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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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시(江界市)는 북한 자강도의 도 소재지이다. 지형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며 북한의 군사적 요충지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강계시를 임시 수도로 결정했었다. 당시엔 강계특별시로 정정되기도 하였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인해 다시 강계시로 수정되었다.[1][2]
개요[편집]
- 행정구역: 북한 자강도의 도 소재지
- 면적: 263.7km²
- 인구: 251,971명(2008년)
- 언어: 평안 방언
북동부는 장강군, 서부는 위원군 · 시중군, 남부는 성간군과 접해 있다. 동서(공귀동~두흥리) 간의 제일 긴 거리는 24km이고, 남북(공인동~장자동) 간의 제일 긴 거리는 19km이며, 도 전체면적의 1.57%를 차지한다. 현재 행정구역은 34동 2리로 구성되어 있다.
1949년 12월에 자강도 강계군 강계면을 강계시로 승격시키면서 원 강계면의 지명을 그대로 따서 강계시라 하였는데, 강계라는 명칭은 이 고장의 장자강 북천, 남천 등 여러 개 강하천들의 어귀에 위치하고 있다는 데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물이 좋은 도시답게 술도 유명하며 특히 도시 빌딩 한폭판에 있는 '인풍루'라는 조선시대 누각이 유명하다고 한다. 지금은 주민들의 쉼터로 개방 중이다. 함경북도 회령과 함께 미인의 고장으로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는 인삼이 특산물이었는데 공물 부담을 견디지 못 한 나머지 떠도는 강계 사람들이 늘어나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자강도가 북한 다른 지역보다 배, 포도 등 과일을 많이 재배하는만큼 이를 사용해 과실주와 리큐르를 제조하는 공장이 강계시에 있다. 바로 강계포도술공장이다. 강계포도술공장에서 제조하는 리큐르로는 인풍술과 백로술이 유명하다. 인풍술은 포도 리큐르이고, 백로술은 배 리큐르이다. 인풍술과 백로술은 남북관계가 상대적으로 나았던 시절에 한국에도 수입되어 팔렸다.
명승고적으로 관서팔경의 하나인 북천강이 독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져 있는 인풍루(仁風樓)를 비롯, 강계아사(江界衙舍), 강계망미정(望美亭), 활쏘기 연습장이었던 거연정(巨然亭) 등이 현존한다.[3]
역사[편집]
강계시 지역의 공귀동 등지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들이 대량으로 발굴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판도로 되어 있었다.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 발해국의 영역으로 되어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 속해 있었다. 고려 말기에 강계시 지역은 고려의 판도로 되었으며 1369년경에 진변(鎭邊), 진안(鎭安), 진성(鎭成), 진녕(鎭寧)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조선왕조가 건립된 이후 1401년(태종 1년)에는 입석(立石, 오늘의 전천군 운송지역)과 이언(伊彦, 오늘의 강계시 고영동지역)을 통합하여 석주(石州)라 하였다. 1403년에 강계부(江界府)로 되었고, 1413년에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로 되었다. 1695년에 평안도 강계부로 되면서 성안방(城安坊), 입석방(立石坊), 성간방(城干坊), 공귀방(公貴坊), 종포방(從浦坊), 곡하방(曲河坊), 어뢰방(漁雷坊), 이판방(吏判坊), 외귀방(外貴坊), 시천방(時川坊), 고산리방(高山里坊) 등 11개 방을 관할하였다.
1794년에 삼천방(三川坊)과 자성방을 신설하였다. 1810년에 좌채(左寨), 우채(右寨), 중채(中寨), 이평면(梨坪面), 진목면(眞木面), 칠평면(七坪面)을 신설하였다.
1839년에 성안방이 읍동면(邑東面) · 읍서면(邑西面)으로, 입석방이 화피면(樺皮面) · 입관면(立館面) · 화경면(化京面) · 전천면(前川面)으로, 성간방이 간상면(干上面) · 간하면(干下面) · 간북면(干北面)으로, 공귀방이 공남면(公南面) · 공서면(公西面) · 공북면(公北面)으로, 종포방이 종남면(從南面) · 종서면(從西面)으로, 이판방이 이남면(吏南面) · 이서면(吏西面)으로, 시천방이 시상면(時上面) · 시하면(時下面)으로, 삼천방이 삼상면(三上面) · 삼중면(三中面) · 삼하면(三下面)으로, 이평면이 이상면(梨上面) · 이하면(梨下面)으로, 우채가 여연면(閭莚面) · 장성면(長城面) · 우예면(虞芮面)으로, 고산리방이 고산면(高山面)으로, 좌채가 무창면(茂昌面)으로, 중채가 하산면(河山面)으로, 자성방이 자상면(慈上面) · 자하면(慈下面) · 관동면(館洞面)으로 각각 개편되었다. 조선 말에 화피면이 용림면(龍林面)으로 개칭되었고, 1895년에 용림면 일부를 분리하여 광성면(廣城面)을 신설하였다.
1896년 지방행정 개편에 따라 평안도가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로 분리될 때 평안북도 강계군으로 되면서 삼상면 · 삼중면 · 삼하면 · 자상면 · 자하면 · 관동면 · 이상면 · 이하면 · 여연면 · 장성면 · 우예면은 자성군에, 하산면 · 무창면 · 진목면 · 칠평면은 후창군에 이관되었고, 곡하방은 곡하면(曲河面)으로, 어뢰방은 어뢰면(漁雷面)으로, 외귀방은 외귀면(外貴面) · 문옥면(文玉面)으로 각각 개편되었으며, 이남면은 이서면에, 공남면은 공북면에 각각 편입되어 21개 면을 개편 관할하였다.
1910년대에 광성면이 용림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에 간상면 · 간하면을 병합하여 성간면(城干面)으로, 시상면 · 시하면을 병합하여 시중면(時中面)으로, 읍동면 · 읍서면을 병합하여 강계면(江界面)으로 각각 개편하였다. 1931년에 강계면과 공서면 일부를 병합하여 강계읍(江界邑)으로 개편하고 공서면 나머지 일부를 공북면에 편입하였다. 1937년에 문옥면이 만포면(滿浦面)으로 개칭되었고, 1942년에 만포면이 만포읍(滿浦邑)으로 승격되었으며, 1946년에 만포읍이 만포면으로, 강계읍이 강계면으로 강등되었다.
1949년에 자강도 강계군으로 되면서 만포면 · 시중면 · 이서면 · 외귀면 · 고산면을 병합하여 만포군(滿浦郡)을, 전천면 · 화경면 · 입관면 · 용림면 · 성간면 · 간북면을 병합하여 전천군(前川郡)을 구성하였고,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면이 편입되면서 동문면(東門面)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12월에 자강도 강계군의 공북면 · 종남면 · 종서면 · 곡하면 · 어뢰면 · 동문면을 병합하여 장강군(長江郡)을 신설하고, 강계면은 자강도 강계시로 승격되어 자강도 소재지로 되었는데, 이때 강계면의 명륜리 일부를 분리하여 신문리(新門里)를, 회룡리를 분리하여 강서리(江西里) · 사직리(社稷里) · 내룡리(內龍里) · 외룡리(外龍里)를 각각 신설하여 강계시는 명륜리(明倫里), 구정리(舊井里), 서원리(書院里), 동부리(東部里), 고당리(古堂里), 남문리(南門里), 남산리(南山里), 부창리(府倉里), 관전리(館前里), 동문리(東門里), 유동리(柳洞里), 고영리(古營里), 연풍리(淵豊里), 인풍리(仁風里), 신문리, 강서리, 외룡리, 내룡리(內龍里), 사직리, 석현리(石峴里) 등 20개 리를 개편 관할하였다.
1952년 12월에 외룡리 일부를 분리하여 서산리(西山里)를, 부창리 일부를 분리하여 만수리(萬壽里)를 각각 신설하였고 장강군 공북면의 향로리는 강계시 향로리(香爐里)로, 장강군 공북면의 두흥리는 강계시 두흥리(斗興里)로, 장강군 공북면의 공귀리는 공북면 인가해리 일부와 통합하여 강계시 공귀리(公貴里)로, 장강군 공북면의 공인리는 공북면 인가해리 일부와 통합하여 강계시 공인리(公仁里)로 각각 개편되었다.
1955년 2월 공귀리, 공인리, 향로리, 두흥리, 동부리를 제외한 모든 리가 동으로 개편되었다. 1957년 6월 사직동이 강서동에, 서원동이 구정동 · 인풍동에, 관전동이 인풍동 · 구정동에 편입되면서 폐지되었으며, 고당동 일부를 분리하여 석조동(石造洞)을, 동문동 일부와 남문동 일부를 병합하여 남천동(南川洞)을 신설하였고, 구정동이 북문동(北門洞)으로 개칭되었다.
1961년 3월 동부리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야학동(野鶴洞)을 신설하고 동부리 나머지는 동부동으로 되었으며, 남천동이 남문동에, 명륜동이 남산동에 편입되면서 폐지되었다. 동시에 석조동 일부를 분리하여 연주동을, 서산동 일부를 분리하여 대응동(大應洞)을, 신문동 일부와 연풍동 일부를 병합하여 수침동(水砧洞)을 각각 신설하고, 향로리는 석현동의 일부 지역과 통합하여 향로동(香爐洞)으로, 시중군 흥주리는 강계시 흥주동(興洲洞)으로 개편하였다.
1967년 10월 석조동 일부와 연주동 일부를 병합하여 연석동(煙石洞)을, 고영동 일부와 장강군 장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고계동(古界洞)을, 석현동 일부와 공인리 일부를 병합하여 인가리(仁可里)를 각각 신설하였으며 공귀리는 공귀동으로, 동문동 일부와 야학동 일부가 병합하여 남천동으로 개편되어 강계시는 북문동, 동부동, 고당동, 남문동, 남산동, 부창동, 만수동, 동문동, 남천동, 유동, 석조동, 연주동, 연석동, 석현동, 고영동, 고계동, 연풍동, 수침동, 신문동, 인풍동, 강서동, 외룡동, 서산동, 대응동, 내룡동, 흥주동, 야학동, 향로동, 공귀동, 공인리, 두흥리, 인가리 등 29동 3리를 개편 관할하였다.
1976년 2월 고계동이 장자동(將子洞)으로 개칭되었고, 1981년 2월에 서산동 일부를 분리하여 독산동(獨山洞)을, 고영동을 분리하여 고영일동(古營一洞), 고영이동(古營二洞)을 신설하였으며, 인풍동이 충성동(忠誠洞)으로 개칭되었다.
1981년 10월에 고당동이 노동자동(勞動者洞)으로 개칭되고 공인리는 공인동으로 되었다. 1995년 12월에 인가리는 은정동(恩情洞)으로 개칭되고 시중군의 의진리(義眞里), 쌍신리(雙新里)가 강계시에 편입되었으며, 1998년에 쌍신리가 신흥리(新興里)로 개칭되었고, 1999년에 의진리가 의진동으로 개편되었다.
2003년 현재 행정구역은 34동(강서동, 고영일동, 고영이동, 공귀동, 공인동, 남문동, 남산동, 남천동, 내룡동, 대응동, 독산동, 동문동, 동부동, 노동자동, 유동, 만수동, 부창동, 북문동, 서산동, 석조동, 석현동, 수침동, 신문동, 야학동, 연석동, 연주동, 연풍동, 외룡동, 은정동, 의진동, 장자동, 충성동, 향로동, 흥주동), 2리(두흥리, 신흥리)로 구성되어 있다.[4]
산업[편집]
강계시는 광복 전에 화전을 일구어 감자, 귀리, 조를 주로 심던 화전지역이었다. 광복 후 전력공업, 기계공업, 방직공업을 비롯한 중공업 및 경공업을 가진 공업 도시가 되었다. 강계시의 공업은 방직 및 피복공업, 일용품공업, 전력공업, 기계공업, 식료품공업 등 부문이 기본을 이룬다. 이밖에도 제약공업, 화학공업, 건재공업 등이 발전하고 있다. 방직 및 피복공업에서는 방직공장을 비롯하여 편직물공장, 방사공장 등이 갖춰져 여러 가지 실과 천, 편직물과 옷을 생산하고 있다.
강계시는 북한의 주요 전력생산기지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대규모 발전소와 여러 개의 중소형발전소들이 있다. 기계공업은 건설기계, 정밀기계, 전기기계 및 전기기구, 공작기계, 식료기계, 방직기계, 농기계, 공구류 생산부문으로 되어 있다. 강계연필공장(江界鉛筆工場)은 전국적 의의를 가진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일반연필, 색연필, 제도연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연필들은 국내 수요를 충족시킬 뿐 아니라 수출도 한다. 강계포도술공장에서는 지방 특산물인 ‘인풍술’, ‘포도주’등을 생산한다. 이 밖에 강계시에는 현대적인 설비와 기술로 갖춰진 60여 개의 지방산업공장들이 발족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식료품, 철재 및 전기일용품, 목재일용품, 문화용품 등이 생산된다.
채소 생산을 위주로 하는 농산업과 축산업, 과수업, 양잠업도 발달되어 있다. 농경지는 강계시 전체 면적의 11.24%를 차지한다. 도시근로자들을 위한 부식물생산에서는 채소, 고기, 알, 젖 생산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주요 산지는 공인, 야학, 고영, 흥주, 석현 등 지역이다. 양잠업의 주요 산지는 공귀, 고영 등 지역이다. 공귀에는 강계고치농장이 있다.[5]
교통[편집]
강계시는 예로부터 북한 북부 내륙 지역의 교통상 중심지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자강도 안의 여러 지역들과 연결되는 철로와 도로가 있다. 만포선과 이 선에서 갈라지는 강계선(강계~낭림)이 통과하고 있으며 여기에 강계역(江界驛), 공인역(公仁驛), 곡하역(曲河驛), 남문역(南門驛), 동부역(東部驛) 등이 설치되어 있다. 강계~쌍방 간에는 통근열차가 다닌다.
도로는 강계를 중심으로 중강(193km), 우시(174km), 초산(134km), 고풍(112km), 위원(95km), 화평(75km) 등 자강도내 각지로 이어지는 도로망이 구축되어 있다.[6]
지리[편집]
낭림산맥과 강남산맥의 지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여기에는 장봉(951m)·초대봉(1,427m)·민봉(1,548m)·중지봉(1,241m)·대웅산(1,123m)·범암산(940m)·조이덕산(888m)·추포령(771m) 등 높고 험한 산과 고개가 솟아 있다. 지형은 가장자리에서 중심부로 가면서 점차 낮아져 분지를 형성하는데 평균높이가 300m이다. 장자강이 북서쪽에서부터 시의 중앙을 관통하여 남천·북천을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며 이들 하천을 따라서 좁은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시 면적의 약 80%가 산림이며, 주요 수종은 소나무·전나무·가문비나무·잣나무·종비나무 등의 침엽수와 신갈나무·상수리나무·떡갈나무 등의 활엽수이다. 주요 기반암은 화강암과 석회암이며 토양은 전반적으로 포드졸성 갈색산림토가 분포한다.
북부내륙지대의 분지에 자리잡고 있어 한랭한 북서풍이 부는 대륙기후의 특성을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5.7℃, 1월 평균기온 -15.9℃, 7월 평균기온 23.1℃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952.6㎜이다. 6·25전쟁중인 1950년 10월 유엔군과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북한이 임시수도로 삼은 곳이기도 하다.
행정구역[편집]
현재 강계시는 34동, 2리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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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편집]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강계시〉, 《위키백과》
- ↑ 〈강계시〉, 《나무위키》
-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강계시 개요〉, 《네이버 지식백과》
-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강계시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강계시 경제〉, 《네이버 지식백과》
-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강계시 교통〉,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강계시〉, 《위키백과》
- 〈강계시〉, 《나무위키》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강계시 개요〉, 《네이버 지식백과》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강계시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강계시 경제〉, 《네이버 지식백과》
- 〈조선향토대백과: 평안북도 강계시 교통〉, 《네이버 지식백과》
- 〈강계시〉, 《두피디아》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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