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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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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js0729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3월 5일 (금) 10:02 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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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쉬(Bosch)
보쉬(Bosch)
피터 부시(Peter Busch)

보쉬(Bosch)는 기술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선도적인 글로벌 공급업체이다. 전 세계적으로 약 40만 명의 임직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2019년에는 777억 유로의 매출을 달성했다. 사업 부문은 모빌리티 솔루션, 산업기술, 소비재, 에너지 및 건축기술 등 4개 분야로 분할된다. 보쉬는 선도적인 사물인터넷 기업으로서 스마트홈, 스마트시티, 커넥티드 모빌리티, 커넥티드 업계를 위한 혁신적인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자체 사물인터넷 클라우드뿐만 아니라 센서 기술, 소프트웨어, 서비스에 대한 전문성을 활용해 고객들에게 단일 소스에서 연결된 교차 도메인 솔루션을 제공한다. 보쉬 그룹의 전략적 목표는 연결된 삶을 위한 솔루션을 만들고, 혁신적이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제품과 서비스로 전 세계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이다.

개요

보쉬그룹은 기술 및 서비스 분야를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보쉬그룹은 전 세계적으로 400,000여 명(2019년 12월 31일 기준)을 고용하고 있다. 보쉬그룹은 2019년 총 매출 777억 유로를 기록했다. 보쉬그룹의 사업은 모빌리티 솔루션(Mobility Solutions), 산업 기술(Industrial Technology), 소비재(Consumer Goods), 에너지 및 빌딩 기술(Energy and Building Technology)의 4개 사업 부문으로 구성되어있다. IoT 선도 기업으로서, 보쉬는 스마트 홈, Industry 4.0, 커넥티드 모빌리티 분야에서 혁신적인 솔루션들을 제공하고 있다. 보쉬는 지속가능하고, 안전하며, 즐거운 모빌리티라는 비전을 추구한다. 보쉬는 자사의 센서 기술, 소프트웨어, 서비스, 그리고 IoT 클라우드와 같은 전문성을 활용하여 고객들에게 커넥티드되고 영역을 넘나드는 솔루션들을 제공한다. 보쉬그룹의 전략적 목표는 AI를 포함하거나 또는 AI를 통해 개발 또는 제조된 제품 및 솔루션을 통해 커넥티드 생활(connected living)을 더욱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보쉬는 혁신적이고 매력적인 제품 및 서비스를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는 “생활 속의 기술(Invented for life)”을 선보이는 것이다.

연혁

  • 1886년 로버트보쉬는 정비공 1명과 심부름꾼 1명을 데리고 슈투트가르트 서부에 위차한 그의 첫 번째 작업장으로 이사
  • 1890년 로버트 보쉬는 고객들이 뒷마당에 위치한 작업장을 찾을 수 있도록 회사 간판을 세움
  • 1886년 로버트 보쉬
  • 1898년 Magnetos Simms Bosch가 런던 스토어가에 첫 번째 판매 사무소를 설립. 이듬해에는 파리에도 판매 사무소를 설립
  • 1903년 벨기에 까미유 제나치가 아일랜드에서 보쉬 점화 시스템이 장착된 메르세데스를 몰고 고든 베네트 컵에서 우승
  • 1905년 관세와 장거리 수송을 피하기 위해 파리에서 생산을 시작
  • 1906년 보쉬 자석 점화 시스템이 미국에 진출
  • 1909년 샌프란시스코 지사 설립
  • 1910년 디트로이트에 지사 설립, 모든 대륙에 진출 영국엣서는 자동차의 90% 이상에 보쉬 자석 점화 시스템이 장착
  • 1914년 전쟁이 반발하자, 곤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보쉬는 즉시 원래 헤드라이트 생산을 염두에 두었던 새로운 홀에 병원 설치
  • 1920년 회사가 전쟁 때문에 잃어버린 피해와 기술적 우위를 따라잡기 위해 포이어바흐 라이트 공장에ㅔ서 생산과 테스트가 최대 속도로 진행
  • 1925년 조립라인 생


역사

로버트 보쉬는 정비공 시절에 자영업을 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는 1886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정밀 기계 및 전기 공학 작업장을 설립하였다. 초창기는 기복이 심해 고생을 하다가 1890년대부터 빠르고 줄기찬 성장을 시작했다. 보쉬는 전화 시스템과 전기 벨 설치 등 들어오는 모든 정밀 기계 및 전기 공학 작업을 수행했다. 그는 고정식 엔진용 자석 점화 장치를 기존 디자인에 맞춰 제작해 달라는 요청에 자석 점화 생산의 길을 닦았다. 1897년 부터, 보쉬는 개량된 자석 점화 장치를 자동차에 장착하기 시작했고 진정으로 안정적인 점화 장치의 유일한 공급자가 되었다. 1902년, 보쉬의 선임 엔지니어인 고트로프 호놀트가 더욱 개량된 솔루션, 즉 스파크 플러그가 포함된 고전압 자석 점화 장치를 발표했다. 이 제품은 보쉬가 세계를 선도하는 자동차 부품회사가 되는 초석을 깔았다. 로버트 보쉬는 영국에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오랜 소원이였는데 1898년 로버트 보쉬가 오랫동안 소원하였던 영국에 영국인 프레데렉 심즈와 함께 런던에 처음으로 독일 외부 보쉬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파리에도 설립을 하였고 이것은 글로벌 시장으로 내딘 첫 발자국이었다. 영국에 이어 프랑스가 유럽 최대의 자동차 판매 시장이었다. 보쉬는 1899년 파리에 자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파리 지사에서의 비지니스는 더활 나위 없이 훌륭했고, 1905년부터는 에펠탑이 보이는 자체공장에서 자석 점화 시스템을 생산하여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다. 이어 다른 유럽 국가에도 빠르게 판매 사무소를 이어갔다. 보쉬는 여러 차례 공작소를 이전한 후에야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 그는 1층 이상을 렌트하려 하다가 결국 공장을 신축하였다. 1901년 건축한 보쉬 공장은 주변 빌딩으로 계속 확장해 나갔다.1903년 국제 자동차 경주가 개최되었는데 자동차 제조업체와 부품 제조업체가 능력을 보일 기회였다. 벨기에인 까미유 제나치가 1903년 아일랜드에서 메르세데스를 몰고 고든 베네트 컵에서 우승을 하였고 극악의 조건을 버텨낸 보쉬의 안정적인 점화 시스템이 일부 기여를 하였다. 그 이후 빨간색 턱수염과 머리카락, 빨간색 더스트 코트로 제나치는 광고 아이콘이 되었고 그는 1918년까지 "레드 데빌"로 보쉬 점화 시스템을 광고하였다. 1906년 미국신문에 자석 점화 시스템을 광고하면서 미국 진출을 시작하얐다. 이 광고로 보쉬는 1906년 수백만 달러의 주문을 수주했고 1년 안에 매출이 두배가 되었다. 미국에서의 사업은 너무 성공적이어서, 1912년 보쉬는 매사츄세츠 주 스프링 필드의 자체 공장에서 인기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보쉬는 미국 이외에 세계의 다른 시장도 진출을 노리기 시작했다. 1906년 남아프리카, 1907년 호주, 1908년 아르헨티나,1909년 중국, 그리고 1911년 일본에 각각 판매 사무소를 설치해 보쉬 판매망이 모든 대륙을 포함하게 되었다. 1913년, 독일 외부에서 발생하는 매출이 회사 전체의 88%가 되었다. 자동차가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이동수단의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안정성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리하여 보쉬는 1913년과 1914년에 적절한 제품을 출시하였고 헤드라이트, 제네레이터, 레귤레이터 및 배터리로 구성되어 야간 주행을 보다 안전하게 해주는 전기 조명 시스템, "보쉬 라이트"와 안정석을 높여주는 스타터였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모든 해외 시장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고 연구 개발이 중단되었으며 생산은 군비로 전환되었다. 보쉬는 자석 점화 장치 대신 수류탄 뇌관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작업 인력의 절반 가량이 징병되었고 여성들이 자리를 메웠다. 징병된 직원 중 453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종전 후 1917년에 개명한 유한회사 로버트 보쉬 AG는 엄청한 도전에 직면했다. 경쟁이 심화되어 글로벌 시장으로 복귀가 힘들었고 특허가 취소된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전의 계약을 새로 체결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이와 동시에, 회사는 핵심 역량, 즉 혁신에 대한 갈망에 집중했다. 전쟁 때문에 중단된 활동이 이제 재개되었고 훨씬 혼잡해진 도로에서의 안전이 보쉬의 연구자와 개발자의 동기가 되었다. 1926년 오토바이 및 자전거 라이트, 보쉬 혼, 앞유리 와이퍼, 배터리 전원 점화 장치가 제품 포트폴리오에 추가되었다. 조립 라인 생산을 무한 회전 컨베이어 벨트로 바꾸었다. 보쉬도 1925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조립 라인이었다. 전체 자석 점화 시스템을 생산하는 데 50일이 걸렸었다면 조립 라인 생산은 5일로 단축되었다. 보쉬가 다년간 생산한 끝에 1927년 혁신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과실을 맺었다. 바로 디젤 연료 펌프이다. 이 펌프는 보쉬가 가솔린 엔진과 달리 자석 점화 장치가 필요 없는 디젤 엔진의 발전에 대응한 결과물이다. 처음에는 트럭에만 사용되다가 1936년에 최초의 승용차용 디젤 분사 펌프가 출시되었다. 독일 자동차 산업의 커다란 위기로 자동차 부품 회사 보쉬는 1926년 이후 제품 포트폴리오를 재고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에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난 전략을 결합하게 되었다. 즉 전동 공구나 열기술과 같이 제품을 개량하여 대량 생산 단계로까지 개발하는 것과 동시에 라디오 및 TV 기술과 같이 완전히 새로운 노력을 병행하게 된것이다. 거의 10년이 지난 후 해외 매출이 겨우 전체의 34%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높은 운송비와 관세 장벽 때문에 보쉬는 대안을 시도했고 프랑스, 영국 및 이탈리아에서 현지 생산을 위한 파트너를 물색하였다. 결국 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에서는 파트너 회사가 보쉬 라이선스 아래 제품을 생산했다. 그 결과 1932년에는 해외 매출이 55%까지 증가했다. 나치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이는 보쉬에게도 중대한 위기였다. 이 정권은 항공기 엔진용 가솔린 분사 기술의 연구 개발을 명령했고 새로운 공장의 건설을 시작했다. 특히 TV 기술은 군사적 목적의 타겟이 되었다. 회사의 해외 매출은 1939년 9%로 떨어지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보쉬는 다시 운영을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했다. 이미 군에 자동차가 많이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쉬가 자동차 관련 생산 활동은 계속할 수 있었다. 독일 산업 전반이 그랬듯이, 징병된 직원들을 대신해 점령지에서 강제 노동자들이 조달되었고 이들은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생활하고 노동해야 했다. 한편, 보쉬 경영진은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핵심에는 회사 고문으로 선임되었던 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가 있었다. 박해받은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지 않도록 회사에 고용하거나 해외로 이주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전쟁 도중 연합국은 반복적으로 보쉬 생산 시설을 폭격했다. 로버트 보쉬는 1942년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공장들이 폐허가 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공장을 후계자가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명확한 지침을 남겼다. 2차 세계 대전 말, 보쉬는 두 번째로 해외 사이트를 상실했다. 생산 시설의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다. 이후 20년간 재건에 전념했지만 새로운 사업 분야도 열심히 모색했다. 1945년까지, 독일 내 보쉬 공장 시설의 50% 이상이 연합국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전쟁 중 보쉬가 군용 차량의 주요 공급자였기 때문에 전략적 타겟이 되었다. 이제 회사를 정리하고 건설하며 직원을 위해 일감을 만들어야 했다. 직원을 다시 고용하고 월급을 지급하기 위해 보쉬는 폐허의 공장에서 철모, 손수레, 우산에서 냄비를 다시 생산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이러한 기구를 스스로 사용하거나 다른 생필품과 교환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보다 복잡한 제품은 연합국 군용 차량에 사용할 스파크 플러그였다. 로버트 보쉬는 1942년에 사망했다. 로버트 보쉬의 유산 집행자들은 그의 희망과 유언장에 따라 1945년 이후 회사를 재건했다. 목표는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지만 이 수익의 일부를 자선 사업에 사용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한스 발츠는 창업자의 뒤를 이어 1963년까지 회사를 운영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는 보쉬 매출의 50% 이상이 해외 사업에서 나왔다. 하지만 1945년에는 거의 제로로 감소했고 회사의 해외 자산은 수용당했다. 파트너와 오래 유지한 좋은 관계 덕분에 또한 브라질, 인도와 같은 국가의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 때문에 글로벌 네트워크의 구축이 점진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1960년이 되어서야 보쉬의 해외 매출이 다시 20%를 넘었다. 1950년대 초, 어려운 시기가 거의 끝나가면서 보쉬는 독일 및 유럽의 경제 기적을 반영하고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제품을 시장에 출시했다. 주방 기구, DIY 매니아를 위한 전기 드릴이 그러한 제품의 예인 것이다. 카 라디오와 같은 핵심 제품은 수백만 개가 팔렸다. 보쉬는 1950년대 중반 전자 부품 개발을 시작했다. 첫 번째 제품이 1958년 생산이 시작된 “바리오드”였다. 이어서 트랜지스터가 출시되었고, 1970년 이후로는 IC가 판매되었다. 회의론자는 비판적으로 보았지만 옹호론자는 열광적으로 개발한 이들 제품은 이제는 보쉬의 핵심 사업 부문이 된 전자장치 분야에 씨앗을 뿌린 것이 되었다. 1950년에서 1960년 사이, 보쉬 직원 수가 15,000명에서 70,000명으로 늘었다. 중형 기업의 중앙집중형 구조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1960년대에 전동 공구 사업부를 필두로 사업 부문이 점차 독립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경제 호황과 완전 고용의 시기에 보쉬는 다른 분야의 기업들을 인수했고 자동차 전장 생산을 위해 수천 명의 직원을 고용했다. 당시 보쉬에게 가장 중요한 시장인 서유럽 자동차 산업이 호황이었지만 다른 분야로의 다변화 역시 중요했다. 1950년대에 이동식 유압 장치, 의료 전자장치, 무선 기술로 다변화한 후, 보쉬는 1963년에 포장 기계 회사를 인수하고 추가로 다른 기업들을 인수하여 활동을 확장하다가 포장 기술 사업부를 설립했다. 보쉬는 1968년 새 연구 센터를 건립하여 연구 개발 자원을 한데 모았고 이 통합 연구 센터는 나중에 경쟁력을 확보해줄 혁신 제품으로 구현될 아이디어를 발아하는 데 필요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회사의 자체 연구 기관도 집적회로와 같은 특수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세계 최대 경제인 미국에서는 1983년이 되어서야 보쉬가 자체 브랜드에 대한 사용 권한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덕분에 회사가 이전의 성공적인 매출을 회복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와 같은 보다 비용 효율적인 국가에서는 사진 및 비디오 기술과 같은 고품질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또한 일본과 같은 주요 시장에서는 합작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보쉬는 이곳에서 1973년에 전자식 가솔린 분사 장치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1984년에는 ABS 시스템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80년에 들어, 보쉬는 통신 분야에 진출하여 인공위성 및 휴대전화용 기술을 구축하고 공공 및 사설 통신 네트워크 구현을 시작했다. 이 부문은 20년 동안 회사 매출의 25%까지 차지하는 등 성공적이었지만, 그 이후 개발 문제로 인해 보쉬는 여러 사업 분야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시큐리티시스템즈 사업부는 사업을 지속하여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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