가푸라(Singapura)'라고 이름 지었다고 전해진다. '싱가푸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시'를 의미한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점령(1511)한 적이 있고, 말레이인들에 의해 싱가푸라의 도시와 항구가 개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포르투갈이 1613년 싱가푸라를 점령하여 현지인들이 건설한 초기 도시를 불태우면서 관련 기록은 모두 소실되었다. 19세기 초까지 네덜란드의 영향권에 있다가 1819년 영국이 말레이반도 남단의 조호르바루 왕국과 조약을 체결한 후 무역항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1819년 1월 영국인 토머스 래플스(Thomas Stamford Raffles, 1781~1826)가 싱가포르를 말레이반도의 무역기지로 개발하였다. 이로서 싱가포르의 공식 역사도 시작되었다. 당시 말라카해협의 핵심 항구는 말라카 및 페낭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래플스는 자유무역을 전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존의 항구들에 비해 경쟁력을 얻게 되었다. 공식 거래물품은 말레이반도에서 생산되는 고무와 주석이었으나 큰 이익을 가져온 것은 영국의 대중국 아편 무역이었다. 무역항이 성장하면서 중국계 화교를 필두로 다수의 이주민들이 싱가포르로 몰려들었다.

1824년 싱가포르의 영국인들은 말레이반도의 말라카와 페낭까지 흡수하면서 영국 동인도회사가 지배하는 해협식민지(Strait Settlements)를 만들어냈다. 해협식민지의 관할권은 1860년대 초까지 인도 총독의 직속 관할권에 놓여있었지만 싱가포르의 도시 성장과 항구기능이 확대되면서 정식 왕령식민지(Crown Colony) 중 하나가 되었다.

싱가포르의 공식 역사는 이 시절을 식민의 역사가 아니라 국가형성 및 발전의 역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이민자들은 싱가포르가 아니라 자신의 떠나온 고향과 국가를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 이처럼 국가형성 과정이 없이 영국의 식민지를 경험하게 되면서 식민통치에 대한 큰 저항이 없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을 확전시킨 후 1942년부터 동남아시아 전지역에 대한 점령이 들어갔다. 유럽이 이미 독일 나치스의 침공으로 전쟁터가 되어 있던 터라 유럽의 제국들의 동남아 식민지에 힘의 공백이 발생하였고, 일제는 이 틈을 타고 동남아를 신속하게 점령하였다. 영국군은 싱가포르를 '동방의 지브롤터'라고 부르며 방어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였고, 싱가포르는 1942~1945년 사이 일본 식민통치를 경험하였다.

일본은 점령 기간 동안 싱가포르의 중국인들이 본토 국민당을 후방에서 지원한다고 간주하여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다. '숙청 대학살(Sook Ching Massacre)'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에서 약 5~10만 명의 중국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싱가포르는 영국의 직할식민지로 환원되었다. 1950~1960년대의 국제정세는 빠르게 냉전체제로 접어들었지만 거대 사회주의국가 러시아 및 중국과 인접한 아시아지역의 정치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 가운데 식민지 청년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영국은 당장은 아니었지만 싱가포르와 말레이반도의 식민지에서 단계적인 자치정부를 승인하게 되었다.

1948년 선거가 실시되어 22명의 입법위원 중 6명을 직선제로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는 총독이 임명하였다. 1957년 런던에서 개최된 헌법회의에서는 싱가포르 독립에 대한 원칙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싱가포르는 국내 자치권은 보장받되, 외교·국방 등은 영국정부가 담당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1958년에는 《싱가포르국가법 The State of Singapore Act》이 영국의회에서 통과되어 싱가포르 국가수립 및 시민권 획득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1959년 독립 자치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리콴유(Lee Kuan Yew, 1923~2015)가 소속된 인민행동당(PAP, People’s Action Party)이 데이비드 마셜(David Marshall, 1908~1995)이 이끄는 노동전선(Labour Front)을 상대로 51석 중 43석을 차지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 리콴유는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1961년 5월 27일 말라야 연방의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man, 재위 1963~1970) 총리가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사라왁, 브루나이, 북보루네오(지금의 사바)를 통합하는 말레이시아 연방 창설을 제안하였다. 자치정부 구성 후 영국은 싱가포르는 연방 참여를 하지 않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리콴유에게 당시 이웃의 강국 인도네시아의 화교 탄압은 안보위기로 다가왔다. 산업화를 통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작은 섬을 벗어나 규모 있는 공동시장이 필요하다는 판단도 더해졌다. 이에 리콴유는 연방 설립안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1962년 9월 연방 참여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투표 결과 국민의 73%가 연방 편입에 찬성함에 따라 1963년 말레이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연방 참여 이후 싱가포르 주정부는 연방정부와 다양한 측면에서 정책적 이견이 드러났다. 1964년에는 싱가포르에서 중국계와 말레이계 간에 대규모 인종 폭동이 발생하였다. 결국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는 인종정책과 정치이념 등의 차이로 인해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축출되었다.

연방 축출은 리콴유(Lee Kuan Yew, 재위 1959~1990) 총리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인종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고, 높은 실업율과 국가재정 부족, 주택 부족과 열악한 상하수도시설로 물 부족과 홍수를 번갈아 경험해야 했다. 또한 1968년 기준 싱가포르의 영국군은 약 2만 5천 명 이상의 현지인 고용을 담당하며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하였는데, 당시 영국군의 철수까지 악재로 작용하며 신생국가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컸다.

국제적 고립위기에 처한 싱가포르는 1965년 9월 국제연합(UN)에 가입, 10월 영국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헌법개정을 통해 싱가포르 공화국(Republic of Singapore)을 선포하였다. 행정수반은 총리가 담당하되 국가 원수로 대통령직이 신설되었고 초대대통령은 말레이계의 유솝 빈 이샥(Yusof bin Ishak, 재위 1965~1970)에게 맡겨졌다. 1967년 8월에는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과 함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을 결성하였다.

1972년 이후 오랜 기간 인민행동당(PAP, People’s Action Party)은 4년마다 열린 선거에서 연속으로 전 의석을 석권하는 패권적 지위를 누렸다.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다수의 강력한 국가정책이 수립되었다. 대표적으로 리콴유 총리는 '모든 국민이 자기 집을 갖게 하겠다.'며 1962년 주택개발국(HDB, Housing & Development Board)을 설립하였고, 주택개발국(HDP)은 국유 토지를 활용해 공공 아파트를 지어 보급하였다. 또한 주택정책을 시행하면서 사회통합정책도 더불어 진행하였다. 공공 아파트에 인종별 쿼터를 정해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살아가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싱가포르 정부는 '언론출판법(Newspaper and Printing Presses Act)' 개정을 통해 출판물의 배포 부수를 제한하는 등 강력한 통제 정책을 실시하였다. 필리핀과 한국 등의 민주화 운동이 국내에서 불어올 것을 우려한 싱가포르는 1987년 초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가톨릭계 인사와 법조인, 언론인 등 36명을 체포하였다.

1990년 리콴유 총리은 부총리였던 고촉통(Goh Chok Tong, 재위 1990~2004)에게 총리직을 이양하고 본인은 선임장관(Senior Minister)으로 후퇴하였다. 참고로 고촉통은 기업인 출신으로 인민행동당(PAP)에 영입되어 1976년부터 정치인의 길을 걸어왔다. 1991년에는 헌법개정이 이루어져서 6년 임기의 대통령 직선제가 채택되었다. 70~80년대 내내 야당탄압이 이어지며 인민행동당(PAP)의 독주가 가능했지만 헌법개정 후 1991년 선거에서는 민주당과 노동자당이 각각 3석과 1석의 의석을 차지하는 변화가 이뤄지기도 하였다. 고촉통은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와 2002년 사스(SARS) 전염병의 시기에 훌륭한 관리능력으로 싱가포르의 정치혼란과 경제 위축을 막아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2004년 리콴유의 아들 리센룽(Lee Hsien Loong, 재위 2004~ 2024)이 신임 총리로 취임하였다. 민간정치인 고촉통이 아버지와 아들의 총리직 사이에서 14년 동안 다른 리더쉽을 보여주었으나, 최고권력의 혈연 승계에 대한 비판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리센룽은 현재까지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다행스럽게 권위주의에 기대기보다 유연하고 포용적인 방향으로 정부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리센룽의 장기집권이 마무리되면서, 2024년 로런스 웡(Lawrence Wong) 총리가 취임하였다.[4]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동남사회발전이사회〉, 《나무위키》
  2. 싱가포르〉, 《위키백과》
  3. 싱가포르/행정구역〉, 《나무위키》
  4. 두산백과: 싱가포르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동남아시아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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