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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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산군(雲山郡)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동부에 위치해 있는 군이다.[1][2]
개요[편집]
운산군의 면적은 819.67㎢이며 인구는 102,928명(2008)이다. 동쪽으로 자강도 향산군, 남쪽으로 구장군·녕변군·태천군, 서쪽으로 동창군, 북쪽으로 자강도 송원군과 경계를 접한다. 현재 행정구역은 1읍 1구 27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 소재지는 운산읍이다.
고려시기인 1261년에 지방관제를 개편하면서 원래의 지명인 운주에서 운자를 따고 산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이라 하여 운산군이라 하였다. 운주는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 특성으로 구름과 안개가 자주 끼여 있는 고을이라는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3]
자연환경[편집]
운산군은 산지가 발달하였다. 북부에는 피난덕산줄기(避難德山-)의 주봉을 이루는 피난덕산(避難德山, 1,317m)과 대바위봉(1,025m), 동림산(東林山, 1,165m) 등 비교적 높은 산들이 솟아 있으며, 남서부에는 예로부터 평안북도에서 이름난 백벽산(白碧山, 901m)과 절골산(698m) · 갈마봉(447m)이, 동부에는 운대산(雲臺山, 836m)을 비롯한 산들이 솟아 있다. 운산읍을 중심으로 하는 구룡강 연안은 분지 지형을 이룬다. 자강도 송원군과의 경계에는 우현령(牛峴嶺, 622m)이, 동창군과의 경계에는 느절령(469m)과 지경령(地境嶺, 168m)이 있는데, 이 영들은 주변 지역들 사이의 주요 교통로로 이용된다.
지층은 여러 지질시대의 암석들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는 금, 운모, 인회석, 규석 등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는데 금은 북진, 부흥 일대에서 풍부한 매장량을 보이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8℃이고, 8월 평균기온은 23.1℃, 1월 평균기온은 -10.8℃이다. 최고극기온은 36.4℃(1968년 8월 2일), 최저극기온은 -32.9℃(1985년 1월 14일)였다. 10℃이상 적산온도는 3,348℃이다.
연평균강수량은 1,400mm 정도로서 북한에서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 속한다. 첫서리는 9월 말 혹은 10월 초에, 마지막서리는 5월 초 혹은 5월 중순경에 내린다. 땅이 어는 깊이는 1977년에 98cm였다. 연평균풍속은 1.3m/s이다. 구룡강과 조양강 골짜기를 따라 산골바람이 자주 분다.
운산군은 하천 망이 조밀한 지역이다. 하천들은 모두 청천강수계에 속하며 그 대부분이 산지 하천의 특성을 띤다. 큰 하천으로는 구룡강(九龍江), 조양강(朝陽江), 우현강(牛峴江), 용흥강(龍興江) 등이 있다. 이밖에도 길이가 5km 이상의 하천이 20여 개나 있다. 광천 자원으로는 운산온천(雲山溫泉)과 부홍약수(富興藥水), 우제온천(牛蹄溫泉)이 있다.
산림은 운산군 전체면적의 73% 되는데, 소나무와 참나무가 기본 수종을 이루며 일부 지역에는 일본잎갈나무, 잣나무, 밤나무, 아까시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분포되어 있다. 산림자원이 풍부한 지역은 풍양, 성봉, 부흥, 남산 등 지역이다. 토양은 대부분 지역에 갈색 산림 토양이, 하천 연안에는 충적토와 논토양이 분포되어 있다.[4]
역사[편집]
운산군 지역의 용호리에서 발굴된 용호동무덤떼는 고구려시기에 운산군 지역이 이미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고구려시기에 운산군 지역에는 운양군(雲陽郡)이라는 행정구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후 발해의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 속해 있었다. 고려왕조가 건립된 이후 고려의 판도로 되어 운중군(雲中郡)이라 불리다가, 950년에 위화진(威化鎭)으로 되었고, 995년에 운주(雲州)로 되었다. 조선왕조가 건립된 이후 1413년(태종 13년)에 운산군(雲山郡)으로 되었다.
1871년에 평양부(平壤府) 운산군으로 되면서 동면(東面), 남면(南面), 성동면, 위곡면, 고연주면, 읍내면(邑內面), 고운산면 등 7개 면을 관할하였다. 1895년에 부군제를 실시하면서 의주부 운산군으로 되었고 그 이듬해인 1896년에 13도제를 실시하면서 평안북도 운산군으로 되어 읍면(邑面), 성면(城面), 남면(南面), 동면(東面), 신면(新面), 고면(古面), 곡면(曲面), 북면(面面) 등 8개 면을 개편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에 남면이 읍면에 편입되고 동면과 신면을 병합하여 동신면(東新面)을, 고면과 곡면을 병합하여 위연면(委延面)을 각각 신설하였으며 북면을 북진면(北鎭面)으로 개칭하였다. 1918년에 읍면이 운산면(雲山面)으로 개칭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북진면, 위연면의 전체 리와 동신면의 1개 리는 새로 설립되는 북진군에 넘어가고 나머지 운산면 · 성면의 전체 리와 동신면 중 8개 리를 병합하여 운산군을 새로 구성하였는데, 이때 운산면의 용포리 · 읍내리 · 송현리를 병합하여 운산읍(雲山邑)으로, 동신면의 삼태리 · 이리를 병합하여 평화리(平和里)로, 성면의 고성상리 · 고성하리를 병합하여 고성리(古城里)로, 성면의 남산상리 · 계림리 · 송죽리를 병합하여 남산리(南山里)로, 성면의 연봉하리 · 죽대리 · 박막리를 병합하여 연하리(延下里)로, 운산면의 제인상리 · 제인하리를 병합하여 제인리(諸仁里)로, 운산면의 입석하리 · 계림리를 병합하여 전승리(戰勝里)로, 동신면의 이답리 · 가리를 병합하여 이답리(泥踏里)로, 동신면의 마장리는 운산군 마장리(馬場里)로, 동신면의 용호리 · 부흥리를 병합하여 용호리(龍湖里)로, 성면의 연봉상리 · 성봉리를 병합하여 성봉리(城峯里)로, 성면의 초하리 · 응봉리를 병합하여 응봉리(鷹峯里)로, 운산면의 용흥리 · 용연리를 병합하여 용흥리(龍興里)로, 운산면의 화옹리 · 입석상리를 병합하여 화옹리(化翁里)로, 운산면의 조양상리 · 조양하리 · 동신면 성지리를 병합하여 조양리(朝陽里)로 각각 개편하여 1읍 14리를 관할하였다.
1953년에 고성리 일부가 성봉리에 흡수되었고, 1954년에 북진군의 북진읍(北鎭邑), 방어리(防禦里), 영웅리(英雄里), 부흥리(富興里), 교리(橋里), 월양리(月陽里), 삼산리(三山里), 도청리(道靑里), 풍양리(豊陽里), 온정리(溫井里), 답상리(畓上里), 상원리(上院里), 좌리(左里), 봉지리(鳳至里), 마상리(馬尙里) 등 1읍 14리 전체가 운산군에 편입되면서 북진읍이 북진리(北鎭里)로, 운산읍이 구읍리(舊邑里)로, 온정리가 운산읍(雲山邑)으로, 교리가 금산노동자구(金山勞動者區)로 각각 개편되었다.
1956년에 북진리가 금산노동자구와 삼산리에 분리 편입되면서 폐지되었고, 금산노동자구가 북진노동자구(北鎭勞動者區)로 개칭되었으며, 1961년에 평화리 일부 지역이 이답리에 편입되었다.
1985년에 향산군의 운봉리(雲峯里), 입석리(立石里), 구두리(龜頭里), 조산리(造山里), 상서리(上西里), 하서리(下西里)가 이관되었으며, 1989년에 구두리, 상서리, 하서리가 다시 향산군에 귀속되었고, 1996년에 운봉리, 입석리, 조산리가 또 향산군에 귀속되었다. 2003년 현재 행정구역은 1읍(운산읍), 1구(북진노동자구), 27리(고성리, 구읍리, 남산리, 이답리, 답상리, 도청리, 용호리, 용흥리, 마상리, 마장리, 방어리, 봉지리, 부흥리, 삼산리, 상원리, 성봉리, 연하리, 영웅리, 월양리, 응봉리, 전승리, 제인리, 조양리, 좌리, 평화리, 풍양리, 화옹리)로 구성되어 있다. 운산군 소재지는 운산읍이다.[5]
산업[편집]
운산군의 경제는 중앙 공업을 이루는 기계공업과 채굴업 · 임산업과 함께 지방원료원천에 의거한 지방공업, 다각적인 농촌경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계공업에서 기본은 공구류 생산이다. 북한의 전문공구생산기지의 하나인 운산공구공장(雲山工具工場)에서는 기계공업부문 특히 공작기계공업을 발전시키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여러 가지 공구와 기구들을 비롯하여 경제 여러 부문에 필요한 제품들이 생산된다.
채굴업에서는 금광이, 임업에서는 갱목용 통나무생산이 큰 의의를 가진다. 지방공업은 식료품, 일용품, 방직, 종이, 제약 등 공업부문으로 이루어졌으며 주요 제품은 된장 · 간장 · 기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식료품, 철제일용품, 가구와 교구비품, 천과 옷, 종이, 의약품, 토기 등이 있다. 농경지에서는 논이 20%, 밭이 70%를 차지한다. 농경지비율이 높은 지역은 운산읍과 도청리, 성봉리, 전승리, 이답리, 영웅리 등 지역이며 낮은 지역은 방어리, 부흥리, 용흥리 등 지역이다. 곡물은 옥수수, 벼, 콩, 수수, 보리, 메밀 등이 재배된다. 옥수수는 군의 전반 지역에서, 벼는 주로 구룡강 · 조양강을 비롯한 하천연안에서 재배된다.
공예작물은 주로 담배가 재배되는데, 그 주요 재배지는 도청리, 성봉리, 전승리 등 지역이다. 채소업은 주로 운산읍과 북진노동자구 등 지역에서 발달되어 있는데 주로 무, 배추, 양배추, 오이, 호박, 가지, 고추, 마늘 등을 재배하고 있다. 축산업에서는 소, 돼지, 양, 염소, 닭, 토끼 등을 사육하고 있는데, 특히 소와 염소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과수업에서 기본은 배, 사과, 복숭아인데, 주요 산지는 용흥리, 제인리, 영웅리, 연하리 등 지역이다. 누에고치에서는 고치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6]
교통[편집]
교통은 운산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여기에 삼산역, 방어역, 운산역 등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향산~창성, 박천~초산(자강도) 간 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이밖에 구읍~남산, 운산~조양, 관대~마장, 마상~대성동 간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7]
운산 금광[편집]
오래 전부터 금 산지로 알려질 정도로 세계적인 규모의 운산금광이 존재하는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동양 최대 금광이었다. 1896년 미국인 모스가 운영하는 뉴욕 소재의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가 금광 채굴권을 따낸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대규모 채굴이 이어졌다. 이 금광의 부대시설로 구한말에 설치된 운산 수력발전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력발전소이기도 한데, 500kW급으로 당시에는 세계적으로도 최첨단 대용량 발전소였는데 역시 오로지 운산 금광 채굴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대 한국어의 속어인 노다지의 어원을 제공한 것으로 유력한 금광이기도 하다.
운산 금광 채굴권을 넘겨준 사람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고종이다. 조선왕조실록과 호러스 뉴턴 알렌의 기록에 보면 운산금광 채굴권은 명성황후가 살해당하기 3달 전인 1895년 7월 15일에 허가를 했다가 바로 취소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명성황후는 운산금광 채굴권을 허락한 후 바로 취소하고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 당했으므로, 명성황후는 결국 금광 채굴권을 넘겨 주진 않았다. 사후 운산금광 채굴권은 조선이 가지고 있다가 다음해인 1896년 4월 17일에 미국인 모스에게 채굴권을 허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운산금광 채굴권을 넘겨준 사람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고종인 것이다.
한국의 대체역사 소설에서 이 금광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여 근대화를 이루는 것이 전형적인 클리셰가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일제강점기 시절 운산금광의 최대 채굴량이 30톤 정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의 근대화가 금광 채굴만으로 가능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없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조선보다 훨씬 빠르게 문호를 개방했고, 150톤 가량의 생산량을 자랑했던 이와미 은광의 수익까지 더하여 자본을 축적했는데도 근대화 과정에서 돈이 모자라 파산하기 직전까지 갔다. 한 나라의 근간을 뿌리부터 바꿔야 하는 것이 근대화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운산금광 단 하나의 매장량은 적진 않지만 여전히 부족한 규모였다. 다만, 한 푼 한 푼이 아쉬웠던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시드머니'의 역할로서는 유용했을 것이다.
평안북도 운산군뿐만 아니라 그 주위도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금광지대로, 운산금광뿐 아니라 이웃한 평안북도 창성군에는 운산금광 못지 않을 정도로 대규모인 대유동금광, 그리고 이 두 금광보다는 작지만 큰 규모의 여러 금광들이 존재한다. 대유동 금광의 채굴권 역시 조선 말기 프랑스에 넘어갔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회수해서 개발했다. 세계 순위에 들던 대형 금광이 아닌 주변의 소형 금광을 개발한 이들중에도 일제 강점기 조선 최고 부자들이 많이 나왔다. 경희학원의 설립자 조영식의 부친도 운산군 소형 금광주였고, 일제강점기 최고 부자였던 최창학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금광 개발로 성공했다. 조선일보 창업주 방응모 역시 평안북도 삭주군에 위치한 소규모 교동금광을 개발해 조선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일제강점기 언론계의 중심부로 진출했다.
북한의 금광들은 오랫동안 많이 캐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금맥이 살아있는 상태로 보수적으로 잡은 조사에서도 북한은 세계 6위에서 10위 규모로 금 매장량이 아직도 풍부하다. 일제강점기의 낮은 기술 수준으로 매장량을 파악하고 캐다 중단된 상태로 현재 최신 기술로 다시 조사하면 매장량이 훨씬 더 늘어날 확률이 높다.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금 채굴 특성상, 평양 시내마저도 전력 사정이 좋지 못한 북한도 채굴 작업을 오랫동안 중단한 상태다. 북한 정권 입장에서도 대규모 금광 개발같은 경제적 충격이 갑자기 일어나면 예상치 못한 정권 안정의 불안요소가 될 수 있으니 닫아둔 상태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운산군〉, 《위키백과》
- ↑ 〈운산군〉, 《나무위키》
-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운산군 개요〉, 《네이버 지식백과》
-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운산군 자연〉, 《네이버 지식백과》
-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운산군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운산군 경제〉, 《네이버 지식백과》
-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운산군 교통〉,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운산군〉, 《위키백과》
- 〈운산군〉, 《나무위키》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운산군 개요〉, 《네이버 지식백과》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운산군 자연〉, 《네이버 지식백과》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운산군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운산군 경제〉, 《네이버 지식백과》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운산군 교통〉,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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