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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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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위치

꺼친주(버마어: ကချင်ပြည်နယ)는 미얀마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주이다. [1][2]

개요

꺼친주의 면적은 89,041㎢이며 인구는 1,270,000명(200년 기준)이며 주도는 밋지나이다. 남동쪽은 샨주, 서남쪽은 저가잉도, 국제적으로는 동쪽은 중화인민공화국 운남성, 서북쪽은 인도 아루나찰프라데시주, 북쪽은 티베트에 접한다.

주의 150만 명의 주민 대다수는 꺼친족(징포족)이다. 꺼친족은 본래 6개 종족의 연합 명칭인데 이들은 다수 종족인 징포족을 비롯하여 라워(마루)족, 라왕족, 라칱족, 자이족 드리고 리수족이다. 주에는 또한 버마족과 샨족도 살고 그외 나가족, 인도계, 중국계 등 약간의 무슬림 등 다른 종족도 살고 또한 약간의 티베트족이 살고 있다. 꺼친주는 기독교가 가장 우세하고 전통 종교인 '낫'을 신봉하는 자들도 아직 있으며 불교는 미미하여 버마족만 주로 신봉하는 편이다. 그외 힌두교, 도교, 이슬람도 있다. 꺼친어인 징포아가 주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이며 버마어는 학교에서 미얀마 공통어로 가르치고 사용하기 때문에 대부분 타운 지역에는 이중 언어로 사용된다.

미얀마의 행정 구역은 크게 7개의 삐내(버마어: ပြည်နယ် 삐내)와 7개의 따잉데따찌(버마어: တိုင်းဒေသကြီး 따잉 데따 찌)로 나뉜다. 도의 이름은 에야워디도와 떠닝따이도를 제외하고는 도의 소재지의 이름이 도의 이름이 되었다. 또한 도와 주는 민족 간의 경계가 되어 도는 버마족이 다수를 이루는 반면, 주는 소수 민족이 다수를 이룬다. 도와 주의 하위 행정 구역으로는 군(버마어: ခရိုင် 커야잉)이 있다.[3][4]

자연환경

꺼친주에는 미얀마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히말라야산맥의 남쪽 끝을 구성하는 하카보 라지(5,889m)와 가장 큰 호수인도지호가 있다.

기후는 대부분 온대 동계 건조기후(Cw)에 해당하고 미얀마 최고봉이자 동남아시아 최고봉인 까까보라지산 부근은 고산기후 및 특이하게도 온대 해양성기후(Csb)가 나타난다.

역사

버마족 중심의 정치체제는 서기 849년 무렵 중국 윈난성을 통해 남하하기 시작한 이들이 건국한 '초기 바간 왕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하지만 바간 왕조 이전에도 이라와디강 북부에는 버마족 이전에 중국 국경을 통해 건너온 퓨(Pyu) 왕국과 남쪽에는 몽족의 도시국가들이 존재해왔다. 특히 퓨족의 도시왕국이 대개 이라와디강 평원의 주인공으로 기원 전후부터 7세기까지 존재감을 드러냈다. 고고학적으로 뚜렷하게 확인되는 이 고대왕국들은 평야에 높은 성을 쌓고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된다.

이후 미얀마는 크게 3갈래의 방향으로 나뉘어 발전과 통합을 반복하게 된다. 우선 이라와디강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의 버마족 왕국(바간 왕조→퉁구 왕조→꽁바웅 왕조), 동북부 산악지대의 샨족 왕국(아바→잉와 왕조), 그리고 남쪽 해안가의 몽족 왕국(따통→한따와디 왕조)이 그 세 가지 미얀마의 원천이 된다. 이들은 상호 교역하고 동시에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며 현재의 미얀마로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거에는 주로 버마족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지만 연방체제가 자리를 잡은 이후엔 이들 3갈래(평야, 해안가, 산악지대) 지리적 특성과 왕조가 뒤섞인 정체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강조되는 중심 흐름은 이라와디 평야의 버마족이 주도한 된 통일 바간 왕국(1044~1287)과 퉁구 왕조(1531~1752), 그리고 꽁바웅 왕국(1752~1885) 이다. 바간 왕조는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로 문자를 도입하고 불교문화를 발전시켜 미얀마의 정체성의 초석을 놓은 미얀마 역사의 가장 빛나는 시절에 해당된다. 이후 몽골족의 침략에 바간이 멸망한 다음에 상당기간 샨족의 잉와, 버마족의 퉁구, 몽족의 한따와디 등 3왕조가 병립하였다. 이후 미얀마를 넘어 동남아 전체에 뚜렷한 영향력을 내보인 버마계 왕국이 퉁구 왕조와 꽁바웅 왕조이다. 16세기 퉁구 왕조는 동남아시아에서 최대의 제국을 이루며 이웃 태국을 사실상 완전히 정복하고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진출하였다. 18세기 꽁바웅 왕조 역시도 1757년 태국 중부의 아유타야와 서남부 아라칸 왕국을 정복하며 현재에 그려진 미얀마의 영토를 사실상 확정하였다.

그러나 천년을 이어온 버마 왕국은 19세기 들어 영국과의 3차례에 걸친 전쟁(버마전쟁, 1823, 1852, 1885)에 차츰차츰 영토를 잠식당하며 최종적으로 꽁바웅 왕조의 붕괴와 영국의 식민지배로 이어진다. 이후 1937년까지 영국령 인도제국의 지방행정구역의 하나로 편입되면서 민족적 자존감에 커다란 생채기를 내었다.

영국은 다수인 버마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인도와 중국인을 대거 끌어들였고, 나아가 소수민족인 까렌족과 카친족 몽족 등을 중심으로 군대와 치안조직을 운영하게 된다. 이같은 식민지배의 분열 정치의 결과로 내부 갈등이 높아지고 이는 독립이후 연방의 분열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적 자각을 독려하던 아웅 산(Aung San, 1915~1947) 등 젊은 독립운동가들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버마의 독자적인 군대 조직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외부 지원세력을 찾기 시작하였다. 당초 중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광저우로 간 이들 일행은 당시 중일전쟁 중인 일본군과 접촉하게 되면서 일본의 지원을 받기로 방향을 바꾸었고, 인도로의 진출을 꿈꾸는 일본의 야심과 버마군 창설을 원했던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요구가 맞아 떨어졌다.

1941년 일본의 도움으로 첫 버마군대 BIA(Burma Independence Army)를 조직해 1942년 일본의 버마 진격에 참여하였다. 영국을 몰아낸 일본은 약속과 달리 이후 3년간 버마를 식민지배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싹텄고, 이에 아웅 산과 버마군(BIA)은 다시금 영국과 연합해 일본과 전투(버마전투)에 나서고 1945년 일본군을 버마에서 몰아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복귀한 영국은 식민지배를 다시금 복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군대까지 보유하고 두 차례의 국제 전쟁까지 경험한 아웅 산을 비롯한 젊은 독립세력은 이에 쉽게 양보하지 않았다. 아웅 산을 중심으로 한 정당인 반파시스트인민해방연대(AFPFL)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끝내 영국 정부로부터 독립을 이끌어 냈다. 1947년 4월 제원의회 선거에서 아웅 산이 이끄는 AFPFL이 압승하여 그의 초대 총리 취임이 유력시 되었지만 7월 19일 정치노선이 다른 세력에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1947년 2월 12일에 아웅산의 버마 정부는 꺼친족, 샨족, 친족과 판롱 회의를 가졌다. 협정은 '변경 지역의 내부 행정의 완전한 자치'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였고 제헌 의회에 의해 꺼친주 창설이 계획되었다. 꺼친 자치주는 1948년에 영국령 버마로부터 독립한 후에 반모군, 미찌나군, 뿌따오군을 합쳐서 형성되었다. 광대한 산지 지역은 꺼친족이 우세했지만 철도 주변과 남부 계곡은 샨족과 버마족이 다수였다. 서북쪽의 경계는 중국 정부가 18세기 이래로 꺼친주의 서북쪽 절반을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해 1960년대까지 경계가 확정되지 않았다. 1960년에 이지역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국민당군 패잔병을 중화인민공화국과 버마가 공동으로 소탕하기로 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영국이 무단 점령한 일부 영역을 돌려받는 대신 장신포의 영유권을 인정하였다. 중화민국 정부는 장신포를 아직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꺼친군은 예전에는 버마군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하였다. 1962년에 네 윈의 집권으로 버마 연방이 폐기되면서 꺼친군은 철수해 꺼친독립기구(KIO)하의 꺼친 독립군(KIA)을 형성했다. 주요 마을철도 주변을 제외하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94년까지 꺼친주는 사실상 독립되어 있었다. 경제의 기반은 중국과의 밀무역, 경옥 교역과 마약이었다. 1994년에 미얀마군이 KIO로부터 일부 경옥 광산을 빼앗은 후에 평화 조약이 서명되어 미얀마 군부의 지도하에 KIO는 계속해서 주의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정전은 즉각적으로 KIO와 KIA로부터 평화 협정에 반대하는 수많은 당파가 떨어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극히 불안정한 상태이다.[5]

산업

꺼친주의 경제는 농업을 기반으로 한다. 주요 작물은 쌀, 사탕수수이다. 광물로는 금, 비취옥 (경옥)이 생산되고, 목재로는 티크 목이 생산된다.

밋지나

밋지나는 미얀마 까친주의 수도이다. 양곤으로부터 1,479km, 만달레로부터 784km 떨어져 있다. 미찌나는 버마어로 큰 강변를 의미하며 사실상 에야워디강의 서안에 위치하고 40km 밑으로 에야워디강의 두 지류인 멜리카강과 메카강의 합류점이 있다. 미얀마 최북단의 하항이자 철도의 종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중국인 민족주의자와 일본군 간의 공성전이 벌어졌고 1944년 8월에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도시는 미얀마의 다른 지역과 철도, 수운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레도 공로의 계획 노선이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주도로서 주 정부가 있고 주의 다른 도시보다 인구가 많다. 도시의 인구는 약 15만 명이고 꺼친족, 샨족, 버마족 및 약간의 중국인, 인도인이 산다.

까친어가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이기는 하지만, 버마어는 국어라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다.

주요 종교는 상좌부 불교와 침례교이고 그 밖의 종교로 애니미즘, 힌두교, 이슬람교가 있다. 밋지나는 정부의 허가 없이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6]

지도

동남아시아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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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1. 가친주〉, 《위키백과》
  2. 미얀마/행정구역〉, 《나무위키》
  3. 미얀마의 행정구역〉, 《위키백과》
  4. 두산백과: 카인주〉, 《네이버 지식백과》
  5. 미얀마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6. 밋지나〉,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

동남아시아 국가
동남아시아 도시
동남아시아 지리
동남아시아 바다
동남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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