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제국
페르시아제국 이란 고지대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지방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던 고대 제국을 통칭하는 말로, 그 기원은 아케메네스제국(BC 550~ BC 330)이다.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고대부터 서양인들 사이에서 이란 민족, 혹은 이란 민족에 의한 고대제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명칭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파르스(Fars)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라틴어화(化)하여 페르시아(Persia)로 변화했으며, 이 지역이 아케메네스(Achaemenes)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아케메네스제국의 명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1935년 3월 21일 팔레피왕조의 레자 샤(Reza Shah)가 국호를 공식적으로 이란으로 바꿀 때까지 여러 왕조에 걸쳐 페르시아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아케메네스왕조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원은 BC 815년경 오늘날의 이란 북서부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던 이란 민족의 한 지파(支派)가 우르미아호(湖)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가로질러 남하, 수사(Susa)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Parsumash)에 정착한데서 시작한다. 이들은 BC 700년경 남쪽으로 이주하여 엘람(Elam)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엘람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 권력의 공백기인 BC 691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인 테이스페스(Teispes)왕자가 안잔(Anzan) 시를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이름을 딴 왕조를 세웠다. 테이스페스는 왕국을 확장시켰으나,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나뉘어 북부는 차남 아리아라메스(Ariarames)가, 남부는 장남 키루스(Cyrus)가 통치했다.
키루스 1세(Cyrus Ⅰ)는 페르시아인들을 통합했으며, 그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는 메디아왕국(Media)의 공주 만다인(Mandane)과 혼인함으로서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통합했다. 캄비세스의 장남 키루스 2세(Cyrus Ⅱ, BC 559~529 재위)는 쿠루쉬(Kurush)라고도 불렸으며, 주변국들을 점령하며 페르시아 제국의 초석을 마련했다. 왕위에 오른 키루스 2세는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제국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 리디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系)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BC 545년). 그리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의 신앙과 제례의식도 허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서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바빌론의 점령은 그때까지 변경 국가였던 제국을 일약 세계제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으며, 따라서 키루스 2세가 대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어서 B.C. 529년 아랄해 연안의 자카르테스(Jaxartes)유역의 스키타이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길에 나선 키루스 2세는 전쟁 중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사망했다. 키루스 2세의 생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이집트 정복은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Kambyses II)가 왕위에 올라 수행했다. 그러나 그가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멸망한 메디아의 종교지도자 가우마타(Gaumata)가 캄비세스 2세의 동생임을 자처하며 왕권을 차지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집트에서 돌아오던 캄비세스 2세는 재위 8년만인 B.C. 522년에 이집트의 시와(Siwa)에서 사망했다. 캄비세스 사후 제국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그를 도와 페르시아의 군인으로 이집트 원정에 참가했던 아케메네스의 왕족 다리우스1세(Darius Ⅰ: B.C. 521~486 재위)가 이집트로 돌아와 B.C. 522년 가우마타를 죽이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다리우스는 제국 전역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B.C. 521년 12월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다리우스 1세와 그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 1세(Xerxses Ⅰ: B.C. 486~466 재위)의 통치 기간 중 아케메네스 제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의 통치기에 아케메네스 제국은 동서로는 히파시스 강에서 리비아까지, 남북으로는 아라비아반도에서 카프카스산맥과 아랄해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전국토를 20개 주로 나누었으며, 징세와 병역을 부과했다. 또한 정복민에 대해서도 관대했으며, 각 지방마다 ‘사트라프’로 불리는 총독을 파견하는 한편, 왕의 직속 관리들이 총독을 감찰해 왕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다리우스 1세는 조로아스터교의 신봉자였으며,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다(그 편린은 그의 碑文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활발한 건축 사업을 벌여,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엘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세웠다. 특히 다리우스 1세의 정복 활동을 묘사한 비수툰(Biston) 부조를 비롯하여 수많은 예술 작품과 세공품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뛰어난 예술 양식을 보여준다. 도로망의 확충에도 관심을 기울여,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총 2,400 km에 달하는 왕도(王道)를 건설하고, 역전제(驛傳制)를 도입하여 각 역에 역마(驛馬)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로로, 전쟁시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여러 국가의 모범이 되었다.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金貨)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다리우스 1세는 BC 513년 도나우강을 건너 스키타이를 정벌하고,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스로 원정하였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위정자로서의 공적이 대단하여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의 유지(遺志)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시도하였으나 유능한 지휘관 마르도니우스가 이미 죽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그는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ses Ⅰ: B.C. 424년 사망)때 키몬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았다(BC 449). 그의 비문(碑文)에서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토착신앙의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신명(神名)을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통치기부터 왕족 내부에 파벌이 형성되면서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2세(Xerxses Ⅱ)는 소그드인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후계자 다리우스 2세(Darius Ⅱ) 역시 그 정통성이 명확하지 않았다. 다리우스 2세의 장남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ses Ⅱ, 재위 404?-358 BC)는 반란을 일으킨 동생 소(小) 키루스(Cyrus the Younger, 키루스 3세, 424?~401 BC)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Artaxerxses Ⅲ, 재위 358-338 BC) 때에 이르러 아케메네스 제국은 B.C. 358년 아나톨리아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B.C. 343년에는 이집트를 다시 정복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3세(Darius Ⅲ: B.C. 336년 즉위)가 즉위할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3세(Alexander Ⅲ),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제국 깊숙이 동진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그리스군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빠른 속도로 점령했으며,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제국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다. 다음해 6월 다리우스 3세가 자신의 부하 베수스(Bessus)에게 암살당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 후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가 완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파르티아제국
파르티아 제국, 또는 아르사케스 제국은 기원전 247년부터 서기 224년까지 고대 이란에 있었던 이란족의 정치문화적 세력이었다. 아르사케스 제국이라는 이름은 제국의 창립자였던 아르사케스 1세로부터 유래했으며, 그는 파르니족을 이끌고 당시 안드라고라스 휘하의 사트라프였던 이란 북동부의 파르티아 지역을 정복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미흐르다트 1세 (r. c. 171–132 BC)는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메디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하면서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전성기 때 파르티아 제국은 오늘날 중동부 터키 일대인 유프라테스강 일대에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서부 파키스탄 지역까지를 영토로 보유하고 있었다. 파르티아 제국은 지중해 분지에 있는 로마 제국과 고대 중국의 한나라를 잇는 비단길 교역로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파르티아 왕위계승자들 사의 빈번한 내전이 외국의 침공보다 제국의 안정에 더 위협이 되었고, 224년 페르시스의 이스타크르를 통치하던 아르다시르 1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파르티아 제국의 마지막 샤였던 아르타바누스 4세를 죽였을 때 파르티아 제국은 멸망했다.
사산제국
사산제국은 AD 7세기 초기 무슬림 정복 이전의 마지막 이란제국이었다. 사산 가문의 이름을 따서 이름붙여진 이 왕조는 서기 224년부터 651년까지 약 4세기 동안 존속함으로써, 이전의 아르사케스가문의 파르티아 제국 다음으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이란계 제국이 되었다.
사산제국은 파르티아제국을 계승하여, 페르시아를 이웃한 대립국인 로마 제국(395년 이후 동로마 제국)과 함께 고대 후기의 주요 강대국으로 재편하였다. 제국은 아랍의 페르시아 정복으로 끝이 났다.
사산제국은 파르티아제국이 내부 분쟁과 로마와의 전쟁으로 쇠약해진 틈을 타서 권력을 잡은 이란 통치자 아르다시르 1세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224년 호르모즈드간 전투에서 파르티아의 마지막 샤한샤인 아르타바누스 4세를 격파한 후 사산 왕조를 세웠고, '이란'이라는 영역 개념의 확장을 통해 아케메네스 왕조의 유산을 회복하려 노력했다. 620년 당시, 가장 넓은 영토 범위에 도달한 사산 제국은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 전체를 포괄하고 레반트에서 인도 아대륙, 남아라비아에서 캅카스와 중앙아시아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점유했다.
사산왕조의 통치 기간은 복잡하고 중앙집권화된 정부 관료제를 특징으로 하는 이란 문명의 전성기였으며,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채택하여 그들의 통치를 합법화하고 통합하는 힘으로 활성화시켰다. 그들은 또한 웅장한 기념물, 공공사업, 후원받는 문화 및 교육 기관을 건설했다.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은 서유럽, 아프리카, 중국, 인도를 넘어 훨씬 더 확장되었으며,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중세 예술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산 왕조의 예술·건축·음악·문학·철학은 이후 찬란하게 번영할 이슬람 문명의 확고한 문화적 기반이 되어주었으며, 나아가 이슬람권 전역에 페르시아의 선진적인 문화와 지식, 사상이 확산되는 것을 보장함으로써 인류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사파비왕조
사파비 왕조는 아제르바이잔과 쿠르트계 부족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슬람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 가장 큰 이란 제국을 건설했으며, 사산 왕조 이래로 이란 전역을 통합한 왕조이기도 하다. 사파비 왕조는 시아 이슬람의 12이맘파를 따르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임을 주장했다. 비록 1722년 왕조가 멸망했으나, 오늘날까지도 이란과 코카서스, 서남아시아 지역의 시아 이슬람 사상의 중추가 되고 있다.
사파비왕조의 조상이 되는 사파비가(家, Safawiyyah)는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다빌(Ardabil)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그 수장은 쉐이크 사피 알-딘(Sheykh Safi al-Din : 1253~1334)이었다. 수피(Sufi, 이슬람 신비주의) 종단의 지도자였던 그가 1399년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사파비왕조를 세운 이스마일 1세(Ismail I : 재위 1501~1524) 역시 아르다빌의 수피 종단 지도자였으며, 투르크계 부족들의 지원을 받아 1501년 7월, 백양왕조(白羊王朝, 튀르키예어는 Ak Koyunlu)를 격파하고 수도 타브리즈(Tabriz)를 점령했다. 이후 우즈베크, 투르크 등과 연합하는데 성공한 그는 사파비 왕조를 세우고 아제르바이잔의 샤(Shah)를 자칭했으며, 1502년 5월에 이란 전역을 통치하는 샤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티무르 왕조의 쇠퇴를 기회로 하여 이란 전역을 평정하고 유프라테스강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 '제왕(諸王)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이란의 민족적 부흥을 실현하였다. 또한 수니 이슬람 지역인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모술을 병합했으며, 시아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했다.
1514년 오스만제국과의 분쟁을 시작으로 수니 이슬람 세력과 끊임없이 대립했으며, 북동쪽의 우즈베크족과도 항쟁하며 시아 이슬람의 종주국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제5대 왕 아바스 1세(Abbas I : 재위 1587~1629)는 이스파한(Esfahan)으로 천도하고 관료기구의 정비, 군제개혁 등으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 싸워 위세를 떨치면서 최성기를 이룩하여 이란적 특색의 이슬람 문화를 번영시켰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국정이 혼란해졌으며, 아바스 2세(Abbas II : 재위 1642~1666) 재위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쇠퇴 일로에 있었다. 결국 1722년 수도 이스파한이 칸다하르(Qandahar)를 기반으로 일어난 아프간족에 의해 점령당했다. 비록 7년 뒤 타흐마세프 2세(Tahmasp II)가 이스파한을 회복했으나, 1732년에 다시 아프간족의 공격을 받았으며, 1736년에 사파비 왕조가 멸망하였다.
팔레비왕조
카자르 왕조가 통치하던 이란의 왕정이 영국과 러시아의 침탈에 무기력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이란 내부에서 대두되었다. 러시아가 10월 혁명으로 이란에서 철수하자 영국의 지원에 힘입은 레자 샤가 1921년 쿠데타를 일으켜 카자르 왕정을 폐지하고 이란을 공화제의 근대적 정치제제를 갖춘 국가로 변모시키려고 추진하였다. 하지만 종교인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레자 샤는 팔레비 왕조를 세웠다. 레사 칸은 군부 쿠데타를 성공한 이후 4년간 정권을 장악하고, 국민의 지지를 얻었지만 종교인들과 갈등은 심화되었다. 마침내 1925년에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인 아흐마드 샤 카자르(Ahmad Shah Qajar : 재위 1909-1925)를 폐위시키고, 국민의회에 의하여 국왕에 추대되어 '샤'라는 칭호를 받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였다.
레자 샤는 이란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이란을 전통적인 이슬람 국가로 이끌기를 원했던 성직자들과는 갈등관계가 지속되었다. 레자 샤는 강력한 철권통치를 강화하면서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탄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추축국(Axis-Powers/Achsenmächte/Potenze dell'Asse, 樞軸國)에 가담한 이유로 영국 ·프랑스의 압력을 받아 퇴위하고, 장남인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재위 1941~1979)에게 양위하였다. 2대 왕 팔레비는 부친의 근대화 개혁을 지속하고자 했으며, 농지개혁과 종교개혁 등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하지만 팔레비 왕조는 곧 전통적인 정치 엘리트들과 모하마드 모사데크(Mohammad Mosaddegh)를 중심으로 하는 이란 민족주의 성향의 신흥 정치 엘리트들 사이의 갈등에 휘말렸다. 팔레비 왕조는 공포정치로 이란을 통제했고 이슬람 민족세력의 탄압과 언론통제로 국정을 장악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팔레비 왕조는 경제정책의 실패로 재정 수입원의 대부분을 석유에만 의존하게 되었으며, 현대적 개혁을 향한 왕조의 의지는 친서구적인 것으로 비난받게 되었다. 결국 팔레비 왕조는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가 이끄는 1979년의 이슬람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참고자료
- 〈페스시아 제국〉, 《위키백과》
- 〈페스시아 제국〉, 《두피디아》
- 〈파르티아 제국〉, 《위키백과》
- 〈사산 제국〉, 《위키백과》
- 〈사파비 왕조〉, 《두피디아》
- 〈팔레비 왕조〉, 《두피디아》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