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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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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령

철령(鐵嶺)은 함남 안변군과 강원 회양군 (현 강원 고산군과 회양군)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개요[편집]

  • 철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고개의 서쪽을 관서 지방, 북쪽을 관북 지방, 동쪽을 관동 지방이라고 한다. 철령을 지나는 도로가 있어 두 지역을 연결한다. 대한민국은 철령을 지나는 도로를 국도 제31호선으로 지정하였다.[1]
  • 철령은 높이 685m이다. 회양과 안변을 잇는 국도가 지나는데 서울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교통 ·군사상 중요한 고개이다. 이 고개의 북쪽을 관북지방, 동쪽을 관동지방이라고 부른다. 이 관문에는 지금도 석성(石城)터가 남아 있고, 서쪽에 솟은 풍류산(風流山)과 동쪽의 장수봉(將帥峰)이 천하의 난관을 이루며, 녹음과 단풍의 경승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북한강과 안변 남대천(安邊南大川)의 수원을 이루고, 철령 고갯길과 함께 깊은 골짜기와 곡벽(谷壁)이 또한 장관을 이룬다. 부근에는 고음폭포(鼓音瀑布) ·취적5경(吹笛五景)과 장수봉 고개 등이 있다.[2]
  • 철령은 북한 강원도 회양군과 고산군 사이에 있는 고개다. 높이는 685m. 31번 국도로 넘을 수 있으며, 예부터 지금까지 중부 지방과 관북 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다. 고려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이 고개도 다시 고려 땅이 되었는데, 후에 원나라를 밀어내고 들어선 명나라가 고려에게 본디 철령 이북은 원나라가 다스렸으니 원나라를 밀어낸 자신들이 다스려야 한다며 철령위를 설치할 것이니 도로 내놓으라 하였다. 당시 실권자였던 최영은 당연히 이런 궤변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이는 곧 요동정벌로 이어졌다. 후한서, 삼국지 동이전에는 기원후 30년에 광무제가 낙랑군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단단대령 동쪽의 현들에 있던 거수들을 현후(縣侯)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단단대령이 오늘날 철령으로 비정되고 있다. 조선 시대부터 현재까지 함경도와 강원도의 경계이다. 철령이 군사적 요충지이다 보니,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서 요새가 하나 지어졌는데, 그것이 '철령관(鐵嶺關)'이다. 이 철령관은 지역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는데, 이곳의 북서쪽인 평안도지역을 관서, 이곳의 북동쪽인 함경도지역을 관북, 남쪽인 강원도지역을 관동으로 불리게 되었다.[3]
  • 철령은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면과 강원도 회양군 하북면(지금의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 사이에 있는 고개이며 그 높이 685m이다. 고개의 북쪽을 관북지방, 동쪽을 관동지방이라고 한다. 서울과 관북지방 사이, 회양과 고산, 안변을 연결하는 교통·군사상의 중요한 고개였다. 고산은 고개 북쪽, 회양은 고개 남쪽에 발달한 영하취락(嶺下聚落)이다. 1914년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을 따라 경원선이 부설되면서 이용 빈도가 감소하였다. 철령에는 지금도 석성(石城)터가 남아 있고 부근에 고음폭포(鼓音瀑布) ·취적5경(吹笛五景) 등이 있다. 서쪽의 풍류산(風流山)과 동쪽의 장수봉(將帥峰)이 천하의 난관을 이루며 북한강과 안변 남대천(安邊南大川)의 수원이다. 1388년(우왕 14) 명나라가 철령 이북은 본래 원나라 땅이라 하며 요동(遼東) 관할하에 두겠다고 통보해오자, 고려에서는 이에 반대하고 철령뿐만 아니라 그 이북의 공산령(公山嶺)까지도 본래는 고려의 영토라 하여 요동정벌을 결의하였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정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철령 이북의 땅도 명나라에 귀속되지 않았다. 이항복(李恒福)은 철령을 소재로 하여 다음과 같은 시조를 남긴 바 있다.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고신 원루를 비 삼아 띄우다가/임 계신 구중 심처에 뿌려본들 어떠하리.'[4]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편집]

  • 철령위(鐵嶺衛)는 고려 말인 1387년(우왕 13년), 중국 명(明)이 요동 지역에 설치한 군사적 행정기구이다. 원(元)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차지한 명은 원이 지배하던 고려의 철령 이북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며 철령위 설치를 고려에 통보해 왔고, 고려는 이것을 자국 영토에 대한 침해로 여겨 우왕(禑王)과 최영(崔瑩) 등이 주도하여 요동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정벌군의 지휘를 맡은 이성계가 요동 정벌에 반대하다 압록강변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으로 진격, 우왕을 폐위하고 최영을 처형하였다. 이것은 훗날 조선이 세워지는 기틀을 제공하게 된다.
  • 철령위문제는 고려 말에 명(明)나라와의 사이에 야기된 철령(함경도와 강원도의 경계) 이북의 귀속문제이다. 고려를 지배하던 원(元)나라의 세력이 기울고 1368년 명나라가 일어난 이후, 명나라 태조(太祖)가 철령 이북의 땅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라 하여 자기 나라에 귀속시켜 철령위를 설치하고 병참군영으로 만들 계획이라는 사실이, 명나라에 다녀온 설장수(偰長壽)를 통해 알려졌다. 이에 고려에서는 이곳에 성(城)을 신축하여 대비케 하는 한편, 박의중(朴宜中)을 다시 명나라에 보내어 철령 이북의 문천(文川) ·고원(高原) ·영흥(永興) ·함흥(咸興) 등과 공험진(公險鎭)까지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고 철령위 설치를 중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조정에서는 최영(崔瑩)이 중신회의를 열어 타개책을 논의한 결과 명나라와 화의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그러나 1388년(우왕 14) 3월 명나라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왕득명(王得明)을 고려에 보내 랴오둥[遼東]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70여 개의 병참(兵站)을 두는 철령위 설치를 정식으로 통고해 오자, 급기야 우왕(禑王)은 요동 정벌을 명하게 되었다. 이에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이성계(李成桂)를 우군(右軍)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좌군(左軍)도통사로 삼고 3만 8천여 군사로 평양을 향해 출발하였다. 결국 이성계의 회군(回軍)으로 요동 정벌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철령 이북도 명나라에 귀속되지는 않았다.

철령 유적[편집]

  •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의 경계를 이루는 철령의 서쪽 봉우리에 있는 고구려 시기의 유적이다. 동서 8m, 남북 10m의 범위 안에 지표면으로부터 내려가면서 두께 5cm의 조선시대문화층과 15cm의 고려 시대 문화층, 20cm의 고구려 시기 문화층이 층층히 겹놓여 있다. 조선 시대와 고구려 시기의 유물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고구려 시기 문화층에서 말 모형들이 많이 드러났다.
  • 불에 탄 붉은 흙덩이와 숯이 섞인 누런 점토층으로 되어 있는 고구려 시기 문화층에서는 1개의 건물터가 있다. 동서로 길게 놓인 남향집이었는데 서쪽 부분의 일부가 2개의 기둥받침돌만 남아 있다. 불에 타서 붉게 다져지고 붉은색 기왓조각들이 깔려 있는 건물바닥 위에서 54개의 쇠말 모형, 4개의 청동말 모형과 각각 1개씩의 쇠로 만든 용, 거북이, 범, 새 모형들을 비롯하여 모두 17종에 81점의 유물들이 있다. 말모형은 길이 28cm, 높이 19cm, 질량이 10kg이나 되는 큰 것으로부터 길이가 10cm 안팎의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각이한 크기이다. 말 모형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갈을 물리고 안장을 얹고 등자가 달린 것이며 그중에는 개마도 적지 않아서 그것이 고구려 기병들이 탔던 군마를 형성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 중배중심의 큰 청동말은 고구려의 마구일식으로 특별히 화려하게 치레되어 있으며 안장은 두꺼운 가죽깔개 위에 부드러운 요를 덧깔고 그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만들었다. 크기와 형태가 각이한 군마모형들이 한곳에서 많이 발견된 것은 당시 고구려에서 철 주조 기술과 생산이 발전되어 철기가 널리 이용되었던 사실과 함께 기병을 기본으로 편성되었던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을 보여주고 있다. 58개의 말 모형들은 맨 앞에 19마리, 그다음에 20마리, 맨 뒤에 19마리씩 3개의 무리를 이루어 남쪽으로 향한 상태로 있다. 이것을 고구려 무덤벽화의 기마 행렬도와 대비하여 보면 전배, 중배, 후배의 대열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마행렬의 바깥둘레 네 방위에 쇠로 만든 용(동쪽), 거북이(북쪽), 범(서쪽), 새(남쪽)모형들이 놓여 있어 그것이 '사신'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중배는 청동의 큰 말을 중심으로 그 좌우와 뒤에 중, 소형의 청동말 3개와 대, 중, 소형의 쇠말 16개를 배치하여 19마리의 말들이 한 마리의 큰 말을 호위하여 나가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령유적에서 나온 고구려 시기의 말모형들은 역사연구에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안변군(安邊郡)[편집]

  • 강원도 중부에 있는 군이다. 북쪽은 문천군 ·원산시 ·동해, 서쪽은 강원 이천군, 남쪽은 강원 회양군과 평강군, 동쪽은 강원 통천군에 접한다. 군의 남서쪽은 마식령산맥(馬息嶺山脈)과 태백산맥(太白山脈)이 추가령(楸哥嶺:530m)에서 연결됨으로써 백암산(白岩山:1,225m) ·저두봉(猪頭峰:1,340m) ·추애산(楸愛山:1,528m) ·풍류산(風流山:1,024m) 등이 솟아 대체로 지세가 험준하다. 풍류산 동쪽의 안부(鞍部)인 철령(鐵嶺:673m)은 예로부터 천연의 요새가 되어 남북의 관문 역할을 하였으며, 관북(關北) ·관서(關西)의 지명도 이곳을 기준으로 하여 구분되었다.
  • 도로는 경원선에 병행하는 1등 도로와 원산에서 양양(襄陽)을 거쳐 동해북부선과 병행하는 2등 도로가 있어, 군의 2대 간선 도로 구실을 한다. 또 용지역(龍池驛)에서 2등 도로가 남쪽으로 철령(鐵嶺)을 넘어 회양(淮陽) 방면으로 통하며 그 외에도 각 면으로 통하는 도로가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다. 명승지로는 지릉(智陵) ·삼방리 고음폭포(鼓音瀑布) ·삼방폭포, 남대천 용담소(龍潭沼) 옆에 세워진 표표연정(飄飄然亭), 예로부터의 관문인 철령관지(鐵嶺關址), 삼방약수 ·석왕사약수가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철령〉, 《위키백과》
  2. 철령(鐵嶺)〉, 《두산백과》
  3. 철령〉, 《나무위키》
  4. 철령(鐵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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