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북부지방
한국 북부지방(韓國北部地區)이란 대한민국 남북으로 한반도를 북부·중부·남부로 크게 3등분할 때에 사용되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를 이른다. 다만,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 초·중등 교과서 등에는 군사분계선 북쪽에 있는 해서지방(황해도)을 북부 지역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강하다.[1][2]
개요
한국 북부지방은 문화라든가 기후 면에서 일제강점기에 '북선'과 '서선'으로 구분되듯 평안도 권역과 함경도 권역의 차이가 심하다. 공통점이라면 외부의 적에 용맹하게 대응한다는 이미지가 있었고, 양반과 노비가 모두 드물어 대체로 사람들끼리 신분이 평등했다는 것이다. 고조선부터 시작하여 백두산과 평양 때문에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는 상업이 발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잡지인 '별건곤'에서는 평안도의 '색향'에 대한 이미지와 함경도 여성의 장사를 잘하는 모습을 설명하기도 한다. 평안남도를 제외하면 평균적으로 키가 크기도 했다. 장준하, 백선엽, 주현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고 평안남도 출신이지만 야구감독 김응용도 있다. 그러나 음식의 경우 평안도는 싱거우나 함경도는 맵짠 음식도 많으며, 식생도 중부지방 느낌이 어느 정도 나는 평안도에 비해 함경도는 종비나무 같은 나무를 보면 이국적인 느낌이 난다. 사투리의 차이도 어휘와 억양 차가 심해 처음 듣는 사람도 구분이 가능해 흔한 북한말의 이미지는 평안도 말투고, 함경도 말투는 요즘으로 따지면 경상도에 비유되는 경우가 많다. 화법도 예절을 중시하고 거절을 바로 잘 못하는 평안도와 달리 함경도는 솔직함을 중시하고 직설적이다. 소련이 영향을 행사하기 전 해방 직후까지는 정치성향도 정반대여서 평안도는 우파가 득세하였고, 함경도는 좌파가 우세한 고장이었다. 참고로 황해도는 중립적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 두 지방만 떼고 보면 동서로 상당한 거리 차가 있어 평양과 라선의 거리가 평양과 전라남도 해남의 거리와 비슷할 정도다.
역사적으로 북부지방을 얘기할 땐 백두산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십중팔구 평안도 이야기다. 사실 역사의 초창기에는 평안도 일대는 남만주 지역과 더불어 한민족의 중심지였다. 고조선이 나타난 곳도 논란은 많지만, 현재는 대체로 랴오닝강~평양 사이를 중심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고구려 시기에는 역사 내내 중심을 차지하던 지역으로, 국내성조차 압록강을 마주보고 현재는 만포시, 강계시와 붙어있다. 농토가 풍부하고 여러 정치적 이유로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 이후 250여년간 수도의 지위를 유지도 했다. 특히 고구려의 경우 삼국 중에서도 압도적인 국력을 가진 한민족의 대표주자였기 때문에 고구려 후기 시대의 평안도는 진정 전성기였다. 그러나 고구려 이후 한국 역사에서는 최고 중심지 위치에서는 밀려나고 제2, 제3의 지역으로 바뀐다. 이는 요동의 상실로 인해 평안도가 대북방의 최전선이 되어버려 더 이상 한반도 정주 국가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려시대에는 고구려의 수도라는 점에서 크게 중시되었고 제2의 수도 서경으로 대접받았으며, 조선시대에도 여기에 기자의 봉토라는 인식까지 이어져 평양은 조선 제2의 도시로 군림할 수 있었다. 평안북도 의주군도 국경에 위치했기 때문에 중국과의 교역지라는 이점을 살려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번성하기도 했다. 현대에도 일제강점기에 신의주시가 그 기능을 맡아 북한에서 평양에 비슷한 수준으로 잘 산다. 다만 다른 곳은 소위 '밀무역'을 비롯한 여러 유형의 무역을 차단하는 경우가 흔해서 북한 치하에서 국경도시가 고난의 행군 무렵을 제외하고는 신의주, 라선을 빼면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중부, 남부 지방과 달리 당파를 형성하지 못해 조선 중기 이후부터 구한말까지 중앙권력에서 소외되기 일쑤였다.
함경도는 역사의 중심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강원도에도 궁예의 태봉국 철원성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수도가 없었던 황해도도 고려시대에 수도권의 배후지 역할을 했고 고구려 제2의 수도인 한성이 있었으며 평양을 수도로 한 국가의 배후지이기도 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함경도의 입지가 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평안도가 발전하던 시기에도 정조가 함경도는 평안·황해도처럼 재화가 풍부한 것도 아니고 삼남 지방처럼 벼와 솜이 풍부하지도 않다며 위로할 정도였다. # 심지어 북간도조차 발해시대 수도가 위치해 한때 크게 번영했었다. 그래도 한민족과 여진족의 성산인 백두산이 위치해있어 상징성 부분에서 의미가 있다. 근대에는 탈북민, 조선족, 고려인의 대부분의 고향이나 기원이 함경도이기에 주목받기도 한다. 2000년대까지는 실향민이 많은 평안도가 이 지역을 대표하여 북한 사람이 모두 '네다'라는 평안도 사투리만 쓰는 줄 알고 싱거운 음식만 먹는다는 등 오해가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탈북민, 조선족의 영향으로 'ㅁ까'라는 함경북도 사투리와 평안도 사투리가 섞인 묘사가 등장하는 등 다른 오해가 생기고 있다. 사실 함경북도는 '네다'를 안 쓰고, 평안도는 'ㅁ까'를 쓰지 않으니 구분을 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함경도가 나오는 건 동예와 옥저와 말갈 언급할 때 정도며, 그 외 윤관의 동북 9성이나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 때나 가끔씩 나오는 정도. 오히려 국어 교과에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들어 충청도 인구에 육박하게 되는 경제적 발전으로 이곳 출신 예술인이나 그 작품이 언급되는 정도다. 그 전에는 8도에서 가장 인구가 적었다. 삼수갑산 같은 극한의 오지에서도 해모수와 관련된 전설이 있기는 하고 나름 역사가 있긴 해도 분단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면도 있다. 이성계 가문이 함흥을 중심으로 세력을 길러 조선을 건국하긴 했지만 수도가 된 적은 없다. 게다가 태조의 출신지라는 위상도 얼마 안 있어 바닥을 뚫고 떨어져버리는데, 조선 초에 연달아 발생한 여러 반란들 때문에 함경도 전역이 반역향으로 찍혔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사건이 국경인의 난으로, 아예 왕자 두 명을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겼다는 이유로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정약용도 이 사건을 들며 함경도에 대해 좋지 않은 서술을 남겼다. 평안도는 기자가 도읍한 곳이라고 하여 중화의 문명을 일찍이 받아들인 곳이라고 인식되었으나, 함경도는 여진의 유습이 남아있다는 인식도 있었다. 고려 때부터 이미 강동6주의 편입을 통해 4군 일대를 제외한 전역이 고유 영토로 인식된 평안도와 달리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기 전에는 함경도 주민을 제외하면 조선의 영토는 맞으나 '고유' 영토라는 인식도 비교적 낮았고 여진으로부터 수복한 '점령지'라는 인식이 강했다. 또한 함경도의 전 주인인 여진족은 조선으로부터 야만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천대받기 일쑤였다.
함경도 주민은 제대로 된 조선인임을 인정받기 위해 함경도가 조선 왕조의 중요한 근거지임을 알리려 하였고, 지역 반란이 있었다 해도 지역민들이 봉기하여 주모자들을 처단하였음을 부각시켰다. 이시애는 토호는 맞지만, 국경인의 난에서 국경인은 전라도 출신으로 유배되었으나 자신이 진압했다는 것이다. 또한 단군과 기자 이래 조선의 고유한 영역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변경지대라는 특성 때문에 고착된 무예에 능한 사람들이 주로 산다는 궁마지향이라는 관념을 극복하기 위해 지역마다 중앙의 주요 학자들과 학맥이 이어진 문학지사들이 있는 유교적으로 교화된 곳이라 강조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중국과 대항한 고구려·발해의 문화권과 연관된 백두산이 중시되는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영·정조 시기 조정이 함경도 지역의 왕실 유적을 현창하는 분위기와 맞물려 왕실과 관련된 비석 등을 세우도록 요청했다.
조선초 북부지방 지명 중에는 대놓고 변방임을 드러내는 지명들도 보인다. 안변(安邊), 영원(寧遠), 삭주(朔州), 강계(江界) 등. 함경북도 지역은 조선 초 4군 6진 개척 등 여진족 정벌을 통해 얻은 영토이기에, 기존 여진식 지명을 조선식 지명으로 개칭하거나 아예 새로 지은 지명이 많다. 다만 현지에서는 여진족과의 관계는 한민족이 이들을 밀어냈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한국 배우 이순재는 두만강변 회령시에서 태어났는데 자기 조상이 6진을 개척했다고 믿는다. 일제강점기에도 나운규 등 문화적으로 유명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봤자 함경도는 애초에 명문가가 부재했고 평안도 역시 명문가가 이미 여말선초 이후로 홍건적의 난 같은 외침 등으로 초토화되어 거의 사라졌기에 조선 건국 무렵 평양 출신 조준까지만 영의정이 되고 그 후손은 능력이 없어 중앙 진출이 사실상 막혀 있었다. 조선 후기에 평안도 한정 과거 급제를 많이하나 예전부터 내려온 명문가가 없어 승진을 못하는 결과적 차별이 이어졌고, 이것에 대한 불만의 터진 예가 바로 홍경래의 난이다.
평안도와 함경도 북부는 조선시대 들어 삼남 지방 출신이 개척한 곳이다. 죄다 북한에 있고 여기서 살았던 실향민도 거의 세상을 떠났으며, 북한도 실질적으로 전통을 중시하지 않아 정보가 부족해, 현재적 관점에서 지역 차별을 언급하는 주장이 인터넷에 상당히 많다. 그러나 함석헌 같은 3.1운동을 기억하는 수준의 고령층 실향민 등의 발언이나 독립운동사, 일제강점기 이 지역 출신 인사 등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면 단지 이 지역 출신은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이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차별받은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 동조하고 잘 어울렸다. 이런 모습은 가루지기 같은 작품이나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움직임에도 호응하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홍경래의 난에서 자주 인용되던 정감록은 길한 곳으로 강원도나 그 남쪽의 지역을 언급한다. 실제 차별을 아는 사람인 함석헌의 증언은 이 글을 참조하자. "평안도 쌍놈이다 해서 차별대우하던 데에서도 임금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성을 향해서 며칠을 두고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봐서 임금이 고맙다, 우리 임금이다 하는 그런 건 없었지요."라지만 여기도 고종 독살설 등으로 분개하여 3.1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조선은 신분 갈등이 더 컸지 지역 갈등은 서로의 역사성을 인정하기에 부수적인 문제였다. 그 함경도도 북부는 조선 왕조의 의지로 새로 얻은 곳이다. 분단이 되기 직전까지는 평안도 쪽이 우파가 득세하고, 함경도의 좌파는 수많은 인물들이 훗날 김일성에 의해 숙청 당하는 등 전혀 지금과 같은 분단을 예상하지 못했으며, 한국전쟁 때도 이곳을 대한민국이 차지하여 통일을 하려다가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과 평양 축구팀이 상당한 라이벌이었는데 이건 그냥 평양이 큰 도시일 뿐이라 과거에는 민족화합, 현대에는 남북화합의 수단으로 인식된다. 괜히 경평전 부활이 남북교류 과정에서 언급되는 것이 아니다. 이건 조선일보가 주최한 대회인데 "조선의 양대 도회인 평양과 경성 두 도시의 친목을 위하여 실로 축복하여 마지 않는다"라는 안재홍 부사장의 언급이 있어 친목을 위한 대회라는 언급이 있다. 실제 경평전 참가자는 민족 단합을 위해 경기가 주최되었다고 한다. 마라토너 손기정 같은 평안도 출신도 경기도 출신의 심훈 등과 인연을 이어 현재 그 후손까지 잘 지낸다. 상해임시정부에서도 대립이 있었는데 이것도 결국 신분별로 모인 것이라 여운형 같은 신분 의식이 없는 사람은 경기권 출신 양반이었으나 평안도 출신인 안창호와 잘 지냈다.
평안도의 경우 조선 후기 중국(청나라)과 교류하는 길목이었기에, 무역을 통한 상업이 발달하기도 했다. 이 지역이 발전하던 시기는 전부 무역을 활발히 하던 시기였다. 상업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해방 직전까지 남아 있다고 할 정도다. 실향민도 이곳 출신은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한 면도 크지만 리버럴한 성향이 있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무역을 세계에서 유례없이 기피하는 북한 정권이 들어서며 이 지역은 크게 몰락하게 된다. 현재의 북한도 수출중심 정책을 펴야 성장할 수 있으나 자력갱생 강조와 같은 정반대의 정책을 펴서 경제적으로 큰 폐단을 낳게 된 것이다. 농업으로만 먹고 살기에는 청천강 상류 일대를 제외하면 소우지라 평안도도 '진압농법'으로 수분 증발을 막아야 벼농사가 제대로 될 정도였는데,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다.
신의주~철원을 잇는 선의 이북은 너무 춥고 산이 많아 농사를 잘 못하니 인구밀도가 낮은 편이다. 평안남도는 좀 예외지만... 개마고원과 중강진은 특히 악명이 높아서 쌀 농사를 못할 정도며, 해안을 빼면 연간 최저기온이 -20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지역이 없다. 심지어 10월이나 5월에도 눈이 오는 지역이 다반사다. 북부지역에서 가장 발달하고 온난한 남포 앞바다가 겨울이면 꽁꽁 얼 정도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남한에서 겨울에 바다가 어는 것은 혹한이 올 때나 가끔 강화도-인천 앞바다가 어는 정도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추운 곳인지 잘 알 것이다. 게다가 함경도 지역은 평안도와 비교하면 그 곳에서 가장 적은 연강수량을 기록하는 대동강 하류가 800~900mm인데 반해 강수량이 매우 적어 함흥 남쪽을 제외하고 베이징 수준의 600mm 가량의 비가 온다. 조선시대에는 함경도는 수렵이나 인삼 채취, 북어 잡이, 광산 등으로 생계를 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공업으로 먹고 사는 지역이었다. 그나마 이 지역은 흥남에 세계 3위 규모의 거대한 비료공장이 들어서고, 무산 등지의 광업도 활성화 되었으며, 러시아와의 무역도 가능해지며 일제강점기에는 경제적인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흔히 춥다는 관념이 많지만, 강원 영서와 평안남도가 비슷한 수준이고 동부전선 고지 근처는 개마고원을 제외한 평안북도 산간과 비슷하다. 인구의 대부분은 당연히 그나마 기온이 견딜만한 수준인 곳에서 살며, 현대 북한에서도 개마고원은 추운 곳으로 손꼽힌다. 혜산이 그나마 크지만 평안도의 도시들에 비하면 작은 편이다. 평양과 신의주의 1월 평균 기온은 -5.5 ℃, -7.2 ℃로 남한에서 평균 기온이 가장 낮은 축에 속하는 제천(-5.2 ℃), 철원(-5.7 ℃), 평창(-6.9 ℃)과 비슷한 수준이고, 김화(-7.9 ℃), 임남(-9.7 ℃)보다는 살짝 높다. 각각의 최저기온은 평양 -30.2 ℃, 신의주 -26.0 ℃, 평창 -28.9 ℃, 철원 -29.2 ℃로 오히려 평양이 더 낮다.[92] 연평균기온은 평양 11.0 ℃, 신의주 9.1 ℃로, 철원(10.3 ℃), 평창(7.1℃)보다는 높지만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정도이고, 서울(12.8 ℃)에 비하면 확실히 낮은 편이다. 개마고원 일대는 한반도에서 기후와 식생, 지형이 유달리 이질적인 지역이다. 로저 셰퍼드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평안도의 산세는 남한과 비슷하나 개마고원의 차이가 심하다고 언급했다.
함경도 동해안 지역은 서쪽의 평안도, 남만주의 동위도 지역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따뜻하지만, 아무래도 남한보다는 위도가 높은 탓에 좀 춥다. 한반도 북부를 통틀어 가장 따뜻한 원산의 1월 평균 온도가 -1.8 ℃로 서울과 비슷한 수준이며, 함흥(-5.5 ℃), 청진(-6.5 ℃), 나선(-7.1 ℃)은 중부 지방보다는 확실히 춥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에서 미군은 근현대 들어 난생 겪어보지도 못한 동한기 전투를 한반도에서 치렀다. 특히 1950년 연말에 미국과 중국이 치른 장진호 전투는 기념비적인 동한기 전투로, 전사한 미군/중공군보다 얼어죽은 미군/중국군이 더 많았다. 이 지역은 너무 추워서 러시아와 견줄 만하거나, 그 이상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평안도는 조선 후기 쯤 되면 충청도의 인구를 앞질러서 8도 중 전라도와 더불어 2~3위의 인구를 기록했으며, 함경도도 충청도의 인구를 따라잡기도 했다. 이곳이 경제적으로 주로 발전하던 시기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다. 일제강점기에는 평안도는 경의선 일대의 도시가 새로 발전하여 의주 같은 기존 전통 도시가 몰락하였고 남포라든가 함경도의 여러 도시처럼 인천의 제물포와 비슷한 성장 과정을 거친 경우도 있다. 남남북녀라든가 북청 물장수, 명태의 고장 같은 여러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지만 분단으로 인해 일부를 제외하고 그 존재감이 매우 낮아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원래의 인구도 제법 있었으나 도시화율도 높았기에 도시의 규모가 세간의 인식에 비해 컸다. 인구 순으로 따지면 평양이 2위, 청진이 6위, 흥남이 7위, 신의주가 8위, 원산이 9위, 함흥이 10위로 11위인 전남 광주, 14위인 충남 대전보다 인구가 많았다. 지금의 북한이 관리하듯 흥남과 함흥을 하나의 시로 합치면 대구급의 인구가 된다. 현재 주요 도시로는 평양시, 함흥시, 청진시, 신의주시, 남포시, 안주시, 강계시, 나진시, 원산시, 혜산시 등이 있다.
이 지역에 자원이 많아 일제강점기 한반도 유수의 공업지역으로 발돋움도 했다. 연은분리법이 처음 고안된 곳이 함경도의 단천이다. 만약 분단이 없었으면 강원도 태백시, 삼척시를 보면 북부의 엄청난 광물자원을 토대로 80년대까지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공업단지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민주당계 정당의 햇볕정책에 대한 반발로 '북한의 광물자원' 자체에 부정적인 인식이 많다. 물론 캘 자원이 없는 상황을 대비하자는 주장은 타당하겠지만, 콩고민주공화국 마냥 자원이 많아도 광업 기술력 부족과 독점으로 가난한 경우도 많다. 그러나 영월군의 상동광산처럼 시대에 따라 경제성이 없다가 2020년대 들어 다시 주목받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상동광산도 캐나다 업체가 광업권을 가져 돈이 한국에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 등 광업으로 돈을 버는 문제는 상당히 복잡하다. 북한의 폐쇄성, 기술 부족 때문에 어떤 자원이 있는지는 북한 당국도 자세히는 모를 것이다.[3]
주요 지역
평안도
평안도는 북한 정부의 행정구역 상 평양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의 대부분, 량강도의 일부, 대한민국 정부의 평안북도와 평안남도를 포함하는 지역. 관서(關西) 또는 한국의 패강 서쪽에 있는 지방이라 패서(浿西)라고도 불리운다. 관서는 철령관(鐵嶺關)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서북(西北), 서토(西土) 등으로도 불렸다. 남북 평안도를 다 합친 넓이는 43,400㎢, 인구는 1,20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특히 가장 큰 도시인 평양은 북부 지방 제1의 도시다. 기원전에는 고조선 땅이었다가 낙랑군, 다시 고구려 땅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하면서 안동도호부가 됐다. 고구려 땅을 대부분 찾은 후에 발해가 차지했다. 그러나 남북국시대에는 두 나라 모두 중심지가 평안도 쪽과는 거리가 멀었고, 황량한 변경, 국경지대에 가까웠다. 후삼국시대 초 평안남도의 남부를 궁예가 편입하였고, 왕건이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며 평안남도 대부분을 수복하는 등 점차 되찾아나가 북계(北界)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 간섭기에 북계가 최탄의 난으로 원나라에 넘어갔으나 결국 반환받았다. 조선 성립 당시 중강진을 중심으로 한 일부가 여진족 땅이었는데 세종대왕 때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조선 영토로 만들었다. 평안도라는 명칭의 어원인 평양과 안주는 둘 다 현재 평안남도에 속한다. 원래는 대동강, 청천강이 상류가 북쪽으로 뻗었기에 평안좌도, 우도로 구별했으며, 이 경우 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영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좌도에 속하게 된다. 평안남북도는 1896년 이후의 구분이다. 선조 21년, 평양에서 최정보란 자가 맹인 신고함과 작당하여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의금부에서 "친족살해가 일어난 평양을 전례에 따라 격하해야 하지만, 솔직히 평안도에서 평양을 대체할 도시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이조에서 "2번이나 평양을 격하하면 일개 현감이 도저히 평양같은 대도시를 다스릴 수 없게될 것이다"라고 평양 격하를 반대하면서 평양의 지위가 유지되었다. 만약 평양을 격하했다면, 조선시대 다른 도처럼 평안도도 한 번 이름이 바뀔 뻔했다. 관서팔경이라 함은 강계시의 인풍루(仁風樓), 의주군의 통군정(統軍亭), 선천군의 동림폭(東林瀑, 폭포), 안주시의 백상루(百祥樓), 평양부의 연광정(練光亭), 성천군의 강선루(降仙樓), 만포시의 세검정(洗劒亭), 영변군의 약산동대(藥山東臺)를 말한다. 팔도 중 2번째로 넓다.[4]
함경도
북한 행정구역 상 함경남도, 함경북도, 량강도의 대부분, 강원도의 일부, 자강도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 이북 5도상 행정구역으로는 당연히 함경북도+함경남도. 이름은 함흥시와 경성군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철령 이북, 관북 지방이라고도 일컫는다.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하면 마천령산맥을 기준으로 그 이북을 관북, 이 이남을 관남이라 칭하기도 한다. 북한에서도 북한이 펴낸 조선향토대백과를 보면 전통 음식을 언급할 때 '함경도지방'이 아우르는 영역을 묘사하며 한국식의 함경도를 언급하는 사례가 있다. # 다만 북한 내부에서는 '함경도'를 자신들의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만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량강도와 다르게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문서는 편의상 조선 팔도의 함경도에 가까운 지역을 소개한다. 한국령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경계는 마천령산맥이다. 행정구역의 직접적 전신은 고려 때 동계이며, 동계가 확장되어 고려 말~조선 건국 초에는 동북면(원간섭기 이후~공양왕까지, 태조, 정종), 그리고 함길도(태종 ~ 세조)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이 경우는 경성 대신 길주에서 따와 붙인 것. 북방 영토가 확립되기 전에는 길주가 동북 지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시애의 난으로 길주가 2개 현으로 분할되면서 세조 13년에 함경도로 고쳤는데 성종 1년, 영흥 품관 김영로가 함흥이 반역향이라는 이유로 영안도(영흥+안변)로 개칭할 것을 청하여 이를 따랐다가, 다시 연산군 4년부터, 함흥을 강등한 것은 세조의 뜻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함흥을 다시 부로 승격하고 함경도가 되었다. 함흥은 태조 이성계의 근거지로 즉 조선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마냥 반역향 딱지를 유지하기에는 껄끄러웠을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마천령 산맥을 경계로 삼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면 아마도 함경북도는 한반도에 포함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다만 세종 본인은 조종이 일으킨 땅을 헛되이 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의견에 찬성하지 않고 반대하였다.[5]
황해도
한반도 중북부에 있는 대한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 이북 5도 중 하나. 황주(黃州)와 해주(海州)에서 그 이름을 땄다. 남쪽에 경기도, 동쪽에 강원도와 함경남도, 북쪽에 평안남도와 접경하고 있다. 2008년 추정 인구는 대략 400만명으로 전라북도와 인구밀도가 비슷했다. 1950년 6월 24일 이전까지는 대한민국도 옹진반도, 연백평야 등 황해도 본토 지역을 일부 실효지배하고 있었고, 6.25 전쟁 중에는 황해도 전역을 잠시 실효지배하기도 했다.[7] 그러나 정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는 황해도 본토는 전부 북한 치하로 넘어 갔고 서해 5도만이 남게 되었다. 기존의 황해도 지역은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치에 의하여 1945년 경기도 옹진군을 거쳐 1995년부턴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편제되어 있다. 전라도를 호남, 경상도를 영남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황해도 또한 이러한 호칭이 있는데 '해서(海西)'라고 부른다. 수도인 개경-한양을 기준으로 서쪽(북서쪽)에 자리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이북 5도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황해도는 분도되지 않았으나 북한의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이 영역을 황해남도와 황해북도가 차지하게 되었는데 황해남도에 해주가 있고 황해북도에 황주가 있다.[6]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