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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공화국(체첸어: Нохчичоь / Noxçiyçö, 러시아어: Чечня)은 연방국가인 러시아를 이루는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정식 국명은 체첸 공화국(체첸어: Нохчийн Республика / Noxçiyn Respublika, 러시아어: Чечен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이지만, 간략히 체첸이라고 부른다. 체첸은 북캅카스 지역에 위치하여 있으며, 인구 다수는 체첸인으로 구성되어 있다.[1]
목차
개요[편집]
체첸공화국의 면적은 17,300km²이며 인구는 1,516,387명(2022년)이다. 소련 시절에는 이웃 국가인 인구시 공화국과 연합하여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이루고 있었으나, 1992년 12월 인구시 공화국과 분리되어 성립되었다. 체첸공화국은 국토의 동쪽과 북동쪽은 다게스탄 공화국과 면하고, 서쪽은 인구시 공화국과 북오세티야-알라니야 공화국, 남쪽은 조지아와 접한다. 수도는 그로즈니(Грозный, Grozny)이다.
대부분이 체첸인인데 일부는 러시아인, 인구시인과 기타 북코카서스계 민족도 섞여있다. 주민은 체첸(Chechen)족과 인구시(Ingush)족이 이 60%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러시아인과 기타 캅카스족이다. 언어는 대부분 체첸어를 사용하며,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들이다. 체첸에서는 체첸인들의 토착 언어인 체첸어와 러시아어가 모두 사용된다. 체첸어는 캅카스 제어 중 북동 캅카스어족으로 불리는 그룹에 속하는데 인근의 인구시인들이 쓰는 인구시어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2][3]
자연환경[편집]
흑해와 카스피해로 둘러싸인북캅카스 지방에 속하고, 캅카스 산맥의 북쪽 기슭과 평야에 펼쳐져있다. 남부 국경을 따라 보코보이 산맥과 그 북쪽으로 서너 개의 평행으로 산맥이 뻗어 있고, 그 사이에 체첸평야가 펼쳐져 있다. 체첸평야 북쪽에는 순자·테레크의 두 산맥이 있고, 그 북쪽으로 테레크마저지(低地)가 펼쳐진다. 석유·가스를 비롯하여 석회암·이회암(泥灰岩)·석고(石膏) 등이 풍부하다.
역사[편집]
체첸은 러시아와의 1차 체첸 전쟁 후 2차 체첸 전쟁도 겪었다. 아직도 국경 지대에서는 소규모 전투가 종종 일어나기 때문에 치안이 위험하다.
러시아 지배 이전[편집]
이슬람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체첸인들은 자신의 역사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고고학상의 유적으로 오래전부터 동북캅카스에 살았던 것이 증명되었다. 체첸인과 인구시인의 선조라고 여겨지는 나흐족에 대한 기록은 7세기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공격을 받았으나 저항하여 티무르의 인정을 받아 검을 하사받기도 했다고 한다.
16세기 말엽부터 동쪽 다게스탄으로부터 이슬람이 유입되어 점차 퍼져나갔다. 한편, 같은 무렵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정치적 통일을 추진하며 국가 형성을 행하던 러시아는 17세기 말까지 전시베리아를 병합하였고, 18세기에는 남하를 개시, 발트해 연안, 흑해 연안, 카자흐 초원, 만주 동북부 등을 점차 병합했다. 또한 캅카스 지배의 거점으로서 북캅카스 중앙부의 테레크 주의 강변의 블라디캅카스(현 북오세티야 공화국)을 건설, 테레크 주 동쪽에 사는 체첸-인구시인의 정복을 추진했다. 이처럼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두에 걸쳐, 러시아 제국에 의해 일어난 캅카스의 지배를 둘러싼 전쟁사를 캅카스 전쟁이라 부른다.
제정 러시아[편집]
러시아는 1801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동조지아를 병합, 남캅카스까지 세력을 뻗었다. 이리하여 1828년까지 오스만 제국령의 아자리야(조지아 서남부 지역) 지역을 제외한 캅카스의 거의 전역이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왔지만, 그중에서 체첸인을 필두로 한 다게스탄과 체첸 지역은 러시아의 지배에 격렬히 저항했다. 이들은 이맘 샤밀의 지휘 하에 1859년까지 격렬하게 항쟁하지만 결국 굴복. 단 산악지대에서 몇년 간 저항이 더 이어졌으며 이후에도 러시아가 혼란스러워지면 바로 봉기를 일으켰다.
체첸인은 18세기 전반까지 이슬람 수니파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어,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의 성직자들이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체첸이나 다게스탄 제민족들은 이러한 수피 교단의 조직력과 결속에 의지하여 러시아에 대한 저항을 계속해왔다.
현대[편집]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건설하였다.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 제국한테 제1차 세계 대전 항복을 하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1918년 3월 캅카스 일대는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의 관할로 넘어간다. 이 때 체첸 역시 오스만 제국한테 넘어갔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동맹국 전반의 패전으로 마무리되면서, 체첸 일대는 권력 공백 상태를 맞게 됐다. 오스만 제국이 캅카스 일대의 지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공백 상태를 맞은 체첸은 적백내전에서 백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1921년 적백내전에서 적군이 승리함에 따라 체첸은 결국 소비에트 러시아 소속으로 바뀌었다.
소련 설립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의 민족자치 방침에 따라 1924년 체첸 자치주, 인구시 자치주를 설립, 1934년에는 병합하여 체첸-인구시 자치주로, 1936년에는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승격하였다.
그 후 정권을 쥔 이오시프 스탈린은 민족공화국에 의한 연방제를 전제로 한 레닌주의 대신, 민족자치공화국을 중앙정부의 집권적 통제 하에 두는 스탈린주의를 취했기 때문에, 민족자치의 실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몇 차례 체첸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지만 이때마다 스탈린은 일단 달래서 적당히 봉기를 수습한 이후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봉기 지휘부를 제거하는 수법으로 체첸 지역을 통제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에는 소련에 침투한 나치 독일군의 일부가 북서캅카스에 도달하였는데, 스탈린 정권은 체첸인을 포함한 반러시아적 민족이 독일군과 연합하여 저항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독소전이 발발할 무렵 일부 체첸인들이 무장 게릴라 활동에 돌입하기도 했다. 독일군 침투 후 1944년 2월, 스탈린은 체첸-인구시인의 대독일 협력을 의심하여, 체첸-인구시인 50만 명을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 추방한 후 자치공화국을 해체했다.
1953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정권을 취득, 1956년 스탈린 비판을 개시하였다. 스탈린이 행한 체첸-인구시인 민족 추방도 비판 대상이 되어 1957년 두 민족은 체첸으로의 복귀와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재건을 인정받았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 연방과의 대대적인 분쟁인 체첸 전쟁이 발발하였다. 1991년에는 분리독립주의 성향의 조하르 두다예프(Джохар Дудаев)을 중심으로 미승인국인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이 수립되기도 하였다. 제2차 체첸 전쟁의 종전(2000년) 이후인 2003년에 아흐마트 카디로프(Ахмат Кадыров)가 러시아 연방에 귀속한 현 체첸 공화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오늘날의 체첸 공화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종전 이후에도 체첸계 분리주의 세력은 잔존하였다. 이들은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의 카우카즈 이슬람 토후국을 표방하기도 하였으나, 지도자들과 대원들 대부분이 러시아군의 토벌로 사살당하고 남은 세력이 해외로 도주하여 2015년 말에 ISIL에 가담하면서 사실상 소멸되었다.
산업[편집]
주요 산업은 석유·가스 채취인데 산지(産地)는 그로즈니·말고베크·카파불라크 주변에 모여 있다. 정유업(精油業)은 그로즈니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며 카스피해(海)의 마하치칼라, 흑해의 투압세, 도네츠 분지까지 송유관이 뻗어 있어 이것이 체첸사태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식품공업은 포도주와 과일통조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농업은 주로 테레크강(江)·순자강·알한추르트강 유역에서 이루어지며, 주민의 약 57%가 도시에서 살고 있다.
교통[편집]
철도는 아스트라한과 바쿠, 투압세와 로스토프 등지로 이어지며 자동차 도로의 총연장은 1,200㎞이다. 그러나 제1·2차 체첸사태를 겪으면서 수도 그로즈니의 건물은 90% 이상이 파괴되는 등 도시의 상당부분이 황폐해졌다.
종교[편집]
대부분의 체첸인들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동다게스탄에서 전해진 수니파 이슬람을 믿는다. 대부분 테레크 카자크군의 후예인 체첸 내부의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다. 수도 그로즈니에는 현재 러시아 정교회 교회 하나가 남았다.
과거 체첸 분리주의자들 중 와하브파에 물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영향으로 한동안은 이슬람 극단주의가 성행한 적이 있었으나, 람잔 카디로프가 체첸의 전통 이슬람인 수피즘으로 회귀한다는 모토를 내세워서 이를 척결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체첸 자치정부부터가 이슬람주의가 심하며 법률을 체첸식 샤리아 율법을 적용하여 러시아와 해외에서 비판을 받는다. 특히 2015년에 샤를리 엡도에서 무함마드 풍자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게다가 성차별도 심하다. 아무리 체첸 고유의 수피즘이 중동 같은 동네의 정통적인 이슬람 근본주의보다는 온건하고 세속적이라고는 하지만, 샤리아라는 이름이 어디 안 가듯이 여성들의 복장 규정 및 단속은 물론이고 복장이 불량하거나 히잡 미착용자는 온갖 불이익을 가하는것도 모자라 이를 정부에서 비호한다. 또한 IS 반군을 막겠다고 내놓은 대책이 막장인데 이혼한 부부를 강제로 재결합시키는 프로그램을 시행하여 비난을 받았다. 그나마 체첸은 여성들의 숨이 아예 턱 막힐 정도인 중동보다는 낫다.
러시아의 다른 지역 및 이슬람권처럼 체첸에서도 성소수자의 입지가 나쁘다. 2017년에는 카디로프의 주도하에 게이 수용소라는 곳을 설치하고 강제 구금했다는 기사가 올라와 서방권 및 러시아 성소수자들이 항의했다. 2017년 4월에는 게이 100여 명이 체포되고 최소 3명이 살해되었다. 2019년 초부터 체첸 공화국이 성소수자 탄압을 재개하면서 2명이 고문으로 숨지고 40여 명이 구금되었다.
그리고 2018년 1월 9일에 체첸에서 현지 인권운동가가 마약소지 혐의로 체포되자 서방측은 석방을 촉구했다.
체첸인 이슬람주의자들이 시리아, 아프간 등 전쟁터에 반정부 전투원으로 참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보통 고급 전력 취급을 받는다. 실제로 장비에도 신경 쓰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보통 반군보다 무장 수준이 뛰어나다.
여담[편집]
- 플래시 게임 세계전쟁에선 완전한 독립국으로 나온다.
- 비공식적으로 120년 넘게 산 코쿠 이스탐불로바 할머니가 체첸 출신이다.
- 체첸 마피아들의 범죄가 러시아와 유럽에서 악명 높다.
- 캅카스 지역이 다 그렇지만 벤데타 문화가 강하며 이를 행하는 사람을 협객처럼 보는 문화가 있다. 일례로 체첸 전쟁 당시 18세 체첸인 여성을 강간 살해한 러시아군의 유리 부다노프 대령이 징역 10년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5년만에 사면을 받고 풀려났는데 체첸에선 이를 민족적 분노로 여기고 사면도 반대하고 맹비난했다. 결국 유리 부다노프는 2011년 모스크바에서 체첸인 유섭 테미르하노프에게 암살됐다. 유섭 테미르하노프는 살인혐의로 15년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옥사했다. 체첸에선 친러/반러 체첸인을 막론하고 그를 민족영웅으로 추앙하고 성대한 장례식이 이루어졌다. 친러파인 람잔 카디로프 역시 그를 칭송하고 억울하게 옥사했다고 두둔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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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캅카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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