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구
금천구(衿川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남서부에 있는 구다. 북서쪽으로는 구로구, 동쪽으로는 관악구, 서쪽으로는 경기도 광명시, 남쪽으로는 경기도 안양시와 접한다.[1]
개요[편집]
금천구 명은 시흥 군의 전 명칭이던 금천현(衿川縣)에서 유래하였다. 1995년 3월 1일 자로 구로구에서 분구되어 설치되었다. 금천이란 명칭은 조선 시대의 지명인 금천에서 유래되었다. 서울특별시의 남서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6˚ 52´ 08˝~126˚ 55´ 30˝,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25´ 41˝~37˚ 27´ 27˝에 위치한다. 동서 간 거리는 5.01㎞, 남북 간 거리는 5.90㎞이며, 면적은 13.02㎢로 서울시 전체 면적의 2.2%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중구 다음으로 작다. 1995년 구로구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구로서 행정구역은 10개 행정동(3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산동이 전체 면적의 19.4%를 차지하여 가장 크고 독산 4동이 전체 면적의 4.5%로 가장 작다. 인구는 2020년을 기준하여 24만 7835명으로 서울시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하여 중구·종로구·용산구 다음으로 적다.
금천구의 인구는 서울특별시의 자치구들 중에서 중구, 종로구, 용산구 등에 이어 4번째로 적다. 하지만 관할구역이 워낙 좁아서 인구밀도는 서울 평균보다 높다. 금천구 동쪽의 구릉지와 서쪽의 안양천 사이에 시가지가 장방형으로 펼쳐지고, 중앙부를 남북방향으로 시흥 대로와 경부선 철도가 관통한다. 산지는 대부분 그린벨트 지역이며, 북서부의 한국 수출산업공단을 제외한 전역이 상업지역과 주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금천구의 금 자는 옷깃 금(衿) 자로, 흔히들 금하면 생각하는 쇠 금(金) 자가 아니다.[2][3]
자연환경[편집]
관악산과 이어지는 삼성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금천구 남동쪽에 호암산(347m)을 중심으로 하는 구릉지를 형성하여 관악구·안양시와 경계를 이룬다. 서쪽으로는 삼성산에서 발원하는 안양천이 광명시와 경계를 이루며 한강으로 흘러가고, 안양시 석수동의 관악산 자락에서 발원하는 삼성천이 금천구를 동서로 관통하여 안양천에 합류한다. 동쪽의 구릉지와 서쪽의 안양천 사이에 시가지가 장방형으로 펼쳐지고, 지도에서 보면 비스듬히 세운 신발 형상을 이룬다. 구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시흥 대로를 중심으로 동쪽의 관악산 쪽으로 점차 높아지는 지세를 보이지만 대부분이 평탄지로 이루어져 해발고도 100m 미만인 지역이 전체 면적의 86%를 웃돌고, 경사도 20% 미만인 지역이 전체 면적의 88%를 웃돈다. 지질은 선캄브리아 시대의 화강암질 편마암이 기반암을 이루고, 안양천의 하천 작용으로 형성된 충적층이 넓게 분포한다.
연평균 일 최고기온은 17.6℃, 연평균 일 최저기온은 9.5℃로 연평균 일교차가 8.1℃로 나타난다. 식물의 성장 가능 기간은 275.3일로 서울시 평균(268.5일)보다 7일가량 길다. 연평균 강수량은 1343.8㎜로 서울시 평균(1387.0㎜)보다 43㎜가량 적으며, 연평균 강수량의 60% 이상이 여름철에 집중하는 하계 다우형이다.
역사[편집]
금천구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한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고, 한강 유역의 하남시 미사리 유적이나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서 선사시대 인류가 살았던 흔적, 강남구 역삼동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선사유물, 서초구 원지동의 지석묘군 등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도 일찍부터 우리 조상들의 생활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 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쟁패가 계속 이어졌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남하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공략하여 석현성과 관미성 등 10여 성을 함락하고 이어 백제 서해안을 공격하여 58개 성을 취하였다. 이어 장수왕 때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장악하였고, 이 일대의 행정구역은 잉벌노현(仍伐奴縣)으로 율목군(栗木郡)에 속해 있었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백제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세력이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수직 라인과 신라와 당을 연결하는 수평라인이 서로 대립되었고, 당나라 세력을 이용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신문 왕대에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로 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이때 잉벌노현은 곡양현(穀壤縣)과 장구현(獐口縣)으로 나뉘었는데 금천구 지역은 곡양현으로 율진군(栗津郡)에 속하게 되었다.
후삼국시대 금천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각 지역에 호족세력들이 건재하였는데 한강 유역 일대에는 왕규(王規)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였고,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인 금주 강 씨(衿州 姜氏 혹은 衿川 姜氏) 세력과 풍덕 유 씨(豊德 柳氏) 세력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금천구 일대는 강감찬의 5대 조인 강여청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래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 진이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태조를 도와 삼한 벽 상공 신이 되면서 이 일대의 호족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고려 건국 후 금천구 지역은 금주(衿州)로, 율진군은 과주(果州)로, 장구현은 안산현(安山縣)으로 바뀌었다. 995년(성종 14) 고려의 행정구역을 5도로 나누면서 관내도(關內道)에 예속되었고, 금주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혁파하였다. 1018년(현종 9) 다시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경기도의 수주현(樹州縣)이 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수도를 한강 북쪽의 한양으로 옮기고 행정제도를 개편하였다. 1394년(태조 3) 먼저 경기도를 좌·우도로, 양광도를 충청도로, 강릉 교주도를 강원도로, 서해도를 풍해 도로 바꾸었는데 이때 금천구는 경기좌도 과천군(果川郡)에 소속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금주를 금천현(衿川縣)으로 개명하고 현감(縣監)이 두어졌다. 이후 1795년(정조 19)에는 금천현 지명을 시흥현(始興縣)으로 바꾸었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시흥현이 인천부 시흥군으로 승격되었다. 이듬해 23부제가 폐지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0년 조선의 국권을 강제 침탈한 일본은 조선의 전통적인 지방제도와 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행정 구역의 개편을 시도하여 1914년 지방제도를 12부 317군에서 12부 220개 군으로 폐지 혹은 통합하였다. 이때 경기도 시흥군에 속하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주로 동면 지역 오늘날의 금천구 지역이다. 당시 동면에 속해 있던 리는 시흥리, 안양리, 독산리, 신림리, 상도리, 봉천리, 가리봉리였다.
1943년 경성부(京城府, 지금의 서울시)에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영등포구 역소(永登浦區域所)가 설치되었다가 8·15광복 후인 1946년 서울시 영등포구로 개편되었다.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시흥군 동면의 가리봉리·독산리·시흥리가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관악 출장소에 속하였다가 1967년 관악 출장소가 폐지되고 영등포구 직할 구역이 되었으며, 1968년 지금의 가산동에 수출산업공업단지(구로공단) 2단지가 준공되었다.
영등포구의 인구 팽창을 해소하기 위하여 1973년 관악구, 1977년 강서구가 분리된 데 이어 1980년 12개 동(가리봉동·개봉동·고척동·구로동·궁동·독산동·시흥동·신도림동·오류동·온수동·천왕동·항동)이 분리되어 구로구가 신설되었다. 이후 구로구가 31개 행정동으로 확대되어 1995년 독산동·시흥동과 가리봉동 일부(가산동) 관할의 12개 행정동(가산동·독산 1~4동·독산본동·시흥 1~5동·시흥본동)이 분리되어 금천구가 신설되었다. 이후 2008년 독산본동이 독산 3동에, 시흥본동이 시흥 1동에 각각 통합되어 10개 행정동으로 정비되었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0개 행정동(가산동·독산 1~4동·시흥 1~5동) 3개 법정동(가산동·독산동·시흥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산업[편집]
정보통신업·사업서비스업을 비롯한 서비스업의 비중이 크고, 서울의 대표적 공업지역으로서 제조업의 비중도 크다. 2018년을 기준하여 지역 내 총생산(GRDP)은 17조 1628억 원으로 서울시 전체 GRDP의 4.1%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9번째로 비중이 크다. 경제활동별 부가가치의 비중은 정보통신업(4조 443억 원)이 25.5%로 가장 크고, 이 밖에 제조업(20.6%), 사업서비스업(19.6%), 도소매업(14.5%), 부동산업(5.9%) 등의 순이다. 정보통신업의 부가가치는 서울시 정보통신업 총 부가가치의 8.2%를 차지하여 강남구·송파구·중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2018년을 기준하여 사업체 수는 3만 2472개로 서울시 전체 사업체의 3.9%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0번째로 많다. 사업체별로는 도소매업체(9091개)가 28%로 가장 비중이 크고, 이 밖에 제조업체(16.6%), 숙박·음식점 업체(10.3%), 운수업체(8.7%), 정보 서비스 업체(8.1%), 전문·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체(6.7%) 등의 순이다. 전체 사업체의 47%가 서울디지털산업단지(G밸리)가 입지한 가산동에 분포하며, 개인 사업체가 약 63%, 종사자 5인 미만의 소규모 업체가 70%를 웃돈다. 사업체 종사자는 23만 4012명으로 서울시 전체 종사자의 4.5%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9번째로 많다.
제조업은 1960년대에 지금의 구로구 구로동과 금천구 가산동에 국내 첫 공업단지인 구로공단이 조성되어 산업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구로공단은 1960년대에 가발·섬유·봉제, 1970~1980년대에는 석유화학·기계·전자 등의 경공업을 위주로 하다가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2000년대 이후 IT제조·패션 중심으로 전환하여 명칭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경하였으며, 2~3단지가 금천구 가산동에 속하여 구로디지털단지(1단지)와 가산디지털단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2018년 제조업체 수는 5399개로 서울시 전체 제조업체의 9.2%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중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업종별로는 의복·의복액세서리 및 모피 제품(19.3%)과 기타 기계·장비(14.4%), 전자부품·컴퓨터·영상·음향 및 통신장비(11.8%), 전기 장비(10.2%), 의료·정밀·광학기기 및 시계 제품(8.0%), 금속가공품(6.2%) 제조업체가 약 70%를 차지한다. 제조업 종사자(4만 430명)은 서울시 전체 제조업 종사자의 15%를 웃돌아 25개 구 가운데 가장 많고, 제조업의 부가가치(3조 2738억 원)는 서울시 제조업 총부가가치의 20%를 웃돌아 25개 구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크다.
전통시장은 시흥동에 대명 여울 빛 거리시장·은행나무시장·비단길 현대 시장, 독산동에 별빛 남문시장·독산동 우시장 등이 상설시장으로 운영된다. 이 밖에 유통 업체로는 시흥동에 600여 개의 철강재 업체가 입주한 중앙 철재 종합상가를 비롯하여 대형 할인점 3개소, 쇼핑센터 6개소, 복합 쇼핑몰 1개소, 기타 대규모 점포 5개소 등이 있다. 2018년 도소매업의 부가가치(2조 3053억 원)는 서울시 도소매업 총부가가치의 3.7%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8번째로 비중이 크다.
교통[편집]
금천구의 도로는 남북 방향으로 발달된 반면 동서 방향으로는 발달이 미약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강남순환로가 계획 12년 만인 2016년 개통하면서 서초구까지 접근성이 20분으로 단축되었다. 독산동 일대에서 경부선 금천구청 역, 독산역으로 이어지는 노선인 금천 08은 비첨 두 시간에도 많은 승객을 운송한다. 서울시 산하 공기업인 서울교통공사의 역은 1개(가산디지털단지역) 뿐이다.
도로 교통은 전남 무안군 삼향읍을 기점으로 하는 서해안고속도로(고속국도 15호선)가 전북·충남·경기도를 거쳐 금천구 독산동까지 이어져 서해안 지역의 남북을 연결하고, 도시고속화도로인 강남순환로가 금천구 시흥동을 기점으로 관악구를 거쳐 서초구 우면동까지 이어진다. 또한 강서구 방화동을 기점으로 하는 남부 순환로가 금천구를 거쳐 강남구 수서동까지 이어지고, 국도 1호선의 일부인 서부간선도로가 영등포구 성산대교 남단에서 금천구의 금천 나들목까지 이어져 서해안고속도로와 접속한다. 이 밖에 시흥동을 기점으로 구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여 영등포구 대림동까지 이어지는 시흥대로를 비롯하여 디지털로(광명시~금천구~영등포구)·범안로(부천시 괴안동~독산동)·안양천로(광명시~금천구~강서구)·문성로(독산동~관악구 서원동)·독산로(시흥동~독산동)·기아로(광명시 소하동~시흥동)와 가마산로·가산로·금하로·벚꽃로·호암로 등이 금천구의 내·외곽을 연결한다.
철도 교통은 경기도 [[]동두천시]]의 소요산역을 기점으로 하는 수도권 전철 1호선이 구로구의 구로역에서 분기하여 금천구의 가산디지털단지역~독산역~금천구청 역을 거쳐 광명역(경기도 광명시)·서동탄역(오산시)·신창역(충남 아산시)까지 운행하며, 금천구에 인접한 광명역에서 경부고속철도(KTX)를 이용할 수 있다. 이 밖에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역에서 인천시 석남역까지 운행하는 수도권 전철 7호선이 가산디지털단지역을 거쳐 가고,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1호선과 접속한다.
관광[편집]
시흥동의 호암산은 호랑이를 닮은 산세에 경치가 아름다워 탐방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금천구의 진산(鎭山)이다. 호암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산마루를 둘러쌓은 호암산성(사적)의 일부를 비롯하여 산성 안에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고 군용수(軍用水)로 사용하던 한 우물, 경복궁의 해태상과 마주 보는 위치에 놓아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는 용도로 세워졌다고 전하는 석구상(石狗像) 등의 역사 유적이 남아 있으며, 산 일대에 숲태교 센터·명상 체조데크 등을 갖춘 호암산 잣나무 산림욕장과 호암 늘솔길·호암산 숲길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호암산 자락의 호압사(虎壓寺)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을 짓는 도중에 여러 차례 궁궐이 무너지던 차에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공사가 순조로울 것이라는 무학대사의 말을 좇아 이곳에 절을 짓고 호랑이의 기운을 누른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금천구를 상징하는 가산디지털단지에는 대규모 패션아울렛들로 패션거리가 조성되어 쇼핑 명소로 인기가 높고,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이 조성되어 과거에 열악한 근로환경 속에서 산업화에 기여한 노동자들의 고단했던 생활을 체험해 볼 수 있다. 가산디지털단지역 내에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발전상을 조명하는 G밸리 산업관광 전시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이 밖에 시흥동에 금천구의 3개 법정동을 상징하는 세 줄기의 인공폭포가 흐르는 금천폭포공원, 조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화성의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 머물던 시흥행궁(始興行宮) 터, 독산동에 감로천 일대의 자연수림을 복원하여 조성한 감로천 생태공원과 베짱이 유아숲 체험장,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된 별빛 남문시장 등의 명소가 있다. 먹거리 명소로는 독산동에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맛나는 거리상점가가 형성되어 있다. 걷기 명소로는 서울 둘레길의 제6코스인 안양천 코스가 안양시와 금천구의 경계에 있는 석수역을 기점으로 안양천과 한강을 따라 금천구·구로구·영등포구를 거쳐 강서구 가양역에 이르는 18㎞ 구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교육[편집]
전통 교육기관은 조선시대에 경기도 시흥현·시흥군에 속하여 시흥 향교가 금천구 지역의 공공 교육기관 역할을 하였다. 시흥 향교는 과천향교에 통합되어 시흥동에 터만 남아 있다.
근대 교육기관은 1911년 경기도 시흥군 군내면 군내동(지금의 금천구 시흥동)에서 개교한 시흥 공립보통학교가 금천구 지역의 첫 근대 학교로 기록되며, 이후 시흥 공립심상소학교·시흥 공립국민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서울 시흥초등학교로 이어진다. 1956년에는 시흥군 동면 독산리(지금의 금천구 독산동)에서 문성 국민학교가 개교하여 지금의 서울문성초등학교로 이어지며, 같은 해에 영등포구에서 개교한 영남 국민학교가 1990년 독산동으로 이전하여 지금의 서울영남 초등학교로 이어진다. 문성 국민학교에서 지금의 서울 독산 초등학교·서울 정심 초등학교·서울 두산 초등학교 등이 분리되었으며, 이밖에 1967년 지금의 서울 탑동초등학교, 1974년 서울 백산 초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중등교육기관은 1960년 중구에서 개교한 국악예술 학교가 한국국악예술 학교를 거쳐 1984년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로 개편한 뒤 1992년 시흥동으로 이전하여 지금의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로 이어진다. 이 밖에 1968년 문일 중학교와 강서중학교(지금의 세일중학교), 1969년 동일중학교, 1970년 강서 여자중학교(지금의 가산중학교), 1972년 대림 여자중학교(지금의 한울중학교), 1973년 동일여자고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2019년을 기준하여 교육기관은 고등학교 6개교를 비롯하여 중학교 9개교, 초등학교 18개교 등이 있다. 학생 수는 1만 9084명으로 서울시 전체 학생의 약 1%에 머물러 25개 구 가운데 중구 다음으로 적다.
문화재[편집]
- 서울 호암산성 - 사적 제343호
- 순흥안씨양도공파묘군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4호
- 호압사 석불좌상(약사불) -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8호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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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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