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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레타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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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위치
케레타로주 위치

케레타로주(스페인어: Querétaro)는 멕시코 중북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편집]

케레타로주의 면적은 11,699㎢이며 인구는 1,924,144명(2012년 기준)이다. 주도는 케레타로다. 북쪽으로는 산루이스포토시주, 서쪽으로는 과나후아토주, 동쪽으로는 이달고주, 남동쪽으로는 멕시코주, 남서쪽으로는 미초아칸주와 접한다.

1810년 멕시코 독립운동, 1867년 프랑스를 지지했던 황제 요제프 F.막시밀리안(Joseph Ferdinand Maximilian) 총살 등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일어난 지역이다. [3]

자연환경[편집]

멕시코시티 북쪽 고원을 차지하며 대부분이 아나우악 고원으로 동쪽에 시에라마드레 산맥이 있다.[4]

역사[편집]

케레타로는 멕시코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 된 도시 중 하나로, 1531년 7월 25일에 코닌 (Conín, 페르난도 데 타피아 Fernando de Tapia)에 의해 창설되었다. 케레타로라는 이름은 치치메카스족 (Chichimecas)이 쓰던 단어에서 유래되었으며, 산티아고 아포스톨 (Santiago Apóstol)이 이끌던 부대에 의해 정복되자 정복을 이끈 사람의 이름을 따서 산티아고 데 케레타로로 명명된 것이다. 1550년대부터 에스파냐의 식민지에 속하였다.

이후 케레타로는 멕시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손꼽히게 되었다. 1810년 멕시코 독립 과정에서 케레타로의 음모 (Conspiración de Querétaro)가 일어난 곳도 이곳이며, 현재의 멕시코 합중국 헌법 (Constitución Política de los Estados Unidos Mexicanos de 1917)을 공포한 곳도 바로 케레타로이다. 1824년에 과나후아토주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주가 되었다.

1996년에는 케레타로 역사지구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산업[편집]

산악 지대인 북부에서는 금·납·주석·구리 등이 나며, 특히 오팔과 수은의 생산이 많다. 남부 평야지대에서는 곡물·고구마·과일 등의 농작물을 재배하며, 투우소 등의 가축을 사육한다.

교육[편집]

케레타로 자치대학교[편집]

케레타로 자치대학교는 멕시코 중부 케레타로주의 케레타로시에 위치한 공립 종합대학교이다. 13개 학부에서 53개 학사학위와 49개 석사학위, 14개 박사학위 과정을 제공한다. 캠퍼스는 케레타로시와 케레타로주 여러 곳에 나뉘어 있다. 대학평가기관 QS의 2023년 세계대학순위에서 세계 1201-1400위권, 라틴아메리카 대학 중 161-170위권으로 평가됐다. 분야별 평가에서 농학 · 임학 분야가 세계 351-400위권에 들었다.[5]

교통[편집]

국제공항[편집]

시우다드 델 카르멘 국제공항[편집]

멕시코 중부 케레타로주(州)의 주도(州都) 산티아고 데 케레타로 도심에서 동쪽으로 약 15km 거리에 있으며 평균해발고도 1,969m의 고지대에 위치한다. 2002년 공항 건설 공사에 착공하여 2004년 11월 28일 개항했으며, 1955년 설립된 구공항인 페르난도 에스피노사 구티에레즈 공항(Aeropuerto Ing. Fernando Espinosa Gutiérrez)을 대체하게 되었다. 멕시코 시티 국제공항(Aeropuerto Internacional de la Ciudad de México)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며, 공항 코드는 QRO(IATA), MMQT(ICAO)이다.

여객 터미널은 한 동이다. 활주로는 3,500mx45m 크기로 총 1개소를 운영하며, 표면은 콘크리트로 포장되었다. 취항 항공사로는 아에로멕시코·볼라리스(Volaris)·아에로마르(Aeromar)·유나이티드항공·아메리칸이글에어라인스·인터제트(Interjet)의 6개사가 있으며 미국 휴스턴(Houston)과 댈러스(Dallas)로의 국제선을 포함해 칸쿤(Cancún)·티후아나(Tijuana)·몬테레이(Monterrey)·아카풀코(Acapulco)·푸에르토 바야르타(Puerto Vallarta)·지와타네호(Zihuatanejo)를 연결하여 국내외 9개 도시로의 직항편을 운항한다. 교통편으로는 산티아고 데 케레타로 도심을 연결하는 57번 연방 고속도로가 인접한다.[6]

케레타로[편집]

멕시코 중앙부 케레타로주의 주도이며 정식 명칭은 산티아고 데 케레타로(Santiago de Querétaro)이다. 멕시코시티에서 북서쪽으로 220km 떨어진 해발고도 1,821m에 위치한다. 면직물·농산물가공 등의 산업이 있으며, 오팔 산지로서 유명하다. 1810년에 M.H.코스티야를 지도자로 하는 멕시코 독립운동이 일어나 1867년에 프랑스 지지자 황제 막시밀리안이 총살되고 1917년에 멕시코 헌법이 기초되는 등, 멕시코 역사상 유명한 도시이다.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아노(Emparador Maximiliano)가 멕시코의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arez)에게 붙잡혀 총살당한 ‘종의 언덕(El Cerro de Las Campanas)’에는 성당이 있으며, 뒤쪽 언덕에는 헌법문서를 손에 든 파레스의 거상이 있다.

'종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멕시코의 장군 마리아노 에스코베도(Mariano Escobedo)의 기마상이, 언덕 위에는 멕시코의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의 거대한 입상이 서 있다. 시의 입구에는 4km에 이르는 수도교(水道橋)가 있고, 시민에게 물을 공급한다. 시내에는 식민지 시대의 건축을 비롯하여 수도원과 성당이 남아 있다.[7]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편집]

케레타로 역사 기념물 지대[편집]

멕시코 중부 케레타로주(州)의 주도인 케레타로는 멕시코시티에서 북서쪽으로 220km 떨어져 있다. 오토미 인디언들이 살던 곳이었으나, 1446년 아즈텍족(族)에게 넘어갔다. 1531년에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10년 멕시코의 독립 이후, 농업과 광업을 기반으로 한 케레타로의 경제가 쇠퇴하였다. 1867년 프랑스를 지지하는 황제 막시밀리안이 총살되고, 1917년 멕시코 헌법이 기초가 마련된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오토미족(族)·타라스코족(族)·치치멕족(族) 등 원주민들과 스페인 사람 등 여러 민족이 공존하도록 계획된 도시이다. 언덕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원주민, 서쪽은 스페인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기하학적인 도로 설계가 특이하다.

또, 17∼18세기의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된 교회·수도원·궁전·주택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산타클라라 교회와 산타로사 교회를 비롯한 옛 건물 내부는 플라테레스크 양식이나 추리게레스크 양식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시의 입구에는 18세기에 건설된 수도교(水道橋)가 있어, 물을 공급한다. 1996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8]

케레타로 시에라 고르다의 프란시스코 선교회[편집]

멕시코 케레타로주의 시에라 고르다 산악지대에 있는 18세기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유적으로, 2003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멕시코 중부에 위치한 케레타로주의 시에라 고르다 산악지대에 있는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유적을 가리킨다. 18세기에 세워진 이 선교회 유적들은 유럽의 선교사들이 중앙멕시코의 유목민족과 문화적으로 접촉한 증거이자 멕시코 중부와 북부 및 미국 서부에서 선교 활동을 통하여 가치를 교환하고 두 그룹이 각자의 환경에서 문화적으로 공존한 사례에 해당한다. 2003년 멕시코의 23번째 세계유산(문화)으로 등재되었다.

지정된 면적은 104ha이며, 여기에는 5개의 프란시스코 선교회 건물이 포함된다. 5개의 선교회는 지금의 할판 데 시에라(Jalpan de Sierra) 자치시에 있는 산티아고 데 할판(Santiago de Jalpan)과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 루스 데 탄코욜( Nuestra Señora de la Luz de Tancoyol), 란다 데 마타모로스(Landa de Matamoros) 자치시에 있는 산타 말라 델 아구아 데 란다(Santa María del Agua de Landa)와 산 프란시스코 델 발레 데 틸라코(San Francisco del Valle de Tilaco), 아로요 세코(Arroyo Seco) 자치시에 산 미겔 콘카(San Miguel Concá)를 말한다. 프란시스코 수도회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행한 선교 활동이 이들 선교회의 건축 및 예술적 성취에 반영되어 있다.

프란시스코 수도회는 18세기에 시에라 고르다 산악지대에 진출하였는데, 선교회는 이 지역에서 토착민들을 모아 선교하고 가르치기 위한 복합 조직 단위였다. 선교회는 산악지대의 경관이 수려한 환경에 자리 잡아 각각 교회를 세우고 와스테크족(Huastec)·호나스족(Jonace)·파메족(Pame) 등의 토착민들을 찾아 모아서 교회 주변에 오두막을 지어 무리를 이루게 하였다. 선교사들은 토착민의 언어를 배웠으며,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행동을 가르친 뒤에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선교단의 계획에 따라 주변 토착민 거주지의 배치와 개발이 결정되었는데, 이 지역들은 오늘날에도 전통적 농촌 주거지로 남아 있다.

선교회의 시설은 각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양식에 따라 건축하였다. 보통 안마당과 출입구, 개방된 소예배당, 주예배당, 회랑 등을 갖추고 있으며, 16세기 수도원을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다. 또한 교회의 십자형 지면 계획과 조각한 회반죽 파사드(façade;건축물의 정면부), 내부에 사용한 회반죽 등은 17~18세기 멕시코 바로크 예술의 특징을 반영하는데, 이런 특징은 할판·란다·탄코얄의 선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이에 비하여 틸라코와 콘카의 선교회는 예배당이 없는 독자적 양식으로, 토착 암석을 사용해 건물을 짓고 회반죽을 발랐으며, 건물이 향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

파사드는 탄코욜이 5개의 수직부로 이루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통상 3개의 수평부와 3개의 수직부로 분할된 장소를 구성한다. 풍성하게 장식된 파사드는 선교사들과 토착민들이 창조적 노력으로 함께 일궈낸 결과물이다. 둥근 지붕은 수랑(袖廊;십자형 교회당의 좌우의 날개 부분)의 교차점을 덮고 있고, 높은 종탑이 교회의 왼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황토색이 가장 많이 쓰였으며, 교회 내부는 점토로 소박하게 표현하였다. 교회 오른쪽의 주거 구역에는 아치형의 입구가 있고, 뜰 주변에 회랑식 길을 낸 곳도 있다.[9]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케레타로주〉, 《위키백과》
  2. 케레타로〉, 《나무위키》
  3. 케레타로주〉, 《네이버 지식백과》
  4. 세계인문지리사전 케레타로〉, 《네이버 지식백과》
  5. 케레타로 자치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6. 케레타로 국제공항〉, 《네이버 지식백과》
  7. 케레타로〉, 《네이버 지식백과》
  8. 케레타로 역사 기념물 지대〉, 《네이버 지식백과》
  9. 케케레타로 시에라 고르다의 프란시스코 선교회〉,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국가
북아메리카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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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도시 1
북아메리카 도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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