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핑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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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Σφίγξ, Sphinx)는 이집트의 대석상을 말한다. 스핑크스 하면 떠올릴 이집트의 스핑크스 조각은 기자의 대스핑크스라고 불리는 것으로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카프레의 얼굴로 추정되는 사람 머리와 엎드린 사자와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다. 대스핑크스는 몸의 길이가 73m에 높이 22m, 얼굴 폭이 4m, 귀의 길이 1.4m, 입의 길이 2.3m, 코의 길이 1.7m이다. 머리 부분이 실물보다 10배, 동체는 22배가 크다.
개요
기자의 대스핑크스는 카프레의 피라미드 앞을 수호하는 거대한 스핑크스. 사실상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핑크스다. 이집트에 있는 모든 스핑크스 석상들 가운데 그 크기가 제일 크고 아름다워, 때문에 대(大)스핑크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앞발부터 꼬리까지 그 길이가 무려 73m에 달하고, 높이는 20m이며 너비는 19m이다. 고대 유적들이 넘쳐나는 이집트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된 조각상이며,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인지도가 높다. 정확히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기원전 2500년경인 이집트 고왕국 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카프레의 피라미드 바로 앞에 세워졌기에 고고학자들은 아마 대스핑크스의 얼굴이 카프레의 얼굴을 보고 깎은 것이라 보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당연히 그리스식 표현인 스핑크스라고 칭하지 않았고 살아있는 (왕을) 닮은 형상이라는 뜻의 '셰세프 앙크(Shesep ankh)'라고 불렀다. '스핑크스'라고 부르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 시절 이집트와 거래하던 그리스 상인들이 위 1번 그리스 전설의 스핑크스의 이름을 붙인 것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그리스 상인들 사이의 은어였으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마케도니아계가 이집트의 왕이 되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스핑크스'라는 명칭이 통용되었다. 이후 그리스 문화를 향유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제국이 약 천 년을 지배하면서 '스핑크스'라고 정착했고, 이슬람이 지배한 지 천수백 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스핑크스라 불린다.
역사
대스핑크스는 하나의 거대한 암석을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 사막에서는 끊임없는 모래바람이 몰아치기 때문에 사암이 독특한 형태로 풍화되어 깎여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암석들 중 하나가 우연히 사람의 머리 모양과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되었고 이를 본 고대 이집트인들이 아예 기반암 전체를 깎아 거대한 스핑크스 석상을 세우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아마 카프레가 이 스핑크스 석상의 주인이라고 보고있다. 가장 큰 이유는 대스핑크스를 만들때 깎아낸 암석들을 잘라낸 벽돌들이 그대로 카프레의 장제전에 사용되었기 때문. 이는 대스핑크스와 장제전이 동시에 만들어지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므로 카프레가 대스핑크스의 주인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대스핑크스는 워낙에 압도적인 크기 탓에 이미 고대 이집트 내에서도 유명한 랜드마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대스핑크스의 중요성도 점차 줄어들었고, 혼란기인 제1중간기가 닥치자 카프레의 피라미드를 포함해 대스핑크스 역시 버려져 모래 속에 묻혀버렸다. 모래 속에 묻혀버린 대스핑크스가 다시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500년 정도나 시간이 흐른 이집트 신왕국 시대였다.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어린 투트모세 4세가 왕자 시절 모래 위에서 거적을 깔고 잠을 자던 도중, 대스핑크스가 꿈에 나타나 '만일 나를 모래 속에서 꺼내준다면 너를 파라오로 만들어주겠다'라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투트모세 4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스핑크스 주위에 쌓인 모래를 깔끔하게 치워주었고, 결국 투트모세 4세는 실제로 왕위에 올랐다. 파라오가 된 투트모세 4세는 이 이야기를 적은 '꿈의 비석'을 스핑크스의 앞발 사이에 세워주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기자가 관광지로 개발되며 기자의 대스핑크스 역시 인기많은 관광명소가 되었다. 이때 이미 대스핑크스와 피라미드는 고대 유적 취급을 받았고, 로마 황제들은 순전히 흥미나 호기심 때문에 대스핑크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스핑크스 주변에 높게 쌓인 모래를 치웠고 12m에 달하는 계단이 스핑크스의 앞발 앞까지 깔렸다. 로마 시대에 기자를 방문한 대 플리니우스는 당시 대스핑크스를 방문한 후 느낀 자신의 소회를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그의 기록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대스핑크스의 얼굴에는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고 한다. 대플리니우스 이후에도 대스핑크스는 여러 황제들과 로마인들의 주요 관심 대상이었으나 로마 제국이 점차 쇠퇴하며 관심도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대스핑크스 근처에 건물을 세운 황제는 200년 경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였다. 로마가 완전히 몰락하자 대스핑크스는 다시 모래에 묻혔다.
이집트가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믿게 된 이후에도 스핑크스는 딱히 지배층에게 테러를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스도교에서 성상 파괴주의가 성행했을 무렵은 이미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이슬람에게 빼앗긴 지 한참이 지난 뒤였고, '우상'이란 것에 훨씬 민감하게 여기는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를 지배한 이후에도 스핑크스는 무사했다. 이유는 간단한데, 그냥 스핑크스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이슬람 군주들은 스핑크스나 피라미드와 같은 이집트의 거대 조형물을 '옛 이집트 임금의 커다란 무덤' 정도로 생각해서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 일부 개방적인 군주들은 선조들이 세운 것이니 뭔가 배울 게 있는 유적이라고 여겼고, 따라서 대부분 군주들은 (현대의 문화재 보호와는 거리가 있지만) 나름대로 지켜주려고 하였다. 실제로 중, 근세의 극단주의자들이 이집트의 유적을 훼손하려다 발각되어 처벌을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대스핑크스는 이집트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확고히 자리잡았고, 1800년대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 나폴레옹이 직접 스핑크스를 보고 간 일도 있다.
181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현대식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카비그리아 주도의 이탈리아 고고학팀이 스핑크스를 덮고 있던 모래를 파내어 대스핑크스의 가슴 부분까지 드러내도록 만들었고, 이후 조금씩 모래를 치우면서 대스핑크스는 마침내 지표면 위로 제 몸뚱아리를 드러내었다. 1857년에는 카이로 박물관의 설립자로도 유명한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펼쳐 대스핑크스의 모래 대부분을 깔끔하게 치웠다. 1886년에 프랑스 고고학자 가스통 마스페로가 스핑크스의 앞발 사이에서 발견한 '꿈의 비석'을 분석, 13번째 줄에 카프레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발견하고 스핑크스가 아마도 제4왕조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라 결론내렸다.
지금이야 대스핑크스의 머리와 목 부분이 어느 정도 안정되게 서있지만, 19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위의 그림같이 풍화 침식으로 인해 거의 떨어질락말락한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위태로웠다고 한다. 목 부분에는 커다란 금이 가있었고 머리 주위의 장식 부분에는 실금이 쩍쩍 갈라져 얼마 안있어 목이 떨어질 것처럼 보였기 때문. 1926년에 머리 장식 부분에서 큼직한 돌덩이가 떨어져나가는 상태까지 이르자 결국 1931년에 이집트 정부 차원에서 콘크리트로 머리와 목 부분을 크게 보강했다. 현재의 모습은 고대 이집트 시절의 외형을 어느정도 복구한 것.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몸통과 다리 부분에도 일부 석재로 보강을 해주었다.
모습
사자의 몸과 인간의 얼굴을 가진 형상의 스핑크스로, 거대한 석회암 덩어리로 만들어진 압도적 크기의 조각품이다. 앞발부터 꼬리까지 총 길이는 약 73m, 기단부터 머리까지의 높이는 약 20m, 너비는 약 19m 정도이다. 현재 이집트에 남아있는 수많은 조각상들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조각상으로, 제작 연대도 웬만한 유물 저리가라할 정도로 대단히 오래된 조각이다. 다리 부분을 포함해 몸통의 아랫부분은 완전히 단단히 기반암이지만 몸통 윗부분과 머리 부분은 비해 훨씬 연한 재질의 암석들이다. 참고로 스핑크스 겉면을 분석해본 결과 붉은색이나 푸른색 염료들이 검출되었는데, 이는 곧 스핑크스가 고대에는 알록달록하게 색칠이 되어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처럼 황토빛 석회암이 아니라 만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색색이 칠해져 있어 매우 화려해 보였을 것이다.
현재 스핑크스에는 코가 없다. 학자들이 스핑크스의 얼굴 부분을 상세히 조사해본 결과, 코가 있었던 부분에 끌과 망치로 두드려 깨진 자국이 확연히 남아있었다고 한다.즉 자연적으로 풍화되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코를 부서 떨어뜨려버렸다는 이야기. 이집트학 학자 로버트 레너가 조사한 결과 이미 기원후 3세기에서 10세기 경 사이 즈음에 코 부분이 떨어져나갔다.
스핑크스의 코가 떨어져 나간 이유를 두고 온갖 잡설들이 판을 쳤는데, 가장 대표적인 소문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가 대포를 쏘아서 코를 맞추어버렸다는 것. 물론 근거는 전혀 없으며 사실도 아니다. 또다른 설에는 이집트를 정복한 무슬림 신자인 맘루크들이 일부러 깨어버렸다는 말이 있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였기에 스핑크스도 우상으로 여겨 얼굴 부분을 고의적으로 훼손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코 부분이 떼어져 나간 게 워낙에 눈에 잘 띄어서 그렇지만 사실 턱수염도 떨어져 나간 상태다. 다만 이 턱수염은 아직 남아있어서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턱수염 부분의 제작 연대와 나이를 조사한 결과 아마도 원래 스핑크스를 건설할 때는 없었고, 아마 후대의 파라오들이 따로 만들어서 붙였을 것이라고 한다. 1900년대에 모래 속에 파묻혀있던 것을 영국 고고학팀이 발굴하여 영국으로 가져가버렸다. 이집트 당국 측에서는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으나 영국에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있다.
기타
- 스핑크스는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인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을 최고신으로 숭배하고 태양이 뜨는 동쪽을 생명의 방향이라 여겼기 때문. 일부 초고대문명설 학자들이 이 방향을 두고 '기원전 10,500년 전 춘분에 사자자리가 뜨던 방향을 가리켰다!'라고 주장했지만 묻혔다. 일단 고대 이집트인들이 특별히 사자자리를 더 중요시 여겼다는 근거도 없었을 뿐더러 굳이 그렇게 세웠다면 분명히 언급이 있을 텐데 그 어떤 문헌에서도 관련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다른 한 설은 스핑크스가 피라미드보다 2000년 앞선 기원전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가설이다. 스핑크스 근처에 있는 벽들을 보면 물이 흘러서 생긴 것 같은 침식 작용 흔적이 있는데 이 정도의 흔적을 남길 만큼의 홍수나 큰 비가 이집트에 마지막으로 일어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만 년 전이기 때문. 그레이엄 핸콕 등이 초고대문명설의 일환으로 미는 주장이다. 침식 흔적이 특이하단 주장 자체는 지질학계 일각에서도 나오긴 했다. 핸콕이 그걸 좋다고 갖다 쓴 것.
- 그러나 벽의 표면에서만 침식흔적이 있기 때문에 벽이 세워진 이후에 침식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벽이 그렇게 오래 전에 세워졌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다. 우선 이집트 지역에서 그렇게 오래된 문명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모래나 바람, 모세관 현상으로 빨아올려진 지하수 등이 만든 것이라는 해석들도 있다. 특히 핸콕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맞는 지질학자를 떠받들며 반박하는 학자들을 '이집트학 학자' 등으로 교묘하게 깎아내렸지만, 반박하는 학자들 가운데에는 저명한 지질학자들도 많다.
- 워낙에 유명한 석상이기 때문에 '혹시 저 아래에 무언가 비밀의 방 같은게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신비주의자인 스펜서 루이스나 에드가 카이스. 1930년대에 스핑크스 아래에 '기록의 방'이라고 해서 고대 아틀란티스의 비밀을 품고 있는 방이 묻혀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근거는 없었고, 레이다 등으로 스핑크스 밑을 샅샅이 탐색해본 결과 그런 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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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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