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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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린(Kremlin, кремль : 끄례믈, 크레믈리)은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궁이다. 동쪽으로는 성 바실리 대성당과 붉은광장이 있으며, 서쪽으로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이 있다. 모스크바 말고도 노브고로드, 니즈니노브고로드, 카잔, 아스트라한에도 크렘린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모스크바에 있는 크렘린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5개의 궁전, 4개의 성당, 벽과 탑들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에는 모스크바의 차르 궁전이었으나, 현재 러시아의 대통령 관저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2017년에 274만 명의 관광객들이 다녀갔다.
'크렘린'은 요새 안의 도시라는 뜻을 가졌으며, 백악관이나 청와대와 같이, 러시아의 연방정부를 칭할 때 쓰는 고유명사화되었다. 전에는 소비에트 연방 중앙정부 지도자와 최고위 간부들을 통칭하는 단어이기도 하였다.
목차
개요[편집]
크렘린은 중세 러시아의 성새(城塞)·성벽(城壁)으로, 오랫동안 러시아 황제의 거성(居城)이었으나 18세기 초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동궁(冬宮)'이 세워지면서 황거(皇居)로서의 기능을 잃었으며, 1918년 이후 소련정부의 본거가 되었다.
러시아어(語)로는 크레믈리(kreml')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모스크바의 크렘린이며, 러시아어 대문자로 시작할 때는 모스크바의 것을 가리킨다. 전설에 의하면, 모스크바의 창건자 유리 돌고루키공(公)이 1156년 무렵 작은 언덕 위에 숲과 목책으로 요새를 구축하였다 한다.
14세기 타타르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떡갈나무로 두껍게 성벽을 건설하였고, 1367년 이것을 하얀 돌로 대체하였다. 이것이 벽돌의 총안(銃眼)이 있는 성벽이 되었으며, 15∼16세기에 다시 축조되어 현재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오랫동안 러시아 황제의 거성(居城)이었으나 18세기 초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동궁(冬宮)'이 세워지면서 황거(皇居)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으로 모스크바는 다시 수도가 되어, 1918년 이후 크렘린은 소련정부의 본거가 되었다. 따라서 '크렘린'이란 말은 소비에트연방시대에 소련정부와 당(黨) 또는 당국자(當局者)의 대명사로서도 사용되었다.
현재의 크렘린 궁전은 모스크바강(江)을 따라 1변이 약 700m의 삼각형을 이루고, 높이 9∼20m, 두께 4∼6m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장식적인 성벽의 첨탑, 피라미드형 탑, 북동의 주문(主門) 레데멜문의 시계탑 등은 17세기에 증축되었다.
성내에는 3대 성당인 성모승천교회(건축 기간 1475~1479), 성수태고지교회(1484~1489), 대천사교회(대천사미가엘교회:1505~1508)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과 수도원·궁전·관청·탑 등이 있다. 중앙에는 높이 100m의 대종탑(이반대제종탑)이 서 있는데, 이 종탑이 서 있는 자리는 모스크바의 정중앙에 해당한다고 하며 적이 침입하면 종탑에 있는 21개의 종이 일제히 울렸다고 한다. 대부분의 건물은 15~16세기에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설계하여 지은 것이다.
역사[편집]
기원[편집]
크렘린의 터는 기원전 2세기부터 원주민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소련 고고학자들의 발굴 조사에 의하면, 11세기 초에 루스인들이 보로비스키 언덕의 남서부 지역을 점령하고 목조 마을을 지었다. 후에 모스크바 강과 네그린나야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요새화된 도시가 지어졌다.
14세기까지, 이 곳은 모스크바의 고르드로 알려져 있었다. '크렘린'이라는 단어는 1331년에 처음 기록되었고, 유리 돌고루키 공작이 1156년에 크게 확장하였으나, 1237년에 몽골군의 침략으로 불타버리고, 1339년에 참나무로 다시 재건하였다.
모스크바 대공국 시기[편집]
드미트리 돈스코이 대공자가 크렘린의 참나무 벽을 1366년에 거대한 석회암 벽들로 교체했으며, 현재 크렘린 요새의 기초를 쌓았다. 이 보강으로 인해 모스크바 대공국은 몽골의 재침략을 견뎌냈으며, 드미트리의 아들 바실리는 크렘린에 교회와 회랑을 만들었다. 1406년에 우스펜스키 대성당이 완성되었으며, 추도프 사원이 대공가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후 이반 3세는 당시 르네상스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건축가들을 초빙하여 크렘린의 재건축을 꾀했다. 크렘린의 벽과 탑들을 새로 쌓았으며, 왕가를 위한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이 때 크렘린에 있는 세 개의 교회를 지었다. 1505년에 이반 대공의 종탑이 지어졌고,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크렘린의 벽은 1485년과 1495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다. 크렘린 궁 안에 거의 대부분의 교회와 벽이 다 지어지자, 대공은 크렘린 궁과 인접한 구역에 건물 건설을 금지하였고, 너비가 30m나 되는 해자로 도시와 궁을 분리시켰다.
러시아 차르국 시기[편집]
이반 4세의 재위 시기에 성 바실리 대성당이 이 해자 곁에 지어졌고, 그의 재위 시기에 또한 크렘린 궁에 추가적인 부속 궁전 건물들이 추가되었고, 성당 종탑이 새롭게 건설되었다. 이 종탑은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였던 성 세르기우스 성당에서 축성하였으며, 성 세르기우스에게 바쳐졌다. 이 종탑은 후에 러시아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에 의해 '러시아 최고의 종탑'이라고 찬사를 받았다. 동란 시대 동안 크렘린 궁은 1610년 9월 21일에서 1612년 10월 26일까지 약 2년가량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군대의 점령 하에 있었다. 이후 러시아의 유명한 군사령관이자 왕자였던 드미트리 포자스키가 후에 로마노프 왕조를 개창하는 미하일 1세를 위하여 민병대를 이끌고 크렘린을 탈환하며, 크렘린은 다시 러시아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미하일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의 재위기간을 거치며, 크렘린 궁은 추가적인 개축 작업을 거치며 점점 더 화려해졌다. 하지만 1682년에 대규모 반란이 발생하였을 때 당시 황제였던 표트르 1세는 크렘린 궁전을 겨우겨우 빠져나오며 크렘린 궁에 대한 안좋은 추억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정 시기[편집]
러시아 제국 시기 동안, 크렘린 궁은 대관식과 같은 중대한 행사를 하는데에 쓰이기는 했으나, 그 외의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1773년동안 거의 버려져 있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 대제가 건축가들을 시켜 그녀의 새 궁전을 크렘린 궁에 지으라고 명령하며 이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건축가들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전을 엄청나게 큰 규모로 지었고, 이 규모로 인하여 크렘린 궁전의 성벽을 포함, 원래 지어져 있던 상당수의 궁전 건물들이 부지 확보를 위하여 철거될 수 밖에 없었다. 이 궁전 공사는 예산 문제로 인하여 잠시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이후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의회 건물들이 지어지며 전형적인 관청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 제정 시기 동안, 크렘린 궁의 성벽은 전통을 따라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와의 전쟁을 겪을 동안, 크렘린 궁은 1812년 9월부터 10월까지 약 1달 정도 프랑스 군의 지배 하에 있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퇴각할 적에, 그는 크렘린 궁에 있는 모든 건물들을 불사를 것을 명했고, 이로 인하여 크렘린 성벽을 포함하여 무기고, 궁정과 같은 건물들 거의 대부분이 거의 반파되었다. 폭발과 함께 발생한 화재는 거의 3일 가까이 지속되었으나, 이후 비가 내리면서 점차 꺼져갔다. 1816년에서 1819년까지 복원공사가 진행되었고, 알렉산드르 1세의 재위기간 하에 크렘린 성내에 있었던 구 건물들 절대다수가 신고딕 양식의 건물들로 새롭게 세워졌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1세가 원래 세워져있던 건물들 거의 대부분을 '미사용' 혹은 '불필요한' 건축물로 판단하여, 현재 크렘린 궁전에서 이 이전의 건물들을 쉽게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후 크렘린 궁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겨울 궁전과 쌍벽을 이루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궁전들 중 하나로 급격히 그 위세가 성장하였고, 특히 바로크 양식의 겨울 궁전에 염증을 느낀 니콜라이 1세가 크렘린 궁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그 내관이 훨씬 더 화려해졌다.
1851년 이후에는 크렘린 궁전에 특별한 공사가 더해지지 않았다. 다만 알렉산드르 2세의 기념비와 1905년에 암살당한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죽은 자리를 표시하는 석판이 깔린 것을 제외하면 크렘린 궁전은 거의 아무 변화가 없었다. 참고로 이 기념비석들은 볼셰비키가 크렘린궁을 점령한 이후 모두 파괴되었다.
소비에트-현대[편집]
소비에트 정는 정부 기관들을 1918년 3월 12일에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대거 이전하였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크렘린 궁전을 그의 거주지로 선택하였고, 스탈린 또한 자신의 사무실을 크렘린 궁에 두었다. 그는 크렘린 궁에서 '구 시대의 잔재들'을 모두 쓸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로 인해 크렘린 궁전의 탑들 위에 꽃혀있던 이두 독수리 상들이 모두 소련의 붉은 별들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현재 레닌의 영묘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크렘린 궁의 석벽은 혁명영웅들의 묘지로 그 용도가 전환되었다.
16세기에 지어진 성당들, 대관식 기념당, 수도원들은 군사 학교를 지을 부지를 만들기 위해 모두 철거되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궁전들이 함께 철거되었다. 크렘린 궁은 실제로 정부 청사의 기능을 했기에, 1955년까지 관광객의 출입이 극히 제한되었다. 1961년에는 크렘린 궁에 박물관이 세워졌고, 크렘린 궁전은 소련 내에 있던 문화유산들 가운데 처음으로 세계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건물이기도 하였다. 이후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 연방이 건국되자, 크렘린 궁은 대통령 궁전으로 그 용도가 승계되었고, 현재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이 곳에 사무실을 두고 업무를 보고 있다.
2021년 전승기념일 기준 성벽 보수공사 중임이 확인되었다.
배치[편집]
크렘린 궁은 전체적으로 비뚤어진 사각형 모양을 한 거대한 요새다. 성벽은 전체 길이가 2,235m, 높이가 5 ~ 19m, 두께가 3.5 ~ 6m이며, 20개의 성문과 탑이 있으며 가장 높은 탑은 트로이츠카야 탑이다. 1번 건물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무기고 박물관이며, 2번 건물은 루스 차르국 차르와 러시아 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열리던 성모승천 성당이다. 3번 건물은 차르의 개인 성당인 수태고지 성당이며, 4번 건물은 미카엘 대천사에게 바쳐진 대천사 성당이다. 5번 건물은 니콘 대주교의 사저였던 열두 사도 성당, 6번 건물은 성모 마리아가 입었던 성의를 기념하는 성의 성당이다. 7번 건물이 크렘린에서 제일 높은 이반 대제의 종탑이며, 8번이 차르 대포, 9번이 차르 종이다. 11번 건물은 현대식으로 지어진 국립 크렘린 궁전이며, 12번 건물이 대통령 관저인 테렘 궁전이다. 13번 건물이 크렘린의 중심이자 러시아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크렘린 대궁전이며, 14번 건물은 대통령 경호처가 들어선 무기고이다. 15번은 러시아 행정부가 입주한 상원궁전, 16번이 크렘린의 초소탑인 쿠타프야 탑이다.
17번 건물은 크렘린의 주출입문이자 가장 높은 탑인 트로이츠카야 탑이다. 20번 건물은 보로비츠카야 탑이다. 21번 건물은 보도프즈브드나야 탑이고, 27번 건물이 모스크바 강을 방비하는 베클레미세프 탑, 28번 건물이 콘스탄티노-옐레네스카야 탑이다. 29번 건물은 나바트나야 탑이고, 31번 건물이 유명한 스파스카야 탑, 32번 건물은 방어용으로 지어진 세나트스카야 탑, 33번 건물은 니콜스카야 탑이다. 34번 건물은 북부 아세날나야 탑이며, 35번 건물이 중앙 아세날나야 탑이다. 37번은 해자를 메워 만든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이며, 39번은 국립 역사 박물관, 40번은 성 바실리 성당이다. 41번 건물은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전람회장인 마네쥐 전시관이다. 43번 건물은 러시아 최고 백화점으로 꼽히는 굼 백화점이다. 44번은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의 아시아-아프리카 연구소다.
건축물[편집]
모스크바의 크렘린은 남쪽의 모스크바 강, 북동쪽의 붉은 광장, 북서쪽의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에 둘러싸여 있으며 전체적으로 거의 삼각형 형태를 띠고 있다. 길이는 125m, 높이는 47m, 전체 면적은 약 26헥타르(25,000 평방미터) 정도 되며, 붉은 성벽에 둘러싸인 건물 안에는 각 시대별로 크고 작은 아홉 개의 궁전과 성당, 탑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700개 이상의 방을 갖추고 있다.
궁전[편집]
- 그라노비타야궁(Грановитая Палата) : 그라노비타야 궁전은 역대 차르들의 연회실이자 알현실이었다.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간소한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황금빛 성화와 모자이크, 이콘 등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어 굉장히 호화롭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계단은 '붉은 계단'이라고 하여 역대 차르-황제들이 즉위식 때에 사용하던 계단으로, 니콜라이 2세가 1896년에 마지막으로 사용했다. 스탈린 시대에 전제정의 유물이라 하여 철거하고 대신 인부들의 작업장을 만들었으나, 소련 붕괴 이후 다시 계단이 복구되었다. 현재 모스크바에 보존된 가장 오래된 공공건물이기도 하며, 현재는 러시아 대통령의 공식 연회실로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 대통령 취임식이 여기서 열리며, 1994년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문하기도 했다.
- 테렘궁(Теремной дворец) : 테렘 궁전은 17세기 차르의 공식 궁전으로, 로마노프 왕조의 첫 차르였던 미하일 1세가 지었다. 총 5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3층은 황후와 그녀의 아이들이 사용했으며 4층은 차르가 사용했다. 맨 위층인 5층에서는 러시아 제국의회인 두마가 열렸다. 적색, 황색, 적황색 타일로 치장된 외관이 독특하며, 현재는 러시아 대통령의 관저라서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
- 크렘린 대궁전(Большой Кремлевский дворец Bolshoi Kremlyovski Dvorets) : 크렘린 대궁전은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길이는 124m, 높이는 47m, 평방 25,000제곱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자랑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3층이지만, 실은 2층에 창문이 두 열이 있는 구조로 실제로는 2층 건물이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황제의 알현실이었으며, 소련 시절에는 공산당 최고회의가 열리는 곳이었으며, 현재는 러시아 대통령의 관저이기도 하다. 크렘린 대궁전에는 러시아 최고 훈장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게오르기옙스키 홀, 블라디미르스키 홀, 알렉산드롭스키 홀, 안드레옙스키 홀, 예카테린스키 홀 등이 있으며, 이 중 게오르기옙스키 홀은 아직까지도 공식 외교 행사에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공식 집무실이나, 실제로 푸틴 대통령이 이 곳에 머무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 국립 크렘린궁(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ремлёвский дворец) : 국립 크렘린 궁전은 크렘린 내에서도 눈에 띄는 현대식 건물로, 니키타 흐루쇼프의 지시로 1961년에 완공되었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땅 속에 묻혀 있는 건물의 깊이가 17m나 되어 거의 건물의 절반 정도가 지면 아래에 있다. 궁전의 메인 홀은 6,0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며, 당대에는 세계 최고 규모였다. 이 건물이 세워질 때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무기고를 철거하면서 지어졌기에, 옛 건물이 즐비한 크렘린 내부에 현대식 건물을 세우는 것이 비조화를 이룬다는 비판이 많았으나 흐루쇼프가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지어졌다. 쉽게말해 만수대의사당, 인민대회당과 같은 역할을 하기위해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 크렘린 상원궁전(Сенатский дворец) : 크렘린 상원궁전은 본디 러시아 제국의 최고 입법기관인 원로원을 위하여 만들어진 궁전으로, 예카테리나 대제의 명으로 1776년부터 1787년 사이에 지어졌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이 곳을 관저로 삼았으며 레닌 사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 곳에 개인 서재를 두었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 정부청사가 들어섰고 현재 러시아 대통령의 집무실로 쓰이고 있다. 이때문에 현재까지도 관광객의 입장을 철저히 제한하고 있다.
- 국립 크렘린 궁전(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ремлёвский дворец) : 국립 크렘린 궁전은 크렘린 내에서도 눈에 띄는 현대식 건물로, 니키타 흐루쇼프의 지시로 1961년에 완공되었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땅 속에 묻혀 있는 건물의 깊이가 17m나 되어 거의 건물의 절반 정도가 지면 아래에 있다. 궁전의 메인 홀은 6,0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며, 당대에는 세계 최고 규모였다. 이 건물이 세워질 때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무기고를 철거하면서 지어졌기에, 옛 건물이 즐비한 크렘린 내부에 현대식 건물을 세우는 것이 비조화를 이룬다는 비판이 많았으나 흐루쇼프가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지어졌다. 쉽게말해 만수대의사당, 인민대회당과 같은 역할을 하기위해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 환락 궁전(Потешный дворец) : 환락 궁전은 크렘린 서쪽 벽에 자리잡은 작은 궁전이다. 1652년에 차르의 양아버지였던 일리야 밀로슬라브스키가 지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국유화되어 왕실 일가가 연극을 보는 등 극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소련 시대에는 스탈린의 사저이기도 하였으며, 그의 2번째 부인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가 자살한 곳이기도 하다.
- 무기고(Арсенал Московского Кремля) : 무기고는 1736년에 지어진 건물로, 크렘린 요새의 북부 모서리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붉은 광장과 가깝기도 하여 광장에서도 무기고 건물의 벽면을 볼 수 있다. 한때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불타 사라지기도 했으나 다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고, 지금은 러시아 대통령 경호처가 입주하고 있어 일반인이 절대 접근할 수 없다.
- 무기고 박물관(Оружейная палата) : 무기고 박물관은 무기고와는 다른 별도의 건물로, 1508년에 처음 지어져 황실 무기고이자 보물 수장고로 사용되었으며 수많은 러시아 장인들이 고용되어 황실에 납품할 세공품들을 만들었다. 이후 성화나 이콘 등도 제작하며 명실상부한 러시아 최대의 보물고로 자리하였다. 소련이 들어선 이후에도 이 곳은 전역에서 가져온 보물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1960년에는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주 소장품은 러시아 제국 황제관과 홀을 포함하여 러시아 황실의 유물들이며, 그 외에도 서유럽과 터키의 보물들도 소장하고 있다.
성당[편집]
- 수태고지 성당(Благовещенский собор) : 수태고지 성당은 성모의 수태고지를 기념하여 지어진 러시아 정교 성당으로, 크렘린 요새의 남서쪽에 자리하여 곧바로 크렘린 대궁전으로 통할 수 있다. 본디 수태고지 대성당은 차르들의 개인 성당이었으며, 성당의 사제들은 대대로 황가의 고해성사를 받아주기도 하였다. 1489년에 처음으로 지어져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였고 소련 시기에는 박물관으로 활용되다가 현재는 복원 작업을 거쳐 다시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백색 석회 파사드와 금빛 양파형 돔이 인상적인 건물로, 내부에는 중동에서 발견한 50여 명의 성인들의 유해를 봉헌하고 있다.
- 성모승천 성당(Успенский Собор) : 성모승천 성당은 성모승천을 기념하여 지어진 성당으로, 러시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들 중 하나로 꼽힌다. 1475년에 처음으로 건설되었으며, 1547년부터 1896년까지 루스 차르국의 차르들과 러시아 제국 황제들의 대관식이 이 곳에서 행해졌다. 소련 시기에는 성당 용도를 박탈당한 이후 박물관으로만 사용되었다. 이 성당에 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수의 정교 주교들과 대주교들이 묻혔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 대천사 성당(Архангельский собор) : 대천사 성당은 성경의 미카엘에게 바쳐진 성당으로, 크렘린 대궁전과 이반 대제 종탑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505년에 처음으로 지어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하기 전까지 역대 류리크 왕조 차르들의 무덤으로 쓰였으며, 소련 시기를 거쳐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태고지 성당과 성모승천 성당에 비하면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되는 등 당대 모스크바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으며, 내부에는 16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소장되어 있다.
- 이반 대제의 종탑(Колокольня Ивана Великого) : 반 대제의 종탑은 독자적인 종탑이 없었던 수태고지 성당, 성모승천 성당, 대천사 성당을 위하여 만들어진 종탑으로, 1508년에 지어졌으며 높이가 무려 81m에 달하여 크렘린 내부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총 22개의 종들이 있으며, 이들 중 가장 거대한 우스펜스키 종은 무게가 65.5톤에 달하고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등 최대 명절에만 간간히 울린다. 나폴레옹이 대포로 종탑을 무너뜨리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 성의 성당(Церковь Ризоположения) : 성의 성당은 성모가 입었던 성의(聖衣)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막았음을 찬미하기 위하여 지어진 성당이다. 1484년에 모스크바 주교의 개인 예배당으로 지어졌으나, 17세기 중반에 왕실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열두 사도 성당(церковь Двенадцати Апостолов) : 열두 사도 성당은 크렘린 내부의 소규모 성당으로, 1653년에 니콘 대주교가 개인 사저로 처음 지었으며 3년후 사도 필리포스에게 바쳐졌다. 니콘 대주교의 취향에 맞추어 비잔틴 양식으로 5개의 돔을 위에 얹었으며,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비에트 시기에 일시적으로 파괴되었다가 현재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탑[편집]
크렘린의 탑은 19개이지만, 성벽에서 분리되어 지어진 쿠타프야 탑까지 합쳐서 20개라고도 한다. 탑들의 꼭대기에는 본래 러시아 제국의 상징인 쌍두독수리가 달려있던 것을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 오늘날과 같은 색유리로 만든 붉은 별 모양으로 대체했다. 소련이 무너진 뒤에도 이건 그대로 두고 있다.
- 스파스카야 탑(Спасская башня) : 스파스카야 탑은 크렘린에서 가장 유명한 탑으로, 1491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높이는 71m이다. 탑에 붙어있는 시계는 1491년과 1585년 사이 즈음에 등장하였으며, 모스크바의 공식 시간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으며 지름만 6m가 넘는다. 스파스카야 탑 아래의 문은 보통 대규모 외교 행사 때에만 주로 사용되었으며, 한때 크렘린 궁전의 정문이기도 해서 이 문을 통과하는 모든 이는 경의의 표시로 모자를 벗고 말에서 내려와야 했다. 한편 소련 시기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러시아 제국 시절의 구유산을 청산한다는 의미로 꼭대기의 쌍두독수리를 없애고 그 자리에 거대한 붉은 별을 달았으며, 이 별 장식은 360도 회전할 수 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가 들어선 이후, 한시적으로 자동차가 탑 아래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 허가되었으나 문화유산 보호를 위하여 지금은 도보통행만이 가능하다. 다만 대통령 공식 행사, 신년행사 등 중요한 행사에는 가끔씩 자동차 통행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 크렘린 시계(Кремлёвские часы) : 지름만 6m가 넘고 시침 2.97m, 분침 3.27m인 이 거대한 시계는 스파스카야 탑과 뗄 수 없는 상징으로, 표트르 대제 시절인 1706년 설치되었고 네덜란드에서 수입해왔다고 한다. 3백 년 넘는 세월을 거치며 당연히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시각을 알리는 타종 소리는 15분마다 울리는데, 매시간 15분에는 1번, 30분에는 2번, 45분에는 3번, 정각에는 4번 타종한다. 0시, 6시, 12시, 18시에는 러시아 국가의 일부 소절 멜로디가, 3시, 9시, 15시, 21시에는 미하일 글린카의 영광(Славься)의 멜로디가 울린 후에 시보의 타종 소리가 울린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는 12시와 6시에 <오브라첸스키 연대 행진곡>, 3시와 9시에 보르트니안스키의 <How Glorious is Our Lord in Zion>이 타종되었으나,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은 이후 1938년까지는 정오에 당시 소련 국가이기도 했던 인터내셔널가를 타종한 후에 시보를 알렸다. (1936년 음원) 1944년 새로 채택된 소련 국가를 타종하게 하려는 시도는 종의 기술적 문제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1938년 이후 58년 동안 멜로디 없이 시보만 타종해오다가, 1996년 보리스 옐친의 재취임을 맞아 정오와 자정에 애국가(러시아)의 멜로디가 흘러나온 후 시보를 타종하기 시작했다.
- 보로비츠카야 탑(Боровицкая башня) : 보로비츠카야 탑은 크렘린 서벽에 위치한 탑으로, 1490년에 스위스 건축가가 설계하여 지어졌으며 1812년에는 후퇴하는 프랑스 군대의 포격을 맞고 훼손되기도 했다. 이후 1815년에 복구하였으며, 1935년에는 소비에트의 상징인 붉은 별을 꼭대기에 달았다. 스파스카야 탑으로 자동차의 통행이 금지되자, 지금은 이 보로비츠카야 탑을 통하여 자동차들이 주로 드나들고 있다.
- 보도프즈보드나야 탑(Водовзводная башня) : 보도프즈보드나야 탑은 크렘린 남서부 성벽에 위치한 탑으로, 1488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 1633년에 물공급기가 설치되면서 '물을 끌어올리다'라는 뜻의 '보도프즈보드나야'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1812년에 프랑스군의 포격을 맞아 사라졌다가 1817년에 복구되었다. 높이는 약 61.85m다.
- 니콜스카야 탑(Водовзводная башня) : 니콜스카야 탑은 크렘린 동쪽 벽에 위치한 탑으로, 이 탑을 통하여 붉은 광장에서 크렘린으로 들어올 수 있다. 1491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1806년에 신고딕 양식으로 개건하였으나 1812년에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1816년에 복구된 것이 또 1917년 혁명 당시 대포로 인해 훼손되었으며, 1935년에는 꼭대기에 붉은 별이 달렸다. 입구에 붙어있던 성 니콜라스의 모자이크 성화는 소련 시기에 회칠되었다가 2010년에 복원되었다. 높이는 약 70.4m다.
- 쿠타프야 탑(Кутафья башня) : 쿠타프야 탑은 크렘린 요새의 초소탑으로, 1516년에 네글리나야 강변의 다리를 방어하기 위하여 처음 세워졌다. 원래는 해자로 둘러싸야 도개교로만 건너갈 수 있었으나, 현재는 해자가 메워졌고 그 자리에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이 조성되었다. 크렘린에서 가장 낮은 탑으로, 높이는 13.5m이다. 관광객들이 크렘린에 입장할 때 가장 먼저 지나치는 건물이기도 하며, 쿠타프야 탑을 지나면 트로이츠카야 탑으로 들어갈 수 있다.
- 트로이츠카야 탑(Троицкая башня) : 트로이츠카야 탑은 크렘린 북서쪽 벽에 위치한 탑이자 성문으로,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1495년에 처음으로 건립되었으며, 1658년에 '삼위일체라는 뜻의 '트로이츠카야'라는 이름을 받았다. 16세기와 19세기 사이에는 시계도 달려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졌고,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황궁 감옥으로도 쓰였다. 트로이츠카야 탑은 소련 시절 러시아 공산당 간부들의 주 출입로로 사용되면서 그나마 성화 위에 회칠을 한 니콜스카야 탑보다 더 과격한 조치를 취하여 아예 모자이크 성화가 갈려 나갔다. 현재는 쿠타프야 탑을 지나면 바로 볼 수 있으며, 크렘린 궁전으로 통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주요 출입구다. 크렘린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높이는 80m 정도다.
- 베클레미세프스카야 탑(Беклемишевская башня) : 베클레미세프스카야 탑은 모스크바 강변의 동쪽 모서리에 자리한 탑이다. 1487년에 모스크바 강의 선박들을 감시할 목적으로 지어졌으며, 높이는 약 46.2m 정도이다. 1917년 10월 혁명 시기에 지붕이 일부 파손되었으나 이후 복구되었다.
- 콘스탄티노-옐레나스카야 탑(Константино-Еленинская башня) : 콘스탄티노-옐레나스카야 탑은 크렘린 동쪽 성벽의 탑으로, 1490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이후 성당으로 사용되었다가 소련 시절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본디 총안과 해자, 그리고 도개교 등이 있었으나, 19세기에 총안은 벽돌로 덮였고 해자는 메워져 사라졌다.
- 나바트나야 탑(Набатная башня) : 나바트나야 탑은 크렘린 남동쪽 성벽에 있는 탑으로, 1495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높이는 약 38m이다. 전통적으로 종을 걸어놓아 크렘린이나 황실에 슬픈 일이 있을 때에 울렸으며, '나바트나야'라는 이름 자체도 '알리다'라는 뜻의 러시아어 '나바트'에서 따왔다. 1771년에는 이 종소리를 기점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기에, 반란이 진압된 이후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 종의 클래퍼[9]를 떼어버리도록 명하기도 했다. 19세기에는 종 자체가 옮겨져 무기고로 이관되었기에 현재는 종을 찾아볼 수 없다.
- 세나트스카야 탑(Сенатская башня) : 세나트스카야 탑은 붉은 광장과 인접한 동쪽 성벽에 자리한 탑으로, 1491년에 순수한 방어용으로 지어졌으며 1787년까지 이름이 없다가 인근에 상원 궁전이 지어지면서 현재의 '세나트스카야'라는 이름을 얻었다. 높이는 약 34.4m이며, 이 탑을 통하여 귀빈들이 크렘린 궁전에서 붉은 광장으로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
- 아세날나야 탑(Арсенальная Угловая башня) : 모서리 무기고 탑은 1492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인근에 무기고가 지어지면서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10] 탑 안에는 비밀 우물이 존재한다고 하며, 1707년에는 대북방전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좁았던 총안을 대폭 확장하여 대포도 수용할 수 있도록 개축하였다. 1812년에는 후퇴하는 프랑스 군대의 포탄을 맞고 파손되었다가 1815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높이는 약 60m다.
기타[편집]
- 차르 대포
- 차르 종
- 레닌 영묘
- 크렘린 벽 묘지
- 붉은 광장
관람[편집]
입장료는 성인 기준으로 700루블이다. 입장 티켓 자동발매기가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러시아어가 쉽지 않다면 티켓 자동발매기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크렘린 궁전 입장시에는 검문이 매우 심하다. 공항 출국수속에 준하는 검문을 받으면서 몸 수색까지 한다. 주류 반입은 절대 금지된다. 만약 주류를 소지하고 있다면 입구 왼쪽 계단 밑의 물품보관함에 물품을 맡기자. 물품보관료는 무료이다.
12사도 교회의 아치형 문을 지나면 순백색과 황금색이 빛나는 사원광장이 나온다. 차르 종과 차르 대포도 여기에 있다. 이 안에서 이반 대제의 종루에 올라가는 것은 따로 250루블, 무기고 박물관은 1000루블이다. 목요일 휴무.
무기고 박물관은 이름과 달리 무기류뿐만 아니라 러시아 제국 시대의 황실 금은세공 장식품과 왕관, 옥좌, 마차, 각종 화려한 보물을 전시하고 있는 곳으로 여기는 역덕은 물론이고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의 보물창고이기 때문에 둘러볼 만 하다.
비공개되는 지역이 많다. 크렘린은 비록 관람객을 받고는 있지만 청와대나 백악관이 그렇듯 대부분 대통령 집무실이나 공공시설로 사용되는 곳으로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거나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위병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쫓아낸다.
매주 토요일 정오에 성당광장에선 근위대 퍼레이드를 행한다.
모스크바 이외 도시의 크렘린[편집]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카잔, 벨리키 노브고로드, 니즈니 노브고로드 , 아스트라한같이 중세 시절부터 좀 역사가 있다 싶은 도시는 대부분 크렘린이라는 이름의 성이 있으며, 이 크렘린 자체가 키예프 루스시절부터 건설되어 온 요새이니만큼 러시아와 함께 루스의 후계국에 속하는 우크라이나에도 크렘린이 존재한다. 다만 또다른 루스의 후계국인 벨라루스에는 크렘린이 있었다는 흔적만 있고 온전한 크렘린은 남아있지 않다. 이들은 비록 모스크바 크렘린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상당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는 등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런 지방의 크렘린을 부를 때는 도시 이름+크렘린으로 따로 부른다. 다만 표기시엔 모스크바의 크렘린은 대문자 Кремль, 러시아 여러 도시에 있는 성채/요새는 소문자 кремль로 표기한다. 현 러시아에서 사용되는 우표(5루블, 50루블 등)에 그려진 끄레믈은 모스크바에 있는 그 끄레믈이 아니라 각 지방의 요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모스크바 크렘린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kreml.ru/zh-CN/museums-moscow-kremlin/
- 〈모스크바 크렘린〉, 《위키백과》
- 〈크렘린〉, 《두산백과》
-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과 붉은 광장〉, 《유네스코와 유산》
- 〈크렘린〉, 《나무위키》
- Yeooooniii, 〈러시아 모스크바 관광명소 3 - 크렘린 궁〉, 《티스토리》, 2020-09-27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