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닝따이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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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닝따이지구(영어: Thangningtai District)는 미얀마 남부에 위치해 있는 지구이다. [1][2]
개요
떠닝따이지구의 면적은 43,328㎢이며 인구는 1,356,000명(200년 기준)이며 수도는 더왜이고 주요 도시로는 몌이와 꼬따웅이 있다. 서쪽은 안다만해, 동쪽은 태국, 북쪽은 몬주와 접한다.
미얀마의 행정 구역은 크게 7개의 삐내(버마어: ပြည်နယ် 삐내)와 7개의 따잉데따찌(버마어: တိုင်းဒေသကြီး 따잉 데따 찌)로 나뉜다. 도의 이름은 에야워디도와 떠닝따이도를 제외하고는 도의 소재지의 이름이 도의 이름이 되었다. 또한 도와 주는 민족 간의 경계가 되어 도는 버마족이 다수를 이루는 반면, 주는 소수 민족이 다수를 이룬다. 도와 주의 하위 행정 구역으로는 군(버마어: ခရိုင် 커야잉)이 있다.[3]
역사
버마족 중심의 정치체제는 서기 849년 무렵 중국 윈난성을 통해 남하하기 시작한 이들이 건국한 '초기 바간 왕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하지만 바간 왕조 이전에도 이라와디강 북부에는 버마족 이전에 중국 국경을 통해 건너온 퓨(Pyu) 왕국과 남쪽에는 몽족의 도시국가들이 존재해왔다. 특히 퓨족의 도시왕국이 대개 이라와디강 평원의 주인공으로 기원 전후부터 7세기까지 존재감을 드러냈다. 고고학적으로 뚜렷하게 확인되는 이 고대왕국들은 평야에 높은 성을 쌓고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된다.
이후 미얀마는 크게 3갈래의 방향으로 나뉘어 발전과 통합을 반복하게 된다. 우선 이라와디강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의 버마족 왕국(바간 왕조→퉁구 왕조→꽁바웅 왕조), 동북부 산악지대의 샨족 왕국(아바→잉와 왕조), 그리고 남쪽 해안가의 몽족 왕국(따통→한따와디 왕조)이 그 세 가지 미얀마의 원천이 된다. 이들은 상호 교역하고 동시에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며 현재의 미얀마로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거에는 주로 버마족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지만 연방체제가 자리를 잡은 이후엔 이들 3갈래(평야, 해안가, [산악지대) 지리적 특성과 왕조가 뒤섞인 정체성을 강조하게 된다.
떠닝따이지구는 역사적으로 오늘날의 떠닝따이도, 몬주, 꺼인주의 남부에 해당하는 말레이 반도 상부 전체를 포함하고 있었다. 반도는 1057년까지는 따톤 왕국의 일부였고 이후에는 어노여타왕의 버간 왕조의 일부였다. 1287년에 버간이 멸망한 후에 이 지역은 시암족 왕국인 수코타이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이후 아유타야 왕조로 이어졌다. 지역의 북쪽 경계는 오늘날의 몰러먀잉 주변의 땅륀강 근처였다.
지역은 1564년에 따웅우 왕조의 버인나웅왕이 시암을 정복하면서 다시 버마족의 땅이 된다. 아유타야는 1587년에 재독립한 후에 1593년에 떠닝따이의 남쪽을, 1599년에 반도 상부 전체를 되찾았다. 1614년에 어나우패룬 왕은 북쪽의 더왜 해안을 되찾았으나 나머지를 점령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꼰바웅 왕조의 얼라웅퍼야왕은 1759년에 이 지역 전체를 회복하였다. 버마족은 이후 몇 십년간 떠닝따이를 수 차례의 시암 침공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시암족은 1792년에 떠닝따이를 되찾으려 시도하였으나 격퇴당했다. 1808년~1809년에 마지막으로 버마족은 떠닝따이에 기반을 두고 시암족을 침공하여 끄라 지협을 타고 내려가 푸껫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영국인은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1824~1826) 이후에 이 지역을 얻었다. 전쟁 직후에 영국과 시암족은 1826년 6월 20일과 1868년에 국경 조약에 서명했다. 몰러먀잉은 영국령 버마의 첫 수도가 되었다. 영국은 1852년의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 이후 저지 미얀마 전체를 점령했고 수도를 얀군으로 옮겼다. 1852년 이후, 떠닝따이도는 오늘날의 몬주, 꺼인주, 버고도의 따웅우군을 포함해 미얀마 남동부를 구성하였다. 몰러먀잉은 떠닝따이의 수도가 되었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떠닝따이의 북동쪽에 새롭게 꺼인주가 만들어졌다. 1974년에 떠닝따이의 남은 북부가 분리되어 몬 주가 만들어졌다. 몰러먀잉은 현재 몬주에 속하며, 떠닝따이도의 수도는 더왜로 이전되었다.[4]
주요도시
더왜
더왜(버마어: ထားဝယ် 더왜) 혹은 타보이(Tavoy)는 미얀마 남동부의 도시이자 떠닝따이도의 수도이다. 양곤에서 남쪽으로 614.3km 떨어진 더왜강 북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139,900명(2004년 추정치)이다. 더왜는 더왜강 어귀에 있는 항구로, 안다만해에서 30km 떨어져 있다. 결과적으로 도시는 몬순 때 홍수가 발생하기 쉽다.
더왜강 하구의 주변 지역은 몇 세기 동안 몬족, 꺼인족, 타이족 선원들이 살고 있었다. 현재의 도시는 1751년에 아유타야 왕조의 작은 항구로서 세워졌다. 이후 시암과 버마간에 지배권이 오가다가 1826년의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이후 영국에 병합되었다. 지리상 태국과도 거의 인접해 있다.
더왜의 기후는 쾨펜의 기후 구분상 열대 몬순 기후(Am)에 속한다.
더왜 롱지는 지역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이 지역은 고무, 건어물, 티크재를 생산한다. 또한 캐슈와 빈랑이 생산되어 중국, 인도, 타이로 수출된다. 더왜는 또한 파인애플, 망고, 망고스틴, 두리안과 같은 열대과일로 잘 알려져있다.[5]
몌이
몌이(버마어: မြိတ် 몌이)는 미얀마 떠닝따이도의 도시로 미얀마 남단의 안다만해 연안에 위치한다. 내륙 지역은 타이로의 주요 밀입국 지역이다.
18세기에 몌이는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에 속한 항구였다. 몌이는 교역의 중심지로서 중요해졌고 특히 유럽인들은 몌이에 상륙해 타닌타리의 상류를 거슬러 산을 가로질러 아유타야에 도착했다.
프랑스 장교 Chevalier de Beauregard는 1687년 7월에 영국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후에 몌이의 통치가 되었다. De Beauregard는 시암 왕 나가이에 의해 영국인 사무엘 와이트를 대신해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프랑스인들은 1688년의 시암 혁명으로 추방당했다.
영국인들은 1826년의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이후 이 지역을 점령했다.
주민들은 어업, 고무와 코코넛의 생산, 발효된 새우 반죽 제조, 식용 새 둥지의 수집, 진주 양식에 종사한다. 앞바다에 있는 80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몌이 제도는 큰 잠재력을 가진 관광지이다.
이 지역의 주민은 다양한 민족(버마족, 중국인, 꺼인족, 인도인, 몬족, 살론족)으로 이루어져 있다.[6]
안다만해
안다만해(-海, 영어: Andaman Sea) 또는 버마해(버마어: မြန်မာပင်လယ်, 영어: Burma Sea)는 벵골만 남동쪽에 자리잡은 바다이다. 미얀마의 남쪽,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서쪽에 있다. 남북으로 1200km, 동서로 650km 정도 되며, 넓이는 797,700㎢이다. 평균 깊이는 870 m이며, 가장 깊은 곳은 3,777m이다. 남쪽은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의 믈라카 해협으로 태평양과 연결된다.
안다만해의 해저를 따라 버마 판과 순다 판의 경계가 발달해 있다. 이 두 판은 유라시아 판에 속해 있었으나, 인도 판과의 충돌로 인한 변환단층의 결과로 만들어졌다.[7]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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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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