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와트
앙코르와트(크메르어: អង្គរវត្ត, 영어: Angkor Wat, Angkor Vat)는 캄보디아 시엠레아프 주(씨엠립)의 앙코르에 위치한 유네스코가 지정한 불교의 성지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사원이다. 12세기 초에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옛 크메르 제국의 사원으로서 창건되었다. 앙코르 유적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축조된 이래 크메르 제국의 모든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맡은 사원이다.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힌두교의 3대 신 중 하나인 비슈누 신에게 봉헌되었고, 나중에는 불교 사원으로도 쓰였다. 옛 크메르 제국의 수준 높은 건축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또한 캄보디아의 상징이기도 하기에 국기에도 그려져 있고,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관광지이다.
캄보디아 씨엠립성의 성도 씨엠립에서 북쪽으로 약 4 km 정도 떨어진 곳,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 톰(Angkor Thom)에서는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앙코르(Angkor)는 크메르어(語)로 왕조를 뜻하며 와트(Wat)는 사원을 뜻하기 때문에 왕조의 사원이라고도 한다. 가장 높은 3층의 중앙 성소까지의 높이는 총 65m이고 계단이 매우 가파른 것이 특징이다.
이 유적이 위대한 이유는 오랜 역사와 웅장한 규모는 물론이고 오래 전에 거대한 규모로 지어졌음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고도의 정교한 건축기술에 있다. 또한 사람의 손에서 방치되는 역사를 겪으며 덩굴과 나무 등이 사원의 벽을 뚫고 자라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건축물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며, 문명의 무상함이라는 불교적 메세지와 인간과 자연이 큰 시간 단위에서 결국 어우러지는 우주의 질서를 몸소 나타낸다. 앙코르 와트 건물은 동향으로 지었지만, 건물의 축을 정동쪽이 아니라 시계 방향으로 0.5도 틀었다. 이는 실수가 아니다. 주야평분시(晝夜平分時), 즉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과 추분 무렵 서쪽 통로에서 일출을 보면, 땅 위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사원의 중앙 탑 꼭대기를 지나가는 듯이 보인다. 만약 건물을 정동향으로 지었다면 태양이 떠오르면서 남쪽 하늘로 움직이기 때문에 중앙탑과 태양이 틀어져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없다. 직접 보면 장관이다. 중세 크메르인들의 고도의 지식과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개요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문화의 대표적 유적이다. 앙코르 톰(Angkor Tom)의 남쪽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12세기 크메르 제국의 황제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약 30년에 걸쳐 축조되었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神)과 합일(合一)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婆羅門敎) 주신(主神)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다.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장식·부조(浮彫)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바깥벽은 동서 1,500m 남북 1,300m의 직사각형으로 웅장한 규모이며 정면은 서쪽을 향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해가 지는 서쪽에 사후 세계가 있다는 힌두교 교리에 의한 것으로, 앙코르 와트가 데바라자의 사후세계를 위하여 지어진 사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앙코르 와트는 길이 5km가 넘는 깊은 해자에 둘러싸여 있으며, 외벽은 그 길이가 3.6km에 달한다.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너비 190m의 해자(垓字)를 건너면 3기(基)의 탑(塔)과 함께 길다란 익랑(翼廊)이 있고 여기서 돌을 깔아놓은 참배로(參拜路)를 따라 475 m쯤 가면 중앙사원에 다다른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은 약간 높다. 회랑의 높이는 제1회랑(215×187m)이 4m, 제2회랑(115×100m)이 12m, 제3회랑(60×60m)이 25m이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의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須彌山)은 돌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쌓아놓았으며, 높이 59m의 중앙사당탑의 탑 끝에서 3중으로 둘러싼 회랑의 사각탑 끝은 선으로 연결해보면 사각추(四角錐)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양식은 인도의 영향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石彫裝飾)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장(全長) 760m에 이르는 제1회랑벽(回廊壁)의 부조, 제2회랑 안의 돌로 조형한 샘물[泉水], 제3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주랑(柱廊)과 탑 등은 뛰어난 구조물이다. 조형에서는 하늘의 무희(舞姬) 아프사라스, 여러 개의 머리를 마치 부채처럼 치켜든 커다란 뱀, 창문·기둥의 장식조각 등이 돋보인다. 앙코르왕조는 13세기 말부터 쇠망하기 시작하여 15세기경에는 완전히 멸망함에 따라 앙코르 와트도 정글 속에 묻혀버렸다.
1861년 표본채집을 위해 정글에 들른 프랑스 박물학자가 이곳을 발견, 그때부터 다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지역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이면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루지의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전화(戰禍)와 약탈로 훼손되어 수많은 불상이 조각난 채 나뒹굴고 대부분이 외국으로 유출되어, 완전한 복구는 어려운 상태이다. 1982년 집계를 보면 앙코르와트의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없어졌고, 전체 유적의 70%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 왕궁의 유물 약 1,000점이 도난·파괴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1983년 이 유적지의 복원을 위해 조사단의 파견을 캄보디아 당국에 통보한 바 있다.
역사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제국의 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1122년부터 1150년까지 28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세웠다. 불교 성지로 유명한 지금과는 달리 세워질 때만 해도 앙코르와트는 힌두교 사원이었는데, 당시 크메르 제국의 국교가 힌두교였기 때문이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보통 이 정도의 거대한 사원은 시바 신에게 봉헌하던 전통을 깨고 앙코르와트를 질서의 신 비슈누에게 바쳤다. 비록 수리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와트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앙코르와트는 완공된 이래로 앙코르와트는 국왕 직속의 핵심 사원이자 크메르 제국의 가장 중요한 사원으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완공되고 30년도 되지 않은 1177년, 크메르 제국은 인근의 참족에게 공격을 당해 치명타를 입었다. 이때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도 이때 참족에게 약탈당해서 크메르 제국은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로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간다. 그나마 중흥군주 자야바르만 7세가 다시 제국을 회복하고 수도를 앙코르 톰으로 옮겨 천도하면서 크메르 제국은 기사회생에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자야바르만 7세는 국교를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꿨는데, 그동안 힌두 신들을 그렇게 믿어왔는데도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으니 힌두교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떨어져 버렸던 것. 자야바르만 7세는 국교를 불교로 바꾸면서 앙코르와트에 있던 각종 힌두교 부조와 석상들도 상당수 불상으로 대체했다.
안타깝게도 중흥군주 자야바르만 7세 이후로 크메르 제국은 끝없이 쇠락했다. 인근의 태국, 베트남 등에 치여 살면서 고대의 영광은 온데간데 없고 허구한 날 공격당하는 약소국 신세로 전락했던 것이다. 앙코르에 세운 각종 사원들과 건축물들도 모조리 잊혀졌고, 앙코르와트 역시 17세기 말 이래로는 거의 사람이 찾지 않는 폐허 수준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워낙 면적이 엄청난 건축물이라 아예 잊혀진 수준은 아니었고, 일본 순례자들이 찾아와 작은 초막을 짓고 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가톨릭 수도자 안토니오 다 마달레나도 1586년에 이 곳을 찾아와 방명록을 남겼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앙코르와트가 아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수준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물론 앙코르와트가 완전히 사람들에게 잊혀진 수준은 아니었다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일부 호기심 많은 탐험가나 여행자들이 왔다갔다하는 정도였다는 것이지, 동남아인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앙코르와트의 존재조차도 몰랐다. 이렇게 처참하게 방치되어있던 앙코르와트를 처음으로 서방 세계에 알린 사람이 그 유명한 앙리 무오다. 프랑스 출신 박물학자 앙리 무오는 1860년에 캄보디아를 탐험하는 과정에서 앙코르와트를 방문했고, 그가 쓴 여행록이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앙코르와트는 마침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다. 앙리 무오는 '이 신전의 아름다움은 솔로몬의 신전이나 미켈란젤로의 그것에 비견될 정도'라고 극찬하면서 앙코르와트를 유럽인들에게 소개했는데, 이 여행록이 이색적인 신세계에 관심이 많던 당대 유럽인들의 입맛에 딱 맞았기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얼마 지나지 않은 1863년 캄보디아를 보호령, 즉 사실상의 식민지로 삼았다. 의도치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의 영토가 넒어지기도 했는데, 유적에 관심이 많던 프랑스가 크메르 유적들을 모조리 손에 넣기 위해서 당시 태국령이던 씨엠립과 바탐방, 시소폰 일대를 침공해서 합병한 후 캄보디아령에 붙여버렸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프랑스인들의 앙코르 유적 사랑은 계속돼서 1931년에는 앙코르와트의 모형을 파리 만국박람회에 통째로 전시하기도 했고, 수많은 학자들이 앙코르와트를 방문해 연구와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 그동안 앙코르와트에 무성하던 초목과 나무들을 모두 뜯어내고 보존 처리를 시작한 것도 이시기다.
하지만 당연히 프랑스인들이 앙코르와트에 좋은 일만 한 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선 미개한 동남아인들이 이렇게 위대한 건축물을 지었을 리 없다며 고대 로마의 후예들이 남겼다든지 심지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후예가 남아 만들었다든지 하는 별별 억지 주장이 다 나왔다. 심지어 처음 이 유적을 발견한 앙리 무오도 캄보디아인들이 이런 유적을 만들었을 리 없다고 의심했을 정도. 그리고 프랑스는 여기 있는 문화재들을 상당수 약탈해 뜯어가 루브르 박물관에 두기도 했는데, 심지어 훗날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작가 앙드레 말로도 이곳의 문화재를 훔쳐간 전력이 있었는지라 이 사실이 그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캄보디아는 1953년 11월 9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캄보디아가 독립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캄보디아 내전의 발발, 크메르 루주라는 최악의 살인집단의 득세 등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앙코르와트 역시 좋은 꼴은 못봤다. 특히 문화재 보존 따위에는 관심이 없던 크메르 루주가 그나마 앙코르와트에 남아있던 목조 건축물들을 모조리 잘라 장작으로 썼고,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군 사이에서 전투를 벌이느라 곳곳에 총탄이 박히는 등 앙코르와트는 이때 꽤나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게다가 앙코르와트는 오히려 전쟁이 끝난 80년대와 90년대에 더 심각하게 훼손된다. 유물에 눈이 돌아간 태국인 도굴꾼들이 전후 캄보디아의 치안이 허술해진 틈을 타 앙코르와트에서 뜯어갈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뜯어가 버렸기 때문. 심지어 기껏 복원해 놓은 부분까지 정말 싸그리 털어갔다.
199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나, 전쟁과 약탈로 인해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소실, 전체 유적지의 70%가 도저히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의 왕궁에 있는 유물 1,000여 점이 도난 및 파괴되는 등 유적지의 훼손이 매우 심각하다. 실제로 해자의 다리와 벽에 기관총으로 생긴 홈을 볼 수 있을 정도. 이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는 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전인 1982년에 유적지 복구를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하기도 했다. 다만 2000년대 들어서 캄보디아의 치안이 그럭저럭 안정화되고 난 이후, 앙코르와트가 사실상 캄보디아의 상징이자 밥줄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조금씩 복구와 유지 작업에 시동을 거는 중이다.
구조
건축
앙코르와트는 전체적으로 해자와 외벽, 그리고 사원 본체로 구성되어 있다. 앙코르와트를 둘러싼 해자는 폭이 무려 190m, 둘레는 5km에 이르며 깊이는 대략 4m 정도로 꽤나 깊다. 해자는 원래 사원으로 상징되는 탈속적인 공간과 세속적인 현세를 구분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는데, 의도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앙코르 와트의 기반을 단단하게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사원 아래의 지하수 수면이 너무 높아지지 않도록 조절해 사원 기단이 물러지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 뿐만 아니라 몇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주변의 열대우림이 사원을 완전히 집어삼키지 않도록 1차적으로 차단해주기도 했다.
해자를 건너 앙코르와트로 들어가는 다리는 해자 서쪽에 있다. 석판으로 포장된 다리에는 석조 사자상이 양 옆을 지키고 있다. 원래는 이 다리 앞에도 건물과 문이 세워져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진 걸로 추정된다. 동쪽에도 들어가는 다리가 있지만 사실상 흙길이 깔린 제방에 더 가깝다. 다리를 따라 해자를 건너가면 고푸람이 나온다. 해자에서 약 30m 정도 떨어진 곳에 앙코르와트의 외벽과 고푸람이 세워져 있으며, 정문이 있었던 서쪽의 고푸람이 가장 거대하다. 서쪽에는 윗부분이 살짝 무너진 총 3개의 고푸람이 있으며 개중에 중앙에 있는 고푸람이 가장 큰 편이다. 중앙 고푸람 내부에는 팔이 여러개 달린 비슈누 석상이 있다. 앙코르와트가 힌두 사원이던 시절에는 아마 중앙 탑에 안치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신상이다.
앙코르와트 외벽의 경우 그 길이가 무려 가로 1024m, 세로 802m에 달하며 높이는 약 4.5m 정도로 꽤 높다랗다. 외벽은 회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바깥쪽 부분에는 사각기둥들이 열을 지어 서있고 안쪽 부분은 벽으로 막혀있다. 기둥들 사이의 천장은 연꽃으로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있으며 벽면에는 웃는 압사라[12]의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특히 이 서쪽 고푸람에는 앙코르와트에서 유일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압사라 여신상 부조가 있는 걸로 유명하기도 하다. 어쨌든 외벽은 총 82만제곱평방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둘러싸는데, 원래는 이 외벽 안에 빽빽하게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이야 목조로 만든 궁전과 건물들이 죄다 썩어서 돌로 만든 가장 중앙의 사원만 남았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외벽 안에 발 디딜 틈도 없이 건축물들이 들어섰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서쪽의 고푸람을 통과하면 석조 보도를 따라서 쭉 중앙 사원으로 향하면 된다. 이 보도의 길이는 무려 350m에 달하고 옆에 나가의 모습을 조각한 난간들이 조각난 채로 세워져 있다. 보도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양 옆에는 '도서관'이 한 채씩 있다. 동서남북을 맞추어 문이 나있는게 특징인데, 실제로 도서관으로 쓰인 건 아니고 당시에는 제사용기를 보관하는 장소였으리라고 한다. 도서관 뒷편에는 인공 연못이 한 개씩 팠는데, 가로 50m, 세로 65m로 꽤나 널찍하며 왼편 연못은 물이 차있으나 오른편 연못은 상대적으로 말라있다. 당시에는 사원에 들어가기 전 이 곳에서 몸을 씻거나 제사용기들을 닦곤 했다. 사원 바로 앞의 십자형 테라스는 '영광의 테라스'라고 부르는데 나가로 조각된 난간과 사자상들이 서있다.
보도를 걷다보면 마침내 사원 본건물에 도착할 수 있다. 중앙 사원 본체는 크게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갈수록 높아지며 맨 마지막 3층에 중앙 탑이 위치하는 구조이다. 모든 층에는 사면의 정중앙에 고푸람들이 1개씩 세워져 있으며, 특히 2층과 3층에는 중앙뿐만 아니라 모서리 부분에도 고푸람들이 1개씩 세웠다. 사원이 서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세워졌기에 사원의 건축물들은 상대적으로 동쪽으로 치우쳤다. 또한 왕이 들어올 때 가장 잘 보이는 부분이 정문과 가까운 서쪽 부분이었던 터라 서쪽 부분에 가장 정교하고 자세한 부조들이 가득 채워넣었다. 또한 왕이 주로 사용했던 서쪽의 계단들이 다른 방향의 계단보다 상대적으로 경사가 낮게 만들어진 것도 특징이다.
사람들이 앙코르와트의 겉모습만 보고 채석장에서 채굴한 돌로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겉부분만 회색 사암을 사용해 만들었고 그 안은 적갈색의 라테라이트 벽돌로 채워넣었다. 라테라이트는 적갈색의 토양으로 땅 속에서는 부드럽지만 땅 밖에서는 습기가 말라 굳으면서 굉장히 단단해진다. 라테라이트 내부에 함유된 산화철 성분 때문이다. 가공하기는 쉽고 건물을 지은 나중에는 단단해지는 특성 때문에 아열대 지방에서는 라테라이트를 이용한 경우가 많았고, 앙코르와트 역시 라테라이트를 이용해서 지었던 것이다. 앙코르와트 유적을 잘 보면 일단 라테라이트 벽돌을 쌓은 다음 겉에는 사암 덩어리를 깎아서 덮은 걸 볼 수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 라테라이트를 쌓지 않고 통째로 사암으로 만든 부분도 존재한다.
1층 회랑은 가로 215m, 세로 187m이다. 2층과 3층 회랑과는 달리 모서리 부분에 고푸람 대신 작은 파빌리온이 하나씩 세워져 있다. 회랑 자체는 사원 외부와 뚫려 있으며 사각 기둥들이 회랑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1층을 2층과 연결시켜주는 통로가 서쪽에 있는 십자 회랑인데, 이를 '1천 신령들의 홀(Hall of Thousand Gods)'라고 부른다. 순례자들이 이 곳에 불상이나 부조를 새겼으나 싸그리 약탈당해서 현재는 몇 개 밖에 남아있지 않다. 특히 이 천 명의 신들의 홀에는 순례객들의 선행에 대한 글들이 유난히 많은데, 대부분은 크메르어지만 일부 버마어나 일본어도 있다. 십자 회랑 사이의 공간에는 한때 물이 차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남북쪽의 회랑은 도서관이다.
참고로 앙코르 와트에는 층과 층 사이마다 '중간단'이라는 독특한 구조가 있다. 주 목적은 1층과 2층을 완만한 경사로 연결시켜 사람들이 더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워낙 경사가 가팔라서 자칫하면 제대로 오르지도 못할 수 있었기 때문. 중간단을 거쳐 1층에서 올라가면 2층 회랑이 나온다. 2층 회랑은 가로 115m, 세로 100m이며, 메루산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바다를 상징한다. 2층의 회랑에는 압사라들이 대략 4명 정도 짝을 이루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사면에 3단의 계단이 있어 3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이 2층과 3층 사이의 계단들은 경사가 높기로 소문난 앙코르와트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매우 경사가 가파르다.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이다.
3층 회랑은 2층에서부터의 높이가 약 40m에 달할 정도로 그 경사가 극히 가파르게 올라간다. 정사각형 모양의 단에는 모서리에 각각 2개씩, 중앙에 1개씩 총 12개의 계단이 나있는데, 각 계단에는 단이 약 40여개 정도가 있고, 이 경사가 70도 정도로 매우 가파를 뿐만 아니라 폭도 보통 계단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 이러한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취하는데, 크메르인들이 사원을 지을 때 바로 이와 같은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3층의 정사각형 모양 기단 둘레는 60m이고, 모서리 쪽 계단이 올라오는 부분에 고푸람들이 1개씩, 그리고 정중앙에 가장 거대한 고푸람이 1개가 있어 총 5개의 고푸람이 서있다. 2열의 기둥으로 장식된 지붕 덮인 회랑이 외벽 역할을 하며, 이 회랑이 십자형 통로와 연결되며 자연스레 중앙의 성소로 향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맨 중앙에 있는 고푸람은 그 높이가 지면에서 65m나 되는데, 특히 크메르 특유의 그 솟구치는 듯한 장식 때문에 더더욱 그 높이가 높아보인다. 본디 이 성소에는 비슈누의 상이 있었으나 이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비슈누가 쫓겨나고 그 자리에 불상이 놓였다. 허나 원래 있던 불상은 진작에 도굴당해 사라졌다. 그나마 1934년에 고고학자 조지 투르베가 중앙 성소 아래에서 모래와 물이 찬 비밀 구덩이를 발견했지만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고. 현재는 이 중앙 성소 한가운데에 새로 불상을 안치해놓았다.
부조
앙코르와트에서 복잡한 건축 양식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빽빽하게 새겨놓은 부조들이다. 대부분 힌두교 신화나 불교 설화의 내용들을 1층 회랑벽에 새겨놓은 것들인데, 정말 공백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벽에 그득그득 부조를 새겨서 보고 있다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위의 그림은 부조의 위치와 그 내용을 설명한 그림이다. 왼쪽이 서쪽이고 오른쪽이 동쪽인데, 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데바와 아수라의 전투', '크리슈나의 승리', '비슈누의 승리', '우유 바다 휘젓기', '천당과 지옥', '수리야바르만 2세의 행렬', '쿠룩셰트라 전투', '랑카의 전투' 순서다. 개중 가장 유명한 건 '우유 바다 휘젓기', '천당과 지옥', '수리야바르만 2세의 행렬', '랑카의 전투' 정도다.
앙코르와트 회랑에는 위처럼 수많은 부조들이 새겨져있으나 개중 가장 볼만한 부조는 역시나 '우유 바다 휘젓기'다. 신과 악마들이 만다라 산을 꽁꽁 둘러싼 뱀의 왕 바수키의 머리와 꼬리를 잡은 채 맷돌처럼 천 년 동안 우유 바다를 휘저었다는 내용인데, 이 과정에서 불사의 영약 암리타와 신들의 무희 압사라, 그리고 락슈미 여신 등 수많은 존재들이 탄생했다는 일종의 창세신화다. 더 자세한 내용은 우유 바다 휘젓기 문서 참조. 어쨌든 앙코르와트의 우유 바다 휘젓기 부조는 대단히 알아보기가 쉬운데, 일단 중심이 되는 신 비슈누, 남쪽의 악마왕 라바나, 그리고 북쪽의 하누만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92명의 아수라들이 바수키의 머리 부분을 잡고 있고, 88명의 데바들이 바수키의 꼬리를 잡고있다.
'수리야바르만 2세의 행렬' 역시 유명한 편이다. 앙코르와트를 창건한 수리야바르만 2세 대왕의 모습을 새겨놓은 부조인데, 보통 관람객들도 한 번쯤은 쓱 둘러보고 가는 경우가 많다. 부조의 길이는 약 93.6m, 위치는 남쪽 회랑의 서편에 있다. 이 부조의 내용은 크메르의 대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공주와 신하, 그리고 군사들을 데리고 위풍당당하게 행진한다는 내용이다. 곁에는 그에 충성하는 왕 18명이 따로 새겨졌다. 참고로 당시 동남아에서는 왕이 쓴 일산과 부채가 많을수록 그 왕의 권위가 높음을 상징했는데, 당시 동남아 전체를 호령하던 수리야바르만 2세 위에는 무려 일산 14개와 부채 5개가 올라가 있다. 이 부조에는 시암 용병들을 묘사한 부분이 훼손되어 있는데, 학계에선 아마 태국인들의 짓이 아닐까 추정한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부조는 길이 66m 정도의 '천당과 지옥' 부조다. 라마야나나 다른 힌두 신화를 몰라도, 착한 사람은 천국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 간다는 권선징악적 이야기라서 부조를 보고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둥 27개에 천국 모습 37개와 지옥의 모습 32개를 자세히 새겼는데, 보통 사람들은 지옥의 모습을 더 흥미롭게 본다. 부조 자체는 3단으로 나누어 맨 위가 천국, 중간이 지옥의 재판관 야마의 법정, 하단에는 지옥이다. 검은 물소에 올라앉은 야마는 18개의 팔로 법정에 들어온 사람들을 심판하고, 선한 사람들은 가루다가 끄는 전차를 탄다. 반대로 지옥행 인간들은 야마의 관리들에 의해 지옥으로 내던져진다. 지옥의 부조에서는 다리가 찢기거나, 산 채로 맷돌에 갈리거나, 코에 밧줄이 꿰이는 등 온갖 유린을 당하는 모습이 자세히 새겨졌다. '랑카의 전투' 부조도 볼만하다. 자세한 내용은 라마야나 문서를 읽으면 더 잘 이해되겠지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 랑카의 전투는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클라이맥스이자 최종 결전의 장이다. 선한 영웅 라마와 그의 동료 하누만이 함께 랑카 섬에서 사악한 악마 라바나를 물리치는 내용이다. 기둥 19개에 장면 총 19개를 묘사했는데, 보통 라마와 원숭이 군대 쪽이 왼쪽에, 라바나의 악마 군대가 오른쪽에 있다. 원숭이 군대는 무기를 거의 쓰지 않고 이빨로 물어뜯거나 눈을 찌르는 모습이고 악마 군대는 정교한 갑주를 차려입은 모습이다. 서로 싸우는 모습도 가지각색인데, 이빨로 목을 물어뜯는 원숭이, 발로 가슴을 누르고 위에서 의기양양해하는 원숭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악마 병사의 모습 등 자세히 보면 온갖 군상들의 모습이 다있다.
마지막으로 설명할 부조는 '쿠룩셰트라 전투', 혹은 '쿠루 평원의 전투'로 불리는 부조다. 라마야나와 함께 힌두 서사시의 양대산맥인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내용인데, 전체적인 내용은 판다바 형제들과 카우라바 형제들이 왕위를 놓고 싸운다는 이야기다. 판다바 형제들이 선한 쪽이고 카우라바 형제들이 악한 쪽이다. 당연히 선한 판다바 형제들이 크리슈나 신의 도움을 받아 승리한다. 이 부조 역시 마찬가지로 전투 도중 활을 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 온 몸에 수많은 화살이 꽃힌 채로 죽어가며 유언을 남기는 영웅 비슈마의 모습 등 볼만한 장면들이 많다. 다만 부조의 전반적인 모습이 위의 '랑카의 전투'와 상당히 겹치기 때문에 관광객들 중 시간이 없거나 빠르게 둘러보는 사람들의 경우 이 쿠루 평원의 전투 부조는 안 보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관광
패키지 투어라면 여행사에서 일정이 만들어져 있어 따라서 소화하면 되기에 자유여행자들의 경우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자유여행자들의 경우엔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앙코르 유적군을 묶어서 투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크게 스몰 투어와 그랜드 투어로 나눌 수 있다.
- 스몰투어는 일반적으로 오전에 앙코르 톰을 시작으로 타 프롬을 본 뒤 오후에 앙코르 왓 사원을 구경하는 일정이다.
- 그랜드 투어는 프레아 칸 사원을 시작으로 닉뽀안, 따 솜 사원을 거쳐 동 메본 사원과 프레룹 사원을 도는 일정이다. 이 일정은 빠르게 돈다면 반나절이면 충분하나 보통 반티아이 스레이를 추가해 시간을 맞춰 프레룹 사원에서 일몰을 보는 일정으로 많이 소화한다.
일반적으로 현지 여행사를 통해 조인해서 가거나, 툭툭 기사를 고용해서 코스를 도는 방법, 한국어가 가능한 캄보디아인 가이드 고용, 현지 한국업체의 한국인 투어상품, 이렇게 보통 4가지를 많이 이용한다.
- 현지 여행사 조인은 차량을 통해 이동하기 때문에 이동간 차량 에어컨을 쐴 수 있고 가격이 싸다는 장점이있으나 가이드가 일반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며 일정대로 맞춰가야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천천히 말하는 영어는 알아들을 수 있고, 기초적인 질문정도는 가능하다면 한국 가이드보다 현지 가이드가 낫다. 그 나라의 유적이니만큼 더 많은 지식이 있을 뿐더러, 조각이나 판화 등 문화를 반영하는 유적들에서 경험이 담긴 자세한 설명을 해줄 수 있다.
- 툭툭 기사 고용은 툭툭 이동시 도로에 날리는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며, 툭툭 기사는 사원에 데려다 주고 출구에서 기다리고, 가이드는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어찌 보면 가격이 가장 쌀 수 있기 때문에 많이들 선택 한다.
- 한국어가 가능한 캄보디아인 가이드 고용은 한국어가 가능하면서 캄보디아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캄보디아인의 가이드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국어가 약간은 부족한지 가끔 제대로 된 설명 혹은 대답을 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단점이 있다.
- 한국인 투어상품은 여러 명이 함께 투어한다고 가정시 1인당 가격이 가장 비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제대로 된 한국어 가이드를 받을 수 있고 요청사항에 대한 피드백이 빠르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기타
-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툼 레이더(2001)에서 첫번째 빛의 삼각형 반쪽이 앙코르와트 안에 숨겨져 있다.
-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 에서 남자주인공인 주모운이 비밀을 묻는 공간으로 나온다.
- 북한의 지원으로 건립된 앙코르와트 박물관이 2015년 12월 4일에 개관했다. 최초 10년은 북한이 입장료 수입의 전부를 가져가고 나머지 10년은 캄보디아와 반반 나눠 갖고, 그 이후에는 캄보디아 정부에 무상 기증한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진짜 앙코르와트를 보러 왔지 앙코르와트 파노라마를 보러 온 게 아니고 위치도 좋지않아 현지인 직원들 월급 주기도 벅찬 상황인데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30% 할인까지 내걸었다. 현지인 입장료는 더 싸다. 결국 대북제재 강화로 폐쇄되었다고 한다.
- 앙코르 유적의 보수와 복원은 캄보디아와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이 도맡아 수행하는 국제 사업이다. 1990년대에는 일본 전문가들이 많이 참여하다가 최근에는 한국, 중국 등에서도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앙코르톰과 프레아피투 사원의 보수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1차 복원정비 사업을 진행했고, 캄보디아 정부의 요청으로 2023년까지 추가 복원 사업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기초조사를 통해 프레아피투 사원이 처음 조성된 시기를 기존에 알려진 13세기보다 이른 12세기 초반으로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지도
동영상
참고자료
- 〈앙코르 와트〉, 《위키백과》
- 〈앙코르 와트〉, 《나무위키》
- 〈캄보디아의 크메르 유적(1)앙코르 와트〉, 《내가 본 세계의 건축》
- 〈앙코르와트〉, 《저스트 고(Just go) 관광지》
- 〈앙코르 와트〉, 《두산백과》
- 〈앙코르〉, 《유네스코와 유산》
- 〈제VOL.10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지금 꼭 가야 할 이유〉, 《여행이지》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