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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팜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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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위치
라팜파주 위치

라팜파주(Provincia de La Pampa)는 아르헨티나 중앙부에 있는 주이다. [1]

개요

라팜파주의 면적은 143,440km²이며 인구는 260,041(1991년)이다. 북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산루이스주, 코르도바주,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리오네그로주, 네우켄주, 멘도사주이다. 22개 군을 관할한다. 최북단이 남위 35도 선이다. 주도는 산타로사이며 제네랄피코가 주요도시이다.

라팜파의 서쪽은 특히 인구가 희박하다. 반면에 북동쪽 평야는 소·양 사육과 밀·옥수수 재배에 알맞은 기름진 토양이다. 그러나 이따금 가뭄이 극심하여 농업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1884년 아르헨티나 영토의 일부가 된 후부터 국경지방을 개척하고 유럽 이민을 유치하려는 노력들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1952년 주로 승격된 후 후안 페론 대통령이 실각할 때(1955)까지 대통령 부인 에바 페론의 이름으로 알려졌다.[2][3]

자연환경

동부의 습윤팜파스(濕潤 pampas:초원지대) 주변부에서 안데스 산기슭으로 연속되는 구릉지와 서쪽 사막 지대까지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팜파의 북동부 건조지대와 파타고니아 사막의 남서부 반건조지대에 걸쳐 있다. 중서부는 넓은 저지대이며 서쪽과 남쪽은 낮은 고원으로 되어 있다. 작은 언덕과 염분이 많은 늪지호수가 드문드문 있고 강바닥이 여기저기 보인다.

역사

1604년 에르난도 아리아스 데 사베드라가 이 지역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 탐험가였다. 그러나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이곳에 영구적인 정착지를 세운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였다.

지역 원주민들의 저항으로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많은 확장을 막았다. 그것은 19세기 훌리오 로카의 사막 정복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 지역은 장교들에게 분할되었고, 그들은 최초의 아르헨티나 정착지를 세웠다.

라팜파 중앙 지역은 1884년에 리오네그로 주와 그 주변의 다른 주들을 포함하여 세워졌다. 인구는 약 25,000명이었다. 1915년에는 110,000명의 주민이 거주했으며, 이는 이 지역으로의 이동을 반영한다. 1945년에 라팜파는 주가 되었다.

1952년 헌법이 제정되어 에바페론주의 이름을 따서 주 이름이 바뀌었다. 1955년 정부가 바뀌고 페론 가문이 망명하면서 후안 페론의 이름을 딴 라팜파와 차코는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산업

작물로는 기장·수수·해바라기가 재배된다. 생산품은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바이아블랑카항을 통해 선적된다. 동부의 파라나플라타 충적 토양은 비옥하여 밀·옥수수·아마·보리·목초 등이 재배되며, 소와 양의 사육도 성하다. 그러나 극심한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치는 일도 있다. 서부의 반은 건조 팜파스로 염원(鹽原)과 소택지가 많고, 인구는 희박하다. 따라서 도시는 대부분 동쪽 변두리에 집중되어 있으며, 농축산물을 출하하고 있다. 남서부에서 석유가 산출된다.

도밍고 페론과 페론이즘

1946년 2월의 선거에서 승리한 도밍고 페론의 집권시에 그가 이끌던 새로운 노동당도 상 · 하 양원 선거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따라서, 도밍고 페론 정부의 지위는 군부, 노동 조합 및 교회의 지지를 배경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도밍고 페론은 지지 세력을 기반으로 노동당과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강화시켰다. 그는 취임 후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공공 사업, 교통 시설, 교육 개혁, 그리고 사회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내무장관 및 외무장관에 노동 조합 운영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을 기용하였다. 다른 부처의 장관들도 이익 집단과 계층을 대변하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각하였다. 또한, 그는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고 급진적인 노동법을 제정하여 지지 세력인 노동자들의 정치적 참여와 지위를 증대시키려고 하였다.

미국은 일찍이 1945년 후반부터 아르헨티나에 대한 석탄과 연료의 공급을 중단하였다. 또, 1946년 2월의 선거에서는 도밍고 페론이 나치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1946년 5월 트루먼 정부에서 아르헨티나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자, 도밍고 페론도 서서히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 도밍고 페론은 집권 후 군부에서 장교단의 정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봉급 인상, 연금 혜택 확대 및 군 고위 인사들의 국영 기업체 취업 등의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도밍고 페론은 미국의 압력이 강화될 때마다 군부에 새로운 무기를 공급하였다.

도밍고 페론은 집권 후, 유사시 미국과 브라질의 개입에 대비하여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중공업에 중점을 두었던 산업 기반을 전후 체제에 맞게 경공업 체제로 전환을 시도하였다. 1946~1947년 사이 도밍고 페론 정권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노동자 총연맹(CGT)과의 관계 수립이었다. 도밍고 페론은 조직화된 노동자 계층에 대한 유대를 강화하였다. 그 사이 도밍고 페론 정부는 1946년 말 프랑스 인 소유의 철도망, 국제 전화 전신 회사(ITT) 소유의 전화 회사(Unión Telefónica)와 양도 협상을 개시하였다. 또, 1947년 2월에는 영국인 소유의 일부 철도 노선을 국유화하였다. 또한, 도밍고 페론은 1947년 7월 경제적인 독립을 선포하면서 아르헨티나의 모든 외채를 청산하였다.

도밍고 페론은 1948년에 들어 정의주의(Justicialismo)을 주창하면서 연말부터 개혁 반대 세력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또, 그의 부인인 에바 두아르테(Eva Duarte)는 자선 단체를 통해 도밍고 페론의 인기를 고조시켰다. 1948년 12월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였다. 또,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고, 직선제에 무제한의 재선을 허용하여 중앙 집권제를 강화하였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1946~1948년 사이 수출의 증대로 혜택을 보았다. 그 결과 1945~1948년 사이 국민 총생산은 29%나 상승하였다. 전후에 미국은 아르헨티나로부터 양모, 육류 캔 및 케브라초 등을 수입하였으나, 육류와 곡물의 수입 통로는 계속 봉쇄하였다.

1946년 아르헨티나 외환 보유고의 3/4은 서유럽과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통화여서 대부분 호환성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은 계속 증대되어 1948년 말까지 미국과의 무역 적자가 크게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948년 초 마셜 플랜 달러를 가지고 아르헨티나 산 물품을 구매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미국은 유럽 지역에 미국, 캐나다 및 영연방 국가들의 곡물을 반출하도록 결정함으로써 아르헨티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 결과 1949년 1월 아르헨티나는 외환 보유고가 고갈되어 부채국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농산물 생산량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수출과 수입은 각각 25% 정도로 성장하였다.

1950년 7월 아르헨티나는 리우데자네이루 조약을 비준하고, 9월에는 사회 안전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도밍고 페론 정권은 1951년 정의주의 학회를 창설하여 정의주의의 선전을 강화했으나 1951년 노동자 총연맹 내의 추종자들이 도밍고 페론의 부인 에바 두아르테를 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다 군부와 마찰을 빚기 시작하였다. 군부는 에바 두아르테의 후보 추대 운동에 즉각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더구나 9월에는 군부 일각에서 쿠데타를 시도하여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사태 진압 후 일부 지도자들은 외국으로 도주하고 상당수의 군인들이 체포되었다. 도밍고 페론 정권은 이를 계기로 강권을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1951년의 선거에서 도밍고 페론은 유권자 690만 명 중 67%의 지지를 얻어 재선되었다. 그는 1952년 재집권한 후 임금과 가격 조정 및 생산성 증대를 강조하는 제2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경기 침체와 우루과이로의 여행 금지 등의 억압적인 정책으로 추종자들과 중립적인 인사들까지도 도밍고 페론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1952년 7월 도밍고 페론 정권의 지지에 크게 공헌한 부인 에바 두아르테의 사망으로 노동 의용군의 조직화에도 실패하였다.

그러자 도밍고 페론은 1952년 5월 라틴아메리카 노조 기구(ATLAS)를 창설하여 정의주의를 유포하면서 국제적인 연대를 시도하였다. 또한, 그는 1953년에 칠레, 에콰도르 및 페루와 호혜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아르헨티나와 갈등 관계에 있었던 영국과의 교역 협정 체결로 소원했던 우루과이를 방문하여 우호 관계를 강화하였다. 1953년 8월에는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려고 과실 송금 허용과 산업 은행의 지원을 약속하는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물가 상승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폭동과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함으로써 정치, 경제적으로 위기에 직면하였다.

1954년 4월 금속 노조의 파업 이후 도밍고 페론과 노조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더구나 그는 10월에 교회측의 노조 개입에 반감을 가지고 충돌하여 가톨릭과의 밀월 관계도 붕괴되었다. 도밍고 페론은 노조 연맹 집회에서 성직자들의 음모를 비난하면서 그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가톨릭 교회측이 정부에 대항하여 항의 시위를 전개하자, 정부는 교육에서 교회의 통제를 폐지하고 이혼을 합법화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1955년 2월에는 정부측의 교회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철회하고, 교직에서 성직자와 수녀들을 해직시켰다. 또, 교회에 대한 과세법을 제정하면서 정교(政敎) 분리의 헌법 개정을 발표하여 가톨릭 세력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한편, 도밍고 페론 정부는 1955년에 들어 미국의 카이저(Kayser) 자동차 회사의 코르도바 공장 설립과 미국의 스탠더드 석유 회사의 파타고니아 유전 지대의 개발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유전 지대의 개발권 양도에 민족주의자들이 강력히 반발하여 5월 성체절 행사에서는 폭동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해군기들이 대통령 궁을 폭격했으나 곧바로 진압되었다. 그 후 계속된 주민들의 저항으로 도밍고 페론은 정부의 온건 정책과 군부에 의존한 강경책도 실패하여 8월 31일 대규모 군중 집회에서 사임을 제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16일 코르도바와 바이아블랑카에서 군부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어 9월 19일 해군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라플라타 정유소의 파괴 위협에 직면하여 도밍고 페론은 권력을 의회에 위임한 후 파라과이 전함으로 스페인에 망명하였다. 이로 인해 군부의 지도자 에두아르도 로나르디(Eduardo Lonardi) 장군이 정권을 계승하였다.[4]

지도

동영상

각주

  1. 라팜파주〉, 《위키백과》
  2. 라팜파주〉, 《네이버 지식백과》
  3. 청산에살자, 〈라팜파〉, 《네이버 블로그》, 2016-11-06
  4. 도밍고 페론과 페론이즘〉,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남아메리카 같이 보기

남아메리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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