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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5일 (금) 01:39 판
시발(始發)은 1955년 국제차량제작소에 의해 생산된 한국 최초의 자동차이다. 시발자동차라고도 한다. 1963년까지 누적대수 2,235대를 생산한 끝에 단종됐다. 시발은 한국에서 최초로 생산한 자동차이다. 1955년 8월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국제차량제작소의 창업자인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에 의해 제작됐다. 당시 상표로 등록된 이름은 ㅅㅣ-ㅂㅏㄹ로, 첫출발이라는 뜻의 한자어 시발(始發)을 한글 자모로 표기한 것이다.
목차
개요
6.25 전쟁 휴전 직후인 1955년에 미군이 내다버린 윌리스 MB 지프들을 주워다가 완전히 해체한 후 쓸만한 부품끼리 긁어모아서 다시 조립해 만든 영운기로, 당시 법제에서는 자동차로 인정받았다. 때문에 형태도 지프 스타일, 즉, SUV이다.
제작사는 국제차량제작㈜이다. 국제차량제작소는 자동차 정비업을 하고 있던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가 세운 회사로 1947년에 설립되었다. 1955년 8월에 이 차를 제작했고 이 차 외에도 아래에 나오는 9인승 세단형 차량도 제작했다. 그러다가 1963년 5월까지 새나라자동차공업㈜와 경쟁을 하다가 끝내 망했다.
제원
- 엔 진 : 직렬 4기통 1323cc
- 변 속 기 : 전진 3단, 후진 1단
- 최고속도 : 시속 80km
- 차 중 : 1500kg
- 구동방식 : 4륜 구동
특징
디자인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 시발자동차는 군용 지프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상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던 유선형의 자동차 형상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유선형의 형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철판을 가공하는 기술과 설비들이 필요한데 당시는 그러한 것들을 바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시발자동차의 외형은 드럼통을 펴서 수공예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이유로 각진 지프 형상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발 1호의 사진을 보면 곳곳에서 드럼통을 편 흔적들이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V자 형상으로 꺾인 라디에이터 그릴, 헤드램프를 따라 자연스럽게 휘어진 본 네트, 그 형상을 반복하고 있는 창, 그리고 창을 따라 휘어진 천정 모서리 부분의 마감 등을 볼 때 형태적으로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형상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시발자동차의 형상은 한국전쟁 당시 이 땅을 누볐던 미군 지프의 형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상은 이후 쌍용자동차의 코란도 시리즈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세리프가 없는 모던한 서체로 이루어진 '시-바ㄹ'이라는 로고는 디자인의 맥락에서 특징적인 부분이다. 시발자동차의 이 로고는 1908년 주시경 선생이 처음 주창한 이래 그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던 한글풀어쓰기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첫 출발'을 의미하는 '시발'이라는 한자어가 풀어쓰기 방식으로 표현됨으로써 한글 단어라기보다는 추상적 이미지처럼 느껴진다. 더욱이 '시'와 '바ㄹ' 사이의 '-'는 그러한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토요타나 포드, 쉐보레와 같은 자동차를 경험한 당시 사람들의 기대 수준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바ㄹ'이라는 로고에는 한글로 이국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모순되는 욕망이 묻어난다.
역사
망치로 두들겨 4개월에 걸쳐 손으로 제작
'시발'이라는 이름의 자동차가 생산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8월의 일이다. 전쟁은 미군을 통해 들어온 군용 차량들은 물론이고, 그 이전까지 여러 경로로 이 땅에 들어와 운행되고 있던 많은 자동차들을 파괴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파괴된 자동차들의 부품을 활용하여 운행 가능한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자동차 재생 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시발자동차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1900년대 초 고종황제를 위한 포드 자동차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50여년 만에 국산 최초의 자동차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최초의 자동차는 을지로 천막 안에서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시발 자동차 역시 외형은 미군 지프를 그대로 베꼈지만 내용은 달랐다. 시발자동차에는 4기통 1323cc 엔진이 탑재되었는데 무엇보다 국산 엔진라는 점이다. 첫 국산 엔진과 국산차를 선보인 곳은 신문기자 출신인 최무성씨가 동생 둘과 설립한 국제공업사이다. 자동차 정비 및 개조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던 국제공업사는 '엔진 도사 김영삼'을 스카우트한 뒤부터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일본에서 엔진을 공부하고 돌아온 기술자 김영삼은 국산 엔진 제작이 꿈이었던지라 사장을 설득해 엔진을 만들어냈다. 흙으로 만든 틀에 쇳물을 부어 주물을 제작한 다음 손으로 구멍을 뚫고 깎아내는 광경을 지켜본 미군 관계자들은 한국인들의 신기로운 손기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시발자동차의 차체는 드럼통을 펴서 일일이 망치로 두드려 만들어졌다. 이러한 제작 방식 때문에 시발자동차는 한 대를 완성하기까지 약 4개월이 걸렸다.
온갖 어려움 속에 세상에 태어난 시발 자동차는 초년 운이 좋았다. 1955년 10월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 창경궁(당시는 창경원)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경영진과 기술진을 초청해 격려하고 시발자동차를 시승까지 했다는 소식에 '사겠다'는 주문이 줄이었다. 대당 8만환 하던 차량 가격에 24만환의 프리미엄까지 붙고 부유층 부녀자들 사이에 차량 구입을 위한 '시발계'까지 등장했다. 차량 인수자격을 미리 달라는 선금도 1억환이나 쌓였다. 제작사는 밤낮없이 공장을 돌렸지만 도저히 수요를 맞출 수 없었다. 천막공장의 최대 생산량이 하루 한 대 꼴이었으니까. 쏟아지는 주문을 미처 감당하지 못하던 국제공업사는 원효로에 공장다운 공장을 차렸다.(현대자동차 원효로 서비스 센터의 일부가 바로 국제공업사가 마련했던 공장 부지다)
시발세단, 시발 택시, 시발 트럭... 다양한 차종 출시
특히 시발자동차는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아 전국을 누비는 자동차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기세를 몰아 1958년에는 6기통 엔진을 장착한 9인승 '시발세단'이 출시됐으며 이후에는 버스와 트럭, 트랙터까지 만들어졌다. 당시 대한뉴스는 시발세단이 최고 시속 80마일(128km)을 낸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시발은 처음 출시된 지 10년도 되지 않아 하락세를 타기 시작한다. 정부 보조금 중단과 일본산 승용차 수입 허용이 맞물리면서 경쟁에서 뒤처지게 됐고 결국 1963년 5월 생산을 중단한다.
좌절
시설 투자를 늘린 시발 자동차는 성공했을까. 그렇지 않다. 우선 1958년 이승만 정부가 발동한 '5.8 대책'에 발목이 잡혔다. 주한 미군이 별다른 제한 없이 주던 휘발유 공급을 제한하자 급해진 정부는 기존의 차를 폐차시켜야 새로운 차를 살 수 있도록 정책을 바꿨다. 자동차 메이커로서는 타격이었지만 낡은 차의 교체 수요가 워낙 커 시발 자동차는 차츰 성장해 나갔다.
결정적으로 시발 자동차의 앞길을 막은 것은 새나라 자동차 사건. 5·16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 아래 일어난 4대 의혹사건의 하나인 새나라 자동차 사건은 일제 승용차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국산차의 활로를 차단한 사건. '자동차 공업육성법'을 제정하고는 법의 이름과 정반대의 시책을 펼친 것이다. 말이 조립생산이지 일본 닛산의 완성차 '블루버드'를 들여와 이름만 바꾼 '새나라' 자동차의 성능은 시발과 비할 게 아니었다. 정치헌금설이 도는 가운데 정권의 비호를 받는 양질의 수입품에 시발자동차는 무너지고 말았다. 국민들에게 '국산품 애용'을 외쳤던 박정희 정권은 최초의 국산차를 만든 국제공업사 최무성 사장 주변을 세무조사로 뒤졌다.
시발 자동차의 후속 모델을 제작하기 위해 국제공업사의 공장장으로 스카우트됐던 오원철(3공 시절 전 청와대 제2 경제수석비서관 역임)씨는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공업도 수공업적으로 나마 버스나 시발차가 국산화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니, 이 것을 기초로 해서 서서히 발전시켜 나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차를 완제품으로 들여왔으니 국내에는 일감이 없어져 버렸다. 이 일로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은 완전히 일본에 내주어야 했고 우리나라는 상당기간 자동차 산업의 불모지가 되어버렸다.'[1][2]
재현
안타깝게도 실제 생산할 당시의 차는 현재로서는 단 한 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남아있는 거라고는 죄다 재현품이다.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삼성교통박물관에 2대, 광주 버스터미널(유스퀘어) 중앙에 1대, 제주도 세계자동차박물관에 1대가 전시 중이다. 자동차 대여 업체인 금호상사에도 한 대가 있다. 광화문광장 옆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도 1대 전시되어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시 제작자의 증언 등이 있어 재현은 온전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흑백사진뿐이라 도색을 못할 뻔했는데 다행히 했다. 제작자의 증언에 따르면 에탄올 버전도 만들려 했다고 한다.
2019년 12월, 보배드림에 방치된 시발자동차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이 찍힌 곳은 대전에 위치한 정일모터스라는 정비공장 옆이다. 하지만 이 차량은 1993 대전 엑스포 당시 전시된 재현차량이다. 즉, 오리지널이 아닌 레플리카이다.
야인시대 107화에서도 복제품이 잠깐 나온 바 있다.
제주도에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시발택시가 현역으로 운용되었다
시발세단
디자인은 1956년식 플리머스 벨베디어나 동시대의 머큐리 몬터레이를 참고한 모양이다. 형태만 보면 어찌 왜건처럼 생겼다.
대한뉴스에 따르면 국제차량제작소에서는 파생 모델로 세단을 제작해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차량은 9인승으로 월 100대까지 생산이 가능했으며 천장이 낮은 것을 빼고는 미제 승용차와 비교해도 뛰어나다고 설명됐다. 시발 계열의 자동차 부품들은 자체 제작되어 국산화를 60프로까지 달성했다고 한다. 심지어 엔진도 미국산을 복제해서 주물로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엔진 도사로 불리던 김영삼이 이 회사에서 일했었고 윌리스제 직렬 4기통 2.2리터 고데빌 엔진을 복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고시속은 130km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급격한 자동차 증가로 석유 파동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가 1957년 5월 8일 자동차의 수를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하면서 시발 세단의 생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여파로 판매량도 상당히 저조했으며 남아있는 차량도 단 한 대도 없고 복제품조차도 없다.
기타
- 시발차를 만든 국제차량제작소는 이 사진처럼 버스도 제작했다. 명칭은 시-발듸-젤뻐쓰'이다. 하체와 엔진은 폐차된 미군 군용트럭의 것을 이용하고 차체는 드럼통을 펴서 제작한 버스이다.
- 시발 픽업트럭도 만들었지만, 단 2대만이 생산되었다. 이유는 당시 시발과 시발 세단의 인기가 높아서 상대적으로 수요가 없었던 픽업을 대량생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 필리핀에도 이 차처럼 군용 지프를 개조해서 만든 대중 교통수단인 지프니가 있다. 이쪽은 아직도 현역이다.
-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최병조 명예교수(1953년생)의 회고에 의하면, 어릴 때 놀다가 시발택시에 치인 적이 있다고 한다. 회고담에서 "시발택시"라고 명확히 진술하는 것을 보면, 그 시대의 한국인들에게 확실히 네임드 차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오원철이 박정희에 의해 공무원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여기에서 공장장으로 일하였다. 이때의 경험으로 방산산업과 각종 민수산업이 나름 효율성 있게 돌아가도록 한 현실 경험을 쌓을 수 있던 것이며, 시발자동차가 한국현대사에 아직도 가려진 의의가 많다는 뜻이다.
동영상
각주
- ↑ 권홍우 논설위원, 〈국산 시발자동차, 출범과 좌절〉, 《서울경제》, 2016-10-12
- ↑ 김유진 기자, 〈한국 최초 자동차 ‘시발 지프’는 6·25전쟁 폐허 속에서 생산됐다〉, 《인사이트》, 2018-12-13
참고자료
- 〈시발자동차〉, 《시사상식사전》
- 〈시발(자동차)〉, 《나무위키》
- 오창섭, 〈시발(始發)택시, 1955)〉, 《한국의 생활 디자인》, 2009-08-25
- 권홍우 논설위원, 〈국산 시발자동차, 출범과 좌절〉, 《서울경제》, 2016-10-12
- 김유진 기자, 〈한국 최초 자동차 ‘시발 지프’는 6·25전쟁 폐허 속에서 생산됐다〉, 《인사이트》, 2018-12-13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