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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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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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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야경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
자금성 곳곳에 있는 청동 사자상
오문의 서쪽 날개에 있는 유물 전시관
동화문에 있는 유물 전시관

자금성(紫禁城, Forbidden City)은 베이징의 중심에 있는 명과 청 왕조의 궁궐이다. 자금성의 규모는 궁궐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현재는 황실이 사라져서 중국어권에서는 주로 고궁(故宫)이라고도 불리며, 1925년 10월 고궁 박물원(故宫博物院)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72만 m²의 넓이에 높이 11m, 사방 4km의 담과 800채의 건물과 일명 9999개의 방(실제로는 8707칸이라고 한다)이 배치되어 있다. 자금성은 5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의 정치적,상징적 수도였다.

1406년에서 1420년까지 지어졌으며, 980개에 달하는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고, 72헥타르나 되는 면적을 차지한다. 전통적 중국 궁궐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동아시아 곳곳에 영향을 끼쳤다.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 "명·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명,청 시대의 황실이 수집한 엄청난 규모의 작품들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다만 자금성에 있던 유물들의 일부는 국공내전으로 인해 국민당이 가져가면서 현재 타이완의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12년부터 자금성은 매년 1500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을 맞고 있으며, 2016년과 2017년에는 1600만 명이 넘게 자금성을 다녀갔다.

소개

자금성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궁궐로 1421년 명나라의 영락제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해 1924년 선통제가 여기서 쫓겨날 때까지 5백년 동안 명나라·청나라 두 왕조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라고 부르던 24명의 황제가 살던 궁궐이다.

명조와 청조의 황제 궁전인 자금성의 건축은 1407년에 시작되었으며, 20만 명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고생한 끝에 14년이 걸려 완공되었다. 황제의 권력과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설계된 자금성은, 천제(天帝)의 거처와 동등한 지상의 등가물이라 여겨졌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황제의 허가 없이는 그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 단지는 각 변에 주 성문이 나 있다. 깊이 6m의 해자와 높이 10m의 벽에 둘러싸여 있다. 총 넓이가 약 72헥타르에 이르는 자금성 안에는 약 800채의 건물과 8,880개의 방이 있는데, 방의 개수가 좀 더 그럴싸한 숫자인 9999개라고 나와 있는 자료들도 있다. 이 건물들 중에 다섯 채의 커다란 전당과 열일곱 채의 궁전이 있었다. 자금성은 두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남쪽 구역, 즉 '전조'(前朝)는 황제가 매일의 정무를 보는 곳이었고, 황제와 그 가족이 거주하는 곳은 북쪽 구역, 즉 '내정'(內廷)이었다. 건물의 소재로는 목재가 지배적으로 쓰였다. 자금성 안에는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모여 있으며, 지붕은 전통적인 왕의 색깔인 노란색으로 칠해졌다.

1644년 명나라 뒤를 이어 들어선 청나라의 열 명의 황제들은 자금성을 정부 소재지로 삼았다. 1912년, 신해혁명에 뒤이어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퇴위했고, 자금성은 결국 박물관이 되었으며 많은 보배와 진기한 물품들을 전시하게 되었다(유물들의 일부는 국공내전(國共內戰) 동안 대만으로 옮겨졌다). 중국 공산당의 정책이 완화되면서 자금성은 중국인과 외국인 관광객 모두가 찾는 주요 명소가 되었다.

이름

자금성이란 이름은 1576년 처음 공식적으로 나왔다. 자금성이란 이름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자금성의 자(紫, 보라색, 자주색)는 북극성을 의미하고, 자금성은 곧 우주와 같은 공간으로 생각되어, 하늘로부터 신성함을 부여받은 황제와 그의 가족의 영역이었다. 자금성은 세속적인 세상과 신성한 세상을 분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황제의 신성함과 불가침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금禁은 금지되었다는 뜻인데, 이는 황제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궁을 들어오거나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성(城)은 도시를 의미한다.

오늘날, 자금성은 중국에서 고궁이라고 가장 흔히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옛 궁궐'을 의미한다. 이런 건물들로 구성된 박물관인 고궁박물관이다. (古宮博物館)

역사

명나라

명나라 고궁을 표현한 그림

대륙의 기상

영락제는 1406년(영락 4년) 자신이 중심지로 삼았던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난징의 궁전을 모방해 베이징에 궁전을 짓도록 했다. 이후 1420년(영락 18)에 완공되니 그 결과물이 바로 자금성이다. 14년 동안 10만 명이 넘는 장인들과 1백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아낌없이 갈아 넣어서 건설했는데, 여기에 소요된 자재는 중국 윈난성 지역의 밀림에서 벌채한 남목(楠木) 수십만 그루와 쑤저우 등지에서 생산한 금전(金磚) 1억 개, 각종 유리기와 2억 개 등이었고, 기와를 만드는 도토는 안후이성 태평에서, 채화의 연료는 서남부의 각 성에서 징발했으며, 기단부와 조각에 사용될 한백옥은 50km 바깥의 채석장에서 운반했는데 그 중 가장 무거운 돌은 200t에 육박했다. 이런 돌은 보통 마차로 운반하는 게 불가능해 채석장에서부터 자금성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을 판 다음 겨울에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뿌려 빙판을 만든 다음에야 겨우 운반할 수 있었다.

잇따른 화재

이렇듯 명나라의 모든 물자와 노동력이 총동원되어 1420년(영락 18) 12월 완성된 자금성은 1421년(영락 19) 정월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했고 영락제는 황실 가족과 수많은 환관, 궁녀들을 거느리고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완공 후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5월에 벼락이 쳐서 자금성의 중심인 3개의 대전(大殿)을 포함한 상당수의 전각들이 불타버렸다.

천도에 대한 말이 많은 상황에서 힘들여 지은 궁전이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벼락을 맞고 전소되자, 황제가 하늘의 뜻을 거슬렀다며 민심이 흉흉해졌다. 급기야 다시 닌징으로 환도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어 조정이 소란스러워졌다. 영락제는 난징 천도론을 주장한 신하 한명을 처형하고 나서야 겨우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 영락제가 몽골 정벌을 위해 출병하던 중 원정지에서 객사하고 베이징에 돌아왔을 때도 그의 관은 잿더미가 된 자금성에 안치된 다음 능묘에 매장되었다. 중건이 마무리된 시점은 19년의 세월이 흐른 정통제 때인 1440년(정통 5)이었다.

그리고 1459년(천순 3)에는 자금성 서쪽에 황실원림인 서원(西苑)을 새로 영건했다. 이곳이 오늘날의 베이하이와 중난하이(中南海)이다. 그중 중난하이는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요인들의 관저로 사용되어 자금성의 뒤를 잇는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110여년 뒤인 1557년(가정 36)에 다시 화재가 발생해 3대전을 포함한 주요 전각들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첫 번째 화재와는 달리 2번째 화재에서는 진화되자마자 바로 중건에 들어가 1561년에 공사가 끝났다.

그리고 30여년 뒤인 1597년(만력 25)에 또다시 화재가 발생해 이번에도 어김없이 3대전이 전소된 것은 물론이고 황제 일가의 사적 공간인 후3궁도 불타는 등 자금성 완공 이래 명나라 역사상 가장 큰 피해가 발생했다. 파괴된 전각 모두를 한꺼번에 지을 수는 없었지만 황제의 옥좌가 있는 정전인 태화전만은 무리를 하면서 간신히 중건했다. 이를 위해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다. 당시 황제는 당대 최악의 황제로 평가받는 만력제였다.

3번째 화재로 불탔던 태화전이 중건된 건 30년이 지난 1627년(천계 7)이었다. 천계제의 재위 7년째 되던 해로 이 해에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해 갓 지은 옥좌에 앉았으나 20년을 못넘기고 1644년(숭정 17)에 명나라가 망했다.

청나라

이례적인 재사용

청나라 건륭제 《만국래조도》의 일부, 앞은 태화문, 뒤는 태화전이다.

보통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의 궁궐을 헐고 새로 짓는 것이 사실상의 관습처럼 굳어졌는데,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을 자금성에서 몰아낸 뒤 자금성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사실 청나라는 베이징을 장악한 후 바로 중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40년간 남쪽과 서쪽의 남명, 정성공, 이자성, 준가르와 계속 전쟁을 벌이면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고, 마지막에는 삼번의 난이 터져 한가하게 궁전을 새로 지을만한 여유가 없었다. 만주족들은 베이징에 입성해 본 자금성의 화려함에 크게 만족했기 때문에 굳이 비용이 많이 들고 백성의 원성을 들을 게 뻔한 새 궁전을 짓는 대신 자금성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게다가 청나라는 이자성의 난 때문에 자살한 숭정제의 원한을 갚아준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오삼계가 이 명분으로 산해관을 열어줘 청군이 이자성군을 베이징에서 몰아냈기 때문에, 청나라는 명나라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의미에서 기존의 궁궐을 쓰는 게 나았다. 이렇게 자금성을 그대로 쓰면서 원래 청나라의 정궁이었던 선양고궁은 행궁으로 격하되었다.

만주족이 자금성을 재사용하기로 결정한 후, 여러 전각을 수리하거나 개축하는 소규모 공사는 있었지만 전반적인 구조 자체는 명나라 시절과 달라지지 않았다.

명나라 때 발생한 3번의 화재 이후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는데, 위와 같은 명말청초의 여러 혼란한 사정 때문에 한동안 방치되고 있었다. 전면적인 개보수는 청나라가 삼번의 난을 진압하면서 중국대륙내에서 반청세력들을 모두 일소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다. 강희제 때인 1683년(강희 22)에 공사에 들어가 1695년(강희 34)에 다시 지어졌다. 건륭제의 재위기간 동안 황제의 취향에 맞는 화려하고 우아한 장식이 갖춰진 전각과 화원을 여러번 고쳐 짓기를 60년 내내 반복했다. 건륭제의 취향이 반영된 이 정원은 '건륭화원'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왕조의 마지막 순간

자금성 항공사진(1900년-1901년

청조의 전성기였던 건륭제 사후 점차 청나라가 쇠퇴하면서 자금성의 권위에도 영향을 미쳐 1813년(가경 18) 천리교도들이 자금성에 난입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근위병들이 갈팡질팡하는 동안 친왕 시절의 도광제가 직접 총을 쏴서 천리교도 격퇴에 일조한 게 이때의 일이다.

명나라 때의 3차례 대화재 이후 청나라 때의 자금성은 큰 화재 없이 2백년 동안 무사했으나 1886년(광서 14) 광서제의 국혼을 앞두고 태화문 인근에서 화재가 시작되어 태화문과 정도문, 소덕전 등이 불타는 사건이 벌어졌다. 비록 6년 뒤에 중건되긴 했지만 황제의 결혼이라는 국가적인 경사를 목전에 두고 터진 일이라 불길한 징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후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려 온 서구 열강을 주축으로 한 8개국 군대에게 점령당하기도 했으며, 신해혁명의 불길이 중국을 뒤덮은 1912년(선통 4)에 청나라가 망했다.

중화민국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했지만 자금성 안에서 거주하는 것은 허락되어 황실 가족들은 외국 황실의 대우로 청 왕조 시절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1917년 장훈복벽으로 황실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고, 1923년 건복궁에 불이 나더니 1924년 2차 직봉전쟁 와중에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 핍궁사건을 일으켜 선통제를 아예 자금성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주인이 없어진 궁전은 고궁박물원으로 개칭되어 황실의 진귀한 보물 및 다양한 궁중 유물들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는데 1913년에 선양고궁과 승덕피서산장에 소장된 보물도 모두 자금성으로 이관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고궁박물원에 있던 수백만 점의 소장품 중 중요 유물을 골라 1만 3491개 상자에 나누어 일본의 침략을 피해 상하이로 옮겨졌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북경으로 돌아온 유물들은 국공내전이 격화되자 중요한 유물을 중심으로 다시 이삿짐을 싸서 1948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에 패배해 대만으로 옮겨갈 때 함께 가지고 가 1965년 새로운 고궁박물원을 만들었다.

이때 대륙에서 가져온 유물들은 고궁박물원 소장품 가운데서도 가장 가치있는 엄선된 것으로, 대만에는 알짜배기가 있고 자금성에는 쭉정이만 남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현재 대만 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은 당시 대륙에서 이송한 게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숫자는 68만 2061점에 달한다. 수백만 점이었던 유물들이 이곳저곳으로 옮겨진 통에 상당수가 사라졌음에도 남은 게 이 정도. 자금성이 명청시대의 궁궐이라 국민당이 뜯어간 유물도 명청시대의 궁중유물 위주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이 타이완 섬으로 옮겨간 뒤 중국 인민해방군이 1949년 북경을 점령한 후에도 자금성은 무사했으며 1950년대 이후 수리 및 복원 계획이 세워져 국가적인 문화재로 관리를 받았다. 그러나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쳐 홍위병들이 과거의 명승 유적들을 '타파해야 할 부르주아 반동의 폐습'이라고 외치며 닥치는대로 파괴하자 저우언라이 총리가 군대를 동원해서 자금성을 지켜냈다.

특히 중세 봉건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자금성은 문화대혁명 때 크게 파괴될 뻔한 위기를 넘겼다. 1957년 반우파 투쟁에서 '우파 우두머리'로 비난을 받았던 전 중국민주동맹 간부인 장보쥔의 딸 장이허가 마오쩌둥의 전 비서 리예에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자금성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집무실을 설치하려 했다고 한다. 1963년에 만들어진 베이징시 도시계획도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천안문, 오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등을 모두 해체하고 공산당 중앙 당사를 그 자리에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장이허 작가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금성의 모든 건물들에다가 붉은색 천을 줄줄이 걸어놓거나 노동자의 동상을 거대하게 세워놓겠다는 흉측한 발상들도 연이어 나왔으나, 문화재 보호주의자였던 저우언라이의 절박한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폭로했다. 저우언라이가 보호를 위해 애썼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때 자금성이 밀려나가고 공산당 당사가 들어섰다면 중국은 문화적으로도, 관광산업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70년대가 지나고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수그러들자 다시 문화재의 중요성이 재평가받으며 자금성도 점차 파괴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중국 정부는 이후 자금성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고 개보수 작업을 계속했는데, 한편 타이완 고궁박물원에 자극받은 중국 정부는 자금성에 있던 기존의 소장품에 새로이 전국에서 수집한 미술품 수만여 점을 더해 이전보다 더욱 규모가 커져 양적인 측면에서는 베이징 고궁박물원도 타이완에 뒤지지 않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2011년 현재 베이징의 고궁박물원 소장 유물은 약 180만 7558건이라고 한다. 그중 국가에서 지정한 1, 2, 3급 문물 즉 진귀문물은 168만 4490건, 일반문물은 11만 5491건, 표본은 7577건이라고 신화통신이 전했다. 비록 많은 유물이 대만으로 건너갔지만 이후 많은 문물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되었으고, 국가에서 수집하거나 기증받고, 중국 재벌들이 자비로 환수하여 기증한 것들도 많다.

  • 서화: 14만여 점
  • 원나라 이전의 회화(繪畫): 420점
  • 원나라 이전의 서법(書法): 310점
  • 청동기: 1만 5천여 점
  • 선진(先秦) 시대 명문이 있는 청동기: 약 1600여점
  • 고대 화폐: 약 1만여 점
  • 동경(銅鏡): 약 4천여 점
  • 인장(印章): 약 1만여 점
  • 도자기: 35만여 점
  • 1급 문물: 1100점
  • 2급 문물: 5만 6천여 점
  • 공예품
  • 옥기: 2만 8461점
  • 칠기, 법랑, 유리, 대나무·나무·상아·뿔 조각, 문방구 등: 10만 1845건
  • 분재: 1442점
  • 서적: 19만 5천여 책

주요 건축

천안문(天安門)
오문(午門)
신무문(神武門)
동화문(東華門)
서화문(西華門)

자금성은 크게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으로 나뉘는데, 외조는 황제가 국사를 돌보던 곳으로 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의 3대전과 그 양쪽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이 있으며, 내정은 황제가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건청궁(乾清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의 후3궁으로 되어 있다.

곤녕궁 북쪽에는 어화원(御花園)이 있고 후3궁 동서 양쪽에 황후와 후비들이 거주하던 6개의 궁이 각각 있어 동서6궁으로 칭하는데, 동6궁은 경인궁(景仁宮)·승건궁(承乾宮)·영화궁(永和宮)·종수궁(鍾粹宮)·경양궁(景陽宮)·연희궁(延禧宮), 서6궁은 영수궁(永壽宮)·태극전(太極殿)(계상궁(啓祥宮))·장춘궁(長春宮)·익곤궁(翊坤宮)·저수궁(儲秀宮)·함복궁(咸福宮)이다. 서6궁 남쪽의 양심전(養心殿)은 황제가 평소 거주하던 곳이고, 동6궁 남쪽의 재궁(齋宮)은 큰 제사를 앞두고 황제가 머물며 재계하던 장소다. 그리고 동서6궁 북쪽의 처소들은 황자들의 거처, 서6궁 서쪽은 황태후의 거처다.

궁성

  • 천안문(天安門) : 황성의 남문. 베이징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있었고, 내성안에 황성이 있었다. 그 황성안에 자금성이 있다. 황성도 자금성에 포함되었던 명청시대에는 자금성의 정문이었으나 지금은 자금성의 정문이 아래의 오문(午門)으로 바뀌었다. 1417년(영락 15) 건설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이었다. 1457년(천순 1) 벼락을 맞고 1465년(성화 1)에 중수했으며 1644년(숭정 17) 이자성 군대의 베이징 점령 때 소실되었다가 1651년(순치제 8)에 재건되면서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나라를 편안케하고 백성을 다스리다(受命于天, 安邦治民)'라는 의미의 천안문(톈안먼)으로 개칭했다. 왕조 시대에는 새로운 법률의 반포와 출전 또는 개선하는 군대가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천안문의 문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이래 신중국의 상징이 되어 현재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곳 앞에 펼쳐진 천안문광장에서 1976년의 4.5 운동(천안문 사태)과 1989년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9년에 전면적인 해체수리를 했다.
  • 단문(端門) : 천안문과 오문 사이에 있는 중간 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고 외형은 천안문과 똑같다. 황제가 조회시, 만조백관들이 이 문 앞에서 꿇어앉아 대기하다가 황명이 내리면 이 문을 통하여 궁으로 들어갔다.
  • 오문(午門) : 자금성의 정문이자 남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진 이래 1647년(순치 4), 1801년(가경 6)에 중수했다. 정중앙에 있는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9칸(60.05 m), 측면 5칸(25 m)이다. 이 건물과 함께 자리한 다른 전각의 4채의 배치가 봉황이 날개를 편 것과 비슷하다 해서 속칭 오봉루(五鳳樓)라 부른다. 황제가 새 달력을 반포하거나 명절에 신하들에게 물품을 하사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5개의 문 중 가운데의 문은 황제 전용으로, 지금은 굳게 닫혀 있다. 황제 아닌 사람이 여길 지나갈 수 있는 경우는 국혼날 가마를 탄 황후가 입궁할 때와 과거 전시에서 진사급제한 장원·방안·탐화[18]가 퇴궐할 때뿐이었다. 가운데 문을 기점으로 문무백관은 동쪽문을, 종실들은 서쪽문으로 출입했다.
  • 신무문(神武門) : 자금성의 북문. 1420년(영락 18)에 처음 지었을 때는 현무문(玄武門)이었지만 청나라 때 강희제의 이름 현엽을 피휘해 신무문으로 고쳤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1칸이며 곽말약이 쓴 '고궁박물원'이라는 편액이 성문에 걸려 있다. 1924년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날 때 이곳을 통해 출궁했다.
  • 동화문(東華門) : 자금성의 동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반대편에 있는 서화문과 같은 모양이다. 1457년(경태 8) 탈문의 변이 일어났을 때 정통제를 비롯한 정변 세력이 이 문을 통해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청나라 때는 황제, 황후, 황태후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재궁(梓宮)이 이 문을 통해 나갔기 때문에 속칭 '귀문(鬼門)'이라고도 불렀다.
  • 서화문(西華門) : 자금성의 서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반대편에 있는 동화문과 같은 모양이다. 맞은편에는 황실의 원림인 서원(西苑)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황후가 서원에 행차할 때 자주 사용했다. 1900년(광서 26)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서태후와 광서제가 이 문을 통해 시안으로 도망쳤다.
  • 각루(角樓) : 자금성의 궁성 네 귀퉁이에 각각 세워진 건물로 황색 유리기와를 얹은 3층 전각이다. 성벽을 제외한 각루만의 높이는 27.5 m이다. 경복궁 동십자각과 같이 궁성을 수비하는 망루 역할을 한다. 영락제 때 세워진 이래 오늘날까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다.

외조

태화문(太和門)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홍의각(弘義閣)
체인각(體仁閣)

3전3각

  • 태화문(太和門) : 태화전의 전문으로 중첨헐산정(重檐歇山頂)에 정면 9칸, 측면 3칸, 높이 23.8 m, 면적 1300 ㎡이다. 앞에는 명당수 역할을 하는 내금수하(内金水河)가 흐르고 있다. 1420년(영락 18)에는 봉천문(奉天門)이라 했다가 1562년(가정 41) 황극문(皇極門)으로, 다시 1645년(순치 2) 태화문으로 개칭했다. 1886년(광서 14)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94년(광서 20)에 중건되었다. 태화문의 좌우에는 각각 정경문(貞慶門, 명나라 때는 홍정문(弘政門))과 소덕문(昭德門, 명나라 때는 선치문(宣治門))이 있다.
  • 태화전(太和殿) : 자금성의 정전.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11칸, 측면 5칸, 길이 64 m, 너비 37 m, 전각 높이 26.92 m, 면적 2368 m², 기단 높이 8.13 m, 기단까지 합친 높이 35.05 m로 중국에 현존하는 궁전 건축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목조 구조물이다. 한백옥으로 된 3단의 기단 위에 세워져 72개의 남목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데 가장 큰 것은 높이 12.7 m, 직경 1.06 m에 이르며 이 중 옥좌와 가까운 곳의 6개 기둥은 금박으로 덮여 있고, 지붕 처마에는 11개의 잡상이 있다. 태화전이 자리한 월대에는 황제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일구(日晷)와 가량(嘉量), 장수를 상징하는 청동거북과 청동학, 그리고 동정(銅鼎) 18개가 진설되었다. 1420년(영락 18)에는 봉천전(奉天殿)이었으며 1562년(가정 41) 중건하면서 황극전(皇極殿)으로 개칭했고 1645년(순치 2)에 태화전으로 개칭했다. 자금성에서 가장 넓은 광장이 여기에 있어서 황제의 즉위식, 국혼, 황후 책봉, 조회 등 국가적인 중대사 때 주로 사용되었다. 태화전 좌우의 담장은 원래 회랑이 있었던 자리였으나 청나라 때 화재를 막기 위해 지금과 같은 담장으로 바꿨다.
  • 중화전(中和殿) : 태화전 뒤편에 있는 전각으로 평면은 정방형이며 단첨사각찬첨(單檐四角攢尖)에 정면 3칸, 측면 3칸, 높이 29 m, 면적 580 ㎡이다. 1420년(영락 18)에는 화개전(華蓋殿)이었고 1562년(가정 41) 중극전(中極殿), 1645년(순치 2) 중화전으로 개칭했다. 전각의 이름은 예기(禮記)의 중용(中庸) 중 '중이란 천하 모든 것의 가장 큰 근본이며, 화란 천하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도이다(中也者天下之本也, 和也者天下之道也)'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태화전에서 공식 행사를 치르기 전에 잠시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평소에 상소문을 읽고 처결하는 공간으로 사용했으며 청나라 때는 황실의 족보를 7년마다 개수하는 작업을 해 그 결과물을 중화전에서 진상받았다.
  • 보화전(保和殿) : 중화전 뒤편에 있는 전각으로 중첨헐산정(重檐歇山頂)에 정면 9칸, 측면 5칸, 높이 29.5 m, 면적 1240 m²이다. 1420년(영락 18)에는 근신전(謹身殿), 1562년(가정 41) 건극전(建極殿), 1645년(순치 2) 보화전으로 개칭했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의복을 갈아입는 공간이었고, 청나라 때는 매년 제야와 정월 15일에 황제가 소수민족 왕공대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1789년(건륭 54) 이후에는 이곳에서 전시가 치러지기도 했다.
  • 문화전(文華殿) : 서쪽에 있는 무영전과 짝을 이루도록 지어진 전각. 공(工)자 형태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앞쪽에는 헐산정(歇山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인 문화전이 있고 천랑을 통해 후전인 주경전(主敬殿)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서 양쪽에는 배전인 본인전(本仁殿)과 집의전(集義殿)이 있다. 명나라 초에는 황제의 편전이었으나 이후 천순제, 성화제 때 태자가 황제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기도 했다. 청나라 때는 매년 봄과 가을에 황제가 경연을 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1776년(건륭 41)에는 문화전 뒷쪽에 문연각(文淵閣)을 세워 <사고전서>를 비롯한 황실에서 소장한 중요 문헌을 보관했다.
  • 무영전(武英殿) : 동쪽에 있는 문화전과 짝을 이루도록 지어진 전각으로 헐산정(歇山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 길이 33.4 m, 기단 높이 1.5 m다. 뒷쪽에는 후전인 경사전(敬思殿)과 천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서 양쪽에 배전인 응도전(凝道殿)과 환장전(煥章殿)이 있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정무를 보거나 대신들을 접견하던 장소였다. 1644년(숭정 17) 자금성을 점령한 이자성이 바로 이곳에서 4월 29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청나라 때는 이곳에서 흠정본(欽定本)의 편집과 간행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무영전판, 약칭 전판(殿版)이라 해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869년(동치 8) 화재로 인해 무영전 일대가 불타면서 건물은 같은 해에 중건했으나 전판들은 소실되었고 잔존한 전판은 현재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있다.
  • 홍의각(弘義閣) : 동쪽의 체인각과 마주보고 있는 단첨무전정(單檐廡殿頂)에 정면 9칸, 측면 3칸, 높이 25m의 전각이다. 태화전 광장 서쪽에 있다. 1420년(영락 18)에는 무루(武樓), 가정제 때 무성각(武成閣), 청나라 초에 홍의각으로 개칭했다. 영락제 때 편찬된 <영락대전>이 소장되어 있었다.
  • 체인각(體仁閣) : 서쪽의 홍의각과 마주보고 있는 무전정(廡殿頂)에 정면 9칸, 측면 3칸, 높이 25 m인 전각이다. 태화전 광장 동쪽에 있다. 1420년(영락 18)에는 문루(文樓), 가정제 때 문소각(文昭閣), 청나라 때 체인각으로 개칭했다. 1678년(강희 17)에 이곳에서 143인의 학사들을 모아 <명사(明史)>를 편찬했다. 1783년(건륭 48)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같은 해에 중건되었다.

자금성 동남부

문연각(文淵閣)
녹색과 청색 기와를 얹은 지붕
  • 전심전(傳心殿) : 문화전 동쪽에 있는 제사 의례용 건축물로 동서 25m, 남북 100m의 권역 내부에 위치하고 있다. 권역 안에는 제사 때 사용되는 건물들이 있는데 경산정(硬山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치생소(治牲所), 3칸의 축판방(祝版房), 3칸의 신주(神廚), 5칸의 치방(值房) 등이 그것이다. 청나라 강희제 때는 이곳 정중앙에 복희·신농·요·순·우·탕·문왕·무왕의 신위를, 동쪽에는 주공의 신위를, 서쪽에는 공자의 신위를 모시고 철마다 제사를 지냈다.
  • 문연각(文淵閣) : 1773년(건륭 38)에 편찬한 <사고전서>를 보관하기 위해 1776년(건륭 41)에 완성된 전각이다. 이곳을 지을 때 해녕 지역의 유명 장서처인 천일각의 구조를 본떴으며 이후 문연각은 청나라가 세운 장서처인 북4각(문연각·문원각(文源閣)·문진각(文津閣)·문소각(文溯閣))과 남3각(문종각(文宗閣)·문회각(文匯閣)·문란각(文瀾閣))의 규범이 되었다.
  • 남3소(南三所) : 명나라 때는 이 일대에 단경전(端敬殿)과 단본궁(端本宮), 힐방전(擷芳殿) 등이 있어서 태자의 거주지였으나 강희제 때 궁인들의 처소로 바뀌었고, 1746년(건륭 11) 여기에 새로 전각과 정원을 꾸며 황자들의 처소로 삼았다. 위치상 동쪽에 있기에 청색과 녹색의 유리기와를 얹은 것이 특징이다. 1782년(건륭 47) 9월 16일 도광제가 이곳 힐방전에서 태어났다.
  • 내각대당(內閣大堂) : 청나라 때 전각대학사들이 모여 국사를 논하던 곳이다.

자금성 서남부

  • 남훈전(南薰殿) : 명나라 때 세워진 정면 5칸의 전각으로 휘호를 올리거나 책봉식 등에 사용된 금보와 금책문을 보관했다. 1749년(건륭 14)에 중수해 그때까지 궁궐에서 소장하던 태호, 복희 등 전설상의 시조부터 역대 왕조 황제·황후·공신의 초상화 121축을 옮겨와 진전으로 기능하기도 했었다. 여기에 있었던 초상화들은 현재 타이완에 있는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내정

후3궁

건청문(乾淸門)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 건청문(乾淸門) : 외조와 내정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문으로 보화전 뒤쪽에 있으며 앞으로는 건청문 광장과 마주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1420년(영락 18)에 지어진 이래 1655년(순치 12)에 중수되었다. 동쪽에는 경운문(景運門), 서쪽에는 융종문(隆宗門)이 있다. 담장 서쪽 끝에 있는 작은 건물이 군기처였다.
  • 건청궁(乾淸宮) : 1420년(영락 18)에 처음 지어졌고 1798년(가경 3)에 마지막으로 중건되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강희제 때까지는 황제의 침궁이었으나 옹정제 때 침소를 양심전으로 옮기면서 정식 조회를 여는 편전으로 바뀌었다. 명나라가 멸망할 때 숭정제의 아내 주황후가 이곳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청나라 때는 1722년(강희 61)과 1785년(건륭 50)에 각각 강희제와 건륭제의 천수연(千叟宴)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건청궁이 유명해진 건 옹정제가 시작한 비밀건저제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인데, 이곳 옥좌 위에 걸려 있는 순치제의 어필로 된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편액 뒷쪽에 제위계승자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함에 넣어 보관했다가 황제 사후 왕공대신들의 입회하에 함을 개봉해 차기 황제가 즉위하도록 했다. 부속 전각으로 단응전(端凝殿), 무근전(懋勤殿)이 있다.
  • 교태전(交泰殿) : 건청궁 뒷쪽에 있는 정방형의 평면으로 된 3칸의 전각이다. 황후의 탄신일인 천추절을 축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건륭제 때 대청수명지보(大清受命之寶)·황제봉천지보(皇帝奉天之寶)·대청사천자보(大清嗣天子寶)·황제지보(皇帝之寶) 2과·천자지보(天子之寶)·황제존친지보(皇帝尊親之寶)·황제친친지보(皇帝親親之寶)·황제행보(皇帝行寶)·황제신보(皇帝信寶)·천자행보(天子行寶)·천자신보(天子信寶)·경천근민지보(敬天勤民之寶)·제고지보(制誥之寶)·칙명지보(敕命之寶)·수훈지보(垂訓之寶)·명덕지보(命德之寶)·흠문지새(欽文之璽)·표장경사지보(表章經史之寶)·순수천하지보(巡狩天下之寶)·토죄안민지보(討罪安民之寶)·제어육사지보(制馭六師之寶)·칙정만방지보(敕正萬邦之寶)·칙정만민지보(敕正萬民之寶)·광운지보(廣運之寶) 등 옥새 25과를 여기에 보관하면서 왕조가 25대까지 이어지기를 염원했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렇지 않았다. 이외에도 1745년(건륭 10)에 제작한 물시계와 1798년(가경 3)에 제작한 서양식 자명종 시계도 보관되어 있는데, 이 시계는 태엽을 돌리면 지금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 곤녕궁(坤寧宮) : 교태전 뒷쪽에 있는 정면 9칸, 측면 3칸의 전각. 명나라 때는 황후의 침궁으로 사용되었다. 청나라 때는 강희제의 두 아내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1653~74)와 효소인황후(孝昭仁皇后, 1653~1678)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옹정제 이후로는 곤녕궁의 공간을 둘로 나누어 동난각에서는 황제와 황후의 국혼 첫날밤을 치렀고 서난각에서는 만주족 전통 신앙에 따라 날마다 육류를 바치는 제사를 지냈다. 강희제, 동치제, 광서제가 여기서 국혼 첫날밤을 보냈으며 선통제의 국혼이 이곳에서 거행된 마지막 대례였다.

내정 서쪽

양심전(養心殿)
  • 양심전(養心殿) : 건청궁 서쪽에 있는 곳으로 공(工)자 평면에 황색 유리기와를 쓴 헐산정(歇山頂)식 건물이다. 명나라 가정제 때 건설되었으며 청나라에 이르러 옹정제부터 광서제까지 8명의 황제가 침궁으로 사용했다. 이곳에서 1661년 순치제, 1799년 건륭제, 1875년 동치제가 붕어했고, 강희제가 로마 교황이 보낸 사절을 접견했다. 또한 동치 연간에 이곳 동쪽의 체순당(體順堂)에서 동태후가, 서쪽의 연희당(燕禧堂)에서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선통제의 아버지 순친왕이 섭정왕으로서 국가대사를 살피는 등 작은 규모에 비해 큰 사건이 많았다. 그리고 청나라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융유황태후가 선통제의 퇴위 조서에 옥새를 찍은 곳이기도 하다.

동6궁

경인궁(景仁宮)
연희궁(延禧宮)
  • 경인궁(景仁宮) : 1420년(영락 18)에는 장안궁(長安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경인궁으로 개칭했다. 강희제의 생모 효강장황후(孝康章皇后, 1640~1663), 광서제의 애첩 각순황귀비(恪順皇貴妃, 1876~1900)[20] 등이 이곳에 거주했으며, 1654년(순치 11) 5월 4일 강희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부속 전각으로 전전, 후전, 동서남북의 배전이 있다.
  • 승건궁(承乾宮) : 1420년(영락 18)에는 영녕궁(永寧宮)이었다가 1632년(숭정 5) 승건궁으로 개칭했다. 숭정제의 애첩 공숙황귀비(恭淑皇貴妃, ?~1642), 순치제의 애첩 효헌단경황후(孝獻皇后, 1639~60), 함풍제의 생모 효전성황후(孝全成皇后, 1808~40) 등이 이곳에 거주했다. 부속 전각으로 전전, 후전, 동서남북의 배전이 있다.
  • 영화궁(永和宮) : 1420년(영락 18)에는 영안궁(永安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영화궁으로 개칭했다. 옹정제의 생모 효공인황후(孝恭仁皇后, 1660~1723), 도광제의 아내 효정성황후(孝静成皇后, 1812~55), 함풍제의 후궁 장정황귀비(莊靜皇貴妃, 1837~90), 광서제의 후궁 단강황귀비(端康皇貴妃, 1873~1924) 등이 이곳에 거주했으며, 1678년(강희 17) 12월 13일 옹정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부속 전각으로 동순재(同順齋, 후전), 동서남북의 배전이 있다.
  • 종수궁(鍾粹宮) : 1420년(영락 18)에는 함양궁(咸陽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종수궁으로 개칭했고, 1571년(융경 5)에는 전전을 흥룡궁(興龍宮), 후전을 성철전(聖哲殿)으로 개칭해 태자의 거처로 삼기도 했다. 숭정제의 태자 주자랑(1629~1644), 옹정제의 아내 효경헌황후(孝敬憲皇后, 1679~1731), 광서제의 아내 효정경황후(孝定景皇后, 1868~1913) 등이 이곳에 거주했다. 부속 전각으로 전전, 후전, 동서남북의 배전이 있다.
  • 경양궁(景陽宮) : 1420년(영락 18) 장양궁(長陽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경양궁으로 개칭했다. 태창제의 생모인 공비 왕씨가 출산 이후 여기에서 30년 넘게 유폐되다시피 지내며 아들을 만나지 못하다가 1611년(만력 39) 죽음이 임박하자 소식을 듣고 달려온 태창제가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가 실명한 생모를 안고 통곡했던 비극이 일어난 곳이다. 부속 전각으로 전전, 어서방(御書房, 후전), 동서남북의 배전(동배전은 정관재(靜觀齋), 서배전은 고감재(古鑒齋))이 있다.
  • 연희궁(延禧宮) : 1420년(영락 18)에는 장수궁(長壽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연기궁(延祺宮)으로, 청나라 때는 연희궁으로 개칭했다. 1832년(도광 12), 1845년(도광 25), 1855년(함풍 5)에 잇따라 화재가 발생해 그때마다 중건했으나 함풍제 때 화재 이후로는 터만 남았고 선통제 때 융유황태후의 명으로 그 자리에 수정궁(水晶宮)을 짓도록 했으나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라 비용 문제로 완공되지 못했다.

서6궁

영수궁(永壽宮)
함복궁(咸福宮)
  • 영수궁(永壽宮) : 1420년(영락 18)에는 장락궁(長樂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육덕궁(毓德宮)으로, 1616년(만력 44) 영수궁으로 개칭했다. 건륭제의 생모 효성헌황후(孝聖憲皇后, 1693~1777)가 이곳에 거주했고, 1789년(건륭 54) 건륭제의 딸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1775~1823)가 니오후루 허션의 아들과 결혼했을 때 연회를 베푼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 태극전(太極殿)(계상궁(啓祥宮)) : 1420년(영락 18)에는 미앙궁(未央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가정제의 생부 흥헌왕이 태어난 곳이라 해서 계상궁(啓祥宮)으로 고쳤다가 청나라 때 태극전으로 개칭했다. 동치제의 후궁 헌철황귀비(獻哲皇貴妃, 1856~1932)가 이곳에 거주했다. 부속 전각으로 체원전(體元殿), 체화전(體和殿)이 있다.
  • 장춘궁(長春宮) : 1420년(영락 18) 장춘궁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영녕궁(永寧宮)으로 바꾸었고 1615년(만력 43) 다시 장춘궁으로 개칭했다. 건륭제의 아내 효현순황후(孝賢純皇后, 1712~48)와 동치제의 생모 서태후(1835~1908)가 이곳에서 거주했는데, 특히 서태후는 1884년(광서 10)까지 거주했다. 부속 전각으로 승희전(承禧殿), 수수전(綏壽殿), 이수전(履綏殿), 평안실(平安室)이 있다.
  • 익곤궁(翊坤宮) : 1420년(영락 18)에는 만안궁(萬安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익곤궁으로 개칭했다. 옹정제의 후궁 돈숙황귀비(敦肅皇貴妃, ?~1725) 등이 거주했다. 부속 전각으로 원화전(元和殿), 연홍전(延洪殿)이 있다.
  • 저수궁(儲秀宮) : 1420년(영락 18)에는 수창궁(壽昌宮)이었다가 청나라 때 저수궁으로 개칭했다. 가경제의 생모 효의순황후(孝儀純皇后 1727~75), 가경제의 아내 효화예황후(孝和睿皇后, 1776~1850), 선통제의 아내 효각민황후(孝恪愍皇后, 1906~46) 등이 이곳에서 거주했으며, 1856년(함풍 6) 4월 27일 동치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부속 전각으로 체화전(體和殿), 여경헌(麗景軒)이 있다 .
  • 함복궁(咸福宮) : 1420년(영락 18)에는 수안궁(壽安宮)이었다가 1535년(가정 14) 함복궁으로 개칭했다. 도광제의 후궁 장순황귀비(莊順皇貴妃, 1822~66), 성귀비(成貴妃, 1813~88) 등이 이곳에서 거주했다. 부속 전각으로 동도당(同道堂)이 있다.

내정 동쪽

  • 재궁(齋宮) :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러 나가기 전에 머물던 전각이다. 전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동서 배전은 각각 정면 3칸이며 침궁으로 사용되는 성숙전(誠肅殿)은 정면 7칸으로 되어 있다.
  • 육경궁(毓慶宮) : 1680년(강희 19)에 처음 세워진 전각. 본래 강희제의 황태자인 윤잉(胤礽)이 생활하던 동궁이기도 하였다. 윤잉이 폐위된 이후에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황제들이 이곳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 봉선전(奉先殿) : 황실의 조상을 제사지내는 가묘 성격의 전각으로 자금성 내정 동쪽에 있으며 명나라 때 세워졌다가 1657년(순치 14) 중건되었다. 전전(前殿)은 정면 9칸, 측면 4칸, 면적 1225 ㎡이고 전전 앞의 월대는 길이 40 m, 너비 12 m, 면적 500 ㎡이며 후전(後殿)은 정면 9칸, 측면 2칸, 면적 755 ㎡이다. 국가적인 경사나 제사, 대규모 행사 때 이곳에서 조상신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자금성 바깥에 있는 태묘와 대비되어 '내태묘(內太廟)'라 부르기도 했다.

서궁 권역

자녕궁(慈寧宮)
  • 자녕궁(慈寧宮) : 1536년(가정 15)에 인수궁(仁壽宮) 자리에 새로 지었고 만력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으며 이후 1653년(순치 10), 1689년(강희 28), 1751년(건륭 16)에 수리되었다. 명나라 때는 만력제의 생모 효정태후, 만력제의 후궁 공각황귀비(恭恪皇貴妃, ?~1630)와 선의소비(宣懿昭妃, 1557~1642)가 거주했고 청나라 때는 순치제의 생모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 1613~88) 이래로 태황태후, 황태후, 태비, 태빈 등의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 대불당(大佛堂) : 자녕궁의 후전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의 전각이며 앞에는 월대가 있다. 청나라 때 황태후와 황태비들이 예불을 올리던 장소로, 내부에는 다양한 불상들과 함께 불교 의례에 사용되는 각종 기물들이 진설되어 있다.
  • 수강궁(壽康宮) : 자녕궁 서쪽에 있으며 1735년(옹정 13)에 건설을 시작해 1736년(건륭 1)에 완공되었고 이후 1820년(가경 25)과 1890(광서 16)에 중수했다. 건륭제의 생모 효성헌황후(孝聖憲皇后, 1693~1777), 건륭제의 후궁 영귀비(穎貴妃, 1731~1800), 도광제의 아내 효정성황후(孝静成皇后, 1812~55) 등이 이곳에서 거주했다.
  • 수안궁(壽安宮) : 수강궁 북쪽과 영화전 남쪽에 있는 전각으로 1420년(영락 18)에는 함희궁(咸熙宮)이었다가 1525년(가정 4) 함안궁(咸安宮)으로 바꾸었고, 1751년(건륭 16) 건륭제의 생모 효성헌황후의 육순을 기념해 수안궁으로 개칭했다. 천계제의 유모 객씨가 이곳에서 지낸 적이 있으며 효성헌황후의 육순과 칠순 생일날 건륭제가 황자와 황손들을 대동하고 하례를 올렸던 장소다. 부속 전각으로 춘희전(春禧殿), 복의재(福宜齋), 훤수당(萱壽堂)이 있다.
  • 영화전(英華殿) : 정면 5칸의 전각으로 1420년(영락 18)에는 융희전(隆禧殿)이었다가 1567년(융경 1) 영화전으로 개칭했다. 황태후와 태비, 태빈들이 예불을 올리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영수궁 권역

황극전(皇極殿)
낙수당(樂壽堂)
경기각(景祺閣)
경복궁(景福宮)
  • 황극전(皇極殿) : 1689년(강희 28)에 지으면서 처음에는 영수궁(寧壽宮)이라 했다가 1772년(건륭 37)부터 1776년(건륭 41)에 걸쳐 영수궁 일대를 새로 지을 때 전전을 황극전으로 개칭했다. 1796년(가경 1) 건륭제가 가경제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난 뒤 이곳에서 마지막 천수연을 거행했으며 1894년(광서 20)에는 서태후의 60세 생일을 하례받았다. 1904년(광서 30)에는 서태후의 70세 생일을 하례하러 온 9개국 사절을 접견하는 곳이기도 했다.
  • 영수궁(寧壽宮) : 황극전 뒷쪽에 있는 전각으로 영수궁의 후전이다. 광서제 때 서태후가 여기서 잠시 거주한 적이 있는데 그때 금룡화새채화로 장식되어 있던 원래의 모습에서 소식채화로 바꿔 변형되었다가 1979년에 중수하면서 다시 건륭제 때의 장식으로 복원했다.
  • 양성전(養性殿) : 1772년(건륭 37)에 지어진 영수궁의 침전 역할을 하는 전각이다. 태상황이 된 건륭제가 거주하기도 했다. 이 전각도 나중에 서태후가 머물면서 장식을 변형시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 낙수당(樂壽堂) : 양성전 뒤쪽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길이 36.15 m, 너비 23.20 m, 면적 839 ㎡이다. 1772년(건륭 37)에 지어져 1802년(가경 7)과 1891년(광서 17)에 중수되었고, 1894년(광서 20)부터는 서태후가 이곳의 서난각을 침실로 사용했다. 이곳에는 건륭제 때 제작한 높이 224 cm, 너비 96 cm, 무게 5톤에 이르는 옥세공품 <대우치수도옥산(大禹治水圖玉山)>이 보관되었다.
  • 이화헌(頤和軒) : 낙수당 뒤쪽에 있으며 정면 7칸, 측면 1칸의 전각으로 뒤쪽의 경기각과 천랑으로 연결되어 工자형 평면이다. 1772년(건륭 37)에 지어져 1802년(가경 7)과 1891년(광서 17)에 중수되었다.
  • 경기각(景祺閣) : 앞쪽에 있는 낙수당과 천랑으로 연결된 정면 7칸, 측면 3칸의 2층 전각이다. 1771년(건륭 36)에 건설된 뒤 1802년(가경 7)과 1891년(광서 17) 두 차례 중수되었다. 경기각의 동쪽 2층에는 옆에 있는 작은 가산과 연결되는 한백옥 다리가 있다.
  • 창음각(暢音閣) : 1772년(건륭 37)에 짓기 시작해 1776년(건륭 41)에 완성한 3층 누각으로, 명절에 황실 가족과 신하들이 궁정에서 연희와 경극 등을 관람하던 극장이며 1802년(가경 7년)과 1891년(광서 17) 수리했다. 높이는 20.71 m이고, 상층은 복대(福臺), 중층은 녹대(祿臺), 하층은 수대(壽臺)로 내부가 3개 층으로 구성된 희대(戱臺)가 있다. 서태후는 경극을 매우 좋아해서 생일날이 되면 일주일 혹은 열흘 이상씩 계속되는 경극을 이곳에서 관람했고, 그런 서태후의 취향과 편의에 맞춰 광서제 때 창음각을 대대적으로 고쳐 지었다. 궁궐 내부에 현존하는 경극용 극장 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 심연서옥(尋沿書屋) : 영수궁화원 안에 있으며 1772년(건륭 37)에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1칸의 전각이다. 현판은 건륭제의 어필로 되어 있으며 서태후가 낙수당에 거처할 때는 광서제가 매일 이곳에서 문안인사와 식사 시중을 들던 공간이었다.
  • 고화헌(古華軒) : 영수궁화원 안에 있는 전각으로 1772년(건륭 37)에 건립되었다. 건륭제의 어필로 된 현판과 대련이 걸려 있으며, 전반적인 장식은 화려하기보다는 단아한 편에 속한다.
  • 수초당(遂初堂) :고화헌 뒤쪽에 있는 전각으로 1772년(건륭 37)에 지어진 후 1802년(가경 7)과 1891년(광서 17)에 중수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건륭제의 어필로 쓰여진 한자와 만주어 현판이 걸려 있다.
  • 부망각(符望閣) : 영수궁화원에 있는 전각 중 가장 높은 건물로 외부는 2층이지만 내부는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772년(건륭 37)에 세운 이래 1802년(가경 7)과 1891년(광서 17)에 중수했다. 자금성 내에 있던 건복궁화원의 연춘각(延春閣)을 모방했다. 건륭제 때는 매년 정월 21일에 이곳에서 왕공대신들을 불러 음식을 내렸고, 가경제는 부망각에서 바라본 경치를 읊은 <영부망각(詠符望閣)>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 권근재(倦勤齋) : 부망각 뒤쪽에 있으며, 영수궁화원의 가장 북쪽에 자리한 전각이다. 1772년(건륭 37) 건복궁화원의 경승재(敬勝齋)를 모방해 지었으며 동쪽 5칸은 부망각과 마주보고 있다.
  • 경복궁(景福宮) : 조선의 경복궁과 한자까지 똑같다(…). 1689년(강희 28) 강희제가 양모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 1641~1718)의 거처로 지은 전각이다. 1772년(건륭 27년)에 새로 중건하면서 건륭제가 국정을 돌본 후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1802년(가경 7)과 1891년(광서 17) 중수했다. 내부에는 건륭제 때 궁중에서 사용한 서양의 기물들이 진설되어 있다.

중화궁 권역

중화궁(重和宮)
  • 중화궁(重和宮) : 건륭제가 왕자 시절 이곳에서 지내다가 화석보친왕으로 책봉되었고, 즉위한 뒤에 궁으로 바꾸었다. '중화'라는 명칭은 순 임금을 가리키는 경칭에서 유래했다. 1743년(건륭 8)부터 매년 새해에 대학사와 한림들에게 다연(茶宴)을 베풀던 장소로 사용되다가 함풍제 이후에는 다연이 거행되지 않았다.
  • 우화각(雨花閣) : 수십 좌의 불상이 안치된 궁중에서 가장 큰 3층 불전으로, 1749년(건륭 14) 건륭제가 몽골 출신의 국사 호토극도(胡土克圖)의 건의에 따라 티베트에 있는 탁림사(托林寺) 단성전(壇城殿)을 모방해 개건했다. 가장 꼭대기의 지붕 처마에는 금박을 입힌 4마리 용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이곳은 티베트 불교의 라마승들이 황제와 황실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며 불공을 드리던 공간이었다.
  • 수방재(漱芳齋) : 1420년(영락 18)에 세워진 뒤 건륭제 때 중수되어 황태후의 생일날 연회를 베풀고 왕공대신과 함께 경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동치제의 후궁 헌철황귀비(獻哲皇貴妃, 1856~1932)가 이곳에 거주하기도 했다.

화원

어화원(御花園)
  • 어화원(御花園) : 자금성 중심축선에 위치한 후원으로 곤녕궁 뒷쪽에 있어서 명나라 때는 궁후원(宮後園)이라 했다가 옹정제 때 어화원으로 개칭했다. 동서 135 m, 남북 89 m, 면적 1만 2015 m²이며 흠안전(欽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어경정(御景亭)·이조당(璃藻堂)·부벽정(浮碧亭)·만춘정(萬春亭)·강설헌(絳雪軒)이, 서쪽에는 연휘각(延輝閣)·위육재(位育齋)·징서정(澄瑞亭)·천추정(千秋亭)·양성재(養性齋)·사신사(四神祠)·정정(井亭)·녹대(鹿臺) 등의 정자·대·누각이 소나무·측백나무·대나무 숲과 괴석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황제와 후비들이 휴식을 취하고 경치를 감상하던 곳이었다.
  • 건복궁화원(建福宮花園) : 자금성 내 서북쪽에 있으며 건륭제가 1742년(건륭 7)부터 강남 원림의 풍취를 살려 조영한 화원이다. 1923년 11월 25일 화재가 발생해 정이헌(靜怡軒), 연춘각(延春閣), 경승재(敬勝齋), 중정전(中正殿) 등이 소실되었다가 70여년이 지난 1999년 고궁박물원에서 4백만 달러를 투입해 복원공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복원 1기 프로젝트로 연춘각의 중건이 시작, 2001년 4월 3일에 상량식이 거행되었으며 기타 다른 전각들도 복원되어 중국을 방문한 국빈 가운데서도 최고 국빈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 영수궁화원(寧壽宮花園)(건륭화원(乾隆花園)) : 건륭제가 1772년(건륭 37)부터 1776년(건륭 41)까지 영수궁을 개건하면서 조성한 동서 40 m, 남북 160 m 후원으로 '건륭화원'이라고도 불린다. 가산과 괴석, 꽃과 나무, 정자와 누대를 조화시키면서 풍부한 색채를 사용해 건륭제의 심미안을 한껏 드러내는 후원이다.
  • 자녕궁화원(慈寧宮花園) : 명나라 때부터 있었던 곳이지만 1769년(건륭 34) 대대적인 개건공사를 통해 탈바꿈했다. 동서 50 m, 남북 130 m, 면적 6800 m²로 정자와 누대 등 건물 11채가 있다. 이곳에 가꾸어진 조경수들은 예제와 종법, 풍수를 고려해 건축과 함께 배치되었다.

명소

구룡벽(九龍壁)
진비정(珍妃井)
  • 구룡벽(九龍壁) : 영수궁 권역의 황극문 바깥에 있으며 길이 29 m, 높이 3.5 m, 두께 0.45 m로 1772년(건륭 37)에 세워졌다. 용 5마리가 다섯 구역에 나뉘어 새겨졌는데, 이는 <역경>에서 천자의 지위를 가리키는 명칭인 구오지존(九五之尊)을 상징한다. 산서성 대동(大同)의 구룡벽, 북경 북해공원의 구룡벽과 함께 '중국 3대 구룡벽'으로 불린다. (사실은 북해공원 것을 모방한 것이다.)
  • 진비정(珍妃井) : 영수궁 북쪽 정순문(貞順門) 내에 위치한 우물이다. 겉모습은 일반적인 자금성 내의 우물과 다를 게 없지만 이 우물이 유명해진 건 1900년(광서 26)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서태후가 광서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도망치기 직전 평소 개혁적인 성향으로 서태후의 눈밖에 난 광서제의 애첩 진비(珍妃)를 우물 속에 던져 익사시켰기 때문이다. 1년 뒤 북경으로 돌아온 광서제는 진비의 시신을 건져 후하게 장사지냈으며, 선통제가 즉위하자 진비와 자매였던 근비(瑾妃)가 진비정 북쪽의 정순문 천당(穿堂) 동쪽에 진비의 위패를 모신 작은 영당을 마련해 회원당(懷遠堂)이라 이름짓고 삭망 때마다 향을 피우며 넋을 달랬다.

구조 및 건축양식

자금성의 잡상
자금성의 구도

자금성은 직사각형의 구조를 하고 있는데, 남북으로 961m, 동서로 753m이다. 현재 980개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8886개의 방이 있다. 내려오는 소문에는 자금성 안에 9999개나 되는 방이 있다고 하나, 조사로 인해 확인된 바는 없다. 청나라 시대까지만 해도 자금성은 황성의 일부였고, 이 황성은 또 베이징 내성의 일부였다. 황성에서 나와 남쪽으로 내려가면 베이징 내성을 지나 베이징 외성으로 나갈 수 있었다.

자금성은 남북의 축을 따라 건물들이 배열되어 있는데, 자금성의 축을 따라가면 천안문 광장과 베이징 외성의 정문까지 곧바로 향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 축은 정확히 남북은 아니고, 약 2도 정도 비틀어져 있다고 한다.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이 축은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원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자금성의 건축 양식은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도 모두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사상들을 담아 만들어졌다. 이같은 반영은 당시 황제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으며, 자금성에 주요하게 쓰인 양식들은 다음과 같다.

  • 당시 황색은 황제의 색깔이었기 때문에, 자금성에 있는 거의 모든 건물들은 황금색 기와를 이고 있다. 오직 2개의 건물만이 예외인데, 황실 도서관에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 물을 상징하는 색깔이었던 검은색으로 기와를 이었다. 또한 왕자들의 거주지인 남 3소에도 황색이 아니라 녹색의 기와가 얹혀져 있는데, 이는 녹색이 성장과 나무를 상징하는 색깔이었기 때문이다.
  • 외조와 내조의 주요 궁전들은 모두 3개씩 짝을 맞추고 있는데, 이는 도가 사상을 반영하여, 우주의 원리를 표현하기 위해 이처럼 지어진 것이다.
  • 자금성의 모든 건물들의 지붕에는 잡상들이 올라가 있는데, 이 잡상의 개수는 그 건물의 지위를 상징한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건물은 3~5개가 얹혀져 있었고, 그 건물의 지위가 올라갈수록 잡상의 개수도 늘어났다. 특히 태화전에는 10개의 잡상이 올라가 있고, 당시 중국 대륙에서 유일하게 잡상을 10개씩 얹을 수 있는 건물이었다.
  • 자금성의 배치도 전통적 궁궐의 배치에 따른 것인데, 궁궐의 맨 앞에는 조상들을 모시는 사원이 있고, 그 뒤에 업무를 보는 공식공간, 맨 뒤에 사적인 공간을 배치하는 형식을 따른 것이다.

자금성 주변

자금성은 남쪽을 제외하고, 3면이 모두 거대한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에는 증산 공원이 있는데, 이 공원에 있는 산을 쌓기 위해 흙을 파냈고, 이로 인해 새로운 호수가 생겼을 정도라고 한다. 서쪽에는 중난하이가 있는데, 현재는 중국 공산당의 주요한 시설들이 입주해 있다. 동쪽에는 백양공원이 있고, 거대한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자금성의 남쪽에는 2개의 중요한 시설들이 있었는데, 하나가 바로 자금성의 태묘고, 나머지 하나가 황실 가족들의 거주지였다. 태묘에서는 황제가 조상들과 신들에게 주기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국가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했다. 하지만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며, 이 건축물들을 모두 헐렸고 대신 공산당 기관 건물들이 이 자리를 대신했다.

현재 남아있는 남쪽 축조물에는 천안문이 있는데, 이는 자금성의 입구가 아니라 베이징 황성의 주요 입구이다. 천안문 가운데에는 현재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있으며, 그 양옆으로 액자가 걸려있는데, 각각 '영원한 중화인민공화국'과 '세계 인민들의 영원한 통합'이라고 써져 있다.

현재는 자금성 주변의 공사가 조심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자금성 주위의 유적들은 정치적, 사상적인 이유로 쉽게 헐려나가고 훼손되고, 이로 인해 자금성 주위의 경관은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2000년대부터 중국 정부는 자금성 내에 들어가 있는 군사적, 정치적 시설들을 밖으로 다시 하나 하나씩 이전하고 있으며, 2004년에는 황성과 그 일대를 보존하기 위해 자금성 주위의 건물 높이가 제한되고, 개발 제한이 대폭 강화되었다. 2005년에는 베이징 황성과 백양공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관광

  • 입장료는 일반인이 11월~3월까지 40 위안, 4월부터 10월까지는 60 위안. 외국인은 기본적으로 일반인 요금의 적용 대상이다. 가이드 비용은 최소 200 위안이지만 오디오 투어(40 위안)이 훨씬 더 싸고 믿을만하다. 휠체어는 500 위안을 맡겨두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그 외 일부 구역에서는 15 위안 이내에서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 관광 가능 시간은 11월~3월에는 오전 8시 30분~오후 4시 30분, 4월부터 10월까지는 오전 8시 30분~오후 5시.
  • 춘절, 노동절, 국경절 연휴에는 사람이 어마무지하게 많이 몰리며, 다른 공휴일에도 사람들이 몰리는건 마찬가지다. 다른 유명한 관광지들도 마찬가지지만, 천안문에서부터 만원전철을 간접 체험할 수 있을 정도. 상징성이 워낙 큰 유적이다 보니 경찰이 통제하고 있지만 그래도 조심하자.
  • 베이징 시내가 거의 그렇지만, 이곳도 경찰이 거의 100 m 간격으로 있고 중국 인민해방군도 배치되었다.
  • 보통의 배낭여행자들은 오문으로 입장했다가 신무문으로 나온다. 이 신무문 밖, 경산공원 사이가 헬 오브 헬이다. 특히 성의 폐관시간이 다가오는 4시 30분이 넘어가면 버스를 타려는 이들과 우왕좌왕하는 관광객들, 그리고 후퉁 관광을 가자고 하는 인력거꾼과 호구를 찾아 다니는 사기꾼,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경찰까지 정말 가만히 있어서 정신이 혼란해진다. 문제는 신무문 밖에서 지하철까지의 거리가 꽤 된다는 것이다.

지도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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