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강
훈강은 압록강 북쪽 약 60㎞ 떨어져 압록강과 나란히 흐르는 강(445㎞)이다.
개요[편집]
- 훈강은 (중국어 간체자: 浑江, 정체자: 渾江, 병음: Hún Jiāng, 한자음: 혼강)은 압록강의 서북 쪽에 위치한 중국 측에서 가장 큰 지류이다. 고구려 때는 비류수(沸流水), 명나라 때는 파저강(婆豬江), 청나라 때는 동가강(佟佳江)이라고 불렸다. 훈강은 지린성 바이산시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 만족 자치현에서 압록강으로 흘러든다. 강의 길이는 446.5km이고, 유역 면적은 15,381km²이다.[1]
- 훈강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현(桓仁縣)을 흐르는 강이다. 랴오닝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에 합류한다. 강 유역은 고구려의 발상지로 북부여(北夫餘)에서 남하한 고구려족이 환런 지방을 근거지로 삼아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고 한다. 강 이름도 시대에 따라 염난수(鹽難水) ·비류수(沸流水) ·대충강(大蟲江) ·파저강(婆潴江)으로 바뀌어 왔다. 조선시대 세종 때 퉁자강(파저강) 유역에서 출몰하여 조선으로 넘어와 노략질을 일삼던 여진족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훈강의 역사[편집]
- 훈강 유역은 고구려의 발상지이다. 강의 중류인 환인저수지(桓仁水庫) 북서쪽 기슭의 오녀산성은 고구려 초대 왕성인 홀본성(忽本城)으로 비정(比定)된다. 이곳은 예맥족의 활동 지대였고, 고조선의 영토였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현도군이 설치되었고, 그곳에서 고구려가 일어났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한 후에는 당, 발해, 요, 금, 원이 차례로 지배하였다. 이후 명나라 초기에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가 휘발하(輝發河) 유역에서 부족민을 이끌고 이곳으로 이주한 후 지명을 따서 퉁갸 하라(佟佳氏 동가씨)라고 불렀고, 청나라 때에 만주팔대성 중 하나가 되었다.
- 태조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 정벌 북으로는 헤이룽장 남부에 있는 동닝현, 북으로는 러시아의 우스리크스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태종때는 수성 정책을 펼쳐 압록강-두만강 경성 이북이 함몰됐으나,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북쪽을 정벌하여 압록강 건너 훈강 이남을 회복하였다. 그후 세조 성종때부터는 이땅을 직접 통치했다는 정사 '조선왕조실록-중중실록' 기록이다. '조선의 광개토대왕' 세종대왕은 고려의 서북 한계 압록강을 넘어 평균 약 60㎞ 북진 훈(渾)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건너 훈강 이남의 서북 국경지역에 여연군, 자상군, 무창군 우예군등에 성을 쌓고 북방 회복을 위한 전진기지 4군을 설치했다.
압록강[편집]
-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북한과 중국을 가로질러 서한만으로 흘러드는 강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총 길이가 790㎞(또는 803㎞)로, 남한에서 제일 긴 낙동강의 525㎞, 한강의 514㎞보다도 길다. 유역 면적은 64,740㎢이며, 북한 쪽 유역 면적이 약 31,226㎢이고 나머지는 중국에 속한다. 압록강은 백두산 남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길림성의 백산시와 통화시, 요령성의 단동시 등의 지역을 지나고 중조변계를 따라 서남으로 흘러 훈강(渾江), 허천강(虛川江), 토루강(禿魯江) 등의 지류와 합류하여 중국 대륙 해만의 최북단인 서해로 흘러든다. 총 길이는 795㎞이고 유역 면적은 6.19만 ㎢이며 양안에 임강, 집안(集安) 등 관광 도시가 있고 단동과 북한에 위치한 신의주 등 공업 도시가 있으며 변경 조약에 의하여 압록강 수면은 북한과 중국의 공동 소유로 하였다. 고려성종 13년인 994년 거란으로부터 점유를 인정받은 압록강 동쪽의 여진 부락을 소탕하고, 장흥(長興)·귀화(歸化)·곽주·구주·안의(安義)·흥화·선주(宣州) 등에 점진적으로 성곽을 쌓고 압록강변으로 진출하였다.
- 압록강은 하천 발원지로부터 임강까지 하천 상류 구간을 형성하였다. 상류 하천은 험산준령을 흘러지나 사면이 가파르고 유속이 빠르며 골짜기 너비는 약 50~150m이며 양쪽은 나무가 무성하여 숲을 이루었고 사처에 폭포와 암초가 있다. 임강에서 수풍까지는 중류 구간을 형성하였다. 임강 이하에서 하천은 방향을 바꿔 서남쪽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경사가 완만하며 골짜기도 200~2000m로 넓어졌으며 양쪽은 식물이 무성하다. 압록강은 위쪽과 아래의 낙차가 매우 심한데 발원지에서 하구까지의 높이가 무려 2,440m나 차이가 난다.
훈강의 국경선 기준[편집]
- '조선왕조실록'에는 훈강지역을 조선이 지배하였다는 직간접 증거가 245회나 적혀 있다. 그중 훈강이 조선의 서북 국경선이라는 관점이 보편적이다. 조선 후기엔 동가강(佟佳江), 20세기에 이르러 강물이 혼탁하다 하여 혼강(渾江)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훈강은 길림성 백산시 북부 장백산맥에서 발원하여 통화현으로 스핑 환런 야허, 사천즈 덴즈 관덴현에서 압록강에 합류한다.
- 1436년 (세종 18년) 윤6월 19일 훈강 동쪽은 조선 영토라 하였다. 파저강(婆猪江)은 그 근원이 장백산에서 흘러나와 한반도의 터전이 되어, 강 동쪽은 우리 지경이 되고, 강 서쪽은 저들의 거주지가 되고 있사온데, 의주로부터 여연까지의 상거(相距)가 1백여 리로서 야인들이 우리 지경을 출입하며 도적질을 감행하는 자가 모두 이 강을 경유하고 있다.
- 1440년 (세종22년) 7월 29일 휴전선의 철책처럼 훈강 강둑에 목책을 설치하였다. 평안·함길도의 도체찰사 병조 판서 황보인이 연변의 비어책을 올리기를, 이산(理山)의 파저강(婆猪江)이 합류하는 양쪽 언덕에 가지가 많은 큰 나무를 베어 목책을 강변에 설치하고 강물이 얼기 시작하거든 물 위에서 칡덩굴로 비껴 얽고, 가지가 많은 큰 나무에 돌을 매어 달아 물속에 넣어 함께 얼어붙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 1465년 (세조 11년) 8월 6일 목숨을 걸고 훈강을 건너 조선으로 귀순하려는 여진족, 훈강 이남은 조선 땅이라는 극명한 증거. 마치 철책선 부근 임진강 하류를 넘어오는 북한 주민들이 연상된다.
- 1484년 (성종 15년) 7월 9일 훈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려는 북서쪽 여진족을 북동쪽 여진족이 만류되었다.
- 1501년(연산 7년) 9월 1일 훈강을 건너오지 못하도록 큰 진을 설치하자고 건의하였다.
- 1595년 (선조 28년) 8월 5일 임진왜란의 와중에서도 파저강 이남은 여전히 조선 땅이라고 하였다.
- 1618년(광해 10년) 6월 10일 훈강과 마주 보는 지역으로 굳게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 1773년 (영조 49년) 12월 15일 이산부의 건너편은 훈강 적진이라고 하였다.
- 1781년(정조 5년) 12월 17일 초산부 산향회진 북쪽 경계가 훈강이라고 하였다.
- 1846년 (헌종 12년) 8월 19일 청나라 군대의 훈강 동구 이동 동태 감시하였다고 한다.
훈강 전투[편집]
- 조선 세종 시기 1433년 최윤덕 등 북방 장수들이 오랫동안 조선을 괴롭히던 훈강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해 평정한 전투이며 파저강 전투라고도 한다. 당시 북방 유목 민족 여진족은 고려 시대 1391년 만포진과 갑산을 점거한 이후 조선의 북방 국경 지역을 넘나들며 약탈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태종 시기 북방 지역에 관심을 기울여 북방 지역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각 고을들을 개칭하고 승격시켰다. 세종에 이르러서도 여진족의 국경 침탈이 자주 이루어졌다. 1432년 12월 9일에 야인 400기가 경계에 침입하여 사람과 물건들을 약탈해가니 강계절제사 박초가 추격하여 사람들을 구하고 약탈해가는 물건을 다시 빼앗아 왔다고 장계하였다. 조선 조정의 중신들은 정벌에 신중해야 한다고 아뢰었으나 세종의 압록강 유역의 정벌 의지는 확고하였다. 그리고 최윤덕을 판중추원사 겸 영영변도호부사로 삼았다. 이후 조정에서 처음 정벌군의 규모를 3천을 논하였으나 전술적인 면 등을 들어 최윤덕이 아뢰어 최종적으로 정벌군은 1만 이상의 군사로 정하였다.
- 훈강 전투의 공로로 회군 이후 5월에 정벌군의 총사령관인 최윤덕은 우의정에 오르게 되었다. 이어 근정전에서 펼쳐진 출병장수들의 위로연에서 세종은 최윤덕에게 세자의 술잔을 앉아서 받도록 하는 등 정벌의 성과에 대해서 만족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우의정이 된 최윤덕을 외직인 평안도도절제사에 3년간 겸직시켰다. 임기를 마친 최윤덕에 이어 또 한 명의 신뢰하는 장수인 이천을 1436년 평안도도절제사로 임명하여 여진족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이후 세종은 계속해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방 지역 탈환에 나서 이천을 보내 제2차 파저강 전투를 치러 사군을 완성하였다. 이 정벌은 다른 지방의 여진족들의 분열도 불러왔는데, 1433년 10월에 함경도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의 분열을 야기시켰다. 이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사민정책 등을 펼치면서 함경도에서 조선의 내실을 다져가 6진을 개척하였다.
오녀산성[편집]
- 오녀산성은 요녕성 환인현 현성(縣城)으로부터 동북쪽으로 8.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훈강(渾江)의 건너편 해발 820m나 되는 높은 곳에 축성되었다. 이 산은 주위의 여러 산 중에서도 가장 높이 솟아오른 산으로 깎아지른 절벽의 높이만도 200m나 되는 험산이다. 산 꼭대기에는 동쪽면을 제외하고 삼면이 모두 절벽으로 성벽은 남북의 길이가 1000m이고, 동서 너비는 300m로 총 길이 2,440m에 이른다. 오녀산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말하는 '왕이 졸본천에 이르러 그곳 땅이 기름지고 산세가 험하고 견고하므로 이곳에 마침내 도읍을 정하고 집을 짓고 살면서 3년 후(기원전 34)에 성곽을 쌓고 궁실(宮室)을 지은 곳'이라고 기록한 바로 그 성이다.
- 환인 서북 3km 지점의 하고성자성지(下古城子城址)는 훈강 서안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훈강은 길림성의 북쪽에서 흘러 내려와 성지의 동부를 경유하여 남쪽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성의 서쪽에는 작은 개울이 있고 성의 남쪽 1.2km 지점에서 훈강에 진입한다. 이곳에서 약 10km 상류에 오녀산성이 있다. 성지는 훈강의 수면에서 약 5m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벽이 226m, 서벽 264m, 북벽 237m, 남벽 212m로 방형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2~5m이고, 성벽 상부의 넓이는 2m 정도이다. 하고성자성과 오녀산성은 훈강 우안의 비교적 가깝고 서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두 성이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녀산성의 동쪽으로 15km 정도 거리의 훈강 동안에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이라고 하는 마을의 남쪽 언덕에는 750여 기의 고구려 초기 적석총이 있었다고 한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훈강〉, 《위키백과》
- 〈압록강〉, 《나무위키》
- 〈압록강〉, 《위키백과》
- 〈파저강 전투〉, 《위키백과》
- 〈파저강 야인정벌(婆猪江 野人征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