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
진주시(晋州市)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중서부에 있는 시이다. 통영 대전 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가 연결된다. 명소로는 진주성, 진주 촉석루, 진양호 등이 있고, 경상국립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등 국립대학교가 있다. 혁신도시 사업에 따라 충무공동(구 금산면, 문산읍, 호탄동 일부 지역)에 한국토지주택공사, 주택관리공단, 중소 벤처기업 진흥공단 등이 이전되었다. [1]
개요[편집]
진주시는 동경 127°53′∼128°22′북위 35°03′∼35°26′에 있다. 동쪽은 함안군·창원시, 서쪽은 하동군, 남쪽은 사천시·고성군, 북쪽은 산청군·의령군에 접한다. 면적은 712.95㎢이고, 인구는 2023년 6월을 기준하여 342,370명이다. 1995년 진양군과 통합시를 이루었으며, 역사·문화·예술·교육 등 경상남도 서부의 중심도시로, 자연적·역사적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5개 면, 16개 행정동(33개 법정동), 337개 행정리(124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에 있다.
시가지는 시의 중앙을 관류하는 남강 유역에 펼쳐져 있으며, 남강을 중심으로 강북·강남·강동의 3개 지역으로 나뉜다. 시내 도로망은 규칙적인 격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 밖의 지역은 아직도 농촌 경관이 뚜렷하다.
진주시는비수도권에서 비교적 인구가 많은 경남에 있어서 돋보이지 않을 뿐이지 비수도권 도시 중에서는 인구수가 상위권에 위치한 지역이다. 경남 내에서는 인구 순위가 4위에 불과하지만 경상남도에서 진주보다 인구가 많은 창원시, 김해시, 양산시는 전부 동부에 위치한 도시이므로 서부에서는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경기도를 뺀 비수도권 도 중에서 진주보다 인구가 많은 도시는 포항시, 구미시, 천안시, 청주시, 전주시, 원주시, 제주시뿐인데 이들은 전부 소속 도에서 최대도시에 해당되는 지역들이다. 인구가 330만에 달하는 경남이어서 잘 부각되지 않지만 다른 도에 있었으면 최소한 도내 제2의 도시는 노려볼 수 있는 인구라는 것.[2][3]
자연환경[편집]
중앙부에 남강이 관류하며 시가지를 북부와 남부로 양분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 북쪽에 비봉산(飛鳳山, 139m), 남쪽에 망진산(望晉山, 172m), 동쪽에 선학산(仙鶴山) 등 100m 내외의 낮은 산들이 외각지구에 위치하여 저평한 시가지를 둘러싸는 형세를 취하며, 단지 동쪽과 남쪽은 남강 유역의 평야부로 되어 있다. 시가지를 동서남북에서 둘러싸는 형세의 주변부는 북부·서부·동남부지역에 소백산맥의 지맥이 뻗어 내리고 있어 산지부가 나타나고 중앙부와 남부지역은 평지부와 낮은 구릉성 저평지가 전개되고 있다.
대표적 산으로는 북서쪽에 광제봉(廣濟峰, 400m)·국사봉(國士峰, 228m), 북쪽에 천황산(天皇山, 364m), 동쪽에 영봉산(靈鳳山, 395m)·방어산(防禦山, 530m) 등이 있다. 그 밖에 월아산(月牙山, 471m)·장군대산(將軍臺山, 482m) 등이 있다.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시의 북부중앙을 곡류하면서 유역에 비옥한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남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는 북부의 미천면에서 발원한 향양천(向陽川), 고성군 송구산에서 발원하여 금곡면·문산읍을 지나며 북류하는 영천강(潁川江), 산청군 감투봉에서 발원하여 단성면·수곡면을 지나며 진양호로 흘러드는 덕천강(德川江) 등이 있다.
남강은 하천의 범람이 잦아 1969년 홍수방지 및 관개, 발전의 목적으로 다목적댐을 구축하였다. 나동면 삼계리와 판문동사이에 댐을 막아 인공호인 진양호가 만들어졌는데, 물을 사천만(泗川灣)으로 방류하는 방법으로 가화천의 유로를 변경하는 등의 공사를 통해 낙동강 및 남강 하류지역의 수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댐공사로 인해 대평면·나동면 일부지구는 수몰되었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다습한 해양성기후의 특성을 띈다. 연평균기온 14℃, 1월 평균기온 1.1℃, 8월 평균기온 27.1℃이며, 연강수량은 1,701㎜ 내외로 대한민국에서 최대다우지역에 속한다.(2007년 기준) 지질은 중앙의 서부일대에는 선캄브리아기의 변성 퇴적암과 화강편마암이 분포되고 있으나, 대부분 지역이 백악기 경상계 지층의 신라통과 낙동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식생은 온대 남동지구의 유형에 속해 편백·해송·리기다소나무·오동나무·탱자나무·대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4]
역사[편집]
청동기시대 유물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부터 사람이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한 시대에는 변진의 소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었으며, 가야 시대에는 고령가야 영역에 포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백제 때 거열성(居烈城)이었던 진주는 문무왕(文武王)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고 하였다. 삼국통일 후 685년(신문왕 5)에 청주(菁州)로 고치고 총관을 두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 실시로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가 되어 1주, 11군, 31현을 관할하는 대읍(大邑)이 되었다. 그 뒤 혜공왕(惠恭王) 때에 다시 청주(菁州)로 개칭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청주에서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道)로 개편되면서 진주로 고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했다. 1012년(현종 3)에 절도사를 없애고 안무사를 두었다가 1018년에 안무사제도를 폐지하고 진주목으로 복구하면서 강성군(江城郡:丹城)·하동군을 속군으로, 사주현·악양현·영선현·진해현·곤명현·반성현·의령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조선 시대 1392년(태조 1)에 한때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 등으로 진주가 정치·경제·행정·군사 요지임이 확인됨에 따라 1603년(선조 36)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이 창원에서 진주로 옮아왔다. 당시에는 진주를 진강(晉江)·청주(菁州)·진산(晉山)이라고도 하였다.
1895년 23부제 실시에 따라 진주부(晉州府) 진주군이 되었고,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어 도청소재지로서 관찰사가 상주하였다. 1910년에 진주군 진주면(晋州面)이 되었다가 1925년에 도청소재지가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1931년 진주면이 읍(邑)으로 승격한 데 이어 1938년에는 진주군 도동면(道洞面)과 평거면(平居面)의 5개리, 내동면(奈洞面)의 1개리가 편입되었다. 1939년 도동면·거평면을 편입하여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나머지 지역은 진양군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에 진주부가 진주시로 개칭되었으며, 1973년에는 진양군 정촌면(井村面) 가좌리(加佐里)와 호탄리(虎灘里), 내동면의 귀곡리(貴谷里)를 이관받았다.
1995년 1월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진주시와 진양군이 합쳐져 도농 복합형 통합시가 되었다. 1997년 7월 구(舊)진주시의 행정동 통폐합과 경계지역 조정으로 26개 동에서 21개 동으로 되었다.
2020년 현재 1읍(문산읍), 15면(정촌면·진성면·이반성면·지수면·금산면·미천면·대평면·내동면·금곡면·일반성면·사봉면·대곡면·집현면·명석면·수곡면), 14동(천전동·성북동·중앙동·상봉동·상대동·하대동·상평동·초장동·평거동·신안동·이현동·판문동·가호동·충무공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업[편집]
진주시는 서부 경남의 문화·교육은 물론 경제·사회의 중심지로서 도시·농촌의 균형개발을 위한 거점도시이자 자연 자원이 풍족하고 산업기반시설이 완비된 도·농 복합도시다. 농산물 집산지였으나 상평공단이 조성된 후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농업특산품으로는 전국 최고 품질의 진주배와 단감을 비롯해 오이·딸기·고추·수박·피망·파프리카·호박 등 원예작물을 생산하여 일본과 동남아시아 등지로 수출하고 있다. 연간 농산물수출액은 501만 달러에 달한다. 주요 공산품은 실크·농기계부품 그리고 은장도 등의 공예품이다.
총 경지면적 1만 8612ha 가운데 논이 1만 298ha 밭이 5,527ha로 남강 유역과 그 지류에 펼쳐진 넓은 충적지가 주요 곡창지대를 이룬다. 근교에서는 미곡·대맥·과맥·맥주맥·메밀·콩 등의 곡물을 주로 재배하지만, 교통의 발달로 과수·화훼 등의 시설재배도 성하여 오이·호박·수박·고추·산딸기 등 채소를 많이 재배하고, 고구마·감자·참깨도 많이 생산한다.
특히 평거동은 관상수를 비롯하여 과수·화훼 재배의 중심지이다. 집현면·금산면·대곡면에서는 토마토·딸기·고추·오이 등을 많이 생산해 서울·부산·광주 등 대도시로 출하하고, 집현면을 중심으로 인공재배되는 산딸기·배·복숭아·밤·단감 등과 목단·잎당귀 등 약용작물도 생산한다. 1970년 남강댐의 완공으로 홍수 및 가뭄 해소, 관광자원의 확보 등 많은 혜택을 보게 되었다.
임야면적은 438.8㎢로 전체 면적의 62%를 차지할 정도로 산지가 많아 배·복숭아·감·밤·대추·버섯·산나물·은행 등이 많이 생산되고 한우·젖소·산양 등도 많이 사육한다. 대나무가 많아 예로부터 죽세품 생산이 활발하다. 양잠업이 성하였으나 농약공해와 노동력 부족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신화직물·무림페이퍼·대동중공업·대동기어 등의 기업을 비롯한 기계·섬유·제지 중심의 공장들이 상평공단을 중심으로 입지해 있다. 견직물은 전국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일본·유럽·미주에 수출하며, 홍보를 위해 매년 미스 실크(silk)를 선발한다. 대동농기계가 경북 논공 공업단지로 이전함에 따라 농기계부품 생산업체들이 한동안 심한 타격을 받았으나 창원산업기지로 거래선을 변경하였다. 일반성면에는 목기·고려은장도·조선가구 등 전통공업이 남아 있다.
상평 지방산업단지·진성농공단지·이반성농공단지·대곡농공단지 4개의 농공단지가 있으며 사봉지구에 95만 평 규모의 사봉농공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 중이다. 상평공단은 농기계부품 생산공장을 주축으로 실크·농기계·자동차부품·제지·화공약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며, 입주업체는 722개 업체이고, 종업원 수는 8,446명이다.
상설시장으로는 중앙공설시장·초전공설시장·서부공설시장·중앙도매시장·도동사설시장 등이 있다. 1988년에 대안동·동성동에 걸쳐 지하상가가 준공되어 도심의 중심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 외에 5일 정기시장이 4개소 있다.
교통[편집]
1965년과 1968년에 각각 개통된 진삼선과 경전선을 비롯하여 진주시는 교통망이 방사상으로 발달한 교통 요지다. 중앙부에 합천과 고령을 연결하는 국도가 남북으로 연결되고, 동부에 남해고속도로가 영·호남을 동서로 이어주며, 서부에는 삼천포·사천·산청·함양을 연결하는 국도가 남북으로 통과한다. 남부에 마산·고성·하동·광양을 연결하는 국도가 남북으로 통과하며 경전선(慶全線) 철도가 동서로 통과한다.
거미줄 같은 지방도는 시내 각 지역은 물론 의령·가야·고성·사천·하동·산청 등을 연결한다. 1996년에는 서진주-진주 7.8㎞, 1998년에는 함양-서진 간 50.2㎞가 개통되어 함양·거창 등 시의 서쪽 지방과 교통이 편리해졌다. 2001년 국토의 중부를 종단하는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2005년 12월에 진주-통영 간 고속도로 48.8㎞도 연결되면서 통영대전 중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다.
철도가 서울·부산·목포 방면으로 연결되고, 항공교통은 사천공항을 이용한다. 진주시의 도로 총길이는 782.7㎞로, 포장률은 88.7%(2006)이다.
관광[편집]
예로부터 예술의 고장이자 지방문화의 총본산인 유서 깊은 곳이다. 수려한 남강을 끼고 임진왜란의 상처를 많이 입은 유적들이 산재하고 있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남강변 절벽 위의 촉석루는 우리나라 3대 누각 중의 하나로 고려 공민왕 때 창건하여 600여 년 동안 유지되다가 6·25전쟁 때 불탄 것을 재건하였다. 이곳에서 바라다보이는 남강 변의 경치는 절경이다. 전시에는 장군이 지휘하는 장소로, 평소에는 관리들의 놀이터로 쓰였다고 한다. 그 밑의 절벽을 따라 남강에 이르면 2m 크기의 의암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것이 의기 논개가 왜장의 목을 껴안고 투신한 바위이다.
남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김시민을 비롯한 수많은 군졸들의 신위를 모신 창렬사, 왜구와 장렬히 전투하였던 승군의 본거지인 호국사가 있다. 시의 남서쪽 약 20㎞ 지점에 남강 상류를 막아 만든 인공호인 진양호는 수정같이 맑은 물과 울창한 주변 산림이 조화를 이루는 절경이고, 특히 일출 광경이 장관이다.
그 밖에 북장대·서장대는 전란 때 장군이 군을 지휘하던 곳이고, 논개의 혼을 모셔놓은 의기사, 진주 유림의 고향인 진주향교, 봉이 날아가 버렸다는 데서 이름지은 비봉산의 경치는 진주의 명물이다. 판문동·귀곡동에 있는 진양호반의 진양호유원지와 가좌동의 석류공원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남성동, 인사동 일대의 골동품거리는 고 미술품 업소의 대부분이 밀집되어 있는 민속품을 포함한 문화재 등의 매매거리로 10여 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민속시장거리이다.
남성동에 소재한 국립진주박물관은 1984년에 진주성내에 개관하였다. 개관 당시에는 가야문화를 중심으로 한 박물관 이었으나 1998년에 역사박물관으로 재 개관하였다. 본관 건물은 우리나라 전통목조탑을 석조건물로 형상화한 것으로 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대표작이며,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본성동의 향토민속관은 국내 유일의 장석전문전시관으로서 장석 8만여 점과, 목가구 20여점, 생활민속품 17여점, 장석제작도구 등이 진열되어 있다. 칠암동에 위치한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은 다목적 발표공간으로 대공연장, 소공연장, 놀이마당, 전시실, 부대시설 등을 갖춘 이 고장 종합문화예술의 전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남가람문화거리는 이 고장의 전통과 독특한 문화적 개성을 지닌 도심 속의 문화, 휴식 공간으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범 문화예술거리로 지정 조성되었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단계(문화예술의 거리)와 2단계(역사의 거리)로 구분되어 조성되어 있다. 진양교·문화예술회관·진주교·천수교에 이르는 칠암, 망경지구 남강변 일대에 위치한다.
신안동의 진주공설운동장을 비롯하여 문산읍의 문산공설운동장, 옥봉동의 남강실내아이스링크장, 상평동의 진주학생수영장 등은 대표적인 이 고장의 체육시설이다. 이외에도 진성면 상촌리에 진주컨트리클럽이 있으며 망진산 체육공원과 비봉산 체육공원 등 시민들을 위한 체육시설을 완비하고 있다.
문화행사 및 축제[편집]
문화행사로 대한민국 지방문화예술제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개천예술제가 개천예술제단 운영위원회 주최로 해마다 10월 3일을 전후해 열린다. 첫회인 1949년 1회부터 1958년까지는 영남예술제로 불리다가 10회째인 1959년부터 개천예술제라 하였다.
『의암별제』와『진주탈춤한마당』을 주축으로 만든 진주논개제는 매년 5월 넷째주 금,토,일 3일간에 걸쳐 진주성에서 개최되며, 1868년 당시 진주목사 정현석이 창제한 것으로서 제향에 악,가,무가 포함되고 여성들만이 제관이 될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의 제례인 의암별제를 서막으로 진주오광대를 비롯한 민속예술과 진주기생들이 남긴 교방문화와 탈춤과 대동놀이로 구성된다.
6·25전쟁 동안과 1979년에만 열리지 않았고 각종 학술발표를 하는 순수예술행사, 민족문화행사, 축하행사 등을 포함 100여 개의 행사가 개최된다. 남강유등축제·불꽃놀이·백일장·가장행렬 등 다양한 민속제가 펼쳐지고 전국의 상인이 모여들어 풍물시장과 야시장이 선다.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와 소싸움·유등놀이·오광대놀이·연날리기·널뛰기·윷놀이 등이다. 유등놀이는 시민들이 집에서 만든 여러 가지 모양의 등에다 불을 켜고 캄캄한 밤중에 시내를 한 바퀴 돈 후 그것을 남강물에 띄우는 놀이이다. 예술의 고장답게 문인협회·무용협회·국악협회·미술협회·사진협회·연극협회·연예협회·음악협회 등이 활동하고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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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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