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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브런즈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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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브런즈윅주 위치

뉴브런즈윅주(영어: New Brunswick njuː bɹʌnz.wɪk, 프랑스어: Nouveau-Brunswick nu.vo.bʁœn.swik)는 캐나다 동부 대서양에 면한 주이다.[1]

개요[편집]

뉴브런즈윅주의 면적은 72,908㎢이며 인구는 812,061명 (2022년)이다. 주도는 프레더릭턴(Fredericton)이다. 서쪽으로 미국메인주, 북쪽으로 퀘벡주, 동쪽으로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노바스코샤주를 경계로 두고있다.

영국계 백인과 프랑스계 아카디아인이 공존해왔던 역사로 인해 영어와 프랑스어가 모두 주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게 두 개 모두를 공용어로 지정한 주는 뉴브런즈윅이 유일하다.

뉴브런즈윅주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지역 내에서는 프랑스어를 일정 수준으로 구사하지 못하면 어느 정도 불이익이 존재한다는 외지인들의 하소연이 어느 정도 있다. 특히 영어만 구사하는 영국계 캐나다인이나 이민자들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아는 아카디안 프랑스계 캐나다인에 비해 불리한 측면이 있다. 일부 사기업에서는 프랑스어로만 업무를 처리하는 사례도 있다.

뉴브런즈윅주에 있는 연방 정부 기관, 주 정부 기관이나 공기업은 물론이고 이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사기업들 역시 영어와 프랑스어 서비스를 기본으로 하고 있고,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많이 거주하는 멍크턴에서 이런 특징을 지닌다. 멍크턴에 있는 4년제 대학인 멍크턴 대학교의 철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프랑스어로 수업하는 불어 대학교이다.

영어를 제2 언어 개념으로 유창하게 구사할줄 알지만 의도적으로 프랑스어로 소통하는 것을 선호하는 프랑스계 이중언어 구사자들을 제외하곤 프랑스어만을 단일언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사멸추세에 있는 셈이다. 지역적으로는 퀘벡주와 접경하는 뉴브런즈윅주 북부 지역일수록 노령층의 프랑스어 화자 아카디안 인구가 강세를 보이며 노바스코샤주, 메인주 쪽에 가까워질수록 영어 및 이중언어 구사자 인구가 강세를 보인다.

프랑코포니 가맹 지역이지만 대도시가 없는 농어촌 지역이고, 캐나다 내 프랑스어 수요 역시 퀘벡주에 집중되다 보니 프랑스 국적의 다국적 기업들은 몬트리올 외에는 전혀 관심이 전혀 없고 중견 도시 정도인 퀘벡 시 정도까지를 지사 설치의 마지노선으로 본다. 뉴브런즈윅주 특히 멍크턴 지역에 지사를 설치하고 연락하는 것은 주로 프랑스 국적 기업이 아닌 몬트리올에 헤드쿼터를 두고 있는 캐나다 국적 기업들이다.[2][3]

자연환경[편집]

뉴브런즈윅주 동부는 세인트로렌스만, 남부는 펀디만에 면하고, 노바스코샤 반도와는 남동쪽의 시그넥토지협(地峽)으로 연결되어 있다. 애팔래치아 산맥의 연장부에 해당하는 북서부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구릉 지대를 이루며, 호수가 많다. 최고지점은 칼턴산(820m)이며,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고, 동안에는 습지대가 펼쳐진다.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이며, 사슴·들새가 많아 야생동물 보호지역이 설치되어 있다. 삼림은 으뜸가는 자원으로 전 면적의 80%를 차지하여 제재·펄프 공업이 성하다.

역사[편집]

퍼스트 네이션[편집]

현재 뉴브런즈윅주에서 첫 유럽인 정착자들이 그 지방에 살고 있던 미크매크 족과 말리시트 족들을 찾았다. 둘다 이 주민들은 알곤킨어족에 속하였다. 미크매크 족은 지방의 동부를 돌아다녔다. 말리시트 족은 세인트존 강 유역에 살았다. 퍼스트 네이션의 주민들은 폭포로부터 내려오는 시냇물 혹은 강에서 조수의 더 멀리 도달하는 곳 근처에 진을 치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 위치들은 연어와 송어를 위한 최고의 잡이를 마련하였다. 퍼스트 네이션의 주민들은 또한 해안을 따라 대합조개와 굴을 모으기도 하였다.

탐험과 정착[편집]

1534년 프랑스의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샬루어 만에 도착하였다. 더욱 나가서의 탐험은 1604년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해 프랑스의 탐험가들 사뮈엘 드 샹플랭과 피에르 뒤 과 드 몽스가 펀디만으로 항해하여 들어갔다. 그들은 해안을 탐험하고 세인트크로이 강의 입구에 있는 세인트크로이섬에서 겨울을 보냈다. 1605년 그들은 펀디 만을 가로질러 현재 노바스코샤주에 있는 포트로열로 이주하였다. 1600년대 후반에 프랑스인 정착자들이 지역에 농장과 낚시장들을 설립하고, 그 지방을 아카디아라고 불렀다.

프랑스의 경쟁자들[편집]

모피 교역을 설립하는 희망을 가진 이들이었던 프랑스인들은 영토의 통치를 위하여 자신들 사이에 싸우기 시작하였다. 가장 유명한 투쟁은 샤를 드 라 투르와 돌네 드 샤르니세 사이에 일어났다. 라 두르는 오늘날 세인트존 일대에 교역지와 요새를 가졌다. 드 샤르니세는 라 투르가 없는 사이에 그의 요새를 공격하였다. 교역인의 부인 마리 드 라 투어는 요새의 방어를 지도하였으나 결국 항복하였다.

프랑스인들 사이에 경쟁은 차차 프랑스인과 잉글랜드인 사이에 경쟁으로 주어졌다. 남부로 잉글랜드의 식민지들이 재빠르게 번창하였다. 많은 잉글랜드의 선원들과 다른 주민들은 뉴브런즈윅 지방에 끌어들여졌다. 잉글랜드인들은 1654년 아카디아를 정복하였으나 1667년 브레다 조약에서 프랑스에게 돌려주었다. 1690년 잉글랜드인들은 다시 아카디아를 침입하였다. 앤 여왕 전쟁 이후, 프랑스는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아카디아의 노바스코샤 본토 지역을 영국에게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은 뉴브런즈윅의 대부분의 소유에 논쟁하였다. 많은 아카디아인들은 뉴브런즈윅 지방에 남아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마지막에서 영국이 지방을 포획하였다. 그들은 많은 아카디아인들을 추방하였다. 파리 조약은 아카디아의 뉴브런즈윅 부분의 영국 소유를 확립하였다.

영국인의 정착[편집]

뉴잉글랜드에서 온 교역인들이 1762년 세인트존에 도착하였다. 1763년 다른 뉴잉글랜드인들이 현재 프레더릭턴 근처에 있는 모거빌의 정착지를 창립하였다. 같은 해에 뉴브런즈윅 지방은 노바스코샤의 영국 주의 일부가 되었다. 많은 아카디아인들은 지방으로 돌아오는 데 허락되었다. 그들은 북부와 동부에서 대지들의 승인들을 받았다.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과 그 후에 영국에 충성한 대략 14,000명의 주민들이 미국으로부터 도착하였으며, 대부분 1783년에 왔다. 이 왕당파들은 세인트존에 상륙하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세인트존 강 유역 하류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프레더릭턴을 창설하였다. 다른이들은 미국과의 국경에 있는 패서매쿼디 만 근처에 정착하였다. 1784년 영국인들은 뉴브런즈윅을 갈라진 지방으로 설립하였다. 1785년 세인트존은 현재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합병된 도시가 되었다. 이듬해 식민지 입법이 창조되어 농부와 대지주들은 지방의 첫 입법부 회의를 선출하였다.

조선업과 영국과의 재목 교역은 1800년대에 번창하였다. 1815년 이후에 수천명의 잉글랜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정착자들이 영국에서 직업들을 찾지 못한 이유로 뉴브런즈윅에 왔다. 이 아일랜드 이민들의 어떤이들은 아일랜드 대기근을 달아나고 있었다.

1825년 거대한 산불이 미라미치 강 지방에서 대략 6000 스퀘어 마일(16,000 스퀘어 킬로미터)를 지나가 타올랐다. 허리케인 같은 바람에 의하여 번진 화재는 전체의 정착지들을 휩쓸어 대략 150명의 주민들이 사망하였다. 집이 없는 정착자들은 다른 주들,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의류, 돈과 공급품들을 받았다.

1830년대로 봐서 뉴브런즈윅의 대략 5분의 4는 아직도 왕실 소유지들이었다. 재목 교역인들은 산림에서 운영하는 데 보수를 내야 했다. 1833년 지방의 입법부는 왕실 소유지들을 획득하는 데 운동을 시작하였다. 영국 정부는 1837년에 뉴브런즈윅에 대지들을 주었다.

애루스툭 전쟁[편집]

뉴브런즈윅과 메인에서 온 정착자들이 애르스툭 강의 유역에 살았다. 영국과 미국은 이 지방에서 경계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고, 뉴브런즈윅과 메인의 벌목꾼들 사이에 논쟁들이 나타났다. 뉴브런즈윅과 메인에서 온 시민군들이 싸우려고 모일 때 1839년 최고점이 왔다. 하지만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의 마틴 밴 뷰런 대통령은 애루스툭 전쟁으로 불린 논쟁을 가라앉히려고 윈필드 스콧 장군을 보냈다. 스콧은 휴전을 협정하였다. 1842년 영국과 미국의 권위자들은 뉴브런즈윅-메인 경계선을 설립하였다.

뉴브런즈윅의 인구가 자라나면서 지방 자치권을 위한 요구들도 자라났다. 정치적 권력은 차차 런던에 있는 영국 식민지 사무소로부터 프레더릭턴에 있는 지방의 입법부로 옮겨졌다. 1849년 영국은 뉴브런즈윅을 그 자신의 사정들에 거의 완료된 통치를 뉴브런즈윅에 승인하였다.

연방과 향상[편집]

1864년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에서 온 사절단들이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의 샬럿타운에 모여 연합된 식민지를 형성하는 논의하였다.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에서 온 사절단들은 그들에게 가입하여 북아메리카 동부의 모든 영국인 지방들의 연방을 제안하였다. 사절단들은 1864년 퀘벡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은 캐나다 자치령의 창조로 이끈 캐나다 연방을 위한 계획을 끌어올렸다.

많은 뉴브런즈윅 주민들은 제안된 연합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을 잃을 것 같은 위협을 느꼈다. 지방의 정치 지도자 새뮤얼 레오너드 틸리는 더 큰 지방들이 자신들을 통치하지 않을 주민들을 납득시키는 주요 일부를 수행하였다. 1867년 7월 1일 뉴브런즈윅은 캐나다 자치령의 4개의 원래 주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른 주들은 노바스코샤주, 온타리오주와 퀘벡주였다. 연방당의 앤드루 R. 웨트모어는 연방의 성립 후 뉴브런즈윅 주의 초대 지사가 되었다. 연방에 이은 세월에 가장 두드러진 주지사는 1871년 무료의 공공 학교들을 설립한 법령을 통과시킨 조지 E. 킹이었다.

주의 수산업, 제재업과 광업은 차차 확장되었다. 그러나 철강 증기선 이용의 증가가 뉴브런즈윅 주의 항해선 산업이 종말로 이끌었다. 그 산업은 중요한 섬유와 철강 산업들로 대체되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동안에 많은 뉴브런즈윅 주민들이 서부 캐나다와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 지방들은 더욱 나은 직업 기회들을 제공하였다.

1890년으로 봐서 2개의 국내 철도 시스템들이 뉴브런즈윅 주의 도시들을 몬트리올과 이었다. 세인트존은 캐나다 동해안에 주요 겨울 항구로서 노바스코샤 주의 핼리팩스와 함께 랭킹에 들어왔다. 하지만 온타리오 주와 퀘벡 주는 캐나다에서 제조업과 무역을 통치하였다. 1900년 이후 펄프 산업이 뉴브런즈윅 주에서 증가적으로 중요해졌다. 공공 근로 프로그램들은 1900년대 초반 동안에 주에서 통신과 교통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1919년과 1925년 사이에 뉴브런즈윅 주의 산업들은 심각한 쇠퇴를 겪었다. 회복이 서서히 왔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에 주요 번창이 종이 산업에서 일어났다.

1900년대 중반과 후반[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주의 펄프와 제지 산업들은 거대하게 확장되었고, 조선업은 세인트존 지역에서 중요해졌다. 구리, 납, 은과 아연의 큰 매장량들은 1952년과 1953년에 배서스트-뉴캐슬 지방에서 지도에 그려졌다. 1953년과 1957년 주는 광업과 제조업을 위한 추가적인 전력을 공급한 수력 발전소들을 완공하였다. 캐나다에서 가장 큰 석유 정제소가 1960년 세인트존에 건설되었다.

배서스터-뉴캐슬 금속 광석 매장량들에 관계된 건설 프로그램이 1962년에 시작되어 1968년에 완공되었다. 프로그램에서 계획들은 화확품과 비료 공장, 부두와 해운 시설, 제재와 제조 회사, 광산과 파이프라인들을 포함하였다. 금속 광석의 체굴은 지방의 가장 큰 광산이 운영을 시작할 때 1964년에 붐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건설 프로그램에 의하여 마련된 경제적 자극에 불구하고 뉴브런즈윅 주의 생활의 표준은 국내적 수준의 아래에 남아있었다. 주의 외부 이동이 솟아 올랐다.

1968년 수력발전소가 프레더릭턴 근처에 있는 세인트존 강에 노인 맥터쿼크 댐에서 개장되었다. 이 발전소에서 온 전력의 절반 이상이 배서스터-뉴캐슬 지방에 있는 산업 지대들로 간다.

1960년대 후반 동안에 주지사인 자유당 소속의 루이 J. 로비쇼가 자신이 부른 동등한 기회의 프로그램에서 주를 지도하였다. 이 프로그램에서 주 정부는 모든 재판소, 학교와 보건·복지 연구소들의 운영을 차지하였다. 활동은 주의 전역을 통하여 그런 시설들에 의하여 마련된 서비스들의 품질을 동등하게 하는 데 장악되었다. 로비쇼의 시기는 또한 뉴브런즈윅 주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아카디아인 소수를 위한 더욱 많은 문화적, 경제적과 정치적 역할과 함께 협조되었다.

1969년 뉴브런즈윅 주 입법 회의는 입법부 자신에 프랑스어를 영어와 함께 재판소, 정부 사무소와 학교들에서 동등한 지위의 공용어로 만든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해 후반부에 캐나다 국회는 공용어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은 10 퍼센트 이하의 주민들이 프랑스어를 쓰는 구역들에서 두개국어에 서비스를 마련하는 데 연방 시설들을 요구한다. 이 법률 아래, 뉴브런즈윅 주의 전체는 연방 서비스들을 위한 두개국어 구역을 숙고하였다.

경제적 발전[편집]

뉴브런즈윅 주의 조선업 시설들은 1970년대에 확장되었다. 1970년 유조선을 위한 북아메리카의 첫 심해 터미널이 세인트존 근처에 개장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세인트존 지역은 주요 산업적 확장을 경험하였다. 주요 계획들은 조선업과 석유 정제 단지들의 확대를 포함하였다. 식품 가공업, 광업과 임업들도 또한 뉴브런즈윅 주를 통하여 확장되었다.

1983년 대서양 캐나다에서 첫 원자력 발전소가 포인트 레프로에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1983년과 1985년에 2개의 칼륨 광산들이 주의 남부에 있는 서식스 지방에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97년 지속된 홍수가 광업의 큰 수를 닫는 원인을 가져왔다. 또한 그해에는 컨페더레이션 다리가 완공되었으며, 뉴브런즈윅 주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를 잇는 데 뉴섬벌랜드 해협을 따라 뻗어나간다. 1990년대에 주 정부는 전화 통화 센터들 같은 정보 기술 비지니스들에서 투자를 촉진시켰다.

주의 지도자들의 전진하는 근심은 특히 북부에서 노동력을 위한 직업들을 어떻게 마련하느냐 혹은 젊은이들의 캐나다의 다른 부분들로 이동을 막는 데 자라왔다. 1996년 채섬에 있는 왕립 캐나다 공군 기지가 문을 닫았다. 2000년대 초반에 펄프와 다른 목재 제품들을 생산한 제재소들이 배서스트, 덜하우지, 미라미치와 다른 위치들에서 문을 닫았다. 다른 제재소들은 생산을 줄였다. 수백명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잃었다. 왕립 캐나다 해군을 위한 최신식의 순찰 프리깃함을 생산한 세인트존 부두와 조선소도 또한 문을 닫았다.

산업[편집]

많은 주민들이 1차 산업에 종사한다. 주로 재배되는 작물들은 감자이며, 블루베리 산지로도 유명하다. 그 외에도 낙농업도 어느 정도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가축을 기르는 축산업이나 혼합농업, 바닷가재 관련 수산업 역시 발달했다.

뉴브런즈윅주의 상당 부분은 삼림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를 배경으로 목재 산업이 상당히 발전했다. 과거에는 목재를 이용한 조선업도 발전했으나 현재는 완전히 쇠퇴했고, 지금은 펄프나 제지 산업이 대세이다. 그 외에도 광업 역시 무시 못 할 비중을 지니고 있다. 납, 아연, 구리, 탄산칼륨 등이 채굴된다.

뉴브런즈윅주의 지리적 조건이 동부와 대서양 연안을 잇는 요충지에 위치한 만큼, 특히 항만 시설의 부가 가치 또한 주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요소이다. 어빙 그룹이 정유시설을 멍크턴이나 내륙 지역이 아닌 세인트 존에 운영하는 가장 큰 이유 또한 크루즈선 터미널을 통해 유조선 접근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웃 주 노바스코샤의 핼리팩스보다 물동량 및 방문객 규모에 있어 밀리긴 하나, 세인트 존에서도 컨테이너선, 크루즈선 및 유조선 입항 등 핼리팩스 항만시설들과 얼추 비슷한 수준으로 다양한 선박을 처리한다. 크루즈선 기항을 통한 관광객 유치 및 선박 물자 공급 배후 산업 육성에도 주 정부 차원에서 꽤 공을 들인다.

다만 세인트 존의 경우 노후화가 많이 된 시설이라 도크 에어리어 확장 및 CN 철도망과 항구 간의 연결 선로 구축 등의 현대화 개장이 필요한 시점이고 이에 따라 캐나다 정부와 주 정부 양쪽이 공동 출자하여 현대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에너지 분야에서는 주 정부 소유의 공기업인 NB 파워가 전력공급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특이 사항은 대도시가 없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세인트 존 기준 서쪽으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데 산업 시설의 전력 수요를 원자력 발전소에서 책임진다.

쿼벡의 전력 공기업 하이드로 퀘벡이 2012년을 마지막으로 베컹쿠르 원전을 폐쇄한 이래, 뉴브런즈윅주의 포인트 렙로 원전은 캐나다 대서양 지방 유일의 원전을 넘어 캐나다 전국을 통틀어 온타리오 외부에 위치한 유일한 원전이다.

CANDU 원자로 1기가 탑재된 중수로 원전으로 1983년도부터 운전을 시작하여 현재도 전력 공급을 하고 있다. 시설 면허 만료가 다가온 NB 파워 측에서 25년 연장 계획을 요청하였으나 캐나다 원자력 안전 위원회로부터 10년 추가 면허 연장 승인을 획득하여 2032년 까지도 운영할 예정이다.

문화[편집]

과거 프랑스로부터 건너온 프랑스계 캐나다인 중 하나인 아카디인들이 아직도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라 아카디안 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아카디아 깃발도 많이 있다. 프랑스 국기 위에 노란색 별이 그려져 있는 깃발이 아카디안의 깃발이다. 그리고 그 깃발이 있는 주택이 있다면 100%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후손이다. 그리고 깃발 외에도 커다란 별 문장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이들 아카디안들은 같은 조상을 두고 있는 이웃 프랑스어권 지역인 퀘벡과는 매우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항쟁까지 벌이며 영어권으로의 동화를 완강히 거부하고 오늘날 몬트리올과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면 영어 구사력이 낮은 퀘벡과 달리 아카디안들은 퀘벡과도 상당히 다른 뉴브런즈윅 내에서만 통용되는 독자적인 프랑스어 방언을 사용하며, 그와 동시에 영어도 수준급 이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이중언어 구사자의 비율이 훨씬 높다.

이러한 퀘벡 - 뉴브런즈윅 간 문화적 정체성 차이는 노바스코샤와 뉴브런즈윅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아카디안 숙청의 후폭풍으로 형성된 결과물이다. 워낙 규모가 커서 손을 댈때 마다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키고 그럴만한 저력을 지니고 있었던 퀘벡[6] 외에 대서양의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일대는 철저하게 영국군에 의해 군사적으로 제압되었던 약소 지역이라 영국의 통치에 저항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을 모조리 미국으로 추방시킨 전례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 정부는 퀘벡 외에는 프랑스어 사용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영어로만 소통하도록 법을 제정한 것과 사실상 사적인 대화 외에는 프랑스어를 구사하지 못하도록 압박한 것도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이 지역의 잔존 아카디안들은 살아남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 체제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뉴브런즈윅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스스로 좋아서, 혹은 특별히 똑똑해서 이중언어 구사자들이 된 게 아니라 잔혹한 역사적 폭력이 낳은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뉴브런즈윅의 특성 상 인근 대서양 소속 주들과 문화 교류가 활발하다. 역사적으로도 노바스코샤 관할 지역이었던지라 노바스코샤와도 문화 교류가 활발하고 노바스코샤와 접하는 멍크턴에는 노바스코샤 주민들이 많이 온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와도 교류가 많다.

COVID-19 사태 초기에는 퀘벡과 온타리오 차량들은 출입 금지 대상이었으나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소속 차량의 입장은 상호 허용하는 등 대서양 지역과 문화적 동질성이 강하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뉴브런즈윅주〉, 《위키백과》
  2. 뉴브런즈윅주〉, 《네이버 지식백과》
  3. 뉴브런즈윅〉,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국가
카리브제도 국가
북아메리카 도시 1
북아메리카 도시 2
북아메리카 지리
북아메리카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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