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
원 또는 대한민국 원(Korean Won)은 대한민국의 통화이다. 1902년에서 1910년 사이에 "원"이라는 이름으로 통화가 최초로 유통되었으며 대한민국의 통화로 등장하는 것은 1945년에서 1953년 무렵이다. 현재의 원화는 1962년에 도입되었다. 圓(원)이라는 한자 표기는 1953년 화폐 개혁 이전에 사용하던 표기로서, 지금은 예전의 원과 구별하기 위해 한자 없이 한글로만 표기한다. 원화의 하부 단위로 1/100의 가치를 지닌 "전"(錢)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회계용으로만 사용된다. ISO 4217 코드는 KRW이고 기호는 ₩을 사용한다. 영문 표기는 WON이다.
목차
개요
대한민국 원은 대한민국의 통화이다. 긴급통화조치법에 따라 기존의 환을 대체하여 통용되어 오다가, 아예 한국은행법에 명문으로 규정되었다.
ISO 4217 국제표준화 화폐코드는 KRW이고, 약식 기호로는 ₩와 같이 나타낸다. 통념과는 달리 이 원(Won)에 대응하는 공식적인 한자는 없다. 처음 도입 당시에는 圓을 썼지만 몇 차례의 화폐 개혁을 거치면서 공식 한자 표기를 없앴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元을, 대만에서는 圓을, 홍콩에서는 圜을[1] '원'의 한자 표기로 사용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다른 나라의 통화와 구별하기 위하여 '韓'을 앞에 붙여 '韩元' 또는 '韓圓', '韓圜' 등으로 표기한다. 대한민국 원이나 대한민국 환, 일본 엔, 중국 위안 등은 전부 기원이 같은 단위로, 과거 동아시아에서 사용된 화폐가 주로 동그란 동전인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오해를 하는데 실제로는 대항해시대 스페인의 은화가 명에 들어오면서 국제적인 기준화폐로 사용되었는데 이 스페인 은화가 기존의 동아시아의 은화와달리 동그란 모양을 하고있어서 은원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원이라는 단위가 유래되었다.
보조단위로는 전(Jeon)이 있는데, 환율 계산 등에만 사용될 뿐 일반적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 한국은행법 제47조의2(화폐단위)
- ① 대한민국의 화폐단위는 원으로 한다.
- ② 원은 계산의 단위가 되고 100전으로 분할된다.
- ③ 원은 영문으로 WON으로 표기한다.
- ④ 전은 영문으로 JEON으로 표기한다.
- [본조신설 2012.3.21.]
- 단위 입력하기
한국어 윈도에서는 \(U+005C, 역슬래시, reverse solidus)를 입력하면 반각 문자 ₩이 나오긴 하지만 다른 언어판 윈도나 다른 운영 체제에서는 그냥 역슬래시(\)로(일본어 윈도에서는 ¥으로) 나오므로 다른 방법으로 입력하는 것이 좋다. ₩(U+20A9)는 Alt + 8361(Num lock을 켜고 숫자 키패드로 입력)를 통해 입력할 수 있다. 전각 문자 ₩(U+FFE6)는 ㄹ + 한자 또는 Alt + 65510(역시 숫자 키패드로)로 입력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한글 IME에서는 Alt + =으로 전각 모드로 전환한 후 \ 키를 누르면 전각문자 ₩이 나온다.
이런 것조차도 문제가 될 수 있는 환경이 있으므로 공식 서한 등에서는 통화 코드인 KRW를 사용하는 편이다.
역사와 권종
1기
화폐 앞면 뒷면 백원권 (1950. 7. 22.)
경복궁 광화문 당초 문양 천원권 (1950. 7. 22.)
이승만 당초 문양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처음 만들어낸 시리즈이다. 당시 환율은 1달러 = 1,800원. 하지만 2주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시작부터가 순탄치 않았다. 전쟁 초반 북한군이 사흘 만에 수도 서울까지 점령하매 예상치 못하게 급히 피난을 가느라 겨우 금괴 1.1톤과 은괴 2.5톤만을 건지고 겨우 철수했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 한국은행을 접수하고 나니 나머지 금괴 0.2톤과 은괴 16톤, 그리고 한국은행이 아직 미발행한 지폐 105억 원 어치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지폐를 발행하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도 직원들이 장비를 다 방치하고 피란을 떠났기에 인민군은 105억원의 미발행권은 물론 앞으로도 무한히 조선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걸 그대로 꿀꺽한 북한은 남한 정부의 경제를 마비시킬 작정으로 미친 듯이 미발행권을 뿌리고 그걸로도 부족해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설비를 이용해 미친듯이 조선은행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전시에 적군에 의해 아군의 화폐가 무참히 발권되는 상황이었으니 정부는 특단의 조치로 화폐 개혁을 단행한다.
공식적 첫 은행권 출범은 1950년 7월 22일 발행된 '이승만 한복 1000원권'과 '광화문 100원권'. 기존의 '조선은행 원'과 같이 사용이 가능한 통화였다. 당시 천원권의 경우에는 지폐의 판 번호 1번부터 500번까지는 일본에서 인쇄했고 판 번호 501번 이후는 한국에서 인쇄했다. 그래서 일본인쇄권과 한국인쇄권은 품질이 다르다. 판 번호 500번까지 일본에서 인쇄된 이유는 기술력 문제가 아니라 전시의 급박한 상황 덕분이다. 물론 기술력도 일본이 한국보다 낫긴 했지만, 중요한 건 상술했듯 적군이 아군 지폐를 무자비하게 조폐한다는 것이었고, 때문에 정부는 기존의 지폐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최단시간 내에 새로운 도안을 만들고 대량인쇄를 해야 했는데, 상술했듯 인쇄설비는 다 서울에 두고 왔고 직원들은 한참 피란 중이라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인이 안 되었다.
때문에 6월 29일, 한국은행 구용서 총재는 도쿄지점에 전화를 걸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일본 대장성을 통해 새 도안을 가진 100원권 및 1,000원권 지폐를 대량 인쇄, 그것도 보름 내로 해야 한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주었다. 도쿄 지점의 김진형 부총재는 지시를 받자마자 대장성이 아닌 GHQ에 쳐들어가 미군에 상황의 급박함을 읍소했고, 역시 상황의 심각함을 이해하고 있던 GHQ는 대장성에 최대한 빨리 새 도안을 내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는 일본 내에서도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는 레드 퍼지가 극에 달하고 이에 맞서는 노동자 파업이 심하던 때라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에 대장성 인쇄청장 이지치 다쓰오(伊地知辰夫)는 이럴 때에 연합군에 최대한 협력하는 것이 일본이 살 길이라며 전 노동자들에게 무기한 밤샘 특근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신도안은 단 이틀 만에 튀어나왔고[6] 도안이 확정된 후 지폐 인쇄작업이 시작되었는데 GHQ에서 급파한 미군 병력들이 인쇄소를 쳐들어가 노동자들에게 총을 겨누며 독촉할 지경이었다. 그 바람에 보통 6개월은 걸리는 작업이 열흘 만에 끝났고, 결국 7월 13일에 1차 인쇄분이 미군 수송기편으로 부산 수영비행장을 통해 대한민국에 도착한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부터 1950년 7월 20일까지 피난자금으로 조선은행권의 긴급인출(자연인 1명당 10만 원)을 실행하고, 적이 불법으로 유통시킨 조선은행 미발행 1000원권과 북조선중앙은행권은 무효로 간주한 다음 1950년 9월 15일부터 1950년 9월 22일까지 한국은행권의 긴급교환(자연인 1명당 10만 원)을 실행했다.
화폐 앞면 뒷면 오백원권 (1952. 10. 10.)
이승만 파고다공원 신(新) 천원권 (1952. 10. 10.)
이승만 파고다공원
1952년 완전히 서울을 되찾았을 때 10월 10일 긴급히 조선은행권을 이승만&파고다 공원 1,000원권/500원권 (국내 생산인 두 번째 시리즈)과 교체해주며 무마하려 했으나 이미 통화시스템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바람에 유명무실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2월 15일 긴급명령으로 화폐개혁을 시행하여 경제혼란을 수습하도록 지시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때 환율은 1달러=6000원. 대한민국 환과의 교환 비율은 100원 = 1환이었다. 한국은행의 경제통계에 따르면 도매물가지수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약 1만 배만큼 폭등했다.
이 시기가 대한민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당대 생존인물인 이승만을 화폐도안에 올린 사례다. 환 시절에는 한창 집권기였으니 당연히 올라갔다.
2기
대한민국 환을 화폐개혁으로 폐지하고 난 뒤의 1962년부터 발행된 "원" 단위의 모든 화폐는 지금도 쓸 수 있으며, 공식적으로 한국은행 및 시중은행에서 현행권과 교환이 가능하다. 물론 역사적인 가치를 생각한다면 실제로 사용하려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외국 시중은행이나 환전소에서 구권, 현행 지폐 환전이 가능하지만 동남아에서는 현행권만 환전이 가능하다. "전(jeon)"은 안 된다. 다만, 사용시에는 액면가 그대로로만 사용할 수 있지만, 수집가 등에게 팔면 몇십배 내지는 몇천배, 몇만배까지도 받을 수 있어서 사용하는 게 손해라는 것이 문제.
지폐
1차 (영제권)
1962년 6월 10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발맞춰 내놓았다. 조선 엔과 달리 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9] 조선 엔 및 대한민국 환과 교환하는 비율은 1000엔=10환=1원이 된다. 이 조치 이후로 기존의 환을 전면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사용량이 폭주하는 소액권 보급에 차질이 생김에 따라(이 당시엔 원화 동전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50환과 10환 동전의 통용을 1975년 3월 21일까지 허용하였다.[10][11] 한국은행에서는 "가"시리즈로 명명하였다. 예를 들면 총석정 50원은 "가 50원권". 참고로 1993년 이전에는 갑을병정(甲乙丙丁)순으로 불렀다. 거기에 개정판이라면 개(改)를 붙여 개갑이라는 식이다.
1차 시기 지폐는 영국과 프랑스의 조폐 회사에서 도안, 제작했다.
화폐 앞면 뒷면 십전권 (1962. 12. 1.)
당초 문양 액면가 오십전권 (1962. 12. 1.)
당초 문양 액면가 일원권 (1962. 6. 10.)
한국은행 휘장 액면가 오원권 (1962. 6. 10.)
한국은행 휘장 액면가 (가) 십원권 (1962. 6. 10.)
한국은행 휘장 액면가 (가) 오십원권 (1962. 6. 10.)
총석정 횃불 (가) 백원권 (1962. 6. 10.)
독립문 횃불 (가) 오백원권 (1962. 6. 10.)
숭례문 횃불
비공식 별칭은 영제(英製) 시리즈. 영국의 데라루(De La Rue)사에서 인쇄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래서 한글 글꼴이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상당히 어색해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디자인부터 인쇄까지 죄다 영국에서 했으니. 물론 감수는 한국은행이 했다. 종류는 1원부터 500원까지 6종이 발행되었는데, 1원 미만 (옛 10환단위 미만)의 소액을 처리하기 위해 10전과 50전짜리 지폐를 추가로 도입하여 모두 8종이 되었다. 굉장히 아담하고 뭔가 성의없어 보이는 저액권과 기본적인 구성을 갖춘 고액권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특징. 한국은행권 중에선 가장 비싼 값으로 수집가들에게 거래되는 시리즈이며, 가장 비싼 것은 위에도 걸려있는 총석정 50원이다.
여담이지만 이 당시(1960년대 중반) 물가는 쌀 1,100원/20kg가량, 쇠고기 1근 300원, 라면 1개 10원, 서울에 집 한채 혹은 고급차 1대 70만원 가량이었다. 또한 일부 기록에 의하면 대통령 봉급이 78,000원이었다고.
2차
1960년대를 주름잡던 권종들이다. 오백원권이 최고액권이었으며, 아직 10원, 50원, 100원 주화가 등장하기 전이다.
2차 시기의 지폐는 영국의 조폐 회사에서 도안, 제작했다. 세종대왕의 도안을 보면 서구형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화폐 앞면 뒷면 (나) 십원권 (1962. 9. 21.)
첨성대 거북선 (나) 오십원권 (1969. 5. 21.)
파고다공원 횃불, 무궁화 (나) 백원권 (1962. 11. 1.)
독립문 경복궁 경회루 (다) 백원권 (1965. 8. 14.)
세종대왕 한국은행 본관 (나) 오백원권 (1966. 8. 16.)
숭례문 거북선
- 2차에 속하는 지폐들의 정확한 등장 순서는 나 십원권 → 나 백원권 → 다 백원권 → 나 오백원권 → 나 오십원권 순서이다.
3차
주로 1970년대를 주름잡던 주요 시리즈로 보면 된다. 전반적으로 기술의 발전으로 새롭게 내놓은 성격이 강하다. 경제규모의 팽창이 점진적으로 가속화되고 오일 쇼크의 영향으로 물가상승률이 높은 수준을 기록하여 원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면서 오십원, 백원 주화가 발행되며 서서히 지폐를 밀어냈다. 또한 이때 천원, 오천원, 만원권 지폐가 처음 나오면서 고액권 지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4차
5차 (현행권)
동전
수표
기념 화폐
위상
액면 대비 가치
대한민국 지도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