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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2일 (목) 16:4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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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닌그라드주(러시아어: Калинингра́дская о́бласть)는 러시아 북서연방관구에 속해있는 가장 서쪽에 있는 주이다.[1][2]
개요
칼리닌그라드주의 면적은 15,125㎢이며 인구는 1,018,624명 (2021년)이다. 러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주이며,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1089km 떨어진 러시아의 최서단에 위치하고 있다. 러시아 내에서 모스크바보다 한 시간 늦은 UTC+2 시간대를 사용하는 유일한 지역이다. 지리상 유럽 러시아 지역에 속하며, 러시아의 북서연방관구(Северо-Западный федеральный округ)를 구성하는 11개의 연방 주체 중 하나이다. 러시아 본토와 떨어져 있으며 남쪽은 폴란드, 북쪽과 동쪽은 리투아니아가 에워싸고 있다. 주도는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 Kaliningrad)다.
발트해의 주요 부동항이자 해군기지, 산업·상업·어업의 중심지이며, 남쪽으로는 리투아니아, 북쪽과 동쪽으로는 폴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의 영토와 이어져 있지 않고, 다른 국가의 영토에 둘러싸여 있는 고립 영토이다. 이는 소련의 해체와 리투아니아의 독립의 결과로 생성되었다. 2018년 러시아가 유치한 제21회 월드컵축구대회의 개최 도시 중 하나였다.
칼리닌그라드시의 원래 도시명은 독일어로 '쾨니히스베르크', 리투아니아어로는 '카랄리아우시우스'로 불렸다. 13세기 쾨니히스베르크는 프로이센의 수도였다. 당시 독일과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을 아우르는 지역의 과학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수학에서 오일러 공식의 기원이 된 유명한 ‘쾨니히스베르크다리 건너기 문제’의 배경이 된 도시이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와 소설가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칸트는 생전 고향을 떠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사람들이 이곳으로 와서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전해주기에 굳이 해외로 모험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동프로이센의 중남부는 폴란드에, 북부는 소련에 각각 할양되었다. 본래 소련 본토와 이어져 있었으나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발트 3국이 독립하면서 러시아의 월경지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국경이 존재한다.
현재 러시아 해군에 속한 발트함대가 칼리닌그라드주 발티스크에 주둔하고 있다. 이곳을 상실하면 러시아 정부로서는 발트해에 해군력을 투사할 방법이 거의 사라지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이다.
또한 특이하게도 주도 칼리닌그라드의 북쪽 시가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 사실은 섬이다.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그바르데이스크에서 강이 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3][4]
자연환경
구릉이 많은 평야 지대인 칼리닌그라드주의 기후는 해양성에서 대륙성으로로 넘어가는 과도기성 기후의 특징이 나타난다. 걸프스트림 난류의 영향으로 겨울에는 유라시아 대륙 지역보다 따뜻하다. 연평균 기온은 8°C이며, 겨울철인 1월의 평균 기온은 -2.5℃, 여름철인 7월의 평균 기온은 17℃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600~740mm를 기록하고, 여름철에 강수량이 많은 편이다. 산림이 영토의 18.5%를 차지하고 있으며, 침엽수림과 활엽수림이 섞인 혼합림이 나타난다.
역사
칼리닌그라드주는 75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이지만, 러시아 연방 주체 중 가장 늦게 러시아 영토에 편입되었다. 1255년에 건설된 칼리닌그라드의 전신 쾨니히스베르크는 1525년부터 1701년까지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다. 19세기에 동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철도망이 개통되면서 곡물·아마 등을 수출하는 교역 중심지이자 해군·육군의 중요한 요새로 발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하였지만, 1945년 소련에 점령된 후 1945년 포츠담 회담의 결정에 따라 동프로이센의 북부와 쾨니히스베르크가 일시적으로 소련으로 이관되었다. 국경 조약 이후 소련령으로 완전히 편입되었고, 소련의 지도자인 미하일 이바노비치 칼리닌(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1895~1946)의 이름을 따서 1946년 칼리닌그라드로 명명되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EU 가입 후 칼리닌그라드를 놓고 러시아와 EU간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었다. 칼리닌그라드의 인접국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2004년 EU에 가입해서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 본토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월경지가 되었고 이 지역 주민에 대한 비자 발급 문제가 러시아와 EU간 최대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러시아의 한 주(州)로 본토와 떨어져 발트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칼리닌그라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갇혀 있는 특이한 지역이다. 칼리닌그라드는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발트 3국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가 독립하면서 본토로부터 단절되었는데, 이 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경유해야 한다.
소련 해체 직후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따로 조치를 취해 줘서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은 비자를 안 받아도 폴란드나 리투아니아를 경유해 러시아 본토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2004년 EU에 가입해 역외국가에 대해서 비자를 요구하는 솅겐조약의 적용을 받게 되면서 문제가 골치아파졌다. 솅겐 지역과 러시아는 예나 지금이나 상호 무비자가 적용되지 않아 칼리닌그라드와 러시아 본토 주민들은 왕래할 때마다 경유 국가인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의 입국 비자를 받아야만 하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EU 가입 뒤에도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에 대한 통행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EU는 불법 입국자와 범죄 행위를 막기 위해서 비자 발급이 불가피하다고 맞섰다. 러시아는 솅겐조약이 적용될 경우 까다로운 출입국 과정과 비자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칼리닌그라드 주민과 경유 화물의 흐름이 사실상 차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려해서 의무적 비자 발급에 반대했다.
당시 이 문제를 취재한 모스크바 타임즈에 의하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국경을 넘나들며 담배와 보드카로 200%의 이윤을 남기며 장사하고 있던 이 지역의 수많은 상인들과 칼리닌그라드를 경유하고 있던 수입차 업자들에게 곤란이 닥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또한 같은 보도에 따르면 2001년 8백여 만 명의 사람들이 칼리닌그라드 국경을 오갔지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비자 발급제가 도입될 경우, 매년 각각의 영사관에서 5만 명과 15만 명의 비자 발급만이 준비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게다가 당시 칼리닌그라드 주 정부에서는 95만 칼리닌그라드 주민의 4분의 1 이상이 아직도 여전히 소지하고 있는 구 소련 여권을 대체할 수 있는 국제 여권이 무엇보다 시급해진다고 밝혀서 혼란까지 예상되고 있었다.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가 발트해로 진출하는 출구인 동시에 연간 수백여 만 명의 내·외국인들이 출입하는 요충지이기도 해 자유로운 출입이 필수적이다. 러시아 측으로서는 최소한 무비자 여행 및 3개월 동안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는 협의가 무엇보다 필요한 상황이었다.
유럽연합과 협상 당시 러시아 정부 측의 무비자 허용 요구 이유에는 자유로운 교류에 대한 필요성 외에도 본토에서 완전히 격리된 칼리닌그라드의 유럽연합으로의 통합 움직임이 가속화되리라는 정치적 우려 또한 있었다. 반면 유럽연합은 국경 방어에 소홀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불법 이민·마약 거래·자동차 도난과 밀수 등 각종 범법 행위를 우려하며 비자 발급이 불가피함을 내세웠다. 이에 러시아 정부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정하고 2001년부터 강력한 국경 통제를 위해 새로운 법률안들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럽연합 측의 새로운 비자 체계는 요금 면에서 더 싸고, 발급 절차도 기존보다 간편하고 신속하게 처리할 것이며, 또한 옵션으로 장기간의 복수비자와 혁신적인 플라스틱 신분증 제도 등을 제공할 것이라는 절충안에도 한동안 러시아는 비자 발급 의무화 요구에 부동자세였다. 푸틴 대통령도 칼리닌그라드의 자유통행권 보장을 역설했다. 푸틴 대통령뿐 아니라 당시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드미트리 로고진도 일부 리투아니아 보수 정당에서 칼리닌그라드를 유럽에 편입시키자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이는 비록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러시아에 비우호적인 자세라고 말하며 다시 한번 칼리닌그라드의 유럽연합으로의 통합 움직임 가능성을 우려했다.
결국 칼리닌그라드주의 특수 상황을 감안해달라는 러시아와 난색을 보이는 유럽연합의 협상은 칼리닌그라드에서 러시아 본토까지 육로로 이동할 때 간이 통행증을 발급받는 조건으로 합의되었다. 비자와 간이 통행증은 발급 난이도와 수수료에 차이가 있다. 비자는 말 그대로 다른 EU 국가들로 가는 비자와 동일하게 취급되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발급을 못 받을 수도 있으나, 간이 통행증은 육로로 24시간(철도로 6시간) 내에 통과한다는 조건으로 발급을 쉽게 내 준다. 수수료도 일반 육로용은 5유로, 철도 통과 전용은 무료이며 육로용 간이 통행증은 리투아니아 대사관을 방문해야 하지만 철도용 간이 통행증은 기차표 예약과 동시에 신청할 수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벌어진 이후, 러시아군이 퇴각한 지역에서 엄청난 규모의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각종 잔혹행위가 잇따라 확인되면서 2022년 4월 4일, 칼리닌그라드와 접경한 폴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4개 국가는 러시아 및 벨라루스와 통하는 모든 국경과 통신선을 48~72시간 안에 차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조치로 인해 월경지인 칼리닌그라드주는 해로와 공로를 제외하고는 본토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서 특히 수바우키 회랑 차단에 적극적인 리투아니아에 대해 보복이 있을 수 있다고 협박하고 있는 상태다. 칼리닌그라드 본토 간 열차는 계속 운행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리투아니아 내 여객 취급을 중단하고 통과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산업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의 전반적인 경제 위기와 함께 칼리닌그라드주의 산업 또한 크게 약화 되었으나, 특별 경제 구역 지정에 관한 연방법이 발효되면서 경제 위기가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자동차 제조 공장, 얀타르 조선소 등 주요 생산 공업이 복구되고 곧 활발해지면서 산업 전반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주요 산업은 자동차, 조선, 전기, 목공 등이다.
양질의 호박석을 전 세계 매장량의 90% 이상 보유하고 있으며, 고품질의 암염, 이탄 등도 이곳의 주요 광물 자원이다. 해상의 유류 터미널에서는 서유럽 및 스칸디나비아 국가에 연간 2백만 톤 이상의 석유를 제공해준다.
교통
주도인 칼리닌그라드에서 북서쪽으로 17km 떨어진 곳에 흐라브로보 국제공항(Международный аэропорт Калининград Храброво)이 있다. 철도는 2019년 기준으로 칼리닌그라드주로 들어오는 열차편만 운행된다. 칼린그라드에서 폴란드나 리투아니아로 향하는 열차 편은 운행이 중단되었다.
버스편으로 러시아 본토와 폴란드, 리투아니아, 독일 등 주변 국가로 갈 수 있다. 칼리닌그라드 항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정기 여객선이 운항한다.
교육
1947년에 개교하여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이름으로 명명된 발틱 연방 대학교(Балтийский Федераль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имени Иммануила Канта)가 지역의 최고등 교육기관으로 자리하고 있다.
관광
유명한 사적으로는 1255년에 축성된 성과 14세기의 성당 등이 있다. 1946년에 개관한 칼리닌그라드 지역 역사·예술 박물관(Калининградский областной историко-художественный музей)은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유명하며, 2006년부터 국제 재즈 페스티벌인 '돈 센토 재즈(Don Cento Jazz)' 와 발트 예술제가 매년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1333년 세워진 뒤 제2차 세계대전 후 재건된 칼리닌그라드 성당은 프로이센 왕들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이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무덤이 있다. 쾨니히스베르크 성의 폐허 위에 지어진 '소비에트의 집'은 불길한 집으로 여겨져 전쟁 때도 점령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호박박물관과 칼리닌그라드 지역역사문화박물관 등에서 역사와 문화를 둘러 볼 수 있다.
칼리닌그라드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칼리닌그라드주의 주도이다. 칼리닌그라드주는 원래 독일 영토였다가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의 결정에 따라 소련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소련 해체의 여파로 러시아의 엑스클라베(다른 나라에 둘러싸인 채 본국에서 떨어져 있는 영토)가 되었다. 둘 다 유럽연합(EU) 회원국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칼리닌그라드주는 냉전 기간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칼리닌그라드의 원래 이름은 쾨니히스베르크였으나 1946년 볼셰비키 원로인 미하일 칼리닌 연방최고회의 간부회 의장(명목상 국가원수)이 사망하자 소련 정부가 그를 기리기 위해 도시 이름을 바꾸었다.
소련은 영토 합병에 이어 옛 시가지의 역사적 흔적을 대부분 지우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전쟁 이전의 기념물 몇 개가 아직 남아 있으며 해안에는 휴양지가 여기저기 산재한다. 쾨니히스베르크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소련 영토로 합병되면서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였던 독일인은 강제 추방당하였고 그 자리는 러시아인들로 대체되었다. 현재는 주민 10명 중 거의 9명이 러시아인이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와 소설가 에른스트 호프만(1776~1822)이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칼리닌그라드는 2018 러시아 월드컵을 개최한 11개 도시의 하나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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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칼리닌그라드주〉, 《위키백과》
- ↑ 〈칼리닌그라드주〉, 《나무위키》
- ↑ 〈칼리닌그라드주〉, 《네이버 지식백과》
- ↑ 〈유럽지명사전 :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네이버 지식백과》
- ↑ 〈유럽지명사전 :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칼리닌그라드주〉, 《위키백과》
- 〈칼리닌그라드주〉, 《나무위키》
- 〈칼리닌그라드주〉, 《네이버 지식백과》
- 〈유럽지명사전 :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네이버 지식백과》
- 〈유럽지명사전 :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러시아유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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