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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2일 (화) 14:36 판
게르만족'(독일어: Germanen, 영어: Germanic peoples)은 그리스로마 문화권 저자들에게 최초로 언급된 북유럽 민족 집단들의 한 분류이다. BC 8세기에서 AD 세기에 활동했던 민족이다. 인도유럽어족 중에 게르만어파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총칭하고, 우리가 흔히 아는 독일어권과 영어권 백인들의 뿌리가 된 민족이다.
게르만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게르마니아라는 지명은 게르마니인의 땅이라는 뜻이지만, 게르만의 어원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타키투스의 관련 기록에 따르면 그는 게르마니아(게르만)라는 명칭이 꽤 새로운 호칭이라고 말했다. 그는 게르만이 라인강 서쪽의 퉁그리족이라는 부족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점차 의미가 확장되어 그쪽 방면의 민족집단 전체를 일컫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확실하지는 않지만 라인강 동쪽의 어느 부족에게서 게르만이라는 명칭이 유래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목차
개념의 정립
오늘날의 미국 백인, 영국인, 호주인, 뉴질랜드인, 캐나다인, 덴마크인,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아이슬란드인, 네덜란드인,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일부 스위스인 등이 해당된다.
지금은 게르만족들이 역사를 거치며 섞여서 다양한 민족으로 호칭되고 있기 때문에 현대에서 '게르만'이라고 하면 주로 4세기의 민족대이동 이전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게르마니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게르만 민족을 뜻하게 되었다.
특징
흔히 게르만족 하면 금발을 떠올린다. 하지만 모든 게르만족이 금발이란 생각은 편견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에서 게르만족의 나라 하면 1순위로 먼저 떠올리는 독일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같은 지역의 게르만계 국가들은 금발보다는 갈색 머리나 흑발도 많이 보이고 남서유럽의 라틴족, 동유럽의 슬라브족 같은 다른 유럽 민족들에게서도 금발은 많이 나타나고 금발 외에도 적발 같은 다양한 색깔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즉 게르만족이라는 것이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동일한 씨족 집단이 아니기에 모든 게르만인이 금발이라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르만족은 농경을 중시하는 정주민족이다. 다만 기후적, 토양적 요인 탓에 목축과 사냥의 비중이 로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북해로 대표되는 바다를 낀 민족들이 많았고 당연히 해산물 섭취 역시 많았다. 주로 청어와 대구를 많이 먹었으며, 이외에는 굴이나 홍합같은 조개류와 새우, 바닷가재, 게 등 갑각류도 먹어왔다. 그러나 다른 해양민족들과 달리 오징어 등 두족류가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졌고, 해조류도 거의 먹지 않았다. 이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영미권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미국, 영국, 호주 등지에서는 두족류와 해조류를 거의 먹지 않는다.
종교는 역사적으로는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에서 개신교가 주류였고 오스트리아, 벨기에, 독일 남부에선 천주교가 주류였다. 대표적 개신교 교파는 북유럽 일대의 루터교회와 영국의 성공회, 감리회가 있으며 이 중 영국계 개신교단들인 성공회 등은 영국의 식민지배로 인해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도 진출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도 교세가 크다. 다만 네덜란드 개신교가 19세기 후반부터 감소하고, 동독이 공산화되고, 개신교 측이 소폭 많았던 스위스의 개신교 역시 감소하면서 역사적 개신교 우위 지역은 줄어든 상태이다. 현대에는 네덜란드, 스위스에서 가톨릭 비율이 더 높다. 독일의 경우는 가톨릭과 개신교 비율이 거의 비슷비슷한 편이다.
역사
고대
독일을 영어로 Germany라 부르다 보니 현 독일 지역이 이들의 주 영역이었다는 인식이 있으나, 본래 게르만족은 전부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내려왔다. 기원전 700년 이전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남안과 유틀란드반도에서만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600년~300년 사이 스칸디나비아의 기온이 내려가자 게르만족은 대거 발트해를 남하하여 발트해 남안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후 남하를 계속하여 켈트족을 몰아내고 중부유럽을 차지하여 정주하게 된다.
기원전 120년 유틀란드 반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튜튼족) 등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남하 하면서 로마와 전쟁하게 되었다. 로마는 이들이 이탈리아로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수차례 군대를 보냈으나 전멸하고 집정관이 연이어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큰 위협을 느낀 로마는 기원전 105년 무려 12개 군단을 동원하는 총력전을 펼쳤으나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8만 명이 전사하는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악의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에 로마 시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고, 국가적 위기를 맞은 로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도하에 로마의 사회 체제를 뒤엎는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그런데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곧장 이탈리아로 진격하지 않고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를 유랑하면서 선주민들과 전투를 치르며 전력을 소모하다가 급기야는 분열되고 말았다. 한편 로마군은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직업군인화되어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다.
분열된 게르만족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이탈리아로 접근해 오자 로마군은 기원전 102년 마르세유 인근에서 테우토니족을 격퇴했고, 이어 기원전 101년 알프스산맥을 넘어오느라 약화된 킴브리족을 밀라노 인근에서 섬멸했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전멸했고 여자들과 어린이는 자결하여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 군제 개혁으로 로마군은 용병화되어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족과의 경계를 라인강에서 엘베강으로 확장하기 위해 11개 군단을 투입하여 10여 년에 걸친 대규모 게르마니아 정복 사업을 펼친다. 그러나 서기 9년에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면서 로마 제국은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게 되고 로마와 게르만족의 국경은 라인강과 도나우강으로 확정된다.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에도 게르만족과 로마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에 이르는 넓은 지대를 국경으로 마주하면서 수시로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진다. 3세기에는 게르만족의 한 부류인 고트족, 프랑크족, 알레마니족이 로마를 공격하여 로마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다. 동시에 게르만족과 로마 사이에 조심스러운 교류가 진행되기 시작되어 게르만족은 로마 사회로 조심스럽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범위는 굉장히 넓었고 그 속에 많은 부족들이 있었으므로 로마는 일부 게르만족과는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다른 일부 게르만족과는 동맹을 맺는 식의 정책을 쓰며 게르만족을 다루었다.
4세기에 들어설 무렵엔 게르만족과 로마 사이에 상당한 교류가 진척되어 용병으로 당시 이미 상당히 와해되어버린 로마의 국방제도를 메워주기도 하고, 로마 농민들이 경작을 포기한 변경지대에 대신 이주하여 그 땅을 경작하고 세금을 내기도 했다. 한편 수세기에 걸친 교류를 통해 게르만족과 로마와의 문화, 문명적 수준 차이가 점점 좁아졌다. 피터 히더의 '로마 제국과 유럽의 탄생' 중 2장 '세계화와 게르마니'에 의하면 4세기 들어서는 군사를 전담하는 귀족 종사단, 즉 초보적인 형태의 장교단이 형성되었고 그들 중에서 좀 더 뛰어난 자들이 부족/종족 전체를 이끄는 부족장/왕이 되었다. 즉 부족장/왕 입장에서 이들은 잠재적인 경쟁자였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들 중에서 본인의 위치에 도전하려는 것이 보이거나, 그런 것이 확실하지 않더라도 실력과 인망이 빼어나게 좋았던 경우 내분이 있었으며 심하게는 내전도 있었다. 로마가 이들 간의 갈등관계를 이용해서 같은 게르만 부족/종족 내 디바이드 앤 룰을 성공시킨 사례도 더러 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4세기 후반, 동방에서 훈족이 나타나자 난리가 나버렸다. 갑자기 동쪽에서 훈족이 나타나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연맹왕국이 형성하면서 게르만족 중 가장 잘나가던 동고트족을 밀어버리고 이들이 서진하면서 주변의 여타 게르만족들을 밀어버렸고,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바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다. 이로 인해 로마의 영토 각지에 게르만족들이 자리를 잡아 각자의 왕국을 세우게 된다. 대표적인 왕국들은 아래와 같다.
특히, 프랑크 왕국은 짧은 이동거리와 종교적으로 보았을 때는 클로비스가 시작한 로마 카톨릭 개종, 경제적 관점에선 대서양 근처 영토장악 후 곡창지대라는 지리적 우월함에 힘입어 주변 국가의 왕실들과 혼인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움직임이 번영의 이유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로마는 후에 이들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로마도 인력 부족한 상황이라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전사를 군에 편입시켜 계속 인력을 충원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였다. 실제로는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등의 게르만계 로마인들이 라틴계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해가며 분투하기도 했다. 애초에 게르만족은 단일 민족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며, 같은 게르만족이라도 전근대 시대에는 같은 부족이 아니면 그냥 남일 정도로 철저한 부족 사회였는데, 그 내부에서 친(親) 로마파 부족과 반(反) 로마파 부족은 서로를 원수로 여겼다.
고트족은 서로 같은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각각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으로 갈리면서 서고트족은 로마제국의 신민이 되었고, 동고트족은 훈족에게 정복당한 뒤로 뒷날 훈 제국이 붕괴된 뒤에 동고트 왕국을 세워 독립하기 전까지 그들과 함께 따라다녔다. 로마의 이탈리아반도 통일 이전에는 하나의 라틴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이후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 및 다른 문화권(이베리아반도, 발칸반도, 북아프리카 등)으로의 팽창을 통해 라틴족은 보다 더 다양한 혈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로마군의 중추를 형성했던 게르만족들은 적어도 4세기까진 대부분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으로서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던 상비군이었고, 게르만족 출신 병사들과 장교들은 전반적으로 로마에 대단한 충성을 바쳤다.
당시의 로마 제국 내의 게르만족들 중에서 귀족이거나 부유한 상인이나 지주쯤 되는 유력자의 자녀들은 로마에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볼모로 붙들려서 수도인 로마로 보내졌다. 물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에는 그곳으로 보내졌는데, 이 볼모 생활은 강제적으로 유폐된 생활이 아니었다. 오히려 볼모들은 사실상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으로 간주되었고, 이곳에서 로마식 교육을 받은 후에 로마 제국의 고관대작으로 임용되어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는 꼭 게르만족들에게만 한 정책은 아니고, 유대인이나, 켈트족, 아랍인 등의 여러 비(非) 라틴계, 비 그리스계 민족들에게 두루두루 실행된 정책이었으므로, 로마 제국의 역사에는 이 정책의 혜택을 받고 출세하여 로마에 충성한 이민족 출신자에 대한 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유대인 출신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서부터,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의 피가 반쯤 섞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시대를 잘 타서 아예 황제로 즉위하기까지 한 아랍인 장군 필리푸스 아라부스 등, 그 수가 매우 많다. 먼 훗날 서로마가 멸망한 후 동로마 시대에는 심지어 게르만족(고트족) 출신 로마 황제도 1명 나왔다.
용병이 정말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건 로마 제국의 재정이 엄청나게 취약해져 로마군 중 부족 단위로 편제되어 싸우는 단위들이 많아져 버렸기 때문이지, 게르만족 자체가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제국에 인력을 공급해주고 제국을 경모했던 게르만족이 아니었더라면, 제국의 서부 경계는 이미 3세기에 붕괴했을 것이 분명하다.
후기 로마군의 전술 변화는 게르만족이 로마군의 주력취급을 받으면서 로마인들 특유의 편제에 따른 세심한 전술적 움직임을 보이기가 어려운 게 결코 아니라, 역으로 "로마군 특유의 편제에 따른 세심한 전술적 움직임"을 게르만족이 보여줬고, 이에 대한 대응 때문에 이뤄진 것이다.
한편, 서로마 각지에 정착하고 나서도 6세기의 게르만 왕국들은 로마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상황이라 주화, 직함 등을 완전히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제국의 권위를 일정 부분 빌렸었다. 의존도가 가장 약했던, 즉 반대로 독립성이 가장 강했던 것은 반달 왕국이었는데, 동서로마와의 전투에서 여러 번 이겼으며(특히 468년의 소위 Cape Bon 전투에서 1천 척도 넘는 동서로마 합동 해군을 꺾었던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또한 지중해 건너 북아프리카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플과 가장 물리적으로 멀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이탈리아 및 달마티아의 오도아케르 정권 및 동고트 왕국은 그 반대였는데, 구 서로마의 중심지라 현지의 구 서로마인들의 영향력이 다른 곳보다 더욱 강했고, 또한 게르만 국가들 중 가장 콘스탄티노플과 물리적으로 가까웠기에 동로마 정부를 완전히 거스르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세
8세기와 11세기 사이에는 북유럽에서 온 게르만족인 노르드인(바이킹)들이 전 유럽을 휘저었다. 게르만족은 원래 북유럽에서 왔으므로 굳이 따지자면 동족간의 싸움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미 유럽 각지에 자리잡고 기독교화된 게르만족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북유럽의 게르만족은 애당초 동질성이 거의 없어진 남남이나 다름없었다.
잉글랜드에선 바이킹들이 지배시기인 데인로(Danelaw)가 시작되었다. 잉글랜드에는 바이킹 지배가 두 번 있었는데, 9세기에는 웨식스를 제외한 모든 영토가 바이킹에게 정복당하고, 11세기에는 크누트 대왕이 전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자신이 갖고 있던 덴마크, 노르웨이와 합하여 '북해제국'(North Sea Empire)을 세웠다. 이 시기 영어는 같은 게르만계 언어라는 동질성 때문에 북게르만어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오늘날에도 상당한 북게르만계 어휘가 영어에 남아있다.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롤로가 북쪽 해안에 정착해 노르망디 국을 세웠다. 이 지역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프랑스의 문화를 받아들여 프랑스화하였고, 노르만족이라 불렸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인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를 정복하는데, 노르만족까지 바이킹으로 친다면 잉글랜드는 총 3번에 걸쳐 바이킹의 침략을 받은 것이다. 노르만 족 정복자인 로베르 기스카르는 남이탈리아에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더 나아가 노르만족 기사들은 십자군 전쟁 때 안티오키아 공국에 정착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동쪽으로 간 바이킹들은 우크라이나 일대를 정복하였고, 정복자 류리크의 후손들은 키예프 공국을 세웠다. 바이킹들은 더 남하하여 동로마 제국에서 바랑인 친위대로 복무하기도 하였다. 노르망디 공국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에는 앵글로색슨족 출신의 바랑인 친위대원도 늘어났다.
근현대
옛날에는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있었지만, 후대에 프랑크 왕국 등 통일 국가가 생기면서 경계가 모호해지거나, 먼 타지에 왕국을 따로 차린 경우 현지인들과 동화되어 사라졌다. 현지인들에게 역관광당하여 멸망하거나, 점령지에서 철수한 나라도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이킹들이 오늘날의 캐나다의 뉴펀들랜드래브라도 지역을 침공하여 세운 식민지인빈란드와 노르망디 공국의 잉글랜드 침공 직전에 잉글랜드를 공격한 노르웨이가 대표적이다]. 그래도 프랑크 왕국과 독일 왕국에선 부족 공국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언어나 지명 측면에서 현재까지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는 게르만 부족들은 아래를 들 수 있다.
- 노르드인 - 북게르만어군 언어권
- 앵글로색슨족 - 영어권
- 프리시 - 프리지아어권
- 작센 - 저지 독일어권
- 독일(니더작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 프랑크족 - 프랑크어군 언어권
- 알레만니 - 알레만어권
- 바이에른 - 오스트로바이에른어권
기타
바이킹
바이킹은 노르드족(북유럽에 살았던 게르만족)이며, 게르만족 일부이다. 게르만족(AD 1세기 이전 ~ BC 8세기 활동)은 바이킹(BC 8~11세기)보다 훨씬 먼저 등장했다. 게르만족은 서유럽과 동유럽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바이킹은 게르만족의 하나일 뿐으로 모든 게르만족이 북유럽에서 남하했거나 바이킹인 것은 아니다.
- 데인족: 바이킹으로 이름을 날린 민족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 지역에서 건너와 '이교도 대군세' 시기에 영국을 침략하여 거의 앵글로색슨 7왕국 전부를 정복할뻔 하였으나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웨식스 왕국의 알프레드 대왕이 이들을 무찔러 앵글로색슨의 왕국을 존속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침략과 정복과정에서 데인족의 피가 영국인의 혈통에 많이 섞이게 됐고, 이 때문에 영국도 바이킹의 후손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데인족이 앵글로색슨을 몰살 시키고 '혈통교체'를 이룬 수준은 아니고 그저 지배층만 바뀐 수준이었으니 적절치 못한 주장이다. 이것은 루스인도 마찬가지이다.
- 노르만족 : 바이킹의 후손이지만 이민족과의 결합으로 인해 바이킹과는 거리가 멀어진 민족이다. 프랑스 지역에 노르망디 왕조를 세우고 정복왕 윌리엄 시대에 영국을 정복한 바이킹으로 유명하다. 노르만족은 살리카법을 준수하고 북게르만족 특유의 선박술도 구사하며 게르만족 문화를 잘 보존했으나 언어 자체는 로망스화되어버리고 말았다. 즉 북부 프랑스어계통의 오일어인 노르만어(Norman language)를 모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 슬라브화 이전의 루스인 : 게르만족이 아닌 동슬라브인의 경우에도 혈통이 섞여있다. 루스인 자체가 게르만 부족 중 하나를 가르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게르만계였던 류리크 왕조의 혈통이 근대의 로마노프 왕조 시작 전까지 이어졌던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자신들의 조상격인 국가의 지배층이 게르만계였다는걸 부정하고 슬라브계 혈통을 중요시 하는 경우가 많았고, 현재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역사학계에서 게르만 혈통을 부정하는 학자가 없진않다.
앵글로색슨족, 프랑크족
- 앵글로색슨족 : 영국인의 주류 민족으로 브리튼으로 이주한 서게르만족이다.
- 프랑크족 :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경우도 현재는 로망스어계열 언어를 사용하며 로마의 문물을 상당수 받아들여 라틴계 국가로 분류되지만 왕족이나 영토 일드프랑스나 롬바르디아와 같은 북부는 프랑크족이나 다른 게르만족의 영향을 받았다.
고트족
고트족 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경우에도 비슷하지만 이들은 피레네 이남에서 팽창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궁지에 몰렸으며 왕족을 포함한 고트족들은 거의 사멸하다시피 하였는데 스페인 왕조에서는 아스투리아스로 인해 고트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후손이 국토의 일부라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와는 달리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시망한 수준이라서 사실상 왕조의 상징성에 가까운 주장이다. 피레네 이남지역이 아프리카라는 등의 주장이 과거에 있었지만 라틴계가 다수라서 아프리카는 아니다. 문화도 레콩키스타로 국토를 회복하였으나 점령기동안 대부분의 게르만 문화가 파괴되었으며 라틴과 이슬람 문화가 섞인 문화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에 가면 모스크를 성당으로 개조하거나 하는 문화재 등을 많이 볼 수 있다.
독일인
독일인은 게르만족의 일부일 뿐이지, 독일인이 게르만족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German'이라는 영어 표기 때문에 게르만족을 '독일 민족'과 같은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어로는 독일인(German)과 구분하여 게르만 족을 Germanic이라 부른다. 물론 이탈리아어와 라틴어에서 독일을 Germania라고 부르니 Germany라는 영어 표현이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독일어와 프랑스어에서 독일을 부르는 명칭인 Deutschland와 Allemagne은 영어 이름 Germany보다는 게르만과 더 명확하게 구분된다.
영어 표현과는 별개로 "게르만족은 원래 현대의 독일 지역에서 살았으니 독일이 게르만족을 대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위에서 서술했듯 원래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틀란트 반도에서 기원하였다. 굳이 출신 지역으로 따지자면 북유럽의 노르드인들이 원조 게르만족에 가깝다는 것이다. 게다가 독일인들의 경우 게르만족 혈통만 있는 게 아니다. 게르만족 남하 이전에는 켈트족과 이란계 민족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로마제국이 팽창함에 따라 현 독일 중남부 지역은 로마의 라틴족도 많이 진출하였다. 또한 동방식민운동으로 원래 서슬라브족, 발트족이 살던 엘베강 동쪽이 독일화됨에 따라 서슬라브족이나 발트족 혈통도 있다.
사실 독일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로마군단에 맞선 토이부르크 숲의 게르만족에서 찾게 된 것은 근대부터의 일이고, 근세까지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란 명칭에서처럼 로마를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프로이센이 폭풍성장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후예인 오스트리아 제국을 배제한 독일통일을 달성하고 적극적인 독일민족주의를 밀게 되면서 정체성이 구체화된 것이다.
근대 민족주의 열풍으로 민족 정체성이 강화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지역별 차이가 있을지언정 명백히 존재했다. 유럽의 경우 중세 시대에는 민족 정체성 위에 기독교도라는 더 상위의 정체성이 존재했고 또 같은 민족 내에서도 부족, 지역간의 정체성이 강하게 있었지만, 민족적, 언어적 정체성도 분명히 존재했다. 중세 시절부터 독일인들 사이에서 그들만의 나름대로 분명한 민족 정체성이 있었다는 점은 역사학계에서도 상당부분 인정된다. 9세기 프랑크 왕국이 분열한 후 프랑스는 프랑크 왕국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지만, 독일인들은 카롤링거 가문의 대가 끊기자마자 918년 국명을 동프랑크 왕국에서 독일 왕국(Regnum Teutonicum, Kingdom of Germany)으로 바꾸었다. 이후 독일 왕국이 확장되는 형식으로 신성로마제국이 들어섰으나, 근본적으로 게르만족 고유의 전통과 관습을 중시했다. 몇몇 게르만의 풍습을 로마에 맞게 바꾸기도 했지만 주요한 관습들은 게르만족의 전통을 따랐다. 살리카법은 물론이거니와 황제 선출 방식 또한 고대 로마 제국과 달리 게르만족이 부족 사회 시절 족장을 뽑던 방식을 계승 발전시켜 신성 로마 제국만의 선제후 제도를 완성했다. 제국의 근간이 되는 군사 제도 역시 고대 로마 제국의 레기온과는 완전히 다른 게르만족 부족 전통에서 발전된 종사제에 기반한 봉건 질서에 따른 군사 제도를 확립했다.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독일 왕국은 여전히 존재하며 같은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도 독일이 이탈리아, 보헤미아와 명백히 다르다는 것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말이나 제도에서도 크게 구체화되어 있는 부분이다. 신성 로마 제국은 표면적으로 세계 제국을 표방했고, 독일 말고도 이탈리아 왕국, 보헤미아 왕국 등을 제후국으로 두었지만, 이탈리아인 등은 사실상 이등 국민에 해당했고, 독일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일등 국민이었다. 일단 황제는 독일 귀족만 될 수 있었고, 황제를 뽑는 선제후 역시 독일 귀족들만 될 수 있었다. 처음에 황제를 뽑던 선제후는 독일 5대 부족 공국 공작들이었는데, 나중에는 독일의 공국들이 쪼개졌지만 처음에 황제를 뽑았던 5대 부족 공국은 사실상 거의 독일의 전 부족을 망라했다. 반면 이탈리아인은 신성 로마 제국의 신민임에도 황제 선출에 전혀 관여할 수 없었고 독일에서 파견된 제후나 그 대리인들이 간섭하지 않고 이탈리아인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주면 다행인 처지였다. 보헤미아인들은 나중에 선제후 투표권을 얻었지만, 보헤미아 왕국이 독일 왕국 아래 제후국이 되는 형태였다. 즉 보헤미아왕은 독일왕의 봉신이었고, 보헤미아왕은 독일의 다른 공작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제후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철저히 독일인들에 의해 굴러갔고, 15세기에는 여전히 이탈리아나 다른 민족들이 제국에 상당히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공식 국명을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으로 확정했다.
참고자료
- 〈게르만족〉,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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