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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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인주(버마어: ကရင်ပြည်နယ်, 영어: Kayin State)는 미얀마 남부에 위치해 있는 주이다. [1][2]
개요
꺼인주의 면적은 30,383㎢이며 인구는 1,431,377명이며 주도는 바앙이다. 만달레도, 샨주, 버고지구, 몬주, 태국의 매홍손주, 딱주에 접한다.
미얀마에서 두 번째로 큰 소수민족인 카렌족의 본거지이다. 주의 동쪽, 타이와의 국경 근처 미야와디(Myawaddy)에 있는 모키(Mawkhee)광산은 130.5km² 규모의 유명한 아연광산으로, 미얀마의 민영 광산회사와 미얀마 광업부(Ministry of Mine)가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공동 개발하고 있다. 주민은 카렌족 이외에 파다웅족(Padaung), 버마족, 샨족(Shan) 등 여러 인종이 섞여 있다. 종교는 기독교와 불교가 양분되어 있다.
미얀마의 행정 구역은 크게 7개의 삐내(버마어: ပြည်နယ် 삐내)와 7개의 따잉데따찌(버마어: တိုင်းဒေသကြီး 따잉 데따 찌)로 나뉜다. 도의 이름은 에야워디도와 떠닝따이도를 제외하고는 도의 소재지의 이름이 도의 이름이 되었다. 또한 도와 주는 민족 간의 경계가 되어 도는 버마족이 다수를 이루는 반면, 주는 소수 민족이 다수를 이룬다. 도와 주의 하위 행정 구역으로는 군(버마어: ခရိုင် 커야잉)이 있다.[3][4]
역사
버마족 중심의 정치체제는 서기 849년 무렵 중국 윈난성을 통해 남하하기 시작한 이들이 건국한 '초기 바간 왕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하지만 바간 왕조 이전에도 이라와디강 북부에는 버마족 이전에 중국 국경을 통해 건너온 퓨(Pyu) 왕국과 남쪽에는 몽족의 도시국가들이 존재해왔다. 특히 퓨족의 도시왕국이 대개 이라와디강 평원의 주인공으로 기원 전후부터 7세기까지 존재감을 드러냈다. 고고학적으로 뚜렷하게 확인되는 이 고대왕국들은 평야에 높은 성을 쌓고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된다.
이후 미얀마는 크게 3갈래의 방향으로 나뉘어 발전과 통합을 반복하게 된다. 우선 이라와디강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의 버마족 왕국(바간 왕조→퉁구 왕조→꽁바웅 왕조), 동북부 산악지대의 샨족 왕국(아바→잉와 왕조), 그리고 남쪽 해안가의 몽족 왕국(따통→한따와디 왕조)이 그 세 가지 미얀마의 원천이 된다. 이들은 상호 교역하고 동시에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며 현재의 미얀마로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거에는 주로 버마족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지만 연방체제가 자리를 잡은 이후엔 이들 3갈래(평야, 해안가, 산악지대) 지리적 특성과 왕조가 뒤섞인 정체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강조되는 중심 흐름은 이라와디 평야의 버마족이 주도한 된 통일 바간 왕국(1044~1287)과 퉁구 왕조(1531~1752), 그리고 꽁바웅 왕국(1752~1885) 이다. 바간 왕조는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로 문자를 도입하고 불교문화를 발전시켜 미얀마의 정체성의 초석을 놓은 미얀마 역사의 가장 빛나는 시절에 해당된다. 이후 몽골족의 침략에 바간이 멸망한 다음에 상당기간 샨족의 잉와, 버마족의 퉁구, 몽족의 한따와디 등 3왕조가 병립하였다. 이후 미얀마를 넘어 동남아 전체에 뚜렷한 영향력을 내보인 버마계 왕국이 퉁구 왕조와 꽁바웅 왕조이다. 16세기 퉁구 왕조는 동남아시아에서 최대의 제국을 이루며 이웃 태국을 사실상 완전히 정복하고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진출하였다. 18세기 꽁바웅 왕조 역시도 1757년 태국 중부의 아유타야와 서남부 아라칸 왕국을 정복하며 현재에 그려진 미얀마의 영토를 사실상 확정하였다.
그러나 천년을 이어온 버마 왕국은 19세기 들어 영국과의 3차례에 걸친 전쟁(버마전쟁, 1823, 1852, 1885)에 차츰차츰 영토를 잠식당하며 최종적으로 꽁바웅 왕조의 붕괴와 영국의 식민지배로 이어진다. 이후 1937년까지 영국령 인도제국의 지방행정구역의 하나로 편입되면서 민족적 자존감에 커다란 생채기를 내었다.
영국은 다수인 버마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인도와 중국인을 대거 끌어들였고, 나아가 소수민족인 까렌족과 카친족 몽족 등을 중심으로 군대와 치안조직을 운영하게 된다. 이같은 식민지배의 분열 정치의 결과로 내부 갈등이 높아지고 이는 독립이후 연방의 분열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적 자각을 독려하던 아웅 산(Aung San, 1915~1947) 등 젊은 독립운동가들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버마의 독자적인 군대 조직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외부 지원세력을 찾기 시작하였다. 당초 중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광저우로 간 이들 일행은 당시 중일전쟁 중인 일본군과 접촉하게 되면서 일본의 지원을 받기로 방향을 바꾸었고, 인도로의 진출을 꿈꾸는 일본의 야심과 버마군 창설을 원했던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요구가 맞아 떨어졌다.
1941년 일본의 도움으로 첫 버마군대 BIA(Burma Independence Army)를 조직해 1942년 일본의 버마 진격에 참여하였다. 영국을 몰아낸 일본은 약속과 달리 이후 3년간 버마를 식민지배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싹텄고, 이에 아웅 산과 버마군(BIA)은 다시금 영국과 연합해 일본과 전투(버마전투)에 나서고 1945년 일본군을 버마에서 몰아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복귀한 영국은 식민지배를 다시금 복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군대까지 보유하고 두 차례의 국제 전쟁까지 경험한 아웅 산을 비롯한 젊은 독립세력은 이에 쉽게 양보하지 않았다. 아웅 산을 중심으로 한 정당인 반파시스트인민해방연대(AFPFL)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끝내 영국 정부로부터 독립을 이끌어 냈다. 1947년 4월 제원의회 선거에서 아웅 산이 이끄는 AFPFL이 압승하여 그의 초대 총리 취임이 유력시 되었지만 7월 19일 정치노선이 다른 세력에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1948년 1월 4일 버마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이뤄냈다. 초대 총리는 우누(U Nu, 1907~1995)가 되었다. 독립초기 영국식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했지만 여느 독립국처럼 초기의 경제실적과 정치불안은 쉽게 개선되지 못하였다. 신생독립국 버마의 불안요소는 제도권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행보를 가속화 하던 공산주의 세력과 버마족 주도의 연방질서에 화학적 융합이 어려웠던 소수민족, 그리고 지배정당인 AFPFL 내부의 정책을 둘러싼 극단적인 내분이 이어졌다.
카렌족은 1940년대 후반부터 카렌족 언어로 코툴레이(Kawthoolei)라고 이름 붙인 자신들의 주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계속 중앙정부와 갈등 관계에 있었다. 현재까지도 꺼인주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미얀마 군사정부와 계속 마찰을 빚고 있다. 또한 영국 식민지 시절 카렌족 중 많은 수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미얀마의 주류 종족인 버마인이 불교도 일색인 것과 차별됨으로써 종교적으로도 반목 상태에 있다.[5]
카렌족
미얀마에는 인구의 대다수, 68%를 차지하는 대표 종족은 버마족이지만, 버마족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종족들이 존재한다. 135개의 소수종족 중 영국이 미얀마를 지배할 당시, 영국에서는 인도계 이주민, 미얀마 소수종족 카렌족(미얀마어로는 꺼인족으로 발음)을 영국 다음의 중간 통치계급으로 삼아 버마족과 대립 구도를 조성했고, 그 잔재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꺼인족의 새해가 미얀마 전체의 공식 공휴일로 지정돼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카렌족, 혹은 꺼인족은은 미얀마 전체인구의 10% 정도 차지하며, 약 6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꺼인족은 태국에도 분포돼있다. 태국 내 꺼인족 인구는 약 100만 명으로, 적잖은 규모가 거주 중이다. 꺼인족은 예전부터 외래문화에 개방적이었는데, 서방 국가와도 친선 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문인지 미얀마 내 또 다른 소수 종족인 카친(Kachin)족과 친(Chin)족 만큼은 아니지만, 기독교 인구가 많다. 한국과 유사한 기후를 보이는 샨(Shan) 지역과는 달리, 꺼인족이 주로 거주하는 꺼인주는 열대성 기후로, 습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고온다습한 밀림 지역이다 보니, 나무들이 많고 예로부터 벌목을 위해 코끼리를 많이 동원했다. 그래서 꺼인족 하면, 코끼리를 빼놓을 수 없다. 또 꺼인주는 정부군에 반대하는 반군도 존재하여 관광객들의 출입을 그동안 금지되기도 했지만 지난 10년 전부터는 꺼인족의 주요 도시인 파안(Hpa-an) 지역에는 출입이 가능해졌다. 파안 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푸른 논, 동굴, 산 등 자연 환경과 함께 꺼인족의 전통, 축제, 관습, 음식들을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관광객들이 출입을 금지한 지역도 많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 중 꺼인의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는 렛훼(Lethwei)다. 미얀마 전통 무술인 렛훼는 무에타이와 유사하지만 머리를 사용하거나, 눈을 찌르는 등 좀 더 공격적인 면이 강하다. 꺼인족의 무술이다보니, 꺼인주에서 유명한 선수들이 많이 배출됐고, 유명 렛훼 선수들은 태국에서 무에타이선수들과 경연을 하기도 한다. 또 꺼인족은 개구리로 장식된 북으로 연주하곤 하는데, 이 북은 꺼인족의 전통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대형악기에 속하며 일반적으로 넓은 청동 상판을 가지고 있고, 나무 받침대에 매달아 두기도 한다. 연주를 할 때면 큰 소리가 난다. 샨족의 샨 드럼처럼, 꺼인족은 이 북을 이용해 꺼인족 고유의 음악을 만든다.
꺼인족은 주로 붉은색, V자 모양의 카라 셔츠, 꼬임 장식으로 된 옷을 입는다. 미얀마에서 하의는 주로 론지(Longyi)라 부르는데, 꺼인족을 상징하는 론지도 따로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꺼인족의 전통문화는 파안 지역 소재 꺼인 주립 문화 박물관에서 2달러(한화 약 2,4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체험이 가능하다. 꺼인 종족의 악기와 의복뿐 아니라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양곤과 만달레이를 다녀보면, 집집마다 자물쇠를 채워두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둑이 드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자물쇠를 사용하는데, 꺼인족의 전통가옥은 독특하게 자물쇠가 아닌 사다리를 이용한다. 꺼인족 전통가옥은 지상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닌, 집의 모서리를 나무로 고정하여 공중으로 띄워져 있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한다. 다만, 꺼인족이 사는 마을은 대부분의 시골 마을처럼 이웃을 모두 알고 지내기 때문에 도둑이 드는 일은 드물다. 취침하거나 외출시에도 사다리는 올려둔다.
꺼인족의 거주 지역은 대부분 밀림 지역이다. 그 덕에 무척 인상적인 자연 환경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파안지역에는 미얀마에서도 긴 강으로 꼽히는 살윈(Thanlwin)강이 흐른다. 이 주변에는 녹색 들판,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을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베트남의 닌빈(Ninh Binh), 중국의 계림(Guilin)을 떠올린다. 사단(Saddan) 동굴 역시 유명 관광지다. 공굴 내는 수백 개의 불상이 이어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 동굴을 통과해서 끝까지 가보면 산과 작은 호수, 논밭도 볼 수 있다. 파안지역은 트레킹, 카약, 자전거를 타고 여유롭게 관광을 할 수 있어 꺼인주의 자랑이라고도 할 수 있다.[6]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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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가인주〉, 《위키백과》
- 〈미얀마/행정구역〉, 《나무위키》
- 〈미얀마의 행정구역〉, 《위키백과》
- 〈두산백과: 카인주〉, 《네이버 지식백과》
- 〈미얀마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 〈미얀마 소수종족, 꺼인족의 문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같이 보기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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