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함경도(咸鏡道)란 조선 시대의 행정 구역이다. 철령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관북지방(關北地方)이라고도 한다. 1896년 함경북도와 함경남도로 분할되었다.[1]
목차
개요
함경도는 한반도 동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한 행정구역 상 함경남도, 함경북도, 량강도의 대부분, 강원도의 일부, 자강도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북 5도상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에 해당한다. 면적은 52,322.49㎢에 달한다. 서쪽으로는 평안도(관서)와 닿으며, 북쪽으로는 중국, 러시아와의 국경을 대고 있다. 남쪽으로는 강원도에 닿는데,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면 영동 지방, 추가령을 넘어가면 영서 지방에 닿는다. 주요 도시로는 함흥시, 성진시(북한 치하 김책시), 청진시, 라선시가 있으며, 모두 동해안에 위치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중 최대 도시는 함흥시이다.
함경도를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하면 마천령산맥을 기준으로 그 이북을 관북, 이 이남을 관남이라 칭하기도 한다. 북한에서도 북한이 펴낸 조선향토대백과를 보면 전통 음식을 언급할 때 '함경도지방'이 아우르는 영역을 묘사하며 한국식의 함경도를 언급하는 사례가 있다. # 다만 북한 내부에서는 '함경도'를 자신들의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만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량강도와 다르게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문서는 편의상 조선 팔도의 함경도에 가까운 지역을 소개한다. 한국령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경계는 마천령산맥이다.[2]
명칭 변천
원래부터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다. 고려 초에는 화주(영흥군) 이남까지만 영토로 편입시켰고, 그 북쪽 지역은 여진족 등의 북방 민족이 차지했다. 고려-몽골 전쟁으로 철령 이북을 상실하여 전부 원나라가 차지했다가, 공민왕 때에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면서 길주까지 회복하였고, 이후 조선 초에 6진 등 북방 개척으로 두만강까지 회복했다. 명칭의 변천은 아래와 같다.
- 동북면(東北面), 태조 원년 (1392년 ~ 1413년)
- 영길도(永吉道), 태종 13년(1413년 ~ 1416년)
- 함길도(咸吉道), 태종 16년(1416년 ~ 1468년)
- 함경도(咸鏡道), 예종 원년(1468년 ~ 1469년)
- 영안도(永安道), 성종 1년(1469년 ~ 1509년)
- 함경도(咸鏡道), 중종 4년(1509년 ~ 현재)[1]
역사
고려 이전
함경도는 원삼국시대 때 옥저의 영역이었다. 뒷날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고, 신라 진흥왕이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 이원군 마운령까지 진출했다가 지금의 강원도에 속하는 안변군 일대의 이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다시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남북국시대에는 대체적으로 안변군을 포함한 남부 지역(현재의 강원도(북한)의 대부분)은 통일신라, 그 외에는 발해의 영역이었다. 현재 사학계는 함흥 혹은 북청에 남경남해부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발해 관련 유물, 유적들로는 함경북도 명천군의 개심사, 청진시 동쪽의 부거리 일대의 유적들, 함경남도 금호지구의 오매리 일대의 유적들이 있다. 윤관의 동북 9성이 있던 땅. 고려시대에는 동계에 속했으며, 함경도 출신 병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고 한다. 고려 말기,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된 이 땅에 전주 이씨 일가가 자리잡았고 고향으로 삼은 땅이 바로 영흥, 화주의 동북면(함경도)이었다. 한때 이성계의 영향력이 목단강에 닿았을 정도며 1380년 정도엔 이미 함경도 전체가 이성계의 독립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쌍성총관부의 위치는 현재의 동북3성 중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쌍성구 설도 있다.
조선
조선 왕조 극초기에는 이성계의 연고지였던 만큼 풍패지향, 흥왕지지(興王之地)로 일컬어졌으나 조사의의 난(1402년)과 이징옥의 난(1453년), 이시애의 난(1467년)이 연달아 일어난 뒤 반역향으로 찍혔다. 이런 도중에 조종께서 지키시던 땅이라는 명목으로 세종 때까지 두만강 하류의 영토를 확장하면서 외부의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힘썼다. 그러나 통일신라 이후 신라계 명문세가들이 하삼도와 경기, 강원 남부 등 신라 내지에 자리잡게 됨에 따라 함흥 이북으로는 공민왕 대 가서야 개척된 함경도에 비해 전통적인 유력가문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선이 농본사회였던지라 기후가 척박한 함경도는 군사기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려웠다. 17세기까지는 팔도 중 가장 인구가 적은 곳이었으니 이곳을 완벽히 다른 인구가 많은 지방과 같은 관심을 기울여도 역차별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내내 함경도가 가장 소외된 것은 어찌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조선 초기에는 토관 제도 등을 실시하여 토착 유력 인사를 흡수하며 이곳 사람들을 회유하였다
근현대
조선시대 차별당한 북한 지역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개화기, 일제강점기에 더 적극적이었다. 당시 북한 지역이 지리적 조건이 좋았기 때문에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 영·정조 때부터 조정은 전국적인 정치적 지역 차별을 없애는데 관심이 있었고, 구한말부터 조정에서는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이용익과 같은 인사를 총애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백두산이 중시되는 등의 움직임이 있자 아예 함경도민은 자신들은 '조선의 뿌리'라고 여기고자 하는 경우가 있었다. 윤동주 같은 인물은 뿌리가 함경도라는 이유로 자신을 '조선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함경도 주민들에게 이민족의 후손이라는 의심을 받던 재가승이라는 함경북도 최북단의 집단도 갑오개혁 때 이미 차별이 없어졌다는 언급이 있다. 해방 이후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자 함경도 출신 군 장성들이 대거 월남하였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 하지만 국가 재건최고회의 및 군 수뇌부에 발생한 파벌싸움에서 '알래스카 토벌작전'에 의해 군복을 벗게 된다. 당시 '알래스카'가 군내에서 함경도 출신 인사를 가리키는 암호명이었다.
북한 치하의 함경도
함경도는 러시아가 연해주를 먹으면서 독립운동의 기지가 되기도 했고, 간도 논쟁도 다 여기서 온 것이다. 반면 일제가 패전할 때는 만주 작전에서 가장 먼저 점령된(청진) 곳이기도 하다. 초기 북한에서는 조만식 등의 기독교 민족주의자 세력이 강했던 평안도에 비해 함흥 등 해안지역의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래에도 나오는 오기섭으로 이들은 김일성에게 쉽게 따르지 않고 김일성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남로당 숙청, 8월 종파사건 등을 거치면서 대부분 숙청되었다. 2016년에는 기록적인 폭우로 두만강 연변에는 그야말로 헬게이트가 열렸다. 만주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옛땅 영역과 간도, 연해주를 맞닿아 있어 통일 후엔 국경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지역이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자연적인 국경 역할을 하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가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현재의 북한의 국경을 거의 그대로 승계할 가능성이 높다. 풍계리 핵실험장으로 인해 방사능 오염과 지하수 오염이 심각하다. 기본적으로 길주군 출신은 피폭검사를 해야 할 정도이다. 2022년 현재까지도 함경도는 정치범수용소가 제일 많은 곳이다. 함경도에 위치한 백두산과 관련해 백두산 위인이라고 김씨 일가를 선전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평안도(정확히는 평양시)보다 김씨 일가에 대한 반감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이다.
자연과 지리
함경도의 면적은 약 52,000㎢ 정도로 [[한반도] 전체 1/4, 대한민국 실효지배 면적기준 1/2의 크기를 자랑하는 면적을 가지고 있다. 팔도 중에서 가장 넓고 국가로 따지면 네덜란드나 대만보다도 크고, 코스타리카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면적이 비슷하다. 내륙지역은 개마고원을 필두로 한 산지가 많고 대다수의 인구가 밀집한 평야는 주로 동해안에 있다. 이러한 지형상 강원도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희박한 지역이다. 남쪽 끝인 안변군과 북쪽 끝인 나진시 사이의 거리는 600km에 달하는데 이는 부산광역시 - 평양시 간 거리보다 길다. 극한지(極寒地)로 알려진 평안북도(자강도) 중강진이 근처에 있다. 6.25 전쟁 당시 미합중국 해병대가 한파로 고전한 장진호 전투의 무대 장진군도 이곳에 있다. 참고로 함흥시 이북 한정이지만 대체로 여름이 시원한 지방이다. 물론 가장 추운 곳은 백두산 일대로, 천지를 포함한 정상 부근은 툰드라 기후(ET)의 조건에 부합한다. 개마고원은 물론이고, 청진시, 성진시 등의 해안 지역도 여름 기온이 낮은데 북한한류(寒流)의 영향 때문이다. 동해안 연안은 바다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생각하는 것처럼 춥지는 않다.
전근대사회 시절에는 함경도 남쪽의 함흥평야 일대를 제외한 지역은 강수량이 적고 기온이 낮아 추운 탓에 농업의 발달이 어려워서 척박한 고장으로 여겨졌었다. 그나마 땅이 비옥하다는 기록이 있는 동옥저는 함흥평야 일대에 있다. 옥수수나 감자는 조선 후기때야 들어온다. 개마고원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함경도 해안 지역도 강수량이 적은데다 여름에도 북한한류의 영향으로 흐리고 안개끼는 날이 많아 냉해를 자주 입어 상대적으로 온난한데도 벼농사를 짓기가 힘들다. 물론 이제는 농업 기술이 발달해서 예전에 비해서 농업 발전이 가능한 고장이 되었다. 지리적 환경 때문에 쌀보다는 주로 콩, 옥수수, 밀, 감자를 심는다. 개마고원 일대의 목초지에서는 목축이 발달해서 양, 소, 염소들을 많이 키우고 있다. 또한 이런 험악한 지리 환경에다 외적을 방비하는 최전방이란 특성 때문에 고려-조선 내내 함경도에 주둔한 육군은 병사 1명이 다른 도의 병사 5~6명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을정도로 고려군 조선군 중 정예부대로 꼽혔다. 이성계가 이곳을 기반으로 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새 왕조를 열었다. 이순신 장군이 젊은 시절 이곳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활약했다.
인문환경
함경도 방언은 정평군 이북은 동북 방언을 쓰고 그 이남은 영동 방언권에 속한다. 함경도의 도민성은 성격이 억센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북한에 있는 지역에 비해 직설화법을 선호하고, 여성은 생활력을 강조한다. 이곳의 전통 음식은 북쪽의 음식이 싱겁다는 관념에 비해 맵짜다. 그나마 예전부터 알려진 음식이던 가자미식해나 함흥냉면의 원형인 회국수는 실제로 짜고 맵다. 평안도가 실향민도 많다보니 이곳의 사투리, 음식 등이 한반도 북부를 대표하는 경향도 있었으나 함경도는 이곳과 다른 면이 있다. 동북 방언도 서북 방언과 차이가 심한 방언으로, 특히 성조의 사용에서 차이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후술할 탈북민의 영향으로 이곳의 문화도 한국에 소개되고 있다. 가령 탈북민이 운영하는 북한 식당의 경우 싱거운 음식이 많은 실향민의 음식보다 매운 음식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함경도 방언으로도 불리는 동북 방언은 지역별로 어미의 차이가 있다. 슴다체와 비슷한 말투를 쓰는 북부 지역의 말투와, 과거 함경도 말투로 알려진 '했지비' 같은 이미지의 남부 지역의 말투로 구분된다. 이 '북부 지역'을 어떻게 가를지는 학자마다 차이가 나서 한국에서는 육진 방언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으나 북한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함경북도 사투리'와 나머지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북한 치하에서 언급되는 분위기는 경상도에 비유되는 경우가 많다. 사투리나 급한 성격에 경상도와 비슷한 속설이 있다. 전통 민요의 경우 '동부민요'로 아예 강원도나 경상도와 같이 묶이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인 주장이나 북한에서 양강도로 편입된 곳 출신은 옆의 자강도로 건너가도 평안도 사투리인 말투가 너무 부드럽고 편안하다고 할 지경이다. 솔직함을 중시하여 양강도 출신인데 '우리 동네는 날강도라 불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지가 쫓아와도 먹을 것을 준다면서 인심이 좋다고 주장한다. 지역드립으로 비하적인 주장도 좀 있으나 이에 관한 주장은 이 문단을 참조. 물론 속설이기에 사람마다 성격이 다양하다. 경상도와 100% 일치하지는 않아 함경도 유래인 부산의 밀면은 원래보다 달게 변했다고 한다. 탈북민이 많은 북쪽이 아니라 함흥 등지의 남쪽은 홍어를 국수에 고명으로 넣는다는 주장이 있다. 지금도 회국수의 원형은 홍어나 가오리를 쓰는 것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조선족, 고려인, 탈북민 과반수가 함경도 계열이다. 조선족은 일부 다른 지방 출신이 섞여 있으나 고려인이나 탈북민은 압도적으로 함경도 출신 비중이 높다. 강을 건너기도 쉽고 중국과 러시아와의 교통이 편리하다는 지리적인 이유가 크다. 특히 탈북민의 분포가 지리적인 영향이 커서 북한 인구의 2%도 안되는 육진으로 개척된 지역과 그 인근 출신이 전체 한국 정착 탈북민의 과반수를 넘은 적도 있다. 함경도 등 이북출신의 영향으로, 고려인 요리인 국시 또한 밀면과 흡사하게 발전했으며, 고려인 식당을 가면 순대 등 우리에게 친숙한 메뉴가 제법 보인다. 혼란한 해방정국과 6.25 전쟁을 거치며 많은 사람들이 월남을 하여 실향민이 되기도 하였다.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은 고향과 가까운 영동지역이나 경상남도 거제, 마산부근이나 부산광역시 등 근방 대도시 등지에 정착했다. 전쟁 당시 북한지역이던 함경도는 한국전쟁 당시 다시 후퇴할 무렵 미군의 함선을 써 피난했다. 강원도 속초시는 함경도 실향민들이 몰려와 속초 아바이마을을 형성하였다.
현대 한국에도 알려진 함경도와 관련된 인물이나 문화 요소로는 인물에는 윤동주, 이순재, 주현,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모가 가장 유명하다. 가수 강산에는 거제 출신이나 함경도 가계에 애정을 드러내는 '명태'와 같은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실 윤동주는 엄연히 따지면 북간도 출신이지만 본적이 함경북도 청진이고 구어로 함경도 사투리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영화 동주에는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윤동주가 등장한다. 배우 이순재도 서울에서 오래 살았지만 문서를 보면 스스로의 고향을 함경북도 회령으로 여기며 심지어 회령 출신 탈북민을 두고 고향이 같다고 한 적 있다. 문화 요소로는 앞서 언급한 음식이나 뒤에 언급할 홍랑이나 아리랑을 지은 나운규도 유명하지만 명태, 북청사자놀음, 북청 물장수, 풍산개가 유명하다. 국어 교과서에도 등장했던 인물로 최인훈, 이용악도 있다. 남남북녀와 같은 맥락으로 회령이나 함흥이 미녀가 많다는 주장도 있었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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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