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골제
벽골제(碧骨堤)는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에 위치한 저수지로 대한민국 저수지의 효시이다. 고대 수리시설 중 규모도 가장 크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벽골제 저수지를 기준으로 그 남쪽을 호남지방이라고 부른다. 호남이란 호수의 남쪽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호수'가 바로 '벽골제'를 가리킨다.
개요[편집]
- 벽골제는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 소재의 비석 및 삼국시대의 저수지 둑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김제 벽골제는 한국 최고(最古)·최대의 저수지 둑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쌓았고, 790년(원성왕 6)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고려·조선 시대에 수리하였다. 제방은 포교리(浦橋里)를 기점으로 월승리(月昇里)까지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어 약 3km의 거리에 남아있는데, 수문지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주(石柱)가 3군데에 1쌍씩 있다. 그리고 1925년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공사에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제방은 절단되어 양분(兩分)된 중앙을 수로로 만들어 농업용수를 흐르게 하였다. 1975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제방 높이는 북단(北端)이 4.3m, 남단(南端)이 3.3m이고, 수문 구조는 높이 5.5m의 2개 석주를 4.2m 간격으로 세웠으며, 서로 마주 보는 안쪽 면에 너비 20cm, 깊이 12cm 요구(凹溝)를 만들고 목제(木製) 둑판을 삽입하여 수량을 조절하였다. 석축(石築)은 약 6m이며 가장 낮은 곳이 1.1m이다.[1]
- 벽골제는 한국 최고(最古)의 저수지 둑으로,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둑의 길이 1800보 규모로 처음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 증축. 이후 11세기 초 고려 현종, 12세기 초 인종, 15세기 초 조선 태종 재위기 등 4차례에 걸쳐 개축하였는데, 세종 2년(1420)에 홍수로 무너졌다. 일제강점기 1925년에 동진수리조합이 농지관개용 간선수로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일부 훼손되었는데, 1975년에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현존하는 둑의 길이는 2.53 km, 확인된 둑의 길이는 북으로 김제 장화동에서 남으로 월승리 사이 3.8 km에 달하며 이곳이 수문지임을 알려주는 석주(石柱)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등 5개 수문이 있었다고 기록되었으나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 2개소만 남았다. 벽골제 유적지에 있는 수문은 장생거다. 2012년에 중심거, 2020년에는 제 1수문(수여거)로 추정하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제방 너머로 수로가 지나지만 수문 바로 뒤에도 제방을 쌓아 실제 수리시설로 가동할 수는 없다. 벽골제 중수비에 따르면 벽골제가 운용되던 시기에는 수문 양쪽의 석주에 느티나무 널을 놓고 그 위에 도르래를 설치하여 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다.[2]
- 벽골제는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저수지이다. 한국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다. 역사적 연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흘해왕 21년조에 ‘시개벽골지안장일천팔백보(始開碧骨池岸長一千八百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그 유적은 포교리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월승리에 이르는 평지에 일직선으로 약 3㎞에 달하는 제방이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1925년에 동진(東津) 수리조합에서 이 제방을 관개용 기간수로(基幹水路)로 개조하여 이용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이 제방에 부수된 시설로는 3개 소에 수문지(水門址)가 있으며, 거대한 돌기둥들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벽골제중수비문에 보면 두 개의 수문이 더 있었다고 한다. 수문의 너비는 4.2m로서 여기에 사용된 돌기둥의 높이는 5.5m이며, 1개의 무게는 약 8t에 달하고 있다. 수문 외부에는 호안석(護岸石) 등이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다. 한편, 저수지 수면의 만수 때 이 제방을 구축함으로써 확보되는 점유 총 면적은 37㎢, 즉 1120만 평의 방대한 지역에 달한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이러한 토목공사는 정밀도가 매우 높은 수준측정법(水準測定法)을 전제로 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이는 당시 토목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 제방과 함께 이곳에 건립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김제벽골제비는 1963년에 일괄해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3]
- 벽골제의 축조 시기는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으로 추정된다. 호남 지방(湖南地方)의 호(湖)가 바로 벽골제를 가리킨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흘해왕 21년조에 '시개벽골지안장일천팔백보(始開碧骨池岸長一千八百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790년(원성왕 6)에 증축한 사실이 있었고, 고려 인종 때 수축하였다가 인종 24년(1146년)에 왕의 병이 벽골제 수축 때문이라는 무당의 말로 일부를 파괴한 일이 있다. 태종 15년(1415년)에 국가적인 대규모 수축공사를 일으켜, 군정 만 명이 2개월 동안 주위 7만 7,406보, 높이 17척의 제방을 수축하여 몽리 수전은 충청도, 전라도에 걸친 방대한 지역으로 9,800결에 달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관리, 유지가 전폐된 이래 농민의 모경으로 지금은 거의 경지화되고 말았다. 이때의 석조수문과 기념비 등의 유물이 남아있다. 제방은 포교마을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월승리에 이르는 평지에 약 3.3km에 달하며, 제방 높이는 5.6m이다. 댐형식은 흙댐(필댐)이다. 관개면적은 10,000ha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벽골제에는 총 5개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 명칭은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라고 한다. 그중 현재 제방과 함께 남아있는 수문은 두 개소로 단지 내 장생거와 단지 밖 벽골제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약 2km에 위치한 경장거이다. 1980년대 수문 일부 복원 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4]
벽골제의 형태[편집]
- 벽골제방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약 3,245m, 『태종실록(太宗實錄)』의 기록으로는 약 3,362m이다. 1975년 벽골제 발굴 작업을 하면서 제방의 길이를 실측한 결과 약 3,300m가 나왔으니 문헌의 기록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벽골제비의 크기는 높이 1.95m, 폭 1.05m, 두께 0.13m이다. 벽골제방은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포교(浦橋)를 기점으로 월승리(月昇里)까지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어 있는데, 수문지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주(石柱)가 2군데에 1쌍씩 있다. 그리고 1925년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공사에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제방은 절단되어 양분(兩分)된 중앙을 수로로 만들어 농업용수를 흐르게 하였다.
- 1975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제방 높이는 북단(北端)이 4.3m, 남단(南端)이 3.3m이고, 수문 구조는 높이 5.5m의 2개 석주를 4.2m 간격으로 세웠으며,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 너비 20㎝, 깊이 12㎝의 요구(凹溝)를 만들고 목제(木製) 둑판을 삽입하여 수량을 조절하였다. 석축(石築)은 약 6m이며, 가장 낮은 곳이 1.1m이다. 현재의 김제 벽골제는 길이 2,500m의 제방과 2개의 수문인 장생거(長生渠)와 경장거(經藏渠)만이 남아 있다. 또한 현재의 제방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수리조합에서 둑의 가운데를 파서 농지 관개용 간선수로로 개조해 놓은 상태이다.
- 둑의 북쪽에는 대극포(大極浦)가 있는데, 조수가 몹시 격하며, 남쪽에는 양지교(楊枝橋)가 있는데, 물이 깊게 고여 있어서 공사하기가 무척 힘이 들어, 옛부터 어려운 공사였다. 이제 먼저 대극포의 조수가 치는 곳에 방축을 쌓아 그 기세를 죽이고, 다음으로는 아름드리 나무를 양지교(楊枝橋)의 물이 고여 웅덩이가 된 곳에 세워서 기둥을 만들고, 나무다리를 만들어 다섯 겹으로 목책(木柵)을 막아서 흙을 메우고, 또 제방 무너진 곳에 흙을 쌓아 편평하게 하며, 제방의 내외로는 버들을 두 줄로 심어서 그 기반을 단단하게 하였으니,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룡(丘壟)처럼 바라보였다고 하였다.
- 신털미산에 있던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1975년 장생거 옆의 제방 위로 옮기고 비각을 설치하였다가 1980년 벽골제지 정화 공사로 인하여 제방 아래 현재 위치로 옮겼다. 1963년 1월 21일 김제 벽골제비 및 제방은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3월 김제 벽골제로 사적의 명칭을 변경하였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벽골제 중수비는 당초 신털미산 정상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사적 벽골제를 선양하기 위해 단지가 조성되면서 현 벽골제단지내로 이전하였다. 재질이 점판암인 까닭에 세월에 마멸되어 판독이 어려우나 앞서 밝힌 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해 전문을 헤아릴 수 있다.
벽골제의 유래[편집]
- 김제의 옛지명이자 마한의 구성국이기도 했던 벽비리국, 벽골군은 이 벽골제에서 비롯되었다. '벽골'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두고 우리말 '벼고을'을 음차했다는 설과 한자 의미 그대로 '푸른 뼈(碧骨)의 둑'이라는 설 등 두 가지가 있다. 전자에 따르면 '푸른 뼈'라는 해석은 벽골, 볏골, 혹은 그와 비슷한 발음의 순우리말을 이두표기하는 과정에서 민간어원이 붙고 그에 끼워맞추기 위한 해석 및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 된다. 벽골이라는 단어를 푸른 저수지 물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 중수비(重修碑)에 '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 사람이 김제(金堤)의 옛 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군도 역시 이 둑을 쌓게 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둑의 길이는 6만 8백 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천 8백 40결(結) 95 복(卜)이라 하니, 고적(古籍)에 적혀 있다. 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水餘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에 이르고, 둘째 고랑을 장생거(長生渠)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 윤부(潤富)의 근원에 이르며, 셋째 도랑을 중심거(中心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물이 고부(古阜)의 북쪽 부령(扶寧)의 동쪽에 이르고, 넷째 도랑을 경장거(經藏渠)라 하고, 다섯째 도랑을 유통거(流通渠)라고 하는데, 둘 다 한 줄기 물이 인의현(仁義縣)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였는데, 이 둑은 신라와 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 사적 제111호 벽골제는 한국 최대의 고대저수지로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서 월승리에 걸쳐 약 2.6㎞에 이르는 제방이 현존하고 있으며 고대 농업사와 토목건축적 의의가 인정되어 1963년 1월 21일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벽골제에 대한 연혁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왕 21년의 기록(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처음 벽골지를 여니 제방의 길이가 일천팔백보이다)으로 소급된다. 그러나 흘해왕 21년, 즉 서기 330년은 이 지역이 백제 영토로 추정되므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신라본기에 삽입되었다고 보면 축조시기는 백제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벽골제는 이후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때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15년(1415)에 중수하였으나 세종 2년(1420)에 심한 폭우로 유실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수리조합이 설립되고 벽골제를 운암제 설치에 따른 김제간선수로로 개조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일찍이 전라도 수군도절제사 박초가 김제군의 벽골제는 신라 때부터 축조한 것으로 실로 동방의 거택(金堤郡碧骨堤, 自新羅已築之, 實東方巨澤。 世宗 11卷, 3年)이라 피력했던 바 벽골제의 주변에는 이 거대한 저수지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흥미 있는 마을 이름이 산재해 있다. 벽골제로부터 동남간으로 약 6㎞ 떨어진 정읍시 감곡면 오주리(五舟리(里))가 있는데, 오주리는 배가 들어왔다 하여 속칭 '배들이'라 불리고 10㎞ 떨어진 감곡면 방교리 호락(湖落) 마을은' 호수가 떨어지는 곳'에서 연유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 들 건너에는 김제시 봉남면 용신리에 '용지(龍池)',' 용문동(龍門洞)이 있고 배(舟) 관련 지명으로 10㎞ 떨어진 봉남면 대송리 접주(接舟) 및 내광리 내주평(內舟坪)이 있고, 봉남면 양전동 용두(龍頭) 마을에는 용이 살았다고 한다. 이밖에도 동북으로 8㎞ 떨어진 황산 기슭에 강정마을이 있는데 벽골제 물이 머물러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김제시 검산동에는 포교로부터 드나들던 소금배가 전복된 곳이라 하여 소금배미가 있다. 이와 같은 마을들은 벽골제 만수 시 호안(湖岸) 마을들로 추정되며 이로부터 벽골제의 거대한 제내 규모를 헤아려볼 수 있다. 김제 벽골제는 한국 최고(最古)이자 최대의 농경 수리 문화 유적으로 각종 수리 시설 발달사의 산 교육장이라 할 수 있다.
벽골제의 의의[편집]
- 평지 전장 약 2.6㎞의 거대구조물 벽골제가 실제 저수지의 제방으로 기능하며 동방거택이라 칭해질 정도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는 것은 시와 문을 포함한 고문헌·지리서 등의 기록을 통해 이미 그 역사가 길다. 또한 민간전승인 김제·정읍지역의 지명전설에서도 벽골제의 거대규모의 일단을 헤아려볼 수 있다.
- 이와 별도로 일부에서는 벽골제의 제방이 바다에 비교적 인접한 측면 및 제내의 지질조사 등을 통해 과거 일정시기 ‘방조제’로 축조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처럼 만일 벽골제가 과거 일정 시기 방조제였다면 조수 통어(統御)의 역사를 새로 쓸 것이며 정설대로 초기부터 제방이었다면 농경사의 역사가 확고해질 것이다. 명확한 것은 무려 1,700여 년의 세월을 자랑하는 제방이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 김제 벽골제는 문화재에 대한 보존과 개발, 현재 간선수로로 기능하는 제 측면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축조방식을 해명할 발굴조사가 매우 어려운 조건이다. 김제시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5차의 발굴을 진행하였고, 발굴은 2018년까지 추진될 계획이다. 추진 중인 발굴의 성과로 벽골제 축조방식으로서 부엽공법이 확인되었고 제방 곡면부의 원 제방 기저부에서 제방보강용 보축제방으로서 다량의 초낭이 발견되었다.
- 제방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벽골제는 단순히 한국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한국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벽골제 쌍룡놀이(碧骨堤 雙龍)[편집]
- 전라북도 김제시 벽골제에 전하는 민속놀이이다.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벽골제는 백제(330년, 비류왕 27년)때 쌓아 통일신라(790년, 원성왕 6년)때 증축한 저수지의 둑으로, 호남평야 한복판에 있어 당시 농민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놀이는 둑의 축조 전설이 결부된 향토신사(鄕土神祀)로 여겨진다.
- 통일신라 원성왕(元聖王:재위 785~798) 때 왕명으로 벽골제를 쌓기 위하여 현지에 파견된 원덕랑(元德郞)을 주인공으로 그의 약혼녀 월내(月乃), 김제 태수의 딸 단야(丹若)의 삼각관계와 김제 태수의 음모, 연못에 사는 백룡·청룡의 싸움 등이 연출된다. 이 놀이는 현지의 전설과 놀이 등을 토대로 재현시켜 197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한 바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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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벽골제〉, 《위키백과》
- 〈벽골제〉, 《나무위키》
- 〈벽골제 (碧骨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제 벽골제(Byeokgolje Reservoir, Gimje,金堤 碧骨堤)〉, 《두산백과》
- 고석중 기자, 〈2천년 벽골제 역사를 간직한 '김제 지평선축제'…시민과 관람객 기대 만발〉, 《뉴시스》, 2022-09-28
- 어기선 기자, 〈(역사속 경제리뷰) 벽골제〉, 《파이낸셜리뷰》, 2022-09-22
- 최창용, 〈김제 벽골제 역사와 가치의 현장을 걷다〉, 《전북일보》, 2022-05-29
- 천소현 기자, 〈여행의 새로운 지평선, 김제 벽골제 생태농경원〉, 《트래비 매거진》, 2022-05-24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