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시
해주시(海州市)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중남부에 있는 시이자 황해남도청 소재지이다. 고려시대 서해도 관찰사영이었고, 조선시대 황해도 감영 소재지로서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황해남도의 유일한 시로서 황해남도의 산업,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다. 광석천(廣石川)이 시의 중앙을 남류하여 황해의 해주만으로 유입되며, 룡당반도(龍塘半島)에는 해주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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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 행정구역: 황해남도
- 면적: 206.93km²
- 인구: 273,300명(2008년)
연혁[편집]
- 고구려 때는 내미홀군(內未忽郡)·지성(池城)·장지(長池)라 불렀다.
- 신라 문무왕(文武王) 이후 한주(漢州)에 속하였다.
- 경덕왕(景德王) 21년(762) 폭지(瀑池)라 개칭하고 지성을 쌓아 대륙방면에 대한 전위부(前衛部)로 중요시되어 왔다.
- 고려 태조는 바다에 임한 까닭에 해주(海州)라 명하고 983년(고려 성종 2년) 처음으로 십이목(十二牧)을 두고 해주에 해주목(海州牧)을 두고 이어서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 현종 때에는 절도사를 폐하고 4도호부(都護府)의 하나인 안서도호부를 두었다.
- 예종 때는 대도호부로 올리고 고종 때 목으로 환원하여 조선에 계승었다.
- 광해군 때 일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 인조 원년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 고종 32년(1895년) 23부(府) 실시로 해주부가 되어 16군을 관하에 두었다
- 1896년 13도(道制) 실시로 황해도의 도청소재지로 되었다.
- 1920년 지정면(指定面)으로 승격하였다.
- 1931년 4월 1일 해주면을 해주읍(邑)으로 승격하였다.
- 1938년 10월 1일 해주읍을 해주부(府)로 승격하였다. 종래의 해주군은 벽성군(碧城郡)으로 개칭하여 분리하였다.
- 1940년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다.
- 1943년 10월 1일 벽성군 서석면 일부를 편입하였다.
- 1945년 9월 2일,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때 대부분이 38선 이북에 속했다. 38선 이남의 용당포 지역은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합의 끝에 38선 이북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하였다.
- 광복 후 해주시(市)로 개칭하였다.
- 1954년 황해도가 2개 도로 나뉘면서 황해남도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 1961년 청단군 영양리와 벽성군 신광리를 편입하였다.
- 1965년 청단군 작천리·장방리를 편입하였다.
- 1973년 국제 무역항이 되었다.
지리[편집]
황해남도 남부의 중앙에 위치하며, 시생누대에 형성된 화강편마암 지질로 이루어져 있다. 북에 수려한 수양산을 등지고, 서에 선리산을 끼고, 남에 백호 모양의 남산(南山)을 안은 ㄷ자형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광석천의 범람원과 단구 위에 시가지가 발달하고 한편 남산을 넘어 더 남쪽으로 리아스식의 해주만을 안고 있다. 또한 그 중앙에 룡당반도가 돌출하여 대안의 진포반도(강령군)와의 사이에 좁은 용당 목을 이루어 해주만을 나누며, 서쪽으로 깊이 만입한 취야만을 분리한다. 해주항은 이 반도 돌단부에 만든 부동항이고 동측의 정도(鼎島)를 인공으로 육계도화하여 방파제를 삼고, 반도 동서 만입부에는 석천포와 결성포의 어항이 있다. 해주의 지형은 한마디로 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는 곳으로 신라 이래 정치·군사상의 요충지로 중시되어 사적이 많다.
위도에 비하여 온화하고 공기가 맑아 마산·진해·여수 등과 예로부터 더불어 전국적인 휴양도시로 알려져 있다. 연평균 기온은 11.9, 1월 평균기온 -2.7 , 8월 평균기온 25.3, 연강수량은 1069.4mm이다. 총 강수량의 60% 이상(622.1mm)이 여름(6·7·8월)에 집중하고, 반대로 겨울(12·1·2월)은 4%(40.3mm)에도 미달되는 건조기를 나타낸다.
행정 구역[편집]
현재 해주시는 26동, 5리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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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편집]
지리적 영향으로 일찍부터 상업·공업이 발달하였으며 1973년 해주항이 기존의 군항에서 국제무역항으로 확장되면서 북한 9대 공업지구의 하나가 되었다. 주요 공업으로 건재·화학·기계·금속조선·일용품·피복·유리·도자기 등이 있고, 특히 풍부한 양질의 석회석을 원료로 한 시멘트공업이 대표적이다. 인산비료·페인트·염료·유산·가성소다 등이 화학공업과 연결농기계·콤바인·트랙터 등의 기계공업도 알려져 있다.
농업은 남부 평야지대에서 주로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교외에서 채소와 배·복숭아·감 등의 과일이 생산된다. 또한 젖소·돼지·닭·오리 사육도 성하다. 대어장인 연평도가 해주만 앞에 자리하여 조기잡이가 성황을 이뤘으며, 숭어·전어·민어·새우·굴 등의 어획도 많다. 특산물로는 해주먹, 장산곶(長山串) 부근 해저에서 채취한 돌로 만든 벼루가 있다.
교통[편집]
철도[편집]
해주시는 황해남도의 교통요지이다. 예로부터 서울과 평양, 중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의선 철도를 부설할 때 벽란도에 철교 가설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이 곳을 피해서 부설함에 따라 한때 쇠락의 위기에 서기도 했으며, 이 때 도청을 사리원으로 옮기자는 청원이 강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광복 전에 일제가 토해선(토성~해주), 사해선(사리원~해주), 옹진선(해주~옹진) 간 협궤를 부설하여 교통의 요지를 이루었다. 개풍-해주-옹진에 이르는 토해선과 사리원에서 해주에 이르는 황해선은 광복 후 다시 배치되었다.
현재 해주시 지역에는 황해남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황해청년선, 황해남도 동부 지역과 연결되는 배천선, 황해남도 서부 지역과 연결되는 옹진선이 뻗어 있다. 옹진선의 지선인 정도선을 통하여 용당반도 및 정섬의 해주항과 연대수송을 보장하고 있다.
영역 내에 해주청년역, 학현역, 매화역, 장방역, 정도역, 왕신역, 서해주역, 문정역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편집]
도로망은 해주~사리원(이북 5도 기준 51번 국도, 54번 국도), 해주~개성 간 1급도로(이북 5도 기준 50번 국도)가 지정되었다. 황해남도 내의 여러 지역과 이어지는 2급도로망이 구축되어 있다. 연안·배천을 지나 개성으로 통하는 도로와 재령을 지나 사리원·신천·안악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으며, 그 밖에도 장연·송화·옹진·금천·남천 등지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장연, 리목, 룡연, 벽성, 재령, 신원까지의 정기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대한민국 국도 중 50번 국도(옹진-개성)와 51번 국도(해주-평원), 52번 국도(장연-신계)가 해주시를 지난다.
해운 및 항공[편집]
해주시는 예로부터 황해의 주요 항구도시였다. 용당포의 해주항이 완성됨에 따라 서북지방의 유일한 부동항으로서 그 면모를 새로이 하였다. 해주항은 현대적인 대규모의 무역항으로 부상하여 북한의 여러 항구들과 뱃길로 연결되어 있다. 서울의 해상 관문인 인천과 가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 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오사카와의 사이에 1,500t급 화물선이 월 5회 운항되었다. 인천항과의 정기 항로가 있었고, 진포, 진남포와도 기선의 왕래가 많아 여객·물자수송이 활발했다. 해주항은 육지의 다른 곳과도 연결되고, 해상으로는 인천∼진남포 간 해상을 연결하여 상업 중심지이면서 교통상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항공교통으로 해주공항이 있다.
교육[편집]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해주향교가 있었다. 용수산 남쪽, 고려시대 학자인 최충의 옛 집터에 위치한 해주향교는 창건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1499년(연산군 5)에 황해도관찰사 풍천심공(豊川沈公)이 중수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890년대에 김영택, 오돈근, 이승모 등이 대령학교와 제민학교를 세웠다. 감리교의 미국인 선교사 홀이 1904년에 의창학교, 1909년에 의정여학교를 세웠다. 1912년에는 전봉훈, 유훈영 등이 정내여학교를 세웠으며, 4년제 광덕학교도 세웠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해주농업학교를 최초로 세웠으며, 3.1 운동 후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여 인문계 중학교로 1922년에 해주공립고등학교를 세웠다. 해주농업학교는 사리원으로 이전하였다. 그 뒤 1923년에 해주공립사범학교가 세워진 데 이어 해주공립공업실습학교, 해주직업학교 등이 문을 열었다. 여자중등교육기관으로는 1931년에 수양공립고등여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일본인 자녀들을 위하여 1907년에 해주공립심상고등학교가 세워졌으며, 이어 해주욱정고등여학교, 해주서중학교 등이 세워졌다.
현대[편집]
해주시에는 10여 개의 대학과 20여 개의 전문학교, 28개의 중학교, 13개의 소학교, 56개의 유치원이 있다.
- 김종태대학(해주사범대학)
- 황해남도 내 중학교 교원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5년제 사범대학이다. 1961년 9월 1일 해주사범대학으로 개교하여 1969년 7월 12일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칭하였으며, 1990년 10월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되었다. 학교 명칭의 김종태는 남한에서 통일혁명당 사건을 주도한 전 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장의 이름이다. 김일성동지 혁명력사학부, 어문학부, 외국어학부, 수학부, 물리학부, 생물화학부, 체육학부가 설치되어 있다.
- 해주제2사범대학
- 황해남도 내의 중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또 다른 사범대학이다. 1948년 10월 5일 2년제 해주교원대학으로 발족되어 초급중학교 교원을 양성하였다. 1961년 4월 해주사범전문학교와 통합되어 해주사범대학(4년제)으로 개편되었으며, 1962년 6월 황해남도 교육간부학교와 병합되었다. 1972년 9월 해주제2사범대학으로 되었다. 대학에는 청년동맹 및 소년단지도원학부, 국어문학학부, 역사지리학부, 수학부, 물리학부, 음악미술학부, 체육학부 등의 학부가 설치되어 있다.
- 김제원대학(해주농업대학)
- 황해남도 내 농촌경리 부문의 과학기술직을 육성해내는 농업대학이다. 1960년 12월 1일에 해주농업대학으로 발족되었다. 1990년 10월 31일에 김제원 농민의 이름을 따 개칭되었다. 김제원 농민은 이른바 애국미헌납운동을 1946년에 시작하였다. 대학에는 농학부, 과수학부, 산림하천학부, 수의축산학부, 농기계학부, 농업경영학부 등 학부와 학과들이 설치되어 있다. 농업과학연구소와 연구원, 박사원, 출판소가 있다. 이밖에 통신학부가 있다.
- 해주의학대학
- 수양산 남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황해남도와 개성의 보건직 양성을 위한 의학대학이다. 1959년 9월 1일에 해주의학대학으로 발족되었다. 1962년에 새로 대학청사를 건설하였다. 의학부와 한의학부, 약학부, 의생학부를 비롯한 본학부 및 특설학부가 설치되어 있다. 이밖에 통신학부, 오랜 현직 보건직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사재교육학부가 있다.
과학연구사업의 주관 부서인 박사원과 연구소가 있으며 제약공장이 있다. 황해남도인민병원과 황해남도소아병원, 그리고 기타 황해남도와 개성시에 있는 인민병원들과 전문과 병원들을 임상 실습 기지로 이용하고 있다.
- 조옥희해주교원대학(해주교원대학)
- 황해남도 내의 소학교 교원과 유치원 교양원을 양성하는 3년제 사범교육기관이다. 1968년 9월에 발족되었다. 당시에는 유치원 교양원만을 양성하는 2년제 교양원대학이었는데, 1972년 9월에 3년제 교원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해주제1교원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 6월에 해주제2교원대학과 통합하여 해주교원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1990년 10월 31일 조옥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조옥희대학으로 개칭되었다가, 1997년 2월 조옥희해주교원대학으로 되었다. 대학에는 교원학과, 교양원학과, 체육학과, 체육무용학과 등 학과가 있다.
- 해주공업대학
- 1961년 9월 1일에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의 발전 지시에 따라 해주시멘트공장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발족되었다. 대학에는 화학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등 여러 학과들과 관리일꾼양성반이 있다.
관광[편집]
- 부용당(芙蓉堂)
- 부용동에 있는 누각으로 북한 국보 제68호로 지정돼 있다. 부용당은 1500년에 해주읍성 앞의 누각으로 세운 것으로 ‘연못 안에 세운 건물’이라는 뜻이다. 1500년에 연못 바깥에 세운 누정을 ‘응향각(凝香閣)’, 20년 후 연못 안에 세운 누정은 ‘부용당’이라고 하였으나 점차 두 건물을 합쳐 부용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이곳을 해주행궁으로 승격시키고 1593년(선조 26) 8월 18일에서 9월 22일까지 머무르며 조선 인조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의 발달된 누정 형식과 건축술을 잘 갖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로서, 주위 환경과 잘 어울려 한때 해서팔경(海西八景)의 하나로 일컬어졌다. 황해도청 바로 앞 연못에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소실되어 돌기둥과 주춧돌만 남아있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2003년에 복원하였다.
- 태봉각(胎封閣)
- 인조가 해주에서 탄생하여 그 태를 묻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과 건물. 1690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6.25 때 크게 파손되었다가 북한 치하에서 몇 차례 보수하였다.
- 해주석빙고
- 옥계동에 있는 석빙고로 북한 국보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빙실의 길이 28.3m, 너비 4.5m, 높이 6m로 고려 초에 처음 세워 1735년(영조 11)에 개축하였다. 일정한 모양의 화강암으로 1.4m 정도의 사이를 두고 12개의 무지개형 골조를 세우고, 그 사이에 큰 판돌을 건너대어 아치 모양으로 만들었다. 밖에는 2m 두께로 흙과 석회를 섞어 다져서 덮고 그 위에 잔디를 입혀 무더운 여름철 태양열을 막도록 하였다. 위로부터 무거운 무게를 받고 있기 때문에 견고함을 유지하는 동시에 내부의 용적을 보다 크게 하기 위하여 천장을 궁륭(穹窿)형식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안팎의 구조가 보존되어 있다.
- 해주다라니석당
- 해청동 해주공원 영내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당으로 북한 국보 제82호로 지정돼 있다. 높이 464cm인 육각형 구조물로, '다라니석당'은 다라니경을 새겨 기둥처럼 세운 돌구조물을 말한다. 굳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서 풍화를 입었지만 원래의 모습이 비교적 잘 간직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돌 조각술의 발전 모습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다라니석당은 이 곳과 피현군 성동리 다라니석당, 두 곳이 있다.
- 백세청풍비
- 1728년에 세웠으며 높이 434cm이다. 백세청풍이란 백이와 숙제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며 마침 해주 북쪽에도 수양산이 있고 해서 세웠다고 한다. 글씨는 황해도관찰사 이언경이 주자의 것을 모사해 새긴 것이다.
- 신광사
- 신광리 북숭산에 있었던 사찰이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와 의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고려 말기 원나라 순제가 제위에 오르기 이전에 대청도에 귀양을 오게 되어 이곳을 지날 때에 풀 속에 한 부처가 있음을 보고, 그 부처에게 속히 귀국하여 왕이 되게 해주기를 빌었던 바, 그 후 귀국하여 왕이 되자 많은 재물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677년에 화재로 소실돼 그 후 다시 중건되었으나 현재는 폐사되었다. 경내 문화재로는 1324년(충숙왕 12)에 세워진 신광사 오층탑과,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가 있다. 무자비는 글자가 없는 비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사미정(四美亭)
- 광석천 기슭에 있는 정자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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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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