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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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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구 위치
계양구청

계양구(桂陽區)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의 동북부에 있는 구이다. 고려 시대 계양 도호부(桂陽都護府)였고, 조선 시대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였는데, 1914년에 부천군으로 개칭되었고, 1940년에 인천 부에 편입되어 1968년에 인천 직할시 북구에 편입되었고, 1995년 3월 1일 계양구가 신설되었다. 계양산, 천마산을 경계로 인천의 도심과는 별개의 시가지를 형성한다. 동쪽은 경기도 부천시서울특별시 강서구, 서쪽은 서구, 남쪽은 부평구, 북쪽은 서구 검단동과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에 접한다.[1]

개요[편집]

인천광역시의 북동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6˚ 40' 50"~126˚ 47' 44",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31' 16"~37˚ 35' 27"에 위치한다. 구의 동쪽 끝은 하야동, 서쪽 끝은 둑실동, 남쪽 끝은 작전동, 북쪽 끝은 이화동이며, 동서 간 거리는 8.6㎞, 남북 간 거리는 6.7㎞이다. 면적은 45.57㎢로 인천시 전체 면적의 4.3%를 차지하여 10개 군·구 가운데 동구·미추홀구 다음으로 작다. 행정구역은 12개 행정동(23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양 1동이 전체 면적의 37.5%를 차지하여 가장 크고 계산 3동이 전체 면적의 0.1%로 가장 작다. 인구는 2018년을 기준하여 31만 5903명으로 인천시 전체 인구의 10.5%를 차지하여 10개 군·구 가운데 6번째에 해당한다.

구를 상징하는 꽃은 진달래,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구를 대표하는 캐릭터는 21세기 신공항 배후도시로서 새롭게 비상하는 계양구의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신비(新飛)'이며, 계양산을 상징하는 머리 모양에 계양 도호부 부사를 지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의 호에서 착안한 흰 구름을 머리에 두르고, 귀에는 구민의 여론을 경청하는 의미를 담은 무선 헤드셋을 착용한 귀여운 아이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구청 소재지는 계산동이다.

계양구의 이름은 인천 내륙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계양산에서 유래하였다. 남쪽으로는 인천광역시 부평구, 북쪽으로는 김포시, 동쪽으로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남동쪽으로는 부천시, 그리고 서쪽으로는 인천광역시 서구와 맞닿아 있다. 인천광역시의 자치구·자치 군 중에서 서울특별시에 직접 접경해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계양구는 부평구와 함께 서울 출퇴근 자들의 선호도가 높고 많이 거주한다. 교외화 현상으로 서울의 인구가 경기도, 인천으로 유출되게 되면서 서울 서부 지역에서 계양구로 이사오는 서울 서부 지역 주민도 많은 편이며 서울 서부 지역에 가면 계양구나 서구 검단 등에 빌라를 분양한다는 광고를 흔히 볼 수 있다.[2][3]

자연환경[편집]

서쪽에 계양산(395m)을 중심으로 꽃 메산(133m)·중구 봉(276m)·천마산(286m) 등이 구의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경인고속도로가 동서를 가로질러 부평구와 경계를 가른다. 서남쪽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평탄한 지형을 이루어 해발고도 50m 이하인 지역이 전체 면적의 약 78%를 차지하며, 경사도 5° 이하인 지역이 약 58%를 차지한다. 계양산에서 남쪽으로 부평구의 부개산·광학 산, 남동구의 거마 산 사이에 형성된 분지에 위치하며, 계양구와 부평구에 걸쳐 부평 평야가 발달하여 곡창지대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시가지와 주택지 등으로 변모하였다. 하천은 북쪽의 경인 아라뱃길을 흐르는 아라천이 서울시 강서구에서 계양구와 서구를 거쳐 서해로 유입되고, 부평구의 광학 산에서 발원하는 굴포천이 북쪽으로 흘러 계산천·귤현 천 등의 지류와 합쳐져 아라천으로 합류한다.

평균기온(2001~2010년)은 12.7℃로 인천시 평균(12.0℃)보다 0.7℃ 높다. 연평균 일 최고기온은 17.7℃, 연평균 일 최저기온은 8.4℃로 연평균 일교차가 9.3℃로 나타난다. 식물의 성장 가능 기간은 261.8일로 인천시 평균(256.8일)보다 5.0일 길게 나타난다. 연평균 강수량은 1315.6㎜로 인천시 평균(1194.4㎜)보다 121㎜가량 많으며, 연평균 강수량의 60% 이상이 여름철에 내리는 하계 다우형이다.

역사[편집]

계양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의 유물 및 유적이 출토된 바 없다. 다만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도끼 두 점이 계산동 일대에서 수습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고구려가 470년 주부토군(主夫吐郡)을 설치하면서 계양구 지역이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마한의 영역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는 주부토군(主夫吐郡)이 장제군(長提郡)으로 개칭되었다.

9세기 말 통일신라의 세력이 쇠퇴하여 견훤과 궁예가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웠을 때, 궁예는 905년 계양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따라서 후삼국시대에 이곳은 후고구려의 판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란기였기 때문에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다스리지는 못하였고, 그 대신 이 고장의 호족이었던 이희목(李希穆)이 계양과 김포 일대를 관장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이희목은 나중에 왕건을 도와 고려의 개국공신에 책봉되었다고 하며, 오늘날의 부평 이씨는 그를 시조로 삼고 있다.

940년(태조 23)에 수주(樹州)로 승격되었으며, 1105년(숙종 10) 소성현(邵城縣)이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어 수주에서 분리되었다. 1150년(의종 4) 수주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되었으며, 당시 도호부청사는 지금의 계산동(桂山洞) 지역에 위치하였다.

1215년(고종 2) 안남도호부가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개칭된 후 1219년(인종 6) 좌사간(左司諫) 이규보(李奎報)가 계양도호부 부사(副使)로 부임하여 『자오당기(自娛堂記)』, 『초정기(草亭記)』, 『망해지(望海誌)』 등 많은 문집을 남겼다.

1310년(충선왕 2)에는 부평부로 개칭되었다. 부평부의 속현은 계양 도호부 시절에 모두 분리 자립하고 양천 현만 남아 있었으나 이 역시 부평부로 개칭될 때 분리되었다. 황어현을 폐지하고 이 지역을 부평부에 통합시키는 등 관할구역이 변화되었다.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도 아래에 부, 목, 군, 현을 두었으며 모든 읍에는 중앙의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부평은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 김포 현을 편입시켰다가 2년 후 다시 분리시켰다. 부평 도호부에는 1455년 중익진(中翼陣)이 설치되어 부사(府使)가 병마 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임하였다. 그 진영의 소재지는 지금의 병방동(兵房洞) 이었다. 이 같은 익군 체제는 곧 폐지되고 진관 체제(鎭管體制)로 바뀌었으며 부평은 수원 진에 소속되었다.

조선 시대 내내 부평 도호부의 읍격(邑格)이나 명칭은 변하지 않았으나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도호부로 복구된 일이 세 차례 있었다. 1438년(세종 20) 부평 도호부는 부평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446년(세종 28)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는데 이것은 관과 민이 공모하여 온천의 소재를 숨기고 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한쪽 다리가 불편하였고 등에는 부종(浮腫)이 생겨 고생하였다. 세종은 중신들의 권유로 온양온천에 가서 목욕한 후 효험을 보았고, 이후 온천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도성에 가까운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온천 탐색을 명하였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이 없어 백방으로 탐색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에 세종은 부평의 관민이 짜고 민폐를 두려워하여 온천의 소재지를 숨긴 것으로 판단하여 도호부를 현으로 강등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온천을 찾지 못한 세종은 온천 탐색을 포기하고 부평현을 다시 도호부로 복구시켰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부평 출신 내시 김순 손(金舜孫)을 처형한 후 부평 도호부를 부평 현으로 강등하였다가 중종반정 직후인 1506년(중종 1)에 다시 복구한 일이 있었다. 김순 손은 연산군이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궁중에서 문란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를 간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연산군은 그를 유배지에서 죽이고 그의 출신지를 강등하였던 것이다. 중종반정 후 김순손은 명예가 회복되었고 부평 현도 강등 1년 만에 복구되었다.

1698년(숙종 24)에 부평 도호부는 부평 현으로 세 번째 강등되었다. 그것은 김포의 장릉(章陵)에 방화한 죄인 최필성(崔弼成)의 출생지가 부평이었기 때문이다. 장릉은 조선조 선조의 다섯째 아들 원종(元宗: 인조의 생부, 추존)과 그의 부인 인헌 왕후(仁獻王后: 추존)의 능침으로 인조가 반정으로 등극하여 이곳으로 이장한 묘소이다. 죄인 최필성은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처는 양반집 노비가 되었으며, 부평은 현으로 강등된 지 10년 만인 1707년(숙종 33)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지방 제도를 개편하였다. 이때 각 도의 관찰사를 장관으로 개칭하고 도의 하부 행정조직으로 부·군·면을 두었다. 그리하여 13도 12부 317군 4,322면이 확정되고 종전에 직할하에 있던 한성부와 경성부로 개칭되면서 부평 부는 경기도 직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지방 제도를 개혁할 당시 서해안의 관문인 인천에 개항장을 설치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인천이 부(府)로 승격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 일대의 지역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1913년 12월 29일에 제정 공포된 부령 제111호(1914년 10월 1일부터 시행)에 인천 부의 관할구역은 개항장으로 축소를 하고 다른 지역은 전부 부평 군으로 통합하게 되었다. 이때 부평 군의 일원과 인천 부에 편입되지 아니한 종래의 인천 군 나머지 지역 전부 그리고 강화군의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부평에서의 부자와 인천에서 천자를 합성한 부천군을 신설하였다. 당시 부천군의 행정구역은 파주 면을 비롯하여 15개 면, 148개 리였다.

1919년 3월 1일에 발발한 3·1만세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인천지역에서 가장 큰 시위운동이 일어난 곳은 계양이었다. 3월 13일 이후 소래면(蘇萊面)과 계양면(桂陽面) 주민 수백 명이 소래산에서 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으며 읍내에서도 수백 명이 모여 시위를 한 바 있었다. 이는 인천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위였고, 이에 대응했던 담당 경찰서는 부내 주재소(富內駐在所: 계산동 위치)였다.

1968년 1월 1일 시행된 「인천시 구(區) 설치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과거 부평지역의 일부가 독립된 행정단위로 ‘북구’라는 이름이 되었다. 즉 부내면(富內面) 지역과 서곶면(西串面) 지역이 북구가 된 것이다. 1973년 7월 1일 법률 제2597호에 의하여 소사읍(素砂邑)이 발전적으로 부천시로 개칭되면서 계양면과 오정면은 김포군에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1호에 의하여 김포군 계양면이 인천시에 편입하여 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평군의 부내면은 일부가 부평구로 독립하고, 부내면의 일부와 계양면이 통합하여 계양구가 되었으며, 서곶면이 김포군의 검단면과 통합하여 서구가 되었고, 소사와 오정이 통합하여 부천시를 구성하였다. 즉 과거의 부평군은 현재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부평구, 서구와 부천시로 분리되어 있다.

인천은 1995년 직할 시에서 광역시로 승격되었고, 아울러 인천광역시 북구를 다시 분할하여 경인 고속국도를 경계로 그 남쪽은 부평구로, 북쪽은 계양구로 나누었다. 계양이라는 읍호는 1215년에 처음 붙여진 이래 1308년에 길주 목이 될 때까지 93년간 사용되었으며, 진산에 해상하는 계양산의 명칭이 유지되어 일제강점기나 광복 이후에도 그 이름을 딴 계양면이 있었다. 그리고 광역시의 승격과 분구가 이루어질 때 이를 계승하여 계양구가 재등장했다.

1998년 작전 3동과 서운동이 작전서 운동으로 통합되었고, 2003년 계산 3동에서 계산 4동이 분동 되었으며, 2015년에는 계양 1동에서 계양 3동이 분동 되어 지금의 12개 행정동 체제가 갖추어졌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2개 행정동(계산 1~4동, 계양 1~3동, 작전 1~2동, 작전 서운동, 효성 1~2동) 23개 법정동(갈현동·계산동·귤현동·노오지동·다남동·동양동·둑실동·목상동·박촌동·방축동·병방동·상야동·서운동·선주지 동·오류동·용종 동·이화동·임학동·작전동·장기동·평동·하야동·효성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산업[편집]

산업구조의 비중은 서비스업을 기반으로 하는 3차 산업이 가장 크다. 지역 내 총생산(GRDP)은 2018년을 기준하여 4조 5306억 원으로 인천시 GRDP의 5.1%를 차지하여 10개 군·구 가운데 7번째에 해당한다. 경제 활동별 부가가치의 비중은 부동산업(6284억 원)이 15%로 가장 크고, 이 밖에 제조업(14.3%), 보건업·사회복지 서비스업(10.3%), 도소매업(9.7%), 교육서비스업(9.7%) 등의 순이다. 전통시장은 계산동의 계산시장, 병방동의 계양산 전통시장, 작전동의 작전시장 등이 상설시장으로 운영된다.

2018년 사업체 수는 1만 8521개로 인천시 전체 사업체의 9.1%를 차지하여 10개 군·구 가운데 6번째에 해당한다. 사업체별로는 도소매업체(4036개)가 21.8%로 가장 많고, 이 밖에 숙박·음식점 업체(17.2%), 운수·창고업체(15.5%), 협회·단체 수리 및 기타 개인 서비스 업체(11.4%), 제조업체(8.8%) 등의 순이다. 사업체 종사자는 8만 3632명으로 인천시 전체 종사자의 7.8%를 차지하며, 도소매업(15.5%)과 보건업·사회복지 서비스업(14.0%), 제조업(12.5%), 숙박·음식점업(11.4%) 종사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제조업은 금속가공 제품을 비롯하여 기타 기계·장비, 식료품, 전기 장비, 기타 제품, 전자제품·컴퓨터·영상·음향 및 통신장비의 비중이 크다. 산업단지로는 서운동 일원에 서운 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교통[편집]

도로 교통은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고속국도 120호선)가 서구 가정동을 기점으로 하여 계양구의 서운동을 거쳐 서울시 양천구까지 이어지고, 성남시의 판교 분기점을 기점과 종점으로 하여 수도권 지역을 순환하는 수도권 제1 순환 고속도로(고속국도 100호선, 구 서울 외곽 순환도로)가 계양구 동부의 노오지 동~서운동을 경유한다. 중구 운서동을 기점으로 하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고속국도 130호선)가 계양구 북부의 둑실동~하야동을 가로질러 경기도 고양시까지 이어진다. 서운 분기점에서 경인고속도로와 수도권 제1 순환 고속도로가 접속하고, 노오지 분기점에서 수도권 제1 순환 고속도로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접속한다. 이 밖에 국도 6호선(중구 북성동~강원도 강릉시)·39호선(충남 부여군~경기도 의정부시)·77호선(부산시 중구~경기도 파주시)이 계양구를 거쳐 간다. 국도 6호선과 77호선이 부평 나들목에서 경인고속도로와 접속한다.

철도 교통은 인천도시철도 1호선이 계양구의 계양역을 기점으로 귤현역~박촌역~임학역~계산역~경인교대입구역~작전역을 거쳐 송도 달빛 축제 공원 역까지 운행하고, 인천국제공항 철도가 서울역에서 계양역을 거쳐 인천공항 2터미널 역까지 운행한다. 계양역에서 인천도시철도 1호선과 인천 국제공항 철도가 접속한다.

관광[편집]

중서부에 위치한 계양산은 인천의 진산으로 그리 높지 않은 정상에 오르면 강화도와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서울관악산·북한산 등의 조망이 시원스레 펼쳐져 등반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계양산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계양산성(사적)과 반딧불이 서식지가 있으며, 산 일대에 산림욕장과 장미원, 계양공원, 계양산 둘레길 등이 조성되어 도심의 휴식처로 인기가 높다.

계양구와 서구에 걸쳐 흐르는 아라천의 경인 아라뱃길은 서해의 아름다운 경관과 아라인천여객터미널~시천 가람터~아라마루·아라 폭포~수향원~두리 생태공원~아라 김포여객터미널~한강으로 이어지는 8곳의 경관이 수향(水鄕) 8경으로 꼽히며, 인천터미널과 김포터미널을 오가는 유람선을 타고 수변의 빼어난 경관을 즐길 수 있다. 아라마루는 아라뱃길 위로 돌출하게 설치한 원형 전망대로서 색색의 야간 조명이 연출하는 야경이 빼어나고, 두리 생태공원에는 야생초화원과 오토캠핑장등이 조성되어 있다.

이 밖에 서운동의 계양 꽃 마루는 봄에는 유채꽃,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역사 명소로는 계산동에 조선 시대 부평 지역의 행정을 총 할하던 부평 도호부 관아(인천유형문화재),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에 참배하러 가는 길에 들러 활을 쏘고 휴식하던 어사대(인천문화재자료)와 손을 씻은 욕은지(인천문화재자료), 수령 500년의 계산동 은행나무(인천 기념물) 등이 있다. 먹거리촌으로는 계산동의 계양 맛길, 용종동의 용종 맛길이 음식문화 시범 거리로 지정되어 있다.

생활 문화[편집]

대체로 공원 시설이 잘 되어 있다. 길을 갈 때 발에 채이는 게 공원이며 관리도 잘 되고 있는 편. 서운동의 서운체육공원 옆에는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의 경기장으로 쓰였던 계양경기장이 건설되어 있으며, 또한 그 주변으로 여러 공원과 캠핑 장을 또 건설 중이다. 게다가 계양산도 공원 시설들을 대대적으로 손을 보고 있다. 단, 계산택지 한정으로 나머지 지역은 공원이 별로 없다.

계양산은 강화도의 마니산를 제외하면 인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몇 안 되는 녹지 가운데 하나이고, 약 2시간 정도면 정상까지 갔다가 올 수 있기에 가벼운 운동코스로 인기가 높다. 얼마 전 주부 토로를 따라 계양산으로 가는 길도 정비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계곡이라 부를 만한 곳까지 있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다 롯데그룹이 골프장을 짓겠다고 해서 몇 년째 박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가 지방선거 결과로 인해 다시 역전되었다.

매년 10월 5일을 전후로 항상 계양구민의 날 행사와 함께 축제를 여는데 지방 행사 치고는 스케일이 꽤나 크다. 그래서 앞에서 초대가수의 공연을 보려면 항상 일찍 가야 한다. 초대가수도 오는데 보통 앞에는 트로트 가수들이 많이 공연을 하며 거의 후반부에 유명 가수 1~2명 정도가 나온다. 2020년 이후로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대규모로 열진 않고 간소하게 치루다 실외 마스크 제한이 해제된 2022년에 다시 정상화 되였다. 축제의 백미는 불꽃놀이인데, 쏘아 올리는 규모가 꽤 커서 서울에서도 관측할 수 있을 정도다.

문화재[편집]

국가 지정 문화재는 사적 1개소(인천 계양산성)가 있다. 시 시정 문화재로는 인천 유형문화재 2점(부평 도호 부관아·부평향교), 인천무형문화재 1점(목조각장), 영신 군 이이 묘와 이찰·이율 형제 정려를 비롯한 인천 기념물 4점, 인천문화재자료 2점(욕은 지·어사대) 등이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계양구〉, 《위키백과》
  2. 계양구〉, 《네이버 지식백과》
  3. 계양구〉, 《나무위키》
  4. 계양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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