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궤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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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궤지구(영어: Mugwe District)는 미얀마 중부에 위치해 있는 지구이다. [1][2]
개요[편집]
머궤지구의 면적은 44,819㎢이며 인구는 4,464,000명이며 주도는 머궤이다. 북쪽으로 저가잉지구, 동쪽으로 만달레이지구, 남쪽으로 버고지구, 서쪽으로 여카잉주, 친주와 접한다.
약 2000년 전의 쀼의 고대 도시가 머궤지구에 위치했다. 전체 인구의 95% 이상이 버마족이고 소수의 친족, 여카잉족, 꺼인족, 샨족이 살고 있다. 인구의 약 98%가 불교도이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머궤지구에는 3859개의 학교가 있지만 70개 만이 고등학교이다. 구 초등학생의 10%만이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구의 12개의 대학 중 대부분은 머궤와 뻐쿠꾸에 위치한다.
미얀마의 행정 구역은 크게 7개의 삐내(버마어: ပြည်နယ် 삐내)와 7개의 따잉데따찌(버마어: တိုင်းဒေသကြီး 따잉 데따 찌)로 나뉜다. 도의 이름은 에야워디도와 떠닝따이도를 제외하고는 도의 소재지의 이름이 도의 이름이 되었다. 또한 도와 주는 민족 간의 경계가 되어 도는 버마족이 다수를 이루는 반면, 주는 소수 민족이 다수를 이룬다. 도와 주의 하위 행정 구역으로는 군(버마어: ခရိုင် 커야잉)이 있다.[3]
역사[편집]
버마족 중심의 정치체제는 서기 849년 무렵 중국 윈난성을 통해 남하하기 시작한 이들이 건국한 '초기 바간 왕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하지만 바간 왕조 이전에도 이라와디강 북부에는 버마족 이전에 중국 국경을 통해 건너온 퓨(Pyu) 왕국과 남쪽에는 몽족의 도시국가들이 존재해왔다. 특히 퓨족의 도시왕국이 대개 이라와디강 평원의 주인공으로 기원 전후부터 7세기까지 존재감을 드러냈다. 고고학적으로 뚜렷하게 확인되는 이 고대왕국들은 평야에 높은 성을 쌓고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된다.
이후 미얀마는 크게 3갈래의 방향으로 나뉘어 발전과 통합을 반복하게 된다. 우선 이라와디강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의 버마족 왕국(바간 왕조→퉁구 왕조→꽁바웅 왕조), 동북부 산악지대의 샨족 왕국(아바→잉와 왕조), 그리고 남쪽 해안가의 몽족 왕국(따통→한따와디 왕조)이 그 세 가지 미얀마의 원천이 된다. 이들은 상호 교역하고 동시에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며 현재의 미얀마로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거에는 주로 버마족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지만 연방체제가 자리를 잡은 이후엔 이들 3갈래(평야, 해안가, 산악지대) 지리적 특성과 왕조가 뒤섞인 정체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강조되는 중심 흐름은 이라와디 평야의 버마족이 주도한 된 통일 바간 왕국(1044~1287)과 퉁구 왕조(1531~1752), 그리고 꽁바웅 왕국(1752~1885) 이다. 바간 왕조는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로 문자를 도입하고 불교문화를 발전시켜 미얀마의 정체성의 초석을 놓은 미얀마 역사의 가장 빛나는 시절에 해당된다. 이후 몽골족의 침략에 바간이 멸망한 다음에 상당기간 샨족의 잉와, 버마족의 퉁구, 몽족의 한따와디 등 3왕조가 병립하였다. 이후 미얀마를 넘어 동남아 전체에 뚜렷한 영향력을 내보인 버마계 왕국이 퉁구 왕조와 꽁바웅 왕조이다. 16세기 퉁구 왕조는 동남아시아에서 최대의 제국을 이루며 이웃 태국을 사실상 완전히 정복하고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진출하였다. 18세기 꽁바웅 왕조 역시도 1757년 태국 중부의 아유타야와 서남부 아라칸 왕국을 정복하며 현재에 그려진 미얀마의 영토를 사실상 확정하였다.
그러나 천년을 이어온 버마 왕국은 19세기 들어 영국과의 3차례에 걸친 전쟁(버마전쟁, 1823, 1852, 1885)에 차츰차츰 영토를 잠식당하며 최종적으로 꽁바웅 왕조의 붕괴와 영국의 식민지배로 이어진다. 이후 1937년까지 영국령 인도제국의 지방행정구역의 하나로 편입되면서 민족적 자존감에 커다란 생채기를 내었다.
영국은 다수인 버마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인도와 중국인을 대거 끌어들였고, 나아가 소수민족인 까렌족과 카친족 몽족 등을 중심으로 군대와 치안조직을 운영하게 된다. 이같은 식민지배의 분열 정치의 결과로 내부 갈등이 높아지고 이는 독립이후 연방의 분열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적 자각을 독려하던 아웅 산(Aung San, 1915~1947) 등 젊은 독립운동가들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버마의 독자적인 군대 조직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외부 지원세력을 찾기 시작하였다. 당초 중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광저우로 간 이들 일행은 당시 중일전쟁 중인 일본군과 접촉하게 되면서 일본의 지원을 받기로 방향을 바꾸었고, 인도로의 진출을 꿈꾸는 일본의 야심과 버마군 창설을 원했던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요구가 맞아 떨어졌다.
1941년 일본의 도움으로 첫 버마군대 BIA(Burma Independence Army)를 조직해 1942년 일본의 버마 진격에 참여하였다. 영국을 몰아낸 일본은 약속과 달리 이후 3년간 버마를 식민지배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싹텄고, 이에 아웅 산과 버마군(BIA)은 다시금 영국과 연합해 일본과 전투(버마전투)에 나서고 1945년 일본군을 버마에서 몰아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복귀한 영국은 식민지배를 다시금 복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군대까지 보유하고 두 차례의 국제 전쟁까지 경험한 아웅 산을 비롯한 젊은 독립세력은 이에 쉽게 양보하지 않았다. 아웅 산을 중심으로 한 정당인 반파시스트인민해방연대(AFPFL)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끝내 영국 정부로부터 독립을 이끌어 냈다. 1947년 4월 제원의회 선거에서 아웅 산이 이끄는 AFPFL이 압승하여 그의 초대 총리 취임이 유력시 되었지만 7월 19일 정치노선이 다른 세력에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1948년 1월 4일 버마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이뤄냈다. 초대 총리는 우누(U Nu, 1907~1995)가 되었다. 독립초기 영국식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했지만 여느 독립국처럼 초기의 경제실적과 정치불안은 쉽게 개선되지 못하였다. 신생독립국 버마의 불안요소는 제도권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행보를 가속화 하던 공산주의 세력과 버마족 주도의 연방질서에 화학적 융합이 어려웠던 소수민족, 그리고 지배정당인 AFPFL 내부의 정책을 둘러싼 극단적인 내분이 이어졌다.
1958년 민족갈등은 정점으로 치닫으며 샨족과 까렌족의 연방탈퇴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집권정당인 AFPFL의 분열로까지 이어졌다. 이때 3년간 정권을 맡은 세력은 조용하게 힘을 키워 온 네윈(Ne Win, 1911~2002, 재임기간 1962~1988) 장군이 이끄는 군부 세력이었다.
네윈은 이를 기반으로 1962년 쿠데타를 통해 우누 내각과 AFPFL을 몰아냈다. 네윈이 이끄는 군부의 쿠데타 이후, 2012년까지 약 6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세운 군부에 의한 사실상의 일당독재가 이어졌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불완전한 연방제로 인한 샨, 까친, 까렌 등 소수민족들이 각자 독립을 추구하고 공산당 세력의 위세가 줄어들지 않자 군부는 선거제도를 아예 폐지하고 사실상의 전시내각을 꾸려나간다. 내전과 갈등을 명분으로 군부세력의 집권도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이후 미얀마의 현대 정치사는 '연방통일'과 '반(反)제국주의'를 외친 군부세력과 '민주주의' 회복을 내세운 재야 세력의 경쟁으로 요약된다.
1988년에는 이른바 '88 민주항쟁'으로 버마 시민항쟁이 다시 한 번 부활하였다. 미얀마의 88항쟁은 끝없이 추락한 경제위기에 따른 민중항쟁의 속성이 강하다. 당시 모친 병간호를 위해 미얀마에 돌아온 아웅 산 수 치(Aung San Suu Kyi, 1943~)는 이 비극적 상황에서 아버지의 화현(化現)이자 새로운 영웅으로 부상하였다. 가택연금에 처해졌으나, 88년 9월 창당된 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의 대표로 추대되었고, 이후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국제사회는 비폭력 민주화 운동으로 1991년 그녀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하였다.
1988년 8월을 뜨겁게 달군 미얀마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안타깝지만 소 마웅(Saw Maung, 1928~1997)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해산당했다. 시민들은 3천 명에 이르는 사망자와 수백 명이 정치범으로 투옥되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동남아 최초의 대학이었던 양곤대학교도 폐교되었고, 수감되지 않은 88항쟁의 주역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군부정권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탄 슈웨(Than Shwe 재임기간 1992~2011) 장군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은 2015년까지 무력을 활용해 굳건하게 권력을 유지한다.
2007년 9월 말에는 승려들이 주도한 일명 '샤프론 혁명(Saffron Revolution)'이 발생하였다. 2007년 이 시민항쟁의 직접적 요인은 군부의 갑작스럽게 연료가격 인상으로 시민들의 생계가 악화된 것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2006년 급작스럽게 양곤에서 네피도로 수도를 이전시키면서, 신수도 건설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세수확보 목적이 숨어 있었다. 2007년의 시위는 중부지역의 승려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곧 양곤으로까지 확대되었고 승려들의 곁으로 청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9월 24일 불법화된 NLD의 깃발이 나타나자 26일 군은 다시 유혈진압을 감행하였다.
이듬 해인 2008년 5월 버마를 덮친 사이클론 나르기스는 약 13만 8천 명의 사망자(실종자 포함)를 낳은 지독한 참변이었다. 나르기스로 인한 참상이 최대도시 양곤에도 미쳤으나 군부는 정해진 이행계획에 따른 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강행하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참사이후 미얀마는 국제사회의 인도적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20년 만에 부활한 2010년 선거에서 군부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연방단결발전당(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 USDP)이 승리하였다. 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은 이 총선에 불참을 결정하였고, 국제사회와 미얀마 내 민주세력도 2010년 총선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 총선의 결과로 2011년 등장한 테인 세인(Thein Sein, 1945~ 재위 2011~2016) 정부는 유사민간정권으로 우려와는 달리 일련의 정치개혁에 착수하였다. 아웅산 수 치의 가택연금 해제 및 정치적 대타협, 노동법과 정당법의 일부 개정 등이 2011년에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2012년에도 변화는 이어졌다. 1월 까렌민족연합(KNU)과 휴전합의, 88항쟁을 이끌었던 500여명의 정치범 석방, 4월 보궐선거에서 아웅산 수 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에 큰 승리를 안겨주었다.
아웅산 수 치 여사는 2015년에 이어 코로나19 팬데믹 와중에 치러진 2020년 선거에서도 유권자의 3분의 2에 가까운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승리하였다. 선거의 결과가 이행되었다면 2021년부터 미얀마는 2기 민간정부가 이끌게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2021년 2월의 첫 날 민 아웅 흘라잉(Min Aung Hlaing, 1956~) 군사령관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로 아웅산 수 치와 그의 세력은 사실상 정치일선에서 축출되었다. 1988년 민주화 시위대 학살에 이어 2021년에도 군부가 시민들의 민주화시위대를 1천 명 넘게 학살하면서 미얀마의 군부독재 문제는 현재까지 진행중이다.[4]
산업[편집]
머궤지구의 주요 생산품은 석유이다. 이곳에서 미얀마의 석유와 천연가스의 대부분이 생산된다. 머궤지구는 석유 뿐만 아니라 식용 기름을 많이 생산하기 때문에 '미얀마의 기름 단지'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다른 산업으로는 시멘트, 면직, 담배, 철, 청동이 있다.
농업 또한 중요하다. 주요 작물은 참깨, 땅콩이 있다. 다른 작물로는 쌀, 기장, 옥수수, 해바라기, 콩과 담배, 토디, 양파, 감자가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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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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