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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지방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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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지방

동북지방(東北地方)이란 대한민국의 동북부 지역에 있는 함경도 지역 일대를 뜻한다. 행정적으로는 북한의 함경북도, 함경남도, 량강도 지역을 포함한다..[1]

역사[편집]

고려 이전[편집]

동북지방은 원삼국시대 때 옥저의 영역이었다. 뒷날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고, 신라 진흥왕이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 이원군 마운령까지 진출했다가 지금의 강원도에 속하는 안변군 일대의 이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다시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남북국시대에는 대체적으로 안변군을 포함한 남부 지역(현재의 강원도(북한)의 대부분)은 통일신라, 그 외에는 발해의 영역이었다. 현재 사학계는 함흥 혹은 북청에 남경남해부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발해 관련 유물, 유적들로는 함경북도 명천군의 개심사, 청진시 동쪽의 부거리 일대의 유적들, 함경남도 금호지구의 오매리 일대의 유적들이 있다. 윤관의 동북 9성이 있던 땅. 고려시대에는 동계에 속했으며, 함경도 출신 병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고 한다. 고려 말기,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된 이 땅에 전주 이씨 일가가 자리잡았고 고향으로 삼은 땅("흥왕지지")이 바로 "영흥", "화주"의 동북면(함경도)이었다. 한때 이성계의 영향력이 목단강에 닿았을 정도며 1380년 정도엔 이미 함경도 전체가 이성계의 독립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쌍성총관부의 위치는 현재의 동북3성 중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쌍성구 설도 있다.

조선[편집]

조선 왕조 극초기에는 이성계의 연고지였던 만큼 풍패지향, 흥왕지지(興王之地)로 일컬어졌으나 조사의의 난(1402년)과 이징옥의 난(1453년), 이시애의 난(1467년)이 연달아 일어난 뒤 반역향으로 찍혔다. 이런 도중에 조종께서 지키시던 땅이라는 명목으로 세종 때까지 두만강 하류의 영토를 확장하면서 외부의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힘썼다. 그러나 통일신라 이후 신라계 명문세가들이 하삼도와 경기, 강원 남부 등 신라 내지에 자리잡게 됨에 따라 함흥 이북으로는 공민왕 대 가서야 개척된 함경도에 비해 전통적인 유력가문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선이 농본사회였던지라 기후가 척박한 함경도는 군사기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려웠다. 17세기까지는 팔도 중 가장 인구가 적은 곳이었으니 이곳을 완벽히 다른 인구가 많은 지방과 같은 관심을 기울여도 역차별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내내 함경도가 가장 소외된 것은 어찌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조선 초기에는 토관 제도 등을 실시하여 토착 유력 인사를 흡수하며 이곳 사람들을 회유하였다.

자신들을 차별해온 조정에 대한 분노는, 급기야 임진왜란 때 북상한 가토 기요마사에게 조선 최북단 회령 아전 국경인(鞠景仁) 등이 임해군, 순화군을 팔아넘긴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국경인은 전북 전주에서 유배되어 온 사람으로, 물론 나중에 의병장과 유생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시 함경도는 일본의 도호쿠 지방과 비슷하게 변방 중의 변방이었던 것. 그렇지만 조선은 중앙집권적 체계를 강조했기에 일본과 달리 지역색이 약했다. 이 당시에도 함경도 개척을 주도한 사람들은 남쪽에서 이주한 조선 출신이기에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인식을 가졌으며, 이곳 사람들은 국경인의 난에서 국경인은 전라도 출신인데, 함경도 사람이 진압하였음을 강조했다. 심지어 "관북(關北)은 인문(人文)의 열림이 다른 지방보다 뒤처지지만 풍기가 질직(質直)하고 후중(厚重)하기 때문에 성취하는 경지에 이르면 정고(貞固)하고 독실(篤實)함이 우뚝 볼 만하니 다른 지방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라며 안동 김씨 가문의 영의정을 지낸 김병학이 함경도 출신이라도 유교적 소양을 갖추면 호평을 하기도 했다.

택리지에서 함흥 이북으로는 설명이 거의 없다. 태조가 서북 사람들을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는 기록, 세종 시절에 6진을 개척하였다는 기록, 함흥 이북 지역의 한두 개 정도의 성씨들을 제외하고는 정말로 없다. 조금 더 설명을 부연하자면 택리지에서 각 지역을 설명할 때, 각 도에 속한 지금의 우리로 치자면 광역시나 시나 군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인 부나 목, 군, 현에 대한 개괄적인 위치나 이름은 모두 언급한다. 물론 대도시나 역사가 깊은 도시라면 자세한 설명이 더해진다. 그런데 함경도의 경우, 함흥과 화령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전혀 언급도 않는다. 당시에 이 지역이 얼마나 조선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예. 그나마 팔도사람들의 인심을 설명할 때 한번 더 언급한다. 함경도 사람에 대해서 '오랑캐와 마주한 탓에 사람들이 굳세고 사납다.' 라고 평가했다. 확실히 춥고 거칠고 야인들까지 많이 쳐들어오는 땅이었으니 사람들이 유순하다면 그게 더 말이 안되긴 한다. 번호(친 조선 여진족)들도 많이 살았고 혼혈이나 정착 등을 하기도 했다.

척박한 지역이었던 탓에 4군 6진 개척 이후 사민정책이 반강제적으로 시행되었는데(호패를 집에 두고 왔다고 강제이주, 길에서 싸웠다고 강제이주 등 이렇게 강제로 이주시키는 상황에서 이사를 허용할리가 없다.) 많은 반발과 탈출이 있었다. 또한 오성대감 이항복과 추사체로 알려진 김정희가 북청군으로 보내진 적이 있었을 만큼 유배지로 이용되기도 했고 유배지이자 첩첩산중의 대명사로도 유명한 개마고원의 삼수군, 갑산군이 바로 이곳에 있다.[워낙 땅도 바다도 험해서, 산길 험한거야 말할것도 없고, 바닷길도 서해나 남해에서 10년 쓰는 선박이 동북해에서는 5년만에 폐선처리가 될 정도였다. 조선도 영토 확장 욕구가 상당했지만 올라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올라가도 보이는 건 여진족뿐이라 이는 함경도 북부 개척은 증기선이 나온 후에야 본격화된다.

또한 얄개, 돌상놈같은 비하어들이 이때 나왔으며 '타박 타박 타박네야 너 어디메 울고 가니'로 시작되는 함경도 전래 민요의 배경설화도 매우 비극적이다. 실제로 양반이 적은 평안도 보다도 늦게 개척된 함경도의 특성상 명문가가 생길 여지가 없어서 근본적으로는 무당의 딸로써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신분계급상 극심한 천대로 볼 수 있다. 함경도라서 차별하기 보다는 신분이 낮은 사람을 차별하니 함경도 출신도 차별받게 되는 것이다. 단천의 연은분리법에 관한 서술 등을 보면 조정에서도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 차별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어 영역 고전시가 부문에서 '묏버들 가려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로 시작하는 기생 홍랑의 시조에 담긴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도 함경도이다. 당시 관기는 해당 관청의 영역조차 못 벗어나 '함관령'이라는 함경도의 고개까지만 갈 수 있다고 하고 일반 백성은 이사를 하기 어렵게 막아놔서 생긴 비극이었다. 다만 인터넷 상의 일설과 달리 아예 서울에 가지 못한거는 아니어서 근면하다는 '북청 물장수'의 이야기는 1800년대 초부터 있었다고 한다.

원래 평안도는 한국사 최초의 대도시 평양 및 대중 무역도시 의주가 위치해 문명을 흡수하기 좋다는 지리적 이점과 더불어 조선 말기에 과거합격자 비율이 조선 팔도 중 1위라는 사실에 비해 함경도는 평안도보다 문화적으로도 여진족의 영향에 오래 있었고 평안도보다 더 조선 왕조의 거리 밖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평안도가 그래도 함경도보다 당대 기준으로는 문화적으로 앞서나간 지역일 거 같지만 이런 생각과 달리 구한말에는 의외로 인구대비 양반의 수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많았다. 다만 이들을 사대부로 인정하기는 싫었는지 택리지에서는 함경도에는 사대부가 없다고 깠다. 이 서술은 택리지가 별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18세기부터 면적이 훨씬 적은 황해도의 인구를 추월했다. 북어 같은 지역 특산물을 이때부터 개발하기 시작하고, 상업과 무역도 조금씩 발달하였다. 19세기부터야 인구가 제대로 증가하기 시작해 20세기 초반에는 충청도의 인구에 육박하게 되었다.

근현대[편집]

조선시대 때 차별 당한 북한 지역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개화기, 일제강점기에 더 적극적이었다. 당시 북한 지역이 지리적 조건이 좋았기 때문에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 영·정조 때부터 조정은 전국적인 정치적 지역 차별을 없애는데 관심이 있었고, 구한말부터 조정에서는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이용익과 같은 인사를 총애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백두산이 중시되는 등의 움직임이 있자 아예 함경도민은 자신들은 '조선의 뿌리'라고 여기고자 하는 경우가 있었다. 윤동주 같은 인물은 뿌리가 함경도라는 이유로 자신을 '조선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함경도 주민들에게 이민족의 후손이라는 의심을 받던 재가승이라는 함경북도 최북단의 집단도 갑오개혁 때 이미 차별이 없어졌다는 언급이 있다.

개화기 당시 이곳에서는 주로 '자강 운동'이 벌어졌고 근대식 교육 및 산업의 발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원산, 흥남, 청진의 발전이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무산군의 철광과 장진호, 부전호 수력발전소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덕분에 이 당시 함경도를 포함한 북한 지역은 '동양의 덴마크'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생활 수준이 남부 지방보다 높았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일제의 한반도 병참기지화에 필요한 인프라 구축을 의미할 뿐 식민지 피지배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함경도민의 강한 자립심은 '북청 물장수'라는 말로도 알려져 있다. 아직 서울 시내에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은 시절에는 일일이 물동이를 지고 떠서 날라야 했는데, 이 일을 맡은 사람들이 대개 북청 출신이라는 점에 기인했다. 함경도에 없는 것 3가지는 노복(奴僕, 머슴), 기생, 거지라는 말이 있었다. 광복 전의 기행문에 묘사된 바로는 함경도 일대의 장터는 거의 대부분이 여성이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장마당 상인들 중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달한다고 한다. 다만 이건 과거와 무관하게 북한 당국이 남성에 대해 각종 정치적 제약으로 장사를 방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런 현상이 딱히 없던 황해도나 북한령 강원도를 포함한 북한 전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평균 신장 역시 1930년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수준(함남 166.2cm, 함북 166.8cm)이었다. 김연옥의 "기후학개론"에 따르면, 중국의 경우는 가장 큰 허베이성이 165.9cm, 가장 작은 후난성이 159.5cm, 2번째 단신 광동성이 159.7cm , 몽골계 칼카스 및 부리야트는 각각 165.4cm 와 164cm, 퉁구스계 만주족, 오르촌족, 다후르 족은 각각 164.2cm , 160.8cm , 162.6cm이었으며 한국은 평균 162~4cm, 일본은 가장 큰 지역이 161.3cm(간사이)이었다. 당시 한국 최단은 161.7cm의 충청남도와 전라북도.그 당시 한국의 지역별 평균신장 링크 프로레슬러 역도산(김신락)도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이다. 태어난 곳이 함경도인 배우 주현도 174cm으로 160cm 중반이 많은 그 나이대 남성에 비하면 꽤 크다.

80년이 흐른 남한의 남성 평균 신장이 174cm, 일본의 남성 평균 신장이 170.7cm, 중국 화북, 만주 일대의 남성 평균 신장이 173~174cm임을 감안(동북 지방은 한국인과 비슷하지만 남부지방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평균키와 비슷하며, 전체적인 평균키는 일본과 비슷하거나 미세하게 작다). 북한이 의식주로 제대로 해결 못하는 극단적으로 가난한 나라만 아니였다면(1990년대의 남한 수준만 되었더라도) 북한 남성의 평균 신장은 못해도 174cm는 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평균 162cm 전후로 집계된 한반도의 남부 지역이 경제성장으로 현재 평균키가 173~4cm이 되었으니 단순 계산으로만 따져도 주민들을 배부르게 먹일 경우 함경북도 지역의 평균키는 대략 177~8cm가량 될 수 있었다. 물론 다 큰 건 아니고 아리랑으로 유명한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임에도 키가 작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자 함경도 출신 군 장성들이 대거 월남하였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지만 국가재건최고회의 및 군 수뇌부에 발생한 파벌싸움에서 '알래스카 토벌작전'에 의해 군복을 벗게 된다. 당시 '알래스카'가 군내에서 함경도 출신 인사를 가리키는 암호명이었다. [2]

지리 및 자연환경[편집]

동북지역의 면적은 약 52,000㎢ 정도로 한반도 전체 1/4, 대한민국 실효지배 면적기준 1/2의 크기를 자랑하는 면적을 가지고 있다. 팔도 중에서 가장 넓고 국가로 따지면 네덜란드나 대만보다도 크고, 코스타리카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면적이 비슷하다. 내륙지역은 개마고원을 필두로 한 산지가 많고 대다수의 인구가 밀집한 평야는 주로 동해안에 있다. 이러한 지형상 강원도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희박한 지역이다. 남쪽 끝인 안변군과 북쪽 끝인 나진시 사이의 거리는 600km에 달하는데 이는 부산광역시 - 평양시 간 거리보다 길다.

극한지(極寒地)로 알려진 평안북도(자강도) 중강진이 근처에 있다. 6.25 전쟁 당시 미합중국 해병대가 한파로 고전한 장진호 전투의 무대 장진군도 이곳에 있다. 참고로 함흥시 이북 한정이지만 대체로 여름이 시원한 지방이다. 물론 가장 추운 곳은 백두산 일대로, 천지를 포함한 정상 부근은 툰드라 기후(ET)의 조건에 부합한다. 개마고원은 물론이고, 청진시, 성진시 등의 해안 지역도 여름 기온이 낮은데 북한한류(寒流)의 영향 때문이다. 동해안 연안은 바다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생각하는 것처럼 춥지는 않다.

전근대사회 시절에는 함경도 남쪽의 함흥평야 일대를 제외한 지역은 강수량이 적고 기온이 낮아 추운 탓에 농업의 발달이 어려워서 척박한 고장으로 여겨졌었다. 그나마 비옥하다는 기록이 있는 동옥저함흥평야 일대에 있다. 옥수수감자는 조선 후기 때야 들어온다. 개마고원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함경도 해안지역도 강수량이 적은데다 여름에도 북한한류의 영향으로 흐리고 안개 끼는 날이 많아 냉해를 자주 입어 상대적으로 온난한데도 벼농사를 짓기가 힘들다. 물론 이제는 농업 기술이 발달해서 예전에 비해서 농업 발전이 가능한 고장이 되었다. [8] 지리적 환경 때문에 쌀보다는 주로 콩, 옥수수, 밀, 감자를 심는다. 개마고원 일대의 목초지에서는 목축이 발달해서 양, 소, 염소들을 많이 키우고 있다.

또한 이런 험악한 지리 환경에다 외적을 방비하는 최전방이란 특성 때문에 고려-조선 내내 함경도에 주둔한 육군은 병사 1명이 다른 도의 병사 5~6명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을정도로 고려군/조선군 중 정예부대로 꼽혔다. 이성계가 이곳을 기반으로 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새 왕조를 열었다. 이순신 장군이 젊은 시절 이곳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활약했다.

주요 지역[편집]

함경북도[편집]

함경북도(咸鏡北道)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동부에 있는 도이다. 함경북도청 소재지는 청진시이다. 북동부는 두만강을 경계로 러시아, 북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과 국경을 이루고, 동쪽은 동해와 접한다. 남동쪽에는 동해에 접해 있고, 북동쪽은 두만강을 국경으로 러시아의 연해지방과, 서쪽은 함경남도량강도와 접하고, 북쪽은 두만강을 국경으로 중국의 지린성과 마주한다. 개마고원, 백두산지괴, 두만지괴, 길주·명천 지괴의 3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해안에 접한 지역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두만강이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중·러와의 3각지대가 되고 있다.

함경남도[편집]

함경남도(咸鏡南道)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동부에 있는 도이다. 함경남도청 소재지는함흥시이다. 본래의 면적은 31,977.49km2로 한반도에서 가장 넓었으나, 1946년 ~ 1954년 사이에 상당 지역이 자강도, 량강도, 강원도에 편입되면서 지금과 같이 영역이 줄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함경도〉, 《위키백과》
  2. 함경도〉,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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