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지방
해서지방(海西地區)란 조선시대의 황해도 일대로서, 지금의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를 가리킨다. '해서'란 '경기해'의 서쪽지방을 뜻한다. 해서지방은 한반도의 중서부에 위치하며 관서지방을 거쳐 중국 대륙으로 가는 길목이며 바다로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의 산둥(山東) 지방과 마주하는 뱃길이었는데 대표적인 항구가 장산곶이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인 위치로 일찍이 개발된 지방이다. 고려시대 수도인 송경이 위치하여 발달하였고 넓은 곡창지대와 서해안에서 생산되는 물산이 풍부했던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황주와 해주의 앞글자를 따서 황해라고 불렀다.[1][2]
자연환경[편집]
해서지방은 북쪽은 대동강과 언진산맥이 평안남도와 경계를 이루고, 동남쪽은 예성강과 마식령산맥이 경기도 및 강원도와 경계를 이룬다. 서쪽은 장산곶을 정점으로 황해에 돌출하고 있으며, 남쪽 역시 황해에 접하고 있다. 재령강·예성강·임진강 등의 주변으로는 낮은 구릉성 산지와 평야가 발달해 있지만, 해서지방은 대체로 산지가 많은 편이다. 임진강은 유로연장이 254.0㎞로, 우리나라 제7위의 하천이고, 예성강은 10위, 재령강은 11위를 차지한다. 주요 하천인 예성강과 재령강 유역에는 연백평야와 재령평야가 발달해 있는데, 이들 평야는 북한에서 가장 넓은 농경지를 형성한다. 해안선의 총연장은 1,618㎞인데 웅진반도 이남은 해안선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의 특징을 나타낸다. 연안은 조석의 차가 크고 수심이 얕아 간석지가 널리 발달하여 해안선에 비해 양항(良港)이 적고, 130여 개의 도서가 산재한다. 해서지방은 북동동에서 남서서 방향의 멸악산맥이 중앙으로 달리는 까닭에, 이 산맥에 의해 남북으로 다시 지역구분이 된다. 북쪽은 황북(黃北)에 해당하지만, 재령강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평안남도와 결합되고 있는 까닭에 황평지역(黃平地域)으로 통용된다. 이에 대하여 멸악산맥 이남은 황남지역(黃南地域)으로 통용되지만, 지리적 특성은 경기 지방과 유사한 중부 지방의 성격을 안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0℃ 내외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000㎜ 내외이며, 광량만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일조시수가 많고 강수량은 극히 적은 지역이다. 이 까닭에 해서지방의 해안에서는 천일제염업이 발달하였다. 멸악산맥은 대체로 9월 평균 18℃의 등온선과 일치하므로 이남의 황남지역은 경기 지방과 같이 중생종(中生種)이 재배되지만, 북쪽의 황평지역은 조생종(早生種)이 재배된다. 이러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해서지방 전체는 지리적 특징이 비슷하다. 즉, 방언구를 보면 이 지방은 경기 방언구에 해당되어 그 경계는 대동강유역과 언진산맥에까지 확장됨으로써 멸악산맥의 경계적 의미는 소멸되고 있다.[3]
형성 및 변천[편집]
해서지방은 대동강과 재령강 유역을 중심으로 선사 유물 다밀 지대로 알려져 있으며, 봉산군을 중심으로 수혈식주거(竪穴式住居)가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이미 선사시대부터 중요한 생활 무대가 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곳은 기자조선과 한사군의 설치 과정에서 대륙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기도 하다. 삼국이 정립된 후부터는 정치적 상황이 달라졌지만, 우리 민족문화는 계속 이어져왔다. 삼국 시대에 이곳은 고구려의 영토로 귀속되어 고구려의 고유문화가 이어져 왔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에는 통일신라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통일신라의 영토는 패수(浿水, 대동강) 이남에 국한되었으므로 해서지방은 변경의 성격을 안은 채 신라 문화의 요소가 새롭게 혼합되어 갔다. 그 뒤 고구려의 영토 수복을 내걸고 북진정책을 강행하였던 고려 시대에 들어오면서 변경의 성격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 뒤 성종의 10도 편성시에는 황주와 해주를 통치의 중심지로 삼고 관내도에 편입시켰으나, 얼마 뒤 서해도(西海道)를 신설하였다. 서해도의 신설은 오늘의 황해도 윤곽을 확립하였고, 앞뒤가 뒤바뀌기는 하였으나 해서지방이라는 명칭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이 지방은 한때 풍해도(豊海道)로 통용되었지만, 바다 해(海)의 고지명은 계승되어 바다와 무관하지 않은 지방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뒤 8도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이 지방은 통치의 중심지인 황주와 해주의 첫 자를 따서 황해도로 바뀌었다. 고려 시대에 제정된 서해도의 명칭이 나타난 이래 바다 해자가 빠지지 않고 있으므로, 해자는 곧 이 지방을 상징하는 고유 명칭으로 이어지고 있다. 1952년의 북한 행정구역개편으로 황해도는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분리됨으로써, 황해남도는 황해에 접하지만 황해북도는 내륙에 위치하게 되었다.
주요지역[편집]
황해남도[편집]
황해남도(黃海南道)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서남부에 있는 도이다. 1954년 10월 30일 황해도를 동서로 양분해 황해에 접하는 서부지역이 황해남도가 되었다. 황해남도청 소재지는 해주시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서부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남포특별시, 동쪽으로는 황해북도, 서쪽으로는 서해, 남쪽으로는 서해를 경계로 대한민국의 인천광역시 옹진군·강화군과 접한다. 해주시는 황해남도의 교통, 산업,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며, 조선시대에 임꺽정이 활동했던 구월산(954m)이 있다. 과일군은 과일을 생산해내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사과는 매우 유명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수출한다. 한편, 신천군에 위치한 신천박물관은 한국전쟁 때 학살당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1999년에 건립되었다. 황해남도는 평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산지가 적은 곳이다. 기후는 황해에 접해 있는 까닭에 북한에서 가장 온화한 지역이다.
황해북도[편집]
황해북도(黃海北道)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중부에 있는 도이다. 1954년 10월 30일 황해도를 동서로 양분해 내륙인 동부지역이 황해북도가 되었다. 도청소재지는 사리원시(沙里院市)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중부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평양직할시·평안남도, 서쪽으로 황해남도·남포특별시, 동쪽으로 강원도, 남쪽으로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대한민국의 경기도, 한강의 하구를 경계로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접한다.
황해[편집]
황해는 태평양의 일부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바다이다. 황하의 토사가 유입되어 바다의 색깔이 누런 빛을 띠었다는 것에서 황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서해(朝鮮西海)라고 부르기도 한다. 총 면적은 약 380000 km2이며, 평균수심은 약 45m이다. 최대수심은 100m를 넘지 않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다. 따라서 갯벌이 발달해 있다. 겨울과 여름 수온 차가 매우 심하며, 담수의 유입이 많고 수심이 얕은 이유로 황해 북부 서한만과 중부 경기만 일부 지역, 가장 고위도 지역인 랴오둥 만은 겨울에 얼어붙기도 한다. 황해는 전라남도 해남 반도 남쪽 끝부터 제주도까지를 경계로 동해와 나뉘고, 제주도 서쪽 끝부터 장강(양쯔 강) 하구까지를 경계로 동중국해와 나뉜다.
현황[편집]
해서지방은 작물을 심는 방식과 작물 분포를 토대로 한 토지이용의 유형을 볼 때에 이 지방은 2모 3작 지대에 해당되어 그 범위가 황평·강원에까지 확대됨으로써, 멸악산맥이 지니는 경계로서의 의미는 미약해졌다. 그러나 농업 경영에 이용되는 토착적인 농기구를 토대로 할 때에 아래 귀〔下耳〕가 넓은 호미의 분포 범위가 해서지방의 공간 범위와 일치하여 농업 문화의 동질성을 나타내고 있다. 복합 문화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는 가옥 구조를 볼 때, 멸악산맥을 경계로 북부에는 서부형, 남부에는 중부형이 나타난다. 서부형은 온돌이 단열(單列)로 되고 대청이 생략되고 있는 데 반하여, 중부형은 대청과 건넌방이 곡부(曲部) 형태로 추가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것은 또한 벼의 조생종과 중생종의 재배 한계와 일치하고 있다. 2009년 기준으로 황해남도에는 3개 시 15개 군에 8개 노동자구가 설치되어 있으며, 황해북도에는 1개 시 19개 군에 11개 노동자구가 설치되어 있다.
지도[편집]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황해남도〉, 《위키백과》
- 〈황해북도〉, 《위키백과》
- 〈황해〉, 《위키백과》
- 〈한국의 지방 구분〉, 《위키백과》
- 〈해서지방〉, 《네이버 지식백과》
- 〈해서지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