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달레이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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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달레이지구(영어: Mandalay District)는 미얀마 중부에 위치해 있는 지구이다. [1][2][3]
목차
개요[편집]
만달레이지구의 면적은 37,021.29㎢이며 인구는 7,627,000명(200년 기준)이며 수도는 만달레이다. 서쪽으로 저가잉지구, 머궤지구, 동쪽으로 샴주, 남쪽으로 버고지구, 꺼인주와 접한다. 수도는 만달레이다. 도의 남쪽에는 미얀마의 수도인 네피도가 있다. 만달레도는 미얀마 경제 전체의 15%를 차지하는 중요한 지역이다.
만달레지구의 인구의 대다수는 버마족이다. 그러나 만달레 도시권에는 최근에 윈난에서 이주해 온 많은 중국인이 살고 있다. 또한 인도인도 만달레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영국계 미얀마인의 거주지가 여전히 핀우린과 만달레에 존재한다. 많은 샨족이 구의 동쪽 경계를 따라 살고 있다. 버마어는 구의 주요 언어이다. 그러나 만달레와 북쪽의 보석 광산 마을인 모곡에서는 중국어 사용자가 증가하고 있다.
미얀마에서 양곤과 만달레와 같은 주요 도시들을 제외하고는 교육의 기회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2005년에 4,467개의 초중교에 100만 명이 넘는 학생이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초등학생 중 13%만이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미얀마의 행정 구역은 크게 7개의 삐내(버마어: ပြည်နယ် 삐내)와 7개의 따잉데따찌(버마어: တိုင်းဒေသကြီး 따잉 데따 찌)로 나뉜다. 도의 이름은 에야워디도와 떠닝따이도를 제외하고는 도의 소재지의 이름이 도의 이름이 되었다. 또한 도와 주는 민족 간의 경계가 되어 도는 버마족이 다수를 이루는 반면, 주는 소수 민족이 다수를 이룬다. 도와 주의 하위 행정 구역으로는 군(버마어: ခရိုင် 커야잉)이 있다.[4]
역사[편집]
만달레도의 역사는 고지 미얀마의 역사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현재의 수도인 네삐더를 비롯해 예전 버마족 왕조의 수도였던 버간, 어와, 아마라뿌라, 만달레가 모두 이곳에 위치한다.
티베트버마어파를 사용하는 쀼족이 1세기 초에 만달레도를 포함한 미얀마 중부를 지배했다. 9세기 초에 쀼족은 윈난성의 남조 왕국과의 전쟁으로 쇠퇴하였다. 버마족은 9세기에 윈난에서 이주해 849년에 버간이라는 도시를 세웠다. 바간 왕조는 이후 2세기 동안 점차 미얀마 중부를 지배해 나갔고 11세기 후반에는 미얀마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버마어와 문자가 버간 왕의 후원 하에 발달하게 되었다.
바간은 1287년에 몽골에게 멸해졌고 미얀마 중부는 몽골(1287~1303), 민자잉(1298~1312), 삔야(1312~1364), 저가잉(1315~1364) 등 여러 지배자가 나타났다. 1364년에 아바의 버마족화된 샨족왕이 미얀마 중부를 재통일했다. 미얀마 중부는 1527년까지 어와, 1555년까지는 샨족의 모닌의 지배 하에 있었다. 버마 문학과 문화가 이 시기에 나타났다. 미얀마 중부는 1555년부터 1752년까지 따웅우 왕조의 일부였다. 지역의 일부는 잠시 몬족의 버고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1752~1753). 꼰바웅 왕조는 1885년 12월에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으로 고지 미얀마가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갈 때까지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영국은 고지 미얀마를 만달레, 메이틸라, 민부, 저가잉, 연방 샨주(남과 북)의 7개 도로 나누었다. 만달레도는 현재의 꺼친주를 포함하고 있었다. 1940년경에 메이틸라가 만달레도에 병합되었다. 만달레도를 포함한 고지 미얀마의 대부분은 1942년 5월부터 1945년 3월 사이의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일본의 지배 하에 있었다. 1948년 1월에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을 때 미찌나군과 반모군이 분할되어 꺼친주를 이루었다.
산업[편집]
농업이 주요 생계 수단이다. 만달레도의 주요 작물은 쌀, 밀, 옥수수, 땅콩, 참깨, 면화, 콩, 담배 등이다. 산업으로는 양조업, 방직업, 제당업 및 보석 광산이 있다. 만달레, 아마라뿌라, 바간, 삔우륀, 어와 등의 많은 역사 유적 덕분에 관광업은 만달레도의 경제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티크나무, 따납카나무와 같은 활엽수 또한 재배된다.
주요도시[편집]
만달레[편집]
만달레이는 미얀마 중부의 도시로, 만달레지구의 도청 소재지이다.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인 꾼바웅 왕조의 수도였던 역사가 있는 미얀마의 전통적인 제2 도시이다. 양곤 북쪽 716km에 위치하며, 에야워디강 동안에 자리하고 있다. 인구는 2011년 기준 952,570명이다.
만달레이는 상미얀마의 경제 중심이고 버마 문화의 중심지로 여겨진다. 과거 20년 동안 중국 윈난성에서 중국인들이 계속 유입되고 있기도 한다. 네피도의 상승세에도 불구하고, 만달레는 고지 미얀마의 주요 상업, 교육, 의료의 중심지로 남아있다. 만달레는 미얀마 중부 건조 지대의 에야워디강가에 위치한다. 해발 고도는 64m이다.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만달레는 열대 사바나기후(Aw)와 온대 하우 기후(Cw)의 경계에 속한다. 1월(최한월)의 평균기온은 18도 정도이고 7월 최난월 평균기온은 28도에 이르며 강수량은 연평균 약 1,000mm 정도이다.[5]
아마라뿌라[편집]
아마라뿌라 (버마어: အမရပူရ, 아마라뿌라)는 미얀마 만덜레지구의 도시로, 예전에는 미얀마의 수도였다. 서쪽으로 에야워디강이 흐르고, 남쪽은 어와가 있다. 어머라뿌라는 팔리어로 불멸의 도시를 의미하며 18세기와 19세기에 3차례 기간 동안 꼰바웅 왕조의 수도였다. 역사적으로는 만덜레의 남쪽에 위치해 따웅시(버마어: တောင်မြို့ 따웅묘)로 불렸지만, 오늘날은 만덜레의 도시 팽창에 따라 그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꼰바웅 왕조의 보도퍼야왕은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 돼서 1783년에 새로운 수도인 어머라뿌라를 세웠다. 보도퍼야의 손자 바지더왕은 1823년에 수도를 어와로 옮겼다. 바지도의 계승자인 따야와디왕은 다시 어머라뿌라로 환도하였다.
1841년부터 1857년까지 아마라뿌라는 미얀마의 수도였지만 민돈왕은 1860년에 만덜레로 천도하였다. 궁전 건물은 해체되어 코끼리로 새로운 장소로 옮겨졌고 성벽은 도로나 철도의 재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옛 도시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해자의 일부가 바가야 승원 주변에 남아 있다.
도시는 견직업, 면직업과 청동 주조로 알려져있다. 또한 만덜레로부터의 일일 관광지로 인기가 있다.[6]
어와[편집]
어와(상버마어: အဝ 어와) 또는 잉와(버마어: အင်းဝ 잉와)는 미얀마 만덜레도의 도시로 에야워디강가의 아마라푸라의 남쪽에 위치한다. 예전의 이름은 예더나뿌라(버마어: ရတနာပူရ 예더나뿌라)로, 팔리어로 '팔리의 보석'을 의미한다. 어와는 문자 그대로 버마어로 '호수의 입구'를 의미한다. 9개 호수를 의미하는 인나와(အင်းနဝ)에서 비롯되었다는 이론도 있다.
어와는 타도민비야왕이 이라와디 강과 미트녜 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 인공섬에 세웠고 1364년부터 1841년까지 미얀마의 수도였다. 이전에는 사가잉이 수도였으나 사가잉이 샨족에게 점령된 후, 왕실은 강을 건너 어와로 이동했다. 어와의 왕은 버간 왕조의 붕괴 후 쇠약해진 버마족의 왕권을 회복하였다.
어와 왕국이 1364년에 어와 시에 세워졌다. 파간 문화는 부활하였고 버마 문학은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왕국은 1527년에 샨족의 침략을 받았다.
1555년에 어와는 남부의 버마족 왕국인 따웅우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599년에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752년에 몬족이 버마족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어와를 약탈하였다. 2년 후에 꼰바웅 왕조의 건국자 얼라웅퍼야가 몬족을 진압하고 슈웨보를 수도로 삼았으며 어와를 재건하였다.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1852~53)으로 저지 미얀마가 영국에게 정복된 후에 고지 미얀마는 일반적으로 어와왕국으로 불렸다. 보도퍼야왕(1781~1819) 때 수도는 주변의 아마라푸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바지도왕(1819~1837)은 1823년에 어와로 환도하였다. 1841년의 대규모 지진으로 어와는 버려졌다. 오늘날 고대의 수도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1939년의 지진으로 어와의 궁전의 대부분은 파괴되었다.[7]
바간[편집]
바간(버마어: ပုဂံ) 또는 파간은 미얀마 만달레이지구의 고대 도시이다. 예전에는 아리마다나푸라 또는 아리마다나(적을 물리친 자의 도시)나 탐바디파(구리의 땅) 또는 타사데사(건조한 땅)으로 알려졌고 미얀마의 몇몇의 고대 왕국의 수도였다. 미얀마 중부의 건조 지대의 이라와디강 동안에 위치하고 만달레이에서 남서쪽으로 140 km 떨어져있다.
바간의 유적의 대부분은 바간이 최초의 버마족 제국의 수도였던 1000년대에서 1200년대에 지어진 것들이다. 874년에 핀비야 왕에 의해 비로소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각 왕의 치세마다 수도를 바꾸는 버마족의 전통으로, 아나우라타 왕 치세 때까지 바간은 다시 버려졌다. 1057년에 아나우라타 왕은 몬족의 수도 타톤을 정복한 후에 팔리 문자를 들여왔고, 바간을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키는데 불교 승려와 장인들을 사용하였다. 저지 미얀마의 승려의 도움으로 아나우라타는 상좌부 불교를 도입했고 스리랑카와의 관계를 정립하였다. 12세기와 13세기에 바간은 세계적인 불교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고 인도, 스리랑카, 타이, 크메르 등로부터 많은 승려와 학생들이 찾아왔다. 왕국은 몽골의 쿠빌라이칸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였고 1287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몽골족에게 약탈당한 후에 버마 왕은 바간을 버렸고 도시는 정치적 중심으로부터 쇠퇴하였으나 계속해서 불교 연구의 장소로서 번영하였다.[8]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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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만달레도〉, 《위키백과》
- 〈미얀마/행정구역〉, 《나무위키》
- 〈만달레이주〉, 《나무위키》
- 〈미얀마의 행정구역〉, 《위키백과》
- 〈만달레〉, 《위키백과》
- 〈아마라뿌라〉, 《위키백과》
- 〈어와〉, 《위키백과》
- 〈바간〉,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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