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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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Pyramid, Pyramis)는 이집트에 위치한 정사각뿔의 모양을 가진 고대 석공들의 건축물이다.
피라미드는 북쪽으로 이집트 카이로 북부에서 남쪽으로 수단까지, 나일강을 따라 약 1500킬러미터가 넘는 지역에 흩어져 있다. 대략 3000년에 걸쳐 300기 이상 지어졌다. 현재까지 발굴된 피라미드는 138개이고, 이들은 대부분 카이로 서쪽 아부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나일강 서안 사막에 흩어져 있다.
가장 먼저 알려진 이집트 피라미드는 이집트 북부의 멤피스 사카라지방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최초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630년부터 2611년까지 이집트 제3왕조 때 지어진 파라오 조세르의 피라미드로 알려져 있다. 이 피라마드와 주변의 건축물들은 설계자 임호텝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마름돌로 쌓아올린 건축물로 인정받는다.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인부들은 거의 수천명에서 2만, 혹은 10만명까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장 유명한 이집트 피라미드는 기자 피라미드로서 이집트 카이로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제 4왕국때 지어진 기자 피라미드들 중 몇몇은 역사상 가장 큰 건축물로 평가된다. 기자 피라미드중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가장 큰 피라미드다. 이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실존하는 건축물이다.
상세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전 세계의 피라미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 특히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고대로부터 매우 유명해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기도 하는데, 연대 자체는 이미 사라진 7대 불가사의의 6개 건축물보다 2천 년가량 더 오래됐다. 현대를 기준으로 대략 4000년에서 4700년 전의 유물이다. 현대인인 우리가 보기에 콜로세움이 2천 년 전의 고대유적이 듯, 고대 로마인들이 보기에도 이집트 피라미드는 2천 년 전의 고대 유적이었다. 쉽게 말해서 고대 로마 시대의 인물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7세 입장에서는 피라미드를 짓던 시기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부르즈 할리파를 건설한 시기가 더 가깝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에서 되살아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파라오가 살 사후세계의 왕궁을 짓는다는 개념에서 만들었다. 즉, 기본적으로는 무덤으로 설계된 것이다. 지금은 거의 피라미드만 남았지만 건설 당시에는 근처에 신전과 제사를 수천 년 동안 보존된 이유는 건축물에 치명적인 강수와 식물이 적은 환경 덕분이다. 그래서 미국의 후버 댐에 이어서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가장 오래 보존될 건축물로 손꼽힌다. 게다가 구조물 크기나 각 부재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서 풍화를 상당히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다. 벽돌로 지은 초기 피라미드는 거대한 돌로 지어진 피라미드보다 보존 상태가 안 좋다.
사실 맨 처음 지어질 때에는 저렇게 우둘투둘하지 않았으며 매끈하게 다듬은 흰색 석회석을 외장으로 사용하여 번쩍였다는데, 세월이 지나며 약한 외장은 떨어져 나가고, 후대 사람들이 돌을 떼어내서 다른 곳에 쓰는 바람에 저렇게 거친 표면이 되었다. 심지어 피라미드가 지어진 고왕국 당시에도 후대 왕들이 선대 왕들의 피라미드에서 석재를 약탈해 자신의 피라미드를 짓는 일이 있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옛 석조물에서 새 석조물의 자재를 마련하는 일이 빈번했다. 가령, 기념물을 많이 건설했기로 유명한 람세스 2세의 경우 명백히 피라미드에서 석회석을 채취해 사용했다. 심지어 신왕국 말기 즈음 되면 민간인들조차도 (재력이 되면 석회석을, 그렇지 못한 이들은 벽돌을 가져가며) 피라미드를 채석장처럼 사용했다. 또한 카이로를 세우는 와중에도 바로 옆에 있는 기자 3대 피라미드에서 그때까지 남았던 외장재 대부분을 벗겨내어 카이로 공공건물의 자재로 전용하였다.
원래 고왕국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피라미드'가 아니라 마르(Mar)라고 불렀다. 하지만 기원전 그리스의 관광객들이 본국에 돌아가 피라미드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먹는 삼각형 모양의 과자 피라미스에 비교했기 때문에 '피라미드'란 명칭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현재 이집트에서 이집트어는 그 후신인 콥트어가 거의 쓰이지 않으므로 마르라는 용어도 잘 쓰이지 않는다. 현대 한국어에서 '산'을 뜻하는 '뫼'라는 어휘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현대 이집트 아랍어로 피라미드는 el-harram(الهرم)이라고 부른다. 어간 هرم은 '늙은'이란 뜻이므로 어간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래된 것' 정도 의미이다.
사실 피라미드의 위상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집트 석조 건축의 수준과 의의는 피라미드 외의 것들도 대단히 놀라운 수준이다. 신전 유적 등을 보면 이집트인이 석조 건축의 기본을 스스로 개발했음을 볼 수 있다. 원래 피라미드 주위에는 장례나 제사를 위한 신전과 부대시설,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한 긴 벽 등을 세웠다. 여기에서 발전하여 돌기둥을 벽에 연결시킨 구조가 나오고 차근차근 더 발전해 벽에서 독립되어 세워진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구현하였다. 이집트 건축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크레타 섬의 문명이나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같은 것도, 이집트의 대담한 시도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건축양식의 발달
피라미드는 갑자기 나타난 건축 양식이 아니라 이전의 마스타바라는 벽돌식 단층 무덤에서 발전하였다. 마스타바는 무덤으로 이곳에 왕을 매장했다. 마스타바는 아랍어로 직사각형 벤치라는 의미이다. 파라오 조세르(Djoser) 시대에 마스타바를 더 높고 웅장한 형태로 변형하여 다층 마스타바 혹은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임호테프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후 파라오 스네프루(Sneferu, Snefru)는 현재 우리가 아는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을 건설하려고 시도했나 당대의 피라미드 건축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붕괴하고 만다. 스네프루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피라미드를 지었는데 피라미드 각이 너무 예각이었던 탓에 다시 붕괴 위험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공사 중 각도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굴절 피라미드라고 한다.
그러나 스네프루는 굴절 피라미드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더욱 상징적이고 미적으로 완성된 피라미드를 짓기 위한 노력했으며, 이 사업은 성공적으로 끝나 현재 우리가 보는 이집트 피라미드 이미지와 같은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다음의 파라오 쿠푸(Khufu)는 이미 완성된 선대 파라오의 피라미드에서 그 규모를 극대화하여 대규모 피라미드를 완성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쿠푸 왕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해 노역하라고 명령했다. 10만 명은 아라비에 산맥의 채석장들에서 네일로스강까지 돌을 견인해 가게 하고, 10만 명은 돌들이 배에 실려 네일로스강 건너로 전해지면 다시 리비에 산맥까지 끌고 가게 명령했다. 그들은 각각 3개원동안 노역했고, 돌을 운반하는 길을 닦느라 10년 동안 고생했다. 피라미드 자체를 만드는 데 20년이 걸렸다. 헤로도토스는 쿠푸 왕이 사악한 자여서 돈이 궁해지자 자기 딸에게 창녀 방에 앉아 있게 하고 공사에 쓰일 돌을 받고 몸을 팔게 했으며, 공주는 자신을 위한 기념물을 남기려는 생각에서 기꺼이 그 일을 수행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1989년 발굴 조사로 피라미드 근처에서 피라미드 마을이 발견된 후 사람들 인식이 바뀌었다. 마을에는 노동자가 살았던 숙소, 공방, 저장고, 물품 관리소, 관리들이 살았던 저택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곳 묘지의 벽화를 보면 사람들이 빵, 맥주, 고기, 채소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물과 상형문자는 마을 사람들이 노예처럼 착취당한 것이 아니라 만족하며 일했음을 보여 준다. 실제 동원된 사람들 숫자도 2만 명 내외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거대한 피라미드는 이전까지 고대 이집트인들의 끊임없는 노력, 건축 기술의 개량과 발전이 바탕이 된 것이며 단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이후 거대한 피라미드가 정점을 이루고, 평민들까지 피라미드를 세울 수 있게 되면서 사람 크기 정도의 작은 피라미드들도 만들어졌다.
몰락
이러한 피라미드는 한동안 무덤으로 쓰인 모양이지만, 훗날 고왕국이 쇠락하면서(이집트 제1중간기) '귀족의 자식이 노예가 되고 노예의 자식이 귀족이 되는 세상'이라는 당대의 기록을 볼 때 엄청난 사회혼란이 있었던 듯하다. 당시 지난 5천 년 중 최악의 가뭄이 닥쳐 어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아이들을 구워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역병과 정치적 혼란은 덤. 이집트는 근 2백 년간 혼란에 휩싸였다.
이 때문에 피라미드같이 복잡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할 수가 없었고 심지어 기존의 피라미드를 훼손하기까지 했다. 결국 중왕국 시대에 이르면 단단한 석재 대신 진흙 벽돌로 속을 채우고 겉을 포장용 석회암으로 바른 피라미드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나마도 안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내부 자재가 부실한 탓에 모두 침식되어버려 오늘날 남은 중왕국시대 피라미드들은 그냥 흙무더기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상태가 나쁘다. 그나마도 중왕국 후기에 이르면 힉소스인의 침입도 그렇고 피라미드를 만들 재력이 안 되어서 그냥 바위산에 굴을 파고 매장했다.
12왕조시대 파라오 아메넴헤트 3세(Amenemhat III)의 벽돌 피라미드. 기자의 대 피라미드와 비교하면 이게 더 옛날 피라미드로 보일 만큼 상태가 나쁘다. 아마넴헤트 3세의 생존년도를 토대로 계산해보면 저 벽돌 피라미드는 기자의 대 피라미드들보다 적어도 800~900년 뒤에 건축된 구조물이다.
이집트가 다시 국력을 회복한 신왕국 시대에 와서는 지난 세월의 환란 속에 피라미드 건축법을 이미 잊어버린 데다가 정치적, 종교적 상황도 변화하였고, 수도를 고왕국 시대의 북부 이집트 멤피스에서 남부 이집트 룩소르로 옮기면서 최고신도 태양신 라에서 창조신 아문으로 바뀌게 되는 등, 피라미드를 건축할 이유도 사라졌기 때문에 왕의 시신은 주로 왕가의 계곡이라는 곳에 매장했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도 피라미드가 아닌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왕가의 계곡은 오랜 세월 비밀이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발견됐는데 대부분 도굴당한 상태였다고 한다. 해당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겠지만, 예부터 쓰였던 무덤 마스타바와 피라미드는 눈에 띄어도 너무 띈다. 그래서 수백~수천 년간 도굴꾼에게 시달렸다.
그래서 아예 사막 속 암반 계곡에 굴을 파고 거기에 왕족의 미라와 부장품들을 안장한 것. 왕족들 입장에서는 잊힌 기술인 피라미드 건축법을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지출을 할 이유가 없었을 뿐 아니라 도굴로부터 그나마 더 안전한 사후세계가 보장된 새로운 장례지 선정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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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구조인데, 사실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는 거의 제각각이다. 모든 피라미드가 이런 구조로 지어지지는 않았다. 공통적인 것이라면 입구가 북극성을 향하도록 지었다는 정도.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위로 올라가면 왕의 묘실이 있고 왕의 묘실 바로 아래에 왕비의 묘실이 있다. 하지만 왕의 묘실로 가려면 천장에 있는 통로를 통해서 가야 하며 이 통로를 마개로 막아 놓았다. 통로 방향으로 계속 내려가기만 하면 막다른 곳으로 빠지는데 그 아래에 함정이 있다.
피라미드 내부의 통로는 극히 좁다. 건물 자체의 하중이 무지막지할 뿐더러, 아치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목적부터가 자주 드나들라고 만든 곳이 아니다. 확실한 건 사람이 편하게 들어가는 것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이집트인들이 아치를 몰라서 피라미드에 아치가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아치 구조물이 사용되었고, 수메르의 도시 니푸르 유적에서도 기원전 3800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치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당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 간 교류가 있었고, 심지어 햇볕에 말린 벽돌과 조적건축을 이집트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배워왔을 확률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집트인들이 아치 구조를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피라미드, 신전 등의 석조 건축물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문명의 여명기인 만큼 이집트인의 눈에 자신들이 가진 아치 기술이 만족스럽지 않았을 수도 있고, 스핑크스 같은 조각상을 제외한 나머지 건축물을 딱딱 각지게 지어야 하는 규정이나 종교적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정형화된 신전 양식이 있고, 이 때문에 아치를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 건축되거나 크게 개보수된 신전에도 아치는 딱히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기원전 1,85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치형 구조물인 가나안 문이 아슈켈론에 있는데, 아치가 무엇인지 이집트인들이, 그것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의 이집트인들이 몰랐을 리 없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2005년부터 방사성 비파괴검사로 탐사해 온 결과 200석짜리 협동체 비행기가 들어갈 만한 공간도 있다고 나타났다. 다만 이것이 처음 세웠을 적에 의도하여 만든 공간인지 아니면 하중이 내려앉아 생긴 공간인지는 더 탐사해 봐야 알 수 있을 듯.
누비아 피라미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이집트 남쪽의 수단에도 피라미드가 있다.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던 누비아 문명의 쿠시 왕국에서는 기원전에 '누비아 피라미드'(Nubian pyramid) 란 것을 여럿 만들었다. 나일강 상류의 쿠시 왕국은 하류의 이집트를 침략하여 이집트 파라오가 된 적도(이집트 25왕조) 있었다. 쿠시 왕국은 흑인 국가였기에 지금도 유적지에서는 흑인을 나타내는 검은 석상들이 발굴된다.
누비아 피라미드들은 양식적으로 전성기의 이집트 피라미드와 유사하지만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 현재까지 발견된 피라미드 중 제일 높은 게 40 m이고 웬만한 것들은 20 m 미만으로 훨씬 작다. 경사 역시 훨씬 급하고 돌에 철분이 함유되어서 전체적으로 색상이 어두운 편이다. 이집트와는 달리 나일강의 동서쪽에 다 있다. #
누비아 피라미드는 전부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무덤 자체는 피라미드 안이 아니라 피라미드의 밑에(지하에) 있고, 피라미드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대신 피라미드 앞에는 작은 사각형 석실이 있는데 아마도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 듯하다. 즉 누비아 피라미드는 제사용 시설, 묘비의 성격이 강하다.
크기가 작아 모래바람에 묻혀버리기가 쉽고, 수단이 상대적으로 고고학계와 여행객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다 보니 아직도 느리게 발굴하는 중이다. 피라미드들이 모여있는 곳이 여태까지 4군데 발견되었고(Meroe, Jebel Barkal, Nuri, El-Kurru), 2018년에 수단 북부에서 다섯 번째로 피라미드가 모인 장소가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240~250개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이는 숫자로는 이집트 피라미드들보다 많다.
이들 중 제일 유명한 메로(Meroe)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피라미드의 윗부분들이 파괴되었다. 수단도 강수량이 적은 사막지대이고 근처에 큰 도시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2천 년 넘게 피라미드들이 세월을 잘 견뎌내었는데, 1830년대에 주세프 페를리니(Giuseppe Ferlini)라는 이탈리아인 도굴꾼이 보물을 찾으러 와서 다이너마이트로 많은 피라미드의 윗부분을 파괴하거나, 어떤 피라미드들은 피라미드째로 파괴해버렸다. 더욱이 경악스러운 사실은 페를리니의 이런 행태들은 그 당시에 이 지역을 통치하던 토후의 허락을 받고 벌인 짓이라는 거다. 당시 사람들의 고고 유적의 가치에 대한 어리석은 무지에서 생겨난 비극이다. 페를리니는 결국 장신구 등의 부장품을 조금 찾기는 했고, 그것들을 유럽으로 가져가서 팔려고 했지만, 그 시대 유럽인들의 생각으로는 '미개한 사하라 남쪽 아프리카에서 몇천 년 전에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고로 이것들은 가짜다'였기 때문에 많이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현재 이 부장품들은 독일에 있는 박물관들에 전시 중이다.
현대에서는 파괴된 피라미드 근처에 널린 벽돌을 모아서 복원해놓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이 근방에 살던 사람들이 집 등을 지을 때 사용하느라 없어진 돌들도 많아서 어떤 것들은 복원했다는 티가 너무 나기도 하고, 어떤 것은 터만 남았을 뿐 영영 없어지기도 했다. 좌우간 아쉽게도 현대시대에 메로의 파라미드를 상징하는 것은 윗부분이 날아가버린 피라미드이다.
관람
기자 피라미드 지구는 카이로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근교에 있다. 보통 타흐리르 광장, 이집트 박물관 등이 있는 도심에서 차로 이동한다. 자유여행자의 경우, 택시를 타고 흥정해 이곳까지 온다. 교통 상황에 따라 약 30분 내외가 걸린다.
기자 피라미드 지구의 입장료는 2019년 기준 120EGP다. 그냥 입장료일뿐, 피라미드 내부에 들어간다면, 300EGP의 추가 요금이 든다. 참고로 이집트의 화폐 단위는 이집트파운드(EGP)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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