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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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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하
가야하 지도

가야하(嘎呀河)는 한반도에서 만주로 향한 한민족의 주요 이주 경로였던 중국 길림성 옌볜조선족자치주(延边朝鲜族自治州) 왕청현에 위치한 하천이다.[1]

개요[편집]

가야하는 도문과 왕청을 경유하여 흐르며 고대로부터 영고탑(寧古塔)과 훈춘[琿春]을 잇는 역참로(驛站路)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요 도시인 왕청현 관내를 경유한다. 왕청현 일대는 북옥저(北沃沮)의 터전이었고,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에 속한 지역이다. 특히 발해국이 상경용천부에서 동경용원부로 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로이자 일본으로 향하는 국제노선인 일본도(日本道)가 지나가는 곳이다. 조선 효종 때 청의 요구에 의해 흑룡강 일대를 침범하는 러시아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두 차례나 출병했던 나선정벌(羅禪征伐) 당시 조선군의 이동 경로 역시 왕청의 가야하를 거슬러 노송령, 영고탑으로 향했던 경로와 일치한다. 신류(申瀏, 1619∼1680)의 『북정록(北征錄)』에 가야하를 거슬러 이동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배고픔과 일제의 만행을 피해 한반도에서 만주로 향했던 한민족의 이주 경로와도 부합되는데, 가야하의 물줄기를 거슬러 목단강, 송화강, 흑룡강 일대로 이동하면서 수전(水田)을 경작하고 정착하였다.

명칭 유래[편집]

지명이 가야하로 음차되어 표기된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길림통지(吉林通誌)에는 13도가야하(十三道嘎呀河)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래 만주어로는 알아하(嘎雅河)로 불리며, 채주하(采珠河, 진주를 캐는 강)라고도 한다. 금대에는 잔준하(孱蠢河), 청대에는 갈합리하(喝哈哩河), 갈이합하(噶爾哈河)라고 불렸다. 왕청현(汪淸縣) 시가지를 통과하는 가야하는 대두자천(大肚子川)과 왕청하(汪淸河)로 불리기도 한다.

현황[편집]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노송령(老松嶺) 인근의 석문자(石門子) 일대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왕청현과 백초구(百草溝)를 거쳐 도문 방향으로 흐르는데, 도문시 서북의 하구촌(河口村)에서 연길로 이어지는 부르하통하[布尔哈通河]와 만나 도문북강(圖們北江)을 이루다가 이내 두만강에 합류한다. 길이는 약 108.7㎞, 너비는 5∼50m이다.

왕청현[편집]

왕칭현(중국조선어: 왕청현, 중국어 간체자: 汪清县, 병음: Wāngqīng xiàn)는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현이다. 면적은 8,994km², 인구는 25만여 명이고, 전체 인구 중 한민족 비율은 30%이다. 동서로는 훈춘(珲春), 둔화(敦化)와 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투먼(圖們)과 옌지(延吉), 북쪽으로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단장시(牡丹江市)의 닝안(寧安), 무렁(穆棱), 동닝(東寧)과 닿아 있다. 러시아 국경과 40km, 북한과는 18km 거리에 있어서 동북아 무역의 중심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왕청현에는 북로군정서 군부가 있었다. 왕청현은 청산리 대첩 이후 최대 전투인 대전자령 전투가 일어난 곳이다. 또한 1915년 한국의 독립을 위한 독립군 사관 양성학교였던 동림무관학교가 세워진 곳이다.[2]

왕칭(汪清)이란 지명은 보루(堡壘)를 뜻하는 만주어(滿洲語)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지역이 변경의 요충지로서 군대 주둔지로 쓰였기 때문이다. 중국 청(淸)의 선통제(宣統帝, 1906~1967) 때인 1909년에 현(縣)이 설치되었으며, 1900년대부터 한인(韓人)이 대규모로 이주해 살기 시작하여 1920년대 항일 독립전쟁의 근거지가 되었다. 1911년 서일(徐一)은 왕칭현에서 국외로 탈출한 의병(義兵)들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결성했으며, 이를 모태로 1919년에 조직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도 왕칭현 스리핑(十里坪)에 근거지를 두고 사관 양성소 등을 운영했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洪範圖)가 이끈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안무(安武)가 이끈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이 이끈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의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에 큰 승리를 거둔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가 일어난 곳도 왕칭현이다.

청나라 초기에 이 지역은 백두산으로 인한 봉금지대의 일부분이었다. 다만, 만주 팔기에 속한 쿠얄라부(庫雅拉部)의 뇨후트씨(鈕呼特氏)가 이 지역에 살고 있었기에 이 지역을 그들의 세습좌령(世襲佐領)으로 삼았으며, 영고탑장군에 속하게 했다. 그 뒤 1881년 혼춘부도통(琿春副都統)의 관할 지역이 되었고, 1902년에는 연길청(延吉廳) 소속이 되었다가 얼마 뒤 연길부(延吉府) 소속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0년길림성 연길부와 혼춘청(琿春廳)의 일부 지역을 각각 쪼개어 왕청설치국(汪淸設治局)을 신설하였다. 이 시기, 서일 등 대종교 신자들이 이 지역으로 망명해와 항일비밀결사 중광단(重光團)을 설립하기도 했다. 신해혁명 직후인 1912년에는 왕청설치국이 승격되어 비로소 왕청현(汪淸縣)이 되었다. 1914년 6월, 왕청현은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관할이 되었다가, 1929년 도제(道制)가 폐지되자 길림성 직할의 3등현(三等縣)이 되었다.

만주국이 수립된 뒤 1934년 12월 간도성(間島省)에 편입되었다. 1939년에는 연길현 북부 지역의 일부가 왕청현 관내에 편입되었다. 1943년 10월 1일, 간도성, 목단강성(牡丹江省), 동안성(東安省)이 통합되어 동만총성(東滿總省)이 되었다. 1945년 5월 28일, 동만총성이 폐지되자, 다시 간도성에 속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만주국이 멸망한 뒤 왕청현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의해 쑹장성(松江省)에 속하게 되었다. 1952년 9월 3일 연변 조선족 자치구가 성립되자 이에 편입되었다.[3]

왕칭현은 장백산맥(長白山脈)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서 평균 해발고도가 806m에 이른다. '임해(林海)'라 불릴 정도로 삼림 자원이 풍부해 임업이 발달해 있다. 삼림이 전체 면적의 86%를 차지하고 있으며, 홍송(紅松), 백송(白松), 적송(赤松), 어린송(魚鱗松) 등의 목재(木材)가 풍부히 생산된다. 왕칭(汪清), 톈차오링(天橋嶺), 다싱거우(大興溝)에 임업국(林業局)이 설치되어 있다. 야생 식물과 동물, 광물 자원도 풍부해 개발 잠재력이 매우 높다. 왕칭현에는 사향노루 등 157종의 야생 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산삼, 오미자, 운지, 영지, 송이 등 약용 가치가 높은 경제 식물이 풍부히 분포하고 있어서 특산물 생산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금, 동, 알루미늄, 석탄, 석회석 등의 광물 자원도 풍부하게 분포하고 있는데, 석회석의 매장량은 2억톤에 이른다. 산지와 하천이 많아 수력 발전에도 유리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왕칭현에는 6개의 수력 발전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만천성(滿天星) 수력발전소는 발전용량이 3.2만kw에 이른다. 산지가 발달해 스키장 등의 여가, 휴양 시설의 개발에도 유리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초지(草地)가 많아 목축업 발달도 기대된다.

사계절이 뚜렷하지만 대륙성기후의 영향이 강해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다. 연평균기온은 3.9℃이며, 기온의 연교차가 커서 7월 평균기온이 17~20℃이지만, 1월 평균기온은 -20℃에 이른다. 산지(山地) 기후의 특성을 띠고 있어서 고도에 따른 기후 변화도 큰 편이다. 무상일수(無霜日數)는 110~130일이다. 연평균강수량은 580mm로 건조하며, 연일조시수(日照時數)는 2,700시간에 이른다.[4]

옌볜조선족자치주[편집]

옌볜조선족자치주(延边朝鲜族自治州)는 중국 지린성에 속하여 있는 자치주이며 중국 동북지구에 있는 유일한 자치주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또는 간략히 연변이라고도 한다. 위치는 지린성 남부 중국과 북한변경에 있으며 소재지는 옌지이다. 옌볜조선족자치주는 중국의 주요한 목재 산지 중의 하나이며 삼림 피복율이 80.04%이고 옌변림업구는 송화강, 압록강, 두만강, 목단강의 발원지이다. 이 곳은 80만명의 재중동포가 거주하는 중국 최대의 조선족 거주 지역이다. 자치주 전체 인구 가운데 조선족 인구 비율은 36.7%이며, 조선족이 전체인구의 2%에 불과한 둔화 시를 제외한 연변 지역의 조선족 인구비율은 46.5%이다.[5]

옌볜조선족자치주 역사는 유구하다. 일찍 2만6,000년 전 구석기 말기에 연변 땅에 ‘안도인’이 활동했고 서기 698년에 진국을 세웠다가 713년에 발해국으로 고쳤다 . 연변이란 단어는 1920년 전후에 나왔는데 이 지역이 3개 나라 접경 지대에 위치해 있고 또 연길 변무 공서의 관할에 속하기에 연변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 동북을 침략한 후, 1934년 12월에 연변을 간도성으로 만들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한 후 중국 공산당은 연변에 인민 정권을 세우고 간도성 정부를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11월에 연변 행정 독찰 전원 공서(延邊行政督察電援公署)로 개칭하였다. 1948년 3월에 연변 전원 공서를 성립했다가 1952년 9월 3일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면서 연변 전원 공서를 철폐하고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성립하였다. 1955년 12월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하고 아래에 1개 시, 5개 현을 두었다. 1958년 돈화현이 연변에 획분되어 들어왔고 1965년 도문시가 설립되었다. 1985년부터 차례로 돈화(敦化), 용정(龍井), 훈춘(暈瑃), 화룡(和龍)현이 시로 되었는데 지금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연길, 도문(圖門), 돈화, 훈춘, 용정, 화룡 6개 시와 왕청, 안도 2개 현이 소속되어 있고 수부는 연길시이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가야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왕칭현〉, 《위키백과》
  3. 왕청현〉, 《나무위키》
  4. 왕칭(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5. 자치주(중화인민공화국)〉,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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