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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앤드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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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앤드리슨(March Andereessen)
모자이크(Mosaic)
넷스케이프(Netscape)
앤드리슨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

마크 앤드리슨(March Lowell Andereessen)은 미국의 소프트웨어 개발자이며, 기업가이고, 투자자이다. 마크 앤드리슨은 최초의 상용 웹브라우저모자이크(Mosaic)의 공동 개발자이며, 넷스케이프(Netscape)의 공동 창업자이고, 글로벌 벤처 투자 회사인 앤드리슨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의 공동 창업자이다. 그는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에어비앤비, 그루폰, 스카이프, 징가, 포스퀘어, 오큘러스 VR, 깃허브 등 수많은 벤처 기업에 투자하여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그는 1994년에 제1회 월드 와이드 웹 국제회의에서 발표된 명예의 전당 6명 중 한 명으로 뽑혔다.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마크 앤드리슨은 1971년 미국 아이오와주 시더폭포에서 태어나, 위스콘신주에 있는 뉴 리스본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종자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으며, 아들에게 초창기 개인용 컴퓨터인 코모도어64를 선물로 주었다. 어릴 때부터 프로그래밍에 소질이 있던 마크 앤드리슨은 새로운 컴퓨터를 받고 나서부터 프로그래밍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어버너-섐페인 캠퍼스(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컴퓨터공학 학사 학위를 따냈다.

월드 와이드 웹[편집]

그는 학부 시절에 텍사스주의 오스틴에 있는 IBM에서 두 차례 인턴을 했었다. 그곳에서 MIT-X 윈도우 구현과 3D 언어 API, SGI의 GL(Graphics Language)와 PHIGS의 포트를 담당하는 AIX 그래픽 소프트웨어 개발팀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일리노이 대학교의 NCSA(National Center for Supercomputing Applications)에서 일하였었는데, 그러면서 팀 버너스-리월드 와이드 웹(WWW)에 대한 개방형 표준에 익숙해졌다. 앤드리슨과 정규직 직장 동료였던 에릭 비나(Eric Bina)는 광범위한 컴퓨터에서 작동 가능한 통합 그래픽으로 사용자 친화적인 브라우저를 만드는 일을 했다. 이 일의 결과 코드는 모자이크 웹브라우저였다.[1][2]

모자이크 웹브라우저 개발[편집]

앤드리슨은 일리노이 대학교에 부설되어있는 부설 슈퍼 컴퓨터 센터(NCSA)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스위스 CERN 연구소의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만든 월드 와이드 웹(WWW)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에 연구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에릭 비나(Eric Bina)와 함께 사용자 친화적이며 그래픽이 포함된 웹브라우저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며, 1992년 말에 모자이크(Mosaic) 웹브라우저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 모자이크 웹브라우저는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당시에 있던 웹브라우저들은 텍스트 기반의 조악한 품질이었지만, 모자이크는 하이퍼링크를 이용하여 마우스 클릭만을 통해서도 다른 페이지의 이동이 가능했으며, 아이콘 및 배경 이미지 등의 그래픽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 세계 최초의 GUI 기반 웹브라우저로 거듭났다. 1993년 1월 23일 자로 NCSA는 모자이크 웹브라우저를 무료로 이용 가능하도록 배포하였고, 첫해에만 200만 회의 다운로드 횟수라는 큰 기록을 남겼다.[1][2]

넷스케이프 창업[편집]

1993년에 마크 앤드리슨은 컴퓨터과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 섐페인을 졸업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기업 통합 기술에서 일하기 위하여 일리노이를 떠나 캘리포니아주실리콘밸리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마크 앤드리슨은 실리콘 그래픽스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큰돈을 벌었던 벤처 사업가 제임스 클라크(James H. Clark)와 만났다. 제임스 클라크는 모자이크 브라우저와 같은 인터넷 웹브라우저 시장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마크 앤드리슨에게 인터넷 소프트웨어 회사를 공동 설립하자고 제안하였다. 마크 앤드리슨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의 동료인 에릭 비나와 다른 프로그래머들을 채용하여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사를 설립하였다. 제임스 클라크는 회사 설립 자금을 대면서 사장을 맡았으며, 마크 앤드리슨은 부사장을 맡았다. 당시 마크 앤드리슨의 나이는 불과 23살이었다.

그런데, 모자이크 웹브라우저는 마크 앤드리슨과 에릭 비나가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직원으로 근무하며 개발한 소프트웨어이기에 법률적으로는 NCSA의 재산이었으며, 마크 앤드리슨이 모자이크라는 회사를 설립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그리하여 마크 앤드리슨은 회사 이름을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즈(Netscape Communications)로 고치고, 웹브라우저의 이름을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Netscape Navigator)로 정했으며, 자신들이 개발한 기존의 모자이크 소스코드를 단 한 줄도 재사용할 수 없어, 처음부터 다시 개발해야 했다. 1994년 12월 15일에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라는 새로운 이름의 웹브라우저를 출시하였으며, 출시와 동시에 시장의 폭발적인 호응을 힘입어 약 90%의 엄청난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에는 넷스케이프에 기업공개를 통해 대중에게 자신을 알렸으며, 타임지의 표지와 다른 출판물에도 실렸다. 넷스케이프는 1999년 미국 AOL에 43억 달러에 인수되었다.[1][2]

라우드 클라우드[편집]

1998년 말에 AOL이 넷스케이프를 인수한 후, 마크 앤드리슨은 벤 호로위츠(Benjamin Abraham Horowitz), 팀 하우즈, 그리고 리인식 등과 함께 옵스웨어를 찾아갔다. 원래는 라우드 클라우드(Roudcloud)라고 이름 붙여진 이 회사는 인터넷과 전자상거래를 하는 소비자들에게 컴퓨팅과 호스팅 및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라우드 클라우드는 호스팅 사업을 EDS에 매각하고 2003년에 옵스웨어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마크 앤드리슨이 회장을 맡았다. 2007년 휴렛팩커드가 16억 달러에 인수하였고, 서비스로서의 소프트웨어 제공과 클라우드 호스팅을 시도한 최초의 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2]

앤드리슨 호로위츠[편집]

2005~2009년에 앤드리슨과 벤 호로위츠가 트위터QIK를 포함한 45개의 창업에 총 8,000만 달러를 투자하였다. 이 일로 두 사람은 슈퍼엔젤 투자자(super angel investors)로 유명해졌고, 2009년 7월 6일에는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 회사인 앤드리슨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의 설립을 발표하였다. [2]

이베이[편집]

앤드리슨은 2008년 이베이(eBay) 이사회에 처음 가입하여 6년간 이베이의 이사로 재직하였다. 2014년 10월에 회사가 온라인 결제 단말기인 페이팔(PayPal)을 해지하기로 한 데 따른 이사직 사퇴를 발표했다. 페이팔과의 관계를 끊는 것에 대한 결정은 앤드리슨과 투자자인 칼 아이칸 사이의 논쟁점이었다. 아이칸은 페이팔과의 분리를 주장하였고, 앤드리슨은 이 분리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여 공분을 샀다. 앤드리슨은 아이칸으로부터 주주들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웠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아이칸은 자신의 주장을 공개서한에서 2009년 이베이가 매각한 스카이프와 앤드리슨의 자회사인 앤드리슨 호로위츠 간의 이해충돌 혐의를 상세하게 밝혔다.[2]

산업 영향[편집]

  • 마크 앤드리슨은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Mark Elliot Zuckerberg), 징가의 마크 핀커스(Mark Pincus) 등 앤드리슨 호로위츠에서 투자하는 기업의 리더들에게 조언가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마크 앤드리슨과 호로위츠는 배니티 페어(Vanity Fair)의 2011년 신규 설립 리스트에서 6위, CNET의 2011년 가장 영향력 있는 투자자 리스트에서 1위를 기록하였으며, 2012년 포브스(Fobes)에서 발표한 미다스 테크 최고 투자자 리스트(Midas List)에서 각각 2위와 21위에 올랐다.
  • 2012년 4월에는 마크 앤드리슨과 벤 호로위츠, 피터 레빈, 제프 조던, 존 오 파렐, 스콧 와이스는 평생 수입의 절반을 벤처 캐피털에서 자선 단체에 기부하기로 약속하였다.
  • 2012년에는 타임 100(Time 100)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 타임은 매년 타임 100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 2013년 마크 앤드리슨은 5명의 인터넷과 웹 개척자 중 한 명이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공학상을 받았다.[2]

벤처 사업[편집]

  • 마크 앤드리슨은 넷스케이프와 라우드 클라우드에 이어서 세 번째로 설립한 회사인 닝(Ning)의 공동 설립자이자 회장이었다. 2011년 9월에 닝은 모드 미디어(Mode Media)에 1억 5천만 달러로 팔렸다 발표되었으며, 마크 앤드리슨은 판매 이후에 글램 미디어(Glam Media)의 이사회에 합류하였다.
  • 링크드인(LinkedIn)과 부티크 은행( boutique bank)의 개인 투자자이다.
  • 마크 앤드리슨은 페이스북, 휴렛 패커드 엔터프라이즈, 크노, 스탠포드 병원, 범프 테크놀로지스, 안키, 오큘러스 VR, 다이얼패드, 타이니코의 이사로 재직 중이다.
  • 아사나(Asana)의 고문과 콜라보넷(CollabNet)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2]

암호화폐[편집]

앤드리슨 호로위츠는 암호화폐에 더 자유롭게 투자하기 위해 벤처캐피탈의 혜택을 포기하고 공인 투자 자문사(RIA, Registered Investment Advisor)로 업종을 변경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벤처 캐피탈과 공인 투자 자문사의 차이점은 투자 제한이다. 먼저 벤처 캐피탈에 대해 알아보자면, 비상장 회사에 대해 자유로운 투자가 가능하지만, 펀드에서 암호화폐 등 위험자산군의 비중이 20%를 넘을 수 없다. 반면, 공인 투자 자문사는 상장사와 비상장사의 구분없이 투자가 가능하지만, 투자 내역을 포함한 정기 사업내역을 제출해야 하는 등의 규제가 생긴다. 즉, 규제를 감안 하더라도 암호화폐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는 의미이다. 마크 앤드리슨은 벤처 캐피탈로서는 가장 먼저, 그리고 과감하게 암호화폐에 투자했으며, 2013년 4월에는 암호화폐 리플코인(XRP)을 발행하는 리플(Ripple)에 투자하였다. 이후에는 미국의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인 코인베이스, 비트코인으로 거래하는 P2P 오픈마켓인 오픈바자 등에 투자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마크 앤드리슨이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가 인터넷의 오래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라 평가하였기 때문이다.[3]

마크 앤드리슨은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이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에어비앤비, 그루폰, 스카이프 등에 초기 투자를 감행하였으며, 이 벤처 기업들은 모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마크 앤드리슨의 혜안은 많은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였다. 그런데 2014년 1월 21일에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에 '왜 비트코인이 중요한가? (Why BitCoin matters?)' 라는 글을 기고하며 비트코인을 높게 평가하였다. 그리고 2014년 5월 21일에는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와의 인터뷰를 통해 비트코인을 또 한 번 고평가하면서 투자자들의 엄청난 투자를 이끌어냈다.[4]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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