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도
교동도(喬桐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섬이다.
개요[편집]
- 교동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의 본 섬이다. 북위 38도 근처에 있으며, 강화도의 서북쪽이자 인천 본토의 서북 쪽에 위치하고 있다. 한강을 건너 황해도 연백군과 휴전선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민간인 출입통제선 위에 있으므로 출입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교동면에는 대룡(大龍)·읍내(邑內)·상룡(上龍)·봉소(鳳韶)·고구(古龜)·동산(東山)·삼선(三仙)·인사(仁士)·지석(芝石)·무학(無鶴)·난정(蘭井)·서한(西漢)·양갑(兩甲) 등 13개 법정리가 있다. 리 구획도 면소재지는 대룡리이다. 물길이 험해서 탈출은 어려운데, 한양과 가깝고 감시는 쉬워서 왕족들의 유배지로도 각광받았던 곳이다. 연산군이 여기 유배되어 사망했고, 광해군도 제주도로 이배되기 전 여기서 잠시 지냈고, 그 외에도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대군, 숭선군, 익평군, 화완옹주, 영선군(고종의 조카 이준용) 등이 여기에 유배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수군 수영인 경기수영의 본영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말~조선 초 대문호였던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이 매력을 느껴 독서를 하고 시를 쓰며 수양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지만, 2014년 7월 1일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강화도와 육지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북에서 수영해서 교동도로 탈북해 올 정도로 북한과 매우 가깝고, 그만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때문에 교동대교를 통해 교동도로 들어오기 전에 해병대 장병들의 간단한 검문 절차를 거쳐야 하며, 해안가나 공중화장실에 목함지뢰 경고문이 붙어있는 등 타지와는 다르게 상당히 살벌한 군사 지역임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1]
- 교동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섬이다.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달을참(達乙斬), 고목근(高木根), 교동(喬桐)이라고 불렀다. 고도가 매우 낮은 섬으로 100m 이하의 봉황산·율두산·고양이산·수정산 등이 있다. 연안의 낮은 지대는 갯벌로 되어 있고 간조와 만조의 차이도 커서 항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육지와 격리된 섬이기 때문에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고려 희종이 유배되었을 때 기거하던 경원전과 조선 철종의 잠저소 등이 있다. 2014년 교동대교가 완공되어 강화도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해졌다.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양사면과 내가면이 있고, 남쪽으로는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가 있다. 북쪽으로 불과 2∼3㎞의 바다를 끼고 황해도 연백군이 있다. 따라서 섬 북부에서는 황해도 땅을 쉽게 바라볼 수 있으며, 좀 높은 곳에서는 예성강 하구를 볼 수 있고, 맑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도 바라볼 수 있어, 실향민들이 화개산(華蓋山) 산정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교동도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달을참(達乙斬), 고목근(高木根), 교동(喬桐)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달을참이란 '크고 높은 산이 있는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이라고도 불렸다.[2]
- 교동도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한 서해의 섬이다. 2014년 완공된 교동대교를 통해 강화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이기는 하나 누구나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교동도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이루는 조강과 예성강의 하구가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황해남도를 마주하고 있고, 동쪽에 강화도, 남쪽에 석모도를 바라보고 있다. 교동도는 원래 세 개의 주요 섬과 자잘한 부속섬이 늘어서 있는 군도였다. 고려 시대 원나라의 침입에 맞서는 과정에서 강화도가 임시 수도가 되자 강화도를 비롯한 주변 섬들을 간척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까지 조성된 간척지는 자연적인 강수에만 의존하는 천수답으로 별도의 관개시설이 없어 자주 가뭄 피해를 입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지하수를 이용한 관정과 저수지가 설치되어 관개농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근대 이전 간척지는 종종 제방이 유실되는 사고와 같은 이유로 다시 갯벌이 되는 일이 있었다. 교동도에는 이와 관련하여 사나운 인심 때문에 간척지가 갯벌이 되는 벌을 받았다는 정주마을 이야기가 전해온다.[[3]
교동면[편집]
- 교동면(喬桐面)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북서부에 있는 도서면(島嶼面)이다. 강화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면으로 동서 길이는 10㎞, 남북길이는 6㎞, 해안선 길이는 35.97㎞, 최고점은 259m이다. 교동면의 북부 해안선은 휴전선의 남방 한계선이 된다. 따라서 서북쪽은 휴전선 너머로 황해도 연백군(현 황해남도 연안군·배천군)과 마주 보고 있다. 기반암은 주로 화강암과 결정편암이며, 고구리(古龜里)·인사리(仁士里)·양갑리(兩甲里)·삼선리(三仙里)·무학리(舞鶴里) 일대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경작지 면적도 강화군 내에서 가장 넓고, 호당 경지면적도 군내에서 가장 높다. 예로부터 간척이 많이 이루어져서 대부분의 평야가 거의 간척지이다. 주요 농산물로 쌀·보리·콩·감자를 생산하며, 근해에서는 도미·농어·숭어·흰새우·낙지 등이 잡히고, 개펄에서 굴이 채취된다.
교동대교[편집]
- 교동대교(喬桐大橋)는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다리이다. 2008년 9월 25일 착공하여 2014년 7월 1일에 개통하였다. 교각을 탑에서 연결한 케이블로 지탱하는 사장교(cable-stayed bridge, 斜張橋)로 만들어졌다.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연결하는 다리로 길이는 3.44km이고 2차로로 만들어졌다. 교동도는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으로 관할 부대의 통제를 따라야 하고 출입증을 받아야 교동도로 진입할 수 있다.
교동도의 자연환경[편집]
- 고도가 매우 낮은 섬으로 높이 0∼10m의 지역이 섬의 3분의 2를 이루고 있으며, 마식령산맥 서단에 해당한다. 가장 높은 산은 화개산(260m)으로 이 섬의 주산을 이루며, 봉황산(75m) · 율두산(89m) · 고양이산(35m) · 수정산(75m) 등 모두 100m 이하의 낮은 구릉들이다. 연백에 면한 동북해안은 제방을 쌓아 고구(古龜)의 관개용 저수지의 완성으로 경지확장 및 경지정리를 하였다. 해안선은 단조로우며, 연안의 저지(低地)는 이질(泥質)인 갯벌로 되어 있어서 어항의 발달은 불리하고, 간만의 차도 커서 선박의 출입도 그리 편리하지 못하다. 섬인 까닭에 한서의 차는 내륙에 비하여 작으나 언제나 해풍이 비교적 강하게 불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으로 한기를 더욱더 조장한다.
- 교동도는 내륙에 비하면 겨울이 빠르고 여름이 늦어 환절기에는 해상의 기류가 고르지 않아 때때로 소나기 · 회오리바람을 몰아오며, 때로는 서리나 우박이 내리는 등 날씨가 고르지 못하다. 연평균기온은 11.2℃, 연강수량은 1,390㎜이다. 상고시대에 이 섬은 개화산 · 율두산 · 수정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었으며, 교동평야에는 언제나 조수가 흘렀고, 그것이 그 뒤 하나의 섬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개화산 중턱에서 볼 수 있는 화석이 된 조개껍질이나 현 해안선에서 내륙에 위치한 패총의 흔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남쪽에 있는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화(陸化) 되어 인마가 내왕할 수 있었다가, 1578년(선조 14)경 다시 바다로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인마가 내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보아, 후빙기 이후 범세계적인 해면변동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하천의 발달도 드물고, 작은 계류가 있을 뿐이다.
교동도의 연혁[편집]
- 교동도는 고구려 때에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부터 교동이라 불려 혈구현(穴口縣)에 속하였다. 고려 시대에도 교동이라 일컬었으며, 고려 명종 때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395년(태조 4)에 만호(萬戶)와 지현(知縣)을 두었으며, 그 뒤 이를 고쳐 현감이라 일컬었다. 1629년(인조 7) 화량진(花梁鎭)으로부터 수영(水營)을 교동 원권진(현 읍내리)으로 이전하면서 현을 부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교동토의 간척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까지 지속되었다. 이로써 형성된 저평한 평야가 넓고, 완비된 경지정리 · 수리시설 기계화 등으로 쌀의 생산량은 섬의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방으로 나가며,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 감자 등과 임산물은 밤 · 대추 · 버섯 등이 생산된다.
- 6 · 25전쟁 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있어 육지와 서해도서가 자유롭게 연락되었으나, 전쟁 이후 매우 불편해졌다. 그러나 서울과의 연결은 강화도 창후리에서 수시로 배가 있었고, 연안도서를 연락하는 선편이 있었으나 불편한 편이었다. 2014년 교동대교가 완공되어 강화도와 연결되었고, 서울과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육지와 격리된 섬인 까닭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배지로 이용되었고, 지리적 위치상 외세의 침범이 빈번했던 관계로 섬에는 많은 고적이 남아 있다. 1629년에 축조된 읍성지(邑城址), 1173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화개산성지, 교동구현허(喬桐舊縣墟)를 비롯하여, 고려 희종이 유배되어 기거하던 경원전(慶源殿)과 철종잠저소(哲宗潛邸所) · 봉수대(烽燧臺) · 단묘(壇廟) 등과 그 밖에도 많은 유적들이 있다. 또, 명승지로는 교동팔경이 있고, 화개사 · 교동향교 등은 화개산 남쪽에 있다. 오염원과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어 생산한 교동쌀이 이름있다.
교동도의 관광[편집]
- 조선시대 한증막 터. 화개산 자락에 있는 봉분 형태의 조선시대 찜질방으로, 조선 후기에 만들어져 1970년대까지 이용되었다고 한다. 2008년 마을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교동도에 남아 있는 한증막 세 곳 중 한 곳이다.
- 연산군 유배지(燕山君 流配地). 연산군이 최후를 맞은 위리안치 유배지로 전해오는 곳이다. 위리안치 상황과 소달구지를 타고 유배 온 연산군 모습 등을 재현해 놓고 전시관을 세웠다. 전시관에서 유배형의 종류, 교동도 유배 역사를 알아볼 수 있다.
- 교동읍성 남문(喬桐邑城 南門). 교동읍성 남문에 새겨진 글자 "삼도통 문". 삼도통은 삼도통어영을 뜻한다. 1629년(인조 7년)에 경기수영을 설치하면서 같이 만든 것으로, 둘레는 870m였다고 한다. 과거에는 동/남/북쪽에 성문을 세웠으나, 현재는 남문(홍예문)만 남고 나머지 문과 성곽 모두가 사라졌다. 2018년에는 홍예문 문을 복원하였다.
- 부근당는 교동읍성 북쪽, 무너져 내린 성곽 곁에 남아 있는 옛 사당이다.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의 화상으로 추정되는 탱화가 걸려 있는데, 주민들은 연산군이 죽음을 맞은 11월 격년으로 이곳에서 제를 올리고 당굿을 벌여 왔다고 한다.
- 대룡시장은 6.25 전쟁 때 황해도에서 교동도로 월남하였던 실향민들이 휴전 이후 북으로 갈 수 없게 되자, 황해도를 추억하는 마음으로 황해도 연백군에 있다는 연백시장을 본따서 만든 재래시장이다.
- 망향대(望鄉台)는 교동도 북서쪽 해안 율두산(밤머리산)에 있다. 한국전쟁 때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와 정착한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바라보며 제를 올리고 망향의 한을 달래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 2개의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어 강 건너 북한 땅의 건물과 간간이 오가는 주민을 볼 수 있어 분단의 현실과 아픔을 생생히 느낄 수 있게 한다.
- 교동 제비집은 교동도에 대한 여행 정보도 얻고 여러 체험도 할 수 있는 관광안내소다. 제비집이란 이름은 실향민들의 고향 황해도와 교동도를 자유롭게 오가는 수많은 제비들을 상징해 지은 것이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교동도〉, 《위키백과》
- 〈교동도〉, 《나무위키》
- 〈교동도/역사〉, 《나무위키》
- 〈교동도 (喬桐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교동면(Gyodong-myeon, 喬桐面)〉, 《두산백과》
- 인천시, 〈인천 가볼만한 곳 – 교동도 혼자여행 하룻길〉, 《경상일보》, 2009-06-25
- 정상미 기자, 〈왕들의 유배지, 북녘까지 3.2km - 교동도에 핀 화개정원〉, 《한국경제》, 2024-03-31
- 이재희 기자, 〈찾아가고 싶은 '가을섬’ 강화 교동도 등 5곳 선정〉, 《인천투데이》, 2023-09-13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