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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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구(遠美區)는 대한민국 경기도 부천시 중부에 위치한 구이다. 2016년 7월 4일 책임 읍면동제의 시행으로 인해 부천시의 다른 일반구와 함께 폐지되었다가 2024년 1월 1일에 다시 설치되었다.[1] [2]
목차
개요[편집]
원미구의 면적은 20.60㎢이며 인구는 392,079명(2024년 6월 기준)이다. 북쪽으로는 오정구, 동쪽으로는 서울 구로구, 남쪽으로는 소사구, 서쪽으로는 인천 부평구에 접해 있는 행정구이다. 구의 이름은 구청소재지인 원미동의 원미산에서 따왔다. 부천 자체도 인구 밀도가 높은데, 이 구도 인구 밀도가 높은 구에 속한다.
2024년 기준 관할구역은 행정동 20개(심곡1동, 심곡2동, 심곡3동, 원미1동, 원미2동, 소사동, 역곡1동, 역곡2동, 춘의동, 도당동, 약대동, 중동, 중1동, 중2동, 중3동, 중4동, 상동, 상1동, 상2동, 상3동) 법정동 9개(심곡동, 원미동, 소사동, 역곡동, 춘의동, 도당동, 약대동, 중동, 상동)로 이루어져 있다.
중동과 상동 일대에 신시가지 개발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중동지역은 1990년대 이후 성장한 경기도 일대 신도시 중 하나이다. 남동부에는 원미산(遠美山)이 솟아 있다. 부천의 3개 구 가운데 농업인구가 가장 많은 편이나 특산물은 없다. 제조업 사업체가 많이 분포하는데, 도당동·춘의동·심곡동 일대에 밀집되어 있다. 서울과는 경인선 철도와 여러 노선의 국도로 연결되어 있다.
대학으로는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과 부천대학이 있으며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는 중앙공원, 상동호수공원, 원미공원, 도당공원 등이 있다. 영상문화단지, 부천종합운동장, 부천박물관 등 문화·체육 시설이 있다.[3]
역사[편집]
선사시대[편집]
부천의 대표적인 선사유적으로는 고강동의 청동기시대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1995년 여름 홍수 때 반달돌칼과 석창 등 매우 정교하게 가공된 석기 유물이 드러나면서 발견되었다. 이후 2005년까지 한양대 박물관과 한양대 문화인류학과에 의해 7차에 걸친 발굴로 총 21기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제사유적인 적석환구유구가 확인되었고 함께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민무늬 토기와 간석기류 등은 청동기시대 뿐만 아니라 초기 철기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판단되어 한강 유역의 초기 국가단계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편집]
삼국시대 부천의 인근 지역인 인천이 백제 미추홀이었던 것에서 유추하여 부천도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75년(장수왕 63)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일대를 차지하면서 고구려의 주부토(主夫吐)로 기록되어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다. 주부토는 고구려의 지명으로 당시 한강의 지류인 굴포천의 범람원에 위치하여 황무지였던 땅에 긴 둑을 쌓아 '줄보둑'-'주부토'로 부른 데서 비롯된 말로 추정한다. 6세기에 고구려가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는 등 정치적 불안이 거듭되자, 551년 부천 일대의 한강 하류 지역을 백제가 수복하였으나, 553년 신라가 급습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전국을 9주5소경으로 정비하면서 지명을 한자식으로 변경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식 이름인 주부토군도 긴 둑이라는 뜻의 장제군(長堤郡)으로 변화되었다.
고려 시대[편집]
918년 왕건은 고려를 건설한 후 940년(태조 23년)에는 전국 주·부·군·현의 지명을 고쳤다. 이때 부평의 지명도 장제군에서 수주(樹州)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부평의 읍격이 상승된 것을 의미한다. 수주라는 명칭은 시인 변영로의 호가 되었고, 지금 고강동 일부 지역의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1150년(의종 4년)에는 전주에 있던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수주로 가져오면서 지명도 안남으로 변화되고 읍격도 상승하였다. 고려 전기의 도호부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에 설치되었다.[20] 당시 부평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한 것은 12세기에 백성의 유망이 많아지고,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정치적 변란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수도 개경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215년(고려 고종 2년)에 안남도호부에서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개칭되었고, 1308년(충렬왕 34년)에 길주목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년)에 다시 부평부로 강등되었다.
조선 시대[편집]
1392년 건국한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었고, 이때 부평은 전국 44개 도호부 중 하나로 종3품인 도호부사가 파견되었다. 당시 부평은 강화와 김포를 거쳐 한성 및 해주와 연결되는 한강 수로에 위치였기 때문에 행정구역상 수원진관에 소속되어 인천을 속읍으로 둔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선들은 인천과 부평 연안을 지나 강화도 염하 수로를 거쳐 한강의 마포나루에서 하역하였다. 강화도 염하는 물살이 거세어 조운선들이 좌초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 연안에서 한강으로 직접 연결되는 물길을 내서 조운선을 운행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시도는 중종 때 김안로에 의해서 추진되었는데, 당시 공사는 한강에서 시작하여 원통이고개까지 수로를 굴착하고 중단되었으나 2011년에 굴포천을 따라 완공된 경인아라뱃길의 원형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종래의 8도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부평은 인천관찰부에 속한 부평군이 되었다. 당시 부평군은 15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현재의 부천에 해당하는 곳은 상오정면·하오정면·석천면·주화곶면·옥산면의 일부 지역이었다.
대한제국[편집]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많은 외국인들과 교역품들이 서울로 향하면서 그 길목에 해당하는 부천에도 변화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1899년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이 개통되어 부천에 소사역(지금의 부천역)과 오류동역(훗날 서울특별시로 편입)이 설치되면서 현재의 부천이 형성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소사역은 광활한 김포평야에서 산출되는 농산물을 모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되었다.
소사역이 설치됨에 따라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이주해서 여객을 상대로 한 접객업소와 음식점 등이 생겨났으며, 성주산 서쪽 기슭으로는 가로촌(街路村) 형태의 취락이 발달하였다. 1904년경 일본인들에 의해서 서울을 중심시장으로 하는 근교농업 형태의 복숭아 과수원이 성주산 자락의 사질토양을 배경으로 세워졌고, 경작을 위한 노동력으로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취락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일제강점기[편집]
한국을 병합한 일제는 1914년 인천의 일본 조계 지역과 주변지역을 인천부로 삼고, 나머지 지역과 부평군을 합하여 부천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부천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신설된 부천군은 인천부의 일부와 부평군을 중심으로 강화군의 일부 섬, 남양군의 대부면과 영흥면의 섬들을 포함하여 15면 160리에 달했다. 당시 부천군청은 인천도호부가 위치한 문학면 관교리에 있었다. 당시 소사역 일대는 계남면에 해당하였는데, 계남면은 1931년 소사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1년 소사읍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당시 부천군 15개 면 가운데 계남면·오정면의 대부분 및 소래면의 일부 지역이 현재의 부천시 영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919년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에 항거한 3·1운동이 발발함에 따라 부천에서도 격렬한 항일시위가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4일 계남면사무소가 군중들의 습격을 받아 조자칭과 판벽 등이 파괴되었다. 이후에도 부천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대한민국[편집]
1960년대 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되면서 공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이루어졌으며,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의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였다. 이에 따라 1973년 행정구역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수도권의 합리적인 개발과 인구집중 억제, 무질서한 시가지 팽창 방지를 위해 수도권의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이때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었다.
원래 1988년부터 설치된 중구와 남구의 각 일부였으나, 1993년 중구 관할이었던 심곡동, 원미동, 춘의동, 도당동, 약대동과 남구 관할이었던 중동, 상동, 소사동, 역곡동을 원미구로 재편성하고, 남구의 나머지 지역을 소사구로, 중구의 나머지 지역을 오정구로 개편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중동신도시와 상동지구의 입주가 완료되어 인구가 50만 명을 넘을 경우, 서쪽의 중동과 상동 일원을 다시 계남구로 분구하기로 하고 중동신도시 개발 당시부터 지금의 경기예술고등학교 자리에 구청 부지를 잡아놓았으나, 인구가 45만여 명에서 정체되어 분구 계획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원미구의 전신인 중구는 소사구의 전신인 남구와 함께 현재 특별시 및 광역시로 승격된 도시들을 제외하고 일반시들 중 전국 최초로 설치된 구이기도 하다(1988년 1월). 수원시의 장안구, 권선구가 1988년 7월 설치된 것보다도 반년이나 앞선 것이다.
2016년 7월 4일 부천시가 일반구를 폐지하고 책임읍면동제를 실시하면서, 원미구가 폐지되고 5개 책임동(행정복지센터)으로 재편되었다.
2019년 7월 1일 책임읍면동제 폐지 및 광역동제 전환으로 각 책임동은 광역동으로 바뀌었고, 산하 일반 행정동은 폐지되었다.
2024년 1월 1일, 부천시가 광역동제를 폐지하고 다시 일반구 체제로 복귀하면서 부활했다. 행정동도 5개 광역동에서 20개 일반동으로 도로 쪼개졌다.[4]
교통[편집]
부천에서 가장 발전된 곳으로, 부천의 중심지이다. 중동신도시에 부천시청이 있으며, 중·상동 및 부천역 일대를 중심으로 대규모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또한 부천을 지나는 철도 노선인 수도권 전철 1호선(경인선)과 서울 지하철 7호선, 수도권 전철 서해선 모두 원미구를 지난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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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원미구〉, 《위키백과》
- 〈원미구〉, 《나무위키》
- 〈두산백과 : 원미구〉, 《네이버 지식백과》
- 〈부천시〉,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