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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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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궁(國弓)은 한국의 전통적인 활쏘기 스포츠이다. 국궁은 전통적인 한국의 활과 화살을 사용하여 일정한 거리에서 과녁을 맞히는 활동이다. 국궁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기 위해 즐기고 있다.

개요[편집]

국궁은 대나무 살을 쏘아 과녁을 맞추어 승부를 겨루는 한국의 전통 궁술 스포츠이다.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국가무형문화재 제 142호로 사실상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용어는 궁도(弓道)가 아닌 활쏘기이다. 양궁에 대비하여 현대에 이르러서는 국궁(國弓)이라고 부른다. 본래 활쏘기는 무과 시험의 과목으로 정해져 있는 무예였으며 무예도보통지의 무예이십사반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 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활이 만들어졌으나 현재까지 제작 기법이 이어져 오는 것은 각궁 뿐이다. 전국체육대회의 한 종목이다.[1]

역사[편집]

활과 화살의 유물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최소 2만년 전 이전인 중석기 시기에 사용된 것이 발견되었다. 활은 사냥과 전쟁을 위해 전세계에 걸쳐 사용되었다. 한국의 경우도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돌화살촉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화살촉이 금속으로 대체된 것은 철기시대 이후이다.

활은 오랫 동안 전쟁 무기로 사용되었다. 상고 시대를 기록한 중국의 역사서에는 예의 단궁(檀弓)이나 고구려의 맥궁(貊弓)과 같은 활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활은 크기를 기준으로 장궁과 단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말을 타고 사용하는 활은 기동의 편의를 위해 길이가 짧은 단궁으로 길어도 1 미터를 넘지 않는다. 고구려의 벽화에 나온 수렵도를 보면 말을 타고 각궁을 사용하여 사냥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고려에서 조선까지 시행된 무과 과거시험에서 활쏘기는 기본적인 평가 항목이었다. 조선의 무과에서 초시와 복시에는 목전이 사용되었다. 과녁은 240보 거리에 놓였으며 기본으로 3발을 쏘아 관중하는 활 마다 7점을 주었다. 그 보다 먼 과녁에 대해서는 5보 마다 1점을 더하였고 50보를 넘기면 과녁을 맞추지 못하였어도 1점을 주었다. 조선시기 사용하던 화살촉은 목전 이외에도 철전(鐵箭) · 유엽전(柳葉箭)과 같은 것이 있다.

한국의 전통활쏘기는 자생적인 근대스포츠로 발전해 왔으며, 암흑기 시대인 일제 강점기에도 조선 궁사들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전승되어 왔다. 1928년 조선궁술회가 조직되고 같은 해에 서울에 있는 활터 황학정에서 전조선궁술대회가 개최된다. 이 대회를 계기로 조선의 궁술은 근대스포츠로 정착하게 되며 당시 제정된 경기 규정 및 운영 방식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조선궁술연구회에서는 1929년 불후의 명작인 <조선의 궁술>을 간행하여 활쏘기 사법과 풍속이 지속적으로 전승되도록 했다. 조선궁술연구회는 1932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조선궁도회로 개칭되었으며, 1946년 조선궁도협회로, 1954년 3월 대한체육회에 가맹하였다. 씨름, 택견 등과 함께 자생적 스포츠로 전국체전 종목에 편입되어 우리 민족의 무예를 이어 가고 있다. 1983년 대한양궁협회가 분리되어 대한국궁협회로 개칭하였으나, 협회 내 여론에 의하여 4년 후 대한궁도협회로 다시 개칭하였다. 현재는 전국 400여개의 활터에서 전통활쏘기가 전승되고 있다.[1]

특징[편집]

일반적으로 한국 각궁이 활 중에 가장 작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국궁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이다. 한국활의 길이는 일반적으로 116cm ~ 130cm 정도인데, 이것은 물론 장궁인 영국 장궁, 리커브 보우(둘다 180cm), 일본 화궁(221cm)보단 확실히 짧은 길이이긴 하지만 의외로 터키활(104cm ~ 112cm)보단 확실히 길고 몽골활(132cm), 헝가리활(139cm)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길이이며 만곡궁치곤 지극히 평범한 길이의 활이다.

물론 만주활의 경우 만곡궁 주제에 무려 175cm로 길이만 놓고 보면 영국 장궁, 리커브 보우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압도적인 길이인데다가 한국활보다 훨씬 길어보이지만 사실 만주활은 고자 부분의 길이가 엄청 긴 것으로, 이는 기마궁수가 주력이던 만주족이 무거운 화살을 쏘기 위해 고자 부분을 무겁고 강하게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며 고자 부분을 제외한 '활 몸체' 부분의 길이는 한국활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애초에 조선군도 기병용 활을 만들 땐 만주활처럼 고자 부분을 길고 두껍게 만들기도 했던 만큼 '한국활은 짧고, 만주활은 길다'는 고정관념은 갖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활 중에도 정량궁, 예궁, 목궁같이 길이가 매우 긴 활이 대단히 많았고 상술했듯 기병들은 만주활처럼 고자 부분이 매우 긴 거대한 활을 쓰기도 하는 등 한국활 자체가 길이가 천차만별이다 보니 한국활은 길이가 짧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사실 길이보다도 한국활 특유의 아이덴티티에 가장 가까운 건 특유의 고자 형태와 (윗장보다 긴) 아랫장이다.

한국 활에 쓰이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으며 고려 후기까지 쓰이던 선고자,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까지 쓰이던 칼고자, 후기부터 쓰이던 평고자로 나뉘는데, 선고자는 전세계 문화권의 활에서 폭넓게 보이는 양식이며 칼고자, 평고자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양식이다.

선고자는 단면이 직사각형(고려 후기까지의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공통)이고 칼고자는 단면이 등변삼각형 형태로 그냥 나무작대기 한쪽에 홈을 파놓은 형태이고, 평고자는 단면이 T자형이며, 언월도 칼등에 납작한 판자를 얹은 것같이 생겼다.

칼고자는 선고자에서 평고자로 넘어가는 중간단계에 해당하는데, 사실 구조 면에선 평고자랑 큰 차이가 없으며 양낭고자(고자 끝부분)의 형태만 빼면 거의 같은 개념이지만, 선고자는 고자 부분이 (옆에서 봤을 때) 직사각형인 것에 반해, 칼고자는 (옆에서 봤을 때)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넓어졌다가 다시 좁아져서 끝이 날카롭게 변하는, 쉽게 말해서 언월도 날 모양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다.

칼고자는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현대의 국궁 고자 양식인 '평고자'로 진화하는데, 탄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경량화로 인해 꼭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다 퇴화해서 단면이 T자형이 되었다는 점을 빼면 사실상 변한 점이 없다시피해서 칼고자 특유의 언월도 모양 측면 실루엣은 그대로 유지가 되게 된다.

즉, 측면에서 봤을 때의 고자 형태가 넓어졌다가 좁아지는 언월도 날 모양인 특유의 형태는 (칼고자, 평고자 막론하고) 고려 말 이래로 한국 활의 일관적인 특징이었다는 얘기다.

물론 고자 끝부분이 뾰족한 건 영국 장궁이나 일본 화궁 등 다른 활에서도 보이는 특징이지만, 그들의 고자는 애초에 송곳같이 가느다란 형태이며 (옆에서 봤을 때) 넓어졌다가 다시 좁아지는 언월도 날모양의 실루엣이 나오는 고자는 한국활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하지만 위 특징은 고려 말 이후 한정이고, 그 이전 시대의 활은 평범한 평고자 형태이기 때문에 단순히 이 특징만을 가지고 '한국 활'을 정의할 수는 없는데, 사실 삼국시대 때부터 일관적으로 내려오는 한국 활만의 특징 또한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국궁에선 줌통을 기준으로 위쪽 림을 윗장, 아래쪽 림을 아랫장이라고 부르는데, 국궁은 아랫장이 윗장보다 더 긴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형태인데, 영국 장궁을 포함한 장궁들은 대부분 위아래가 대칭이고, 일본활과 만주활은 윗장이 아랫장보다 훨씬 길며, 그나마 국궁과 형태가 가장 비슷한 터키활조차 윗장이 살짝 더 길기 때문이다.

이런 형태 때문인지 국궁은 만작시 윗장은 화살과 거의 평행하게 되지만 아랫장은 화살과 평행하지 않게 아래로 기울어진 형태가 된다. (즉 화살 기준으로 위쪽은 직사각형, 아래쪽은 직각사다리꼴이 된다.)

이러한 특징은 삼국시대 때부터 일관적으로 내려오는 특징으로 추정되는데, 수렵도에 그려진 고구려활 또한 윗장은 화살과 거의 평행하지만 아랫장은 아래로 기울어진 형태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 활 또한 아랫장이 윗장보다 길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랫장이 윗장보다 더 긴데도 불구하고 만작 상태에선 위아래의 두 고자가 같은 수직선상에 존재해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줌통[5]이 뒤로 쏠리게 된다. (강제로 길이를 비슷하게 맞춘다는 느낌이다.)

사실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윗장이 더 긴 일본 화궁은 만작 상태에서 줌통이 앞으로 쏠리는데, 국궁은 일본 화궁과 반대로 아랫장이 더 길기 때문에 만작 상태에서 줌통이 뒤로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 탓에 국궁은 (줌통이 뒤로 쏠리는 힘에 저항하기 위해) 줌통을 '일부러 앞으로 기울이듯이' 잡고 당기는데, 이것이 소위 '고자채기'가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결론적으로 한국활은 옆에서 봤을 때 언월도 날 모양의 실루엣이 나오는 고자와 (윗장보다 더) 긴 아랫장 등의 특징이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2]

재료[편집]

국궁의 초기 재료는 나무, 대나무, 등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목재 합성궁, 뼈를 이용한 합성궁이 사용되었다. 한반도 특유의 C자형 각궁은 고대의 맥궁으로부터 이어진 합성궁 제작기술이 조선시대에 극단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활들이 공존했을 가능성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시대 이후 단순궁 형태의 활은 민간에서만 사용되었다.

국궁은 각궁, 특히 물소뿔로 만든 흑각궁을 중시했다. 그러나 한국에는 물소가 없다. 이 때문에 재료를 중국, 일본, 류큐에서 전량 수입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을 견제하려고 수량을 제한했고, 류큐 왕국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츠마 번에게 점령당했으므로, 일본에서만 수입할 수 있었다. 덕분에 중국과 일본의 물소를 남부지방에서 번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기후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참고로, 물소 뿔은 약재나 화각공예품을 만드는 데도 쓰인다.

어찌되었든, 흑각궁은 조선후기에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각궁은 장마철에 약화되거나 심하면 망가지기도 했다. 따라서 장마철은 이나 말을 다루기에도 좋지 않은데도 국경으로 침입하는 유목민족들에게 유리한 계절이라고 인식했다. 궁사들 사이에서는 "마누라는 윗목에 재워도 활은 아랫목에 재운다." 하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궁사들은 여름을 대비하여 합성장궁, 철궁, 간각칠궁 등을 준비해두어야 했다.[3]

종류[편집]

재료별 분류[편집]

골궁[편집]

고구려에서 쓰던 뼈로 만든 활이다. 맥국(貊國)의 활이란 뜻으로 맥궁이라고도 불리며, 중국으로도 수출할 만큼 품질이 좋았다 전해진다. 온전한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고구려의 벽화에 그려진 그림을 토대로 볼 때 활 몸체가 거의 완벽하게 3자를 그리며, 고자 부분이 비정상적으로 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자 2개, 활 몸체 부분 하나 해서 총 3개의 소 갈비뼈를 써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된 연구도 안된채로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고구려의 활을 전부 맥궁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맥궁은 고구려의 일부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생산되는 활을 칭한다는 문헌이 있을 뿐이며, 고구려활을 모두 맥궁이라 칭할수는 없고, 형식과 용도가 매우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용된 뼈판의 갯수 역시 한정적이지 않으며, 매우 다양하다. 또한 뼈로 만든 활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으며, 뼈판은 주요 압력부위를 보강하는 용도로 사용하였고, 이 유물이 오래 보존되어 발굴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현대의 각궁처럼 나무와 뿔, 힘줄, 뼈판을 접착제로 붙여만든 매우 정교한 합성궁의 일종이다.

뼈활, 골각궁, 골고자 등의 명칭 역시 처음 등장하는 말로, 이를 후속 작성자들이 복제 편집하며 사용하면서 마치 정식 명칭인 것처럼 기사를 내거나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는 것을 통해 굳어진 경향이 있으나 공식적으로 인정된 학술적 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와 조사를 통해 정명해야할 문제이다. 해외의 실존 유물(Atarnet공개자료)이 고구려의 활과 동일한 형태의 활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 역시 같은 문건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나, 이후 등장하는 유사 문건들에서 이를 마치 자신들이 선행연구하여 전하는 것처럼 조작하는 경우가 계속 발생하고, 제대로 분석하지 않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경향이 있으니 이 활에 대해 조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의하여야 한다.[3]

목궁[편집]

환목궁[편집]

민간용 단순궁. 산간지방이나 민간에서 사냥용으로 썼다는 옛 어르신들의 증언이 있다.

백제활의 직계후손이다. 현용 복합궁(흑각궁)이 고구려활의 직계후손이라면, 연천 목궁은 백제활의 직계후손이란 얘기이다.

일본 화궁과 상당히 닮았는데, 특히 야요이 시대~헤이안 시대의 원시 화궁(原始和弓)과 매우 흡사하게 생겼다. 이는 연천 목궁의 조상인 백제활과, 일본활의 조상인 원시 화궁이 같은 조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활과 일본활의 공통 조상은 중국 남부 오스트로네시아족이 쓰던 보우피싱용 활인데, 이게 중국 남부에서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 활은 백제, 가야, 일본 등지에서 폭넓게 쓰였으나 백제, 가야의 장궁이 고구려식 만곡궁에게 밀려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 현재는 일본에만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나주 신촌리 고분군 출토 활 등 백제활의 유물들을 보면 나무 하나만 갖고 만드는 단일궁인데다가 나무가 휜 모양 그대로 깎아서 활을 만드는 등 현대의 연천 목궁과 유사점이 상당히 많다.

이는 원시 화궁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현대의 일본 화궁은 대나무를 여러 개 이어붙여 만드는 '복합 죽궁'이지만, 헤이안 시대의 유물을 보면 백제활처럼 나무를 휜 모양 그대로 깎아 만드는, 일명 '환목궁(丸木弓)'이라 불리는 형태의 단일궁이다.

즉 이런 정황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연천목궁은 백제활, 그리고 일본활의 조상인 원시화궁의 형태를 아직까지 보존하고 있는 활이라고 볼 수 있다.

나무를 생긴 모양 그대로 깎는다 해서 원시인 활 취급하며 비웃는 의견이 있는데, 허나 만들기 어려운 건 자랑이 아니다. 제작 프로세스가 쓸데 없이 어려우면, 다른 말로 하면 효율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인류 기술 발전사는 오히려 그간 제작이 어려워 생산량 적은 것을, 수지타산에 맞도록 경제적인 수단을 새로이 개척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이것이 곧 '신기술'이다. 당시 활은 공예품 성격으로나, 문화보존의 수단이나, 관광자원으로나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 관광객을 감탄하게끔 만들던 게 아니다. 당대에 활은 최대한 효율 좋게 만들면 그게 국력, 특히 군사력과 직결되었으니 언젠가 더 쉬운 대체제가 발견되면 실전용으로는 그걸로 갈아타는 게 수순이었다 (1선 군사용에서 도태되어 민간 오락용으로 전래되는 경우는 있지만).

당연히 100% 길게 쭉 뻗은 나무만 있다면 그걸 쓰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나무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다 보니 목궁의 형태가 이렇게 못생기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괜히 일본이 단순목궁 버리고 곧은 형태의 복합죽궁으로 선회한 게 아니다.

위쪽 림이 아래쪽 림보다 훨씬 길다는 점, 위쪽 림이 만곡궁처럼 (완만한) S자를 그린다는 점, 위쪽 림의 고자가 휜 부분이 아래쪽 림 고자가 휜 부분보다 훨씬 긴 점 등 일본 화궁과 비슷한 점이 많긴 하지만 확실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일단 일본 화궁은 활을 당길 때 (위아래 길이 차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줌통이 앞으로 기우는 형태이지만 연천 목궁은 (분명 위쪽이 아래쪽보다 긴데도) 줌통이 앞으로 기울지 않거나 심지어 뒤로 기우는 경우도 있다.

이건 국궁 자체가 화살을 시위에 매길 때 줌통에서 가장 가까운 (시위의) 지점보다 위에 매기기 때문인데, 자세한 건 해당 문단 참고. 이 탓에 (일본 궁도와는 달리) 당연히 고자채기도 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데, 목궁 자체가 각궁의 우천기 스페어 느낌이고, 평소에 각궁을 쏘던 궁사가 목궁을 쏜다 해봤자 각궁과 똑같은 사법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일본 장궁을 국궁처럼 쏜다는 느낌과 비슷하다 보면 될 듯하다.

길이가 워낙 길다보니 일본활과 비슷하게 시위를 푼 상태에서 한쪽 고자끝에 창날을 달아 창으로 쓰기도 했다고 한다.

전투시에도 이걸 사용할 정도면 '정말 갈 때까지 갔다, 졌다.'고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보편적으로 단순궁은 사냥용, 습사용, 유희용이었다.

단 장력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는 방태기활(단순 죽궁)과는 달리 단순 목궁은 두께와 길이에 따라 장력을 자유자재로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방태기활보단 많이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각궁의 제작기간이나 가격 등을 생각해보면 의병들이나 군수물자가 부족한 관군들도 어느 정도 사용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육군박물관에 남아있는 실제 유물에는 염색된 가죽 / 직물로 고급스럽게 제작된 형태로 이루어져 목궁은 신분 고저를 따지지 않고 널리 사용됐을 추정할 수 있다

목궁 또한 각궁 못지 않게 보존 가치가 높은 엄연한 '국궁'임에도 그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대한민국에서 목궁 복원 및 제작을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현중순 목궁장이다.

복원이라고 해서 오해할 수 있는데, 현 목궁장은 실전된 목궁제작법을 복원한 게 아니라 당신 조부께서 만드시던 사냥용 활이 전통 목궁이 맞는지 여러 사료와 증언들을 토대로 재확인한 쪽에 가깝다. 즉 어떻게 보면 한국 최후의 목궁 제작법 전승자라 보는 게 더 정확하다.[3]

교자궁[편집]

교자궁의 경우 어느정도 논란이 있는데 조선 전기와 후기 문헌에 언급되는 교자궁에 대한 설명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한자 역시 조선 전기의 것은 絞子弓, 후기의 것은 交子弓으로 차이가 있다.

조선 전기의 교자궁은 문종실록에서 두터운 대나무와 저리갈나무를 사용해 각궁과 비슷하게 만든 활로 녹각궁과 함께 습기에 강한 복합 목궁으로 언급된다. 제조법 자체는 흑각궁과 거의 같지만 물소뿔 대신 제주도산 저리갈나무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부터 기록되는 교자궁은 국산 소뿔과 나무를 사용한 각궁 종류로 묘사되며 아교가 많이 들어가 습기에 약하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후기 군영의 활 보유량에서 흑각궁과 함께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등 여러모로 조선 전기의 향각궁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3]

죽궁[편집]

약한 활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의외로 상당히 위력이 강한 강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을 보면 최대 사거리가 167m(80 ~ 90보) 정도라고 하며 후라이팬 3개는 그냥 뚫을 정도의 위력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장력이 목궁의 2배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요즘 각궁의 최대 사거리는 330m에 달하지만 의외로 장력은 꽤 약한 편이고, 과거의 군용활은 장력이 강한 대신 사거리가 짧은 활을 썼음을 생각하면 죽궁의 위력이 크게 밀리는 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효종실록 14권(효종 6년 1655년 신유 2월 6일)에 '대구 부사 이정을 통정계(通政階)로 특별히 승진시켰다. 본도의 병마절 도사(兵使)가 본 읍의 군기(軍器)를 검열하고서 이정이 새로 만든 죽궁(竹 弓)의 제도를 계문하니, 특별히 칭찬하는 명이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구광역시의 특산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방태기활은 민간 전승용 단어로 방태기란 벙태기혹은 망태기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99년도에 나온 활이야기 풍속사 및 국궁논문집 5권에 실린 내용에 기반하면 인삼재배를 위해 대나무로 발을 만들어 그늘이나 기둥을 세울때 사용한 흔적으로 알려져있다. 가삼의 재배와 연관된 만큼 북쪽에서는 빨라야 18세기 이후에 나온 근대의 활로 유통의 발달과 인삼재배문화와 연계되어 있다. 특이한점은 이런 황해도와 경기도 일부에서는 죽궁을 목궁이라고 혼용해서 사용하였다고 구술이 있다.[3]

각궁[편집]

대표적인 국궁이다. 현재까지 제작방법이 전승되는 유일한 활이다. 전체적인 골격은 앞면은 대나무, 뒷면은 물소뿔로 되어 있고, 대림목 부분은 참나무로 되어 있으며, 고자 부분은 뽕나무로 되어 있다. 접착 방식은 민어부레풀로 붙이며, 앞면(대나무)은 쇠심줄을 발라 놓는다.

터키 활 등과 함께 가장 발전된 활로 자주 언급되는 활이며 특히 한국 각궁은 그 극단적으로 강화된 탄성이 특징적으로 언급된다. 다만 한국 입장에선 여러모로 단점도 많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활이기도 했다. 일단 한국에서 물소가 서식하지 않기 때문에 물소뿔을 전량 수입해야 했는데, 물량 중 상당수가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탓에 조선의 강군화를 경계했던 중화 왕조들에 의해 수입 규제를 수없이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이런 합성궁들이 다 그렇다지만 아교나 어교를 사용하기 때문에 습기에 약하여 군사적으로 운용하는데 불편함이 있었다. 이런 단점을 감안하고도 계속 사용했다는 점에서 각궁의 성능이 매우 높이 평가받았고, 동시에 조선이 활을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3]

향각궁[편집]

국산 황소 뿔을 이용해 만든 각궁으로 물소 뿔의 수가 한계가 있는 만큼 향각궁은 조선군에서 상당히 많이 사용된 활이다. 한국의 토종 황소 중에선 뿔이 가장 길었던 황해도산 황소 뿔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황해도산 황소뿔은 길이가 20 ~ 40cm에 달했기 때문에 3개를 이어붙이면 대충 물소뿔과 비슷한 길이가 나왔다고 한다. 제조법은 상술한 흑각궁 제조법에서 물소뿔을 황소뿔 3개를 이어붙인 것으로 바꾼 거 외엔 큰 차이는 없다. 뿔 3개를 이어붙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삼각궁, 혹은 물소뿔과 구분해서 백각궁이라 부르기도 했다.

뿔 3개를 이어붙이는 만큼 필요한 아교의 양이 더 많아 상대적으로 습기에 더 약했을 확률이 높다. 물론 위력도 비교적 떨어지는 편으로 평균적인 성능은 흑각궁의 하위 호환에 가까웠다. 다만 향각궁의 성능 역시 상당한 편이었고 무엇보다 재료 수급이 훨씬 용이했던 탓에 조선 전기 군용 활에서 흑각궁과 함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3]

녹각궁[편집]

사슴의 뿔로 만든 활이다. 문종실록에 여름철 각궁을 점화할때 시위하거나 입직하는 군사들에게 녹각궁을 차게 했다는 것을 보면 습기에 상대적으로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3]

철태궁[편집]

상술한 향각궁, 녹각궁, 교자궁이 물소뿔을 대체하려고 다른 재료를 쓴 거라면, 이쪽은 반대로 대나무를 대체하려고 다른 재료를 쓴 케이스다. 결론만 말하면 이놈도 각궁이다.

제조법은 상술한 흑각궁과 동일하나, 대나무 대신 강철을 썼다. 당시 조선에서 여태까지 주구장창 설명한 흑각궁의 내구도 문제를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고 노력한 것이 눈에 보이는 활이다. 약한 대나무 대신 내구도 끝판왕인 강철을 썼으니 당연히 훨씬 튼튼했겠지만 민어부레풀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을 것이고, 대나무에 비해 탄성이 엄청나게 떨어졌을 것이다.[3]

동궁 / 칠궁[편집]

동궁은 빨간 도료, 칠궁은 검은 옻을 칠해서 방수성을 높인 활이다. 굳이 이런 분류를 나눈 것은, 계절에 따라서 여러 종류의 활을 번갈아서 사용했기 때문이다.[3]

철궁[편집]

쇠를 구부리고 열을 가해서 가공한 활이다. 장마철 대비용으로서, 무게에 비하면 비효율적이었다고 한다.[3]

용도별 분류[편집]

예궁[편집]

예궁은 제사를 지내거나 명절에 사용한 예식용 활이다. 엄청나게 체격이 큰 무관이나 기계를 써서 당겼다. 지배자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한 활이었다. 육군박물관에 소장한 18세기 예궁 유물은 길이가 무려 247 cm에 달한다.[3]

교자궁[편집]

교자궁은 민간에서 널리 쓰인 강화궁이다. 조선후기에는 활의 중요성이 감소하여 군에서도 교자궁을 주력으로 편성했다. 한때 인터넷에는 우천시 사용한 목궁으로 보는 주장이 퍼졌지만, 교자궁 관련 기록 1, 기록 2들을 참조하자면, 이러한 복합궁도 각궁이랑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조선 전기 문종실록의 경우에 서술되어있는 교자궁(絞子弓)기록 3 과 조선 중후기에 서술되어있는 교자궁(交子弓)이 다른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와 조선 중후기의 교자궁은 이름만 같은 다른 것이거나, 조선 전기의 교자궁(絞子弓)이 조선 중후기에 좀 더 발전한 형태의 교자궁(交子弓)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견해가 있다.[3]

탄궁[편집]

탄궁은 돌 탄환을 쏘는 활로, 민간에서 사냥용으로 썼다. 놀이용으로도 많이 쓰였다.[3]

육량궁(정량궁)[편집]

육량궁은 길이 165 cm 이상의, 일반적인 활보다 훨씬 크고 두껍고 파운드 세기도 강한 활로, 김홍도의 활쏘기와 신윤복의 계변가화에 있는 커다란 활이 바로 육량궁이다. 무과시험에서 무관들을 선발하기 위해 사용했던 활로, 파운드가 최소 150파운드(약68kg)가 넘어가는 강궁이다. 육량궁의 다른 이름으로 육균궁(六鈞弓)이 있는데, 6균은 180근(115kg)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힘이 강한 사람은 몸을 앞으로 튕기면서 쏘고 힘이 약한 사람은 쏘면서 자빠진다는 기록이 있다. 힘이 약한 사람이 활을 안정적으로 당기기 위해서나, 혹은 특별히 더 장력이 강한 육량궁을 쏘기 위해 '조근대'라는 별도의 보조기구를 몰래 사용했다 전해진다. 이런 활을 300g이 넘어가는 육량전을 70보(약84m) 넘어서까지 날려야 비로소 무과시험 합격 커트라인에 들어간다.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지만, 육량궁은 전투용으로 사용하는 활이 아니다. 전시에 사용했다거나 군영에 배치했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활을 얼마나 강하게 당기는지 눈으로 보기 위해 비치한 시험용 도구이다. 물론 전투용 각궁이 정량궁과 비슷한 장력을 쓰겠지만. 다만, 상황에 따라서는 전투용으로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전투용으로 썼을 것이다. 장력도 롱보우와 대등한 파운드를 가진 걸 감안하면, 그런데 정량궁은 조선의 궁술이라는 책에는 전쟁용 활로도 사용했다고 한다.[3]

경기시설 및 용[편집]

사정[편집]

활을 쏘는 장소인 활터로 전국에 걸쳐 분포하며 조선 후기에 국궁이 번성했던 것을 보여주듯 다수의 사정이 그 명맥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황학정은 고종이 활을 쏘던 사정이고, 인천 무덕정과 전주 천양정도 전통이 있는 대표적인 사정이다.

정간[편집]

사정의 중심에 있으며 정간(正間)이라는 패가 걸려있다. 활을 쏘기 전에 정간에 인사를 하는데 이를 정간배례라 한다. 여러 연구 결과 이 정간문화는 1970년대 근대에 만들어진것으로 확인되었다. 전통적인 궁도(弓道)의 시설은 아니다.

활터구조[편집]

활터에는 사정(본 건물)이 있고 그 앞에 사대가 설치되어 있다. 과거에는 여러 가지 사거리를 두고 과녁을 두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대한궁도협회에서 관리하는 활터의 경우 사대 앞으로 공터가 있고 145m 앞에 과녁이 설치되어있다. 사대 폭은 선수간에 간격이 80cm이상이고, 과녁 좌우 옆 방향으로 10m이상 되는 위치에 대피소가 설치되어 고전의 안전을 보장한다. 사정은 사대로부터 5m의 거리에 있고, 기 게양대는 사대 좌 또는 우측방에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과녁[편집]

과거의 과녁과 다르게 궁도의 과녁은 근현대화를 거치며 형성되었다. 현대 대한궁도협회에서 공인된 과녁은 로 2m, 세로 2m 66.7cm의 사각형 모양이다. 과녁은 수직으로부터 후방 15도의 경사각이 되도록 설치되어 있다. 과녁이 여러 개이면, 과녁과 과녁 사이는 5m 이상 떨어져야 하고, 과녁 후면에는 안전지대가 확보되어 있다. 과녁은 보통 나무로 만든 구조물에 고무판이 여러 겹 덧대어 있어 화살이 관중시 충격을 완화한다.

[편집]

활은 조선시대까지는 모두 7종류가 있었다. 즉 정량궁, 예궁, 목궁, 철궁, 철태궁, 동개활, 각궁이 그것인데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은 각궁 뿐이다.

현대에는 개량궁이 보급되어 널리 쓰인다. 활에는 좌궁과 우궁이 있으며 좌궁은 왼손으로 현과 화살을 당기고 왼쪽눈으로 과녁을 겨냥하여 주로 왼손잡이들이 사용한다.

각궁[편집]

조선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유일한 대한민국의 전통적 활이다. 물소뿔, 산뽕나무, 소힘줄, 부례풀, 참나무, 대나무, 화피가 각궁의 소재이다. 각궁은 활을 쏘았을 때 활 자체가 충격을 흡수하여 사수에게 긴장과 부담을 덜어준다.

개량궁[편집]

국궁의 보급을 위하여 만들어진 활로 처음에는 글레스화이바로 만들어지다가 화학소재와 화피, 고자와 도고지를 갖춘 것이 만들어졌다.[17]각궁보다 얹었을 때 10cm가량 길고 활을 쏘았을 때 충격흡수가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화살[편집]

죽시[편집]

과거에 유엽전이라 불렸으며 현재는 촉만 바뀌어 죽시라 불린다. 대, 싸리, 도피, 꿩깃, 소심, 부레풀, 촉으로 만들며 길이는 2자5치~2자8치로 다양하다. 촉부분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둥근 모양이며, 몸통은 속이 빈 대나무이다. 끝 부분에는 깃이 3개 붙어있으며 오니를 깎아놓아 현의 절피에 걸을 수 있게 하였다.

카본시[편집]

카본금속을 합성해서 만든 것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으로 나뉜다. 죽시에 비해 값이 싸고 기상에 관계없이 사용가능하며 정확도가 높아 널리 보급되고 있다.

전통[편집]

전통은 화살을 보관하는 통이다. 지제, 죽제 기타 오동 같은 목제가 있고, 통 표면에는 송죽 같은 것을 그리기도 하고 십장생, 호랑이등을 새기기도 하며 무사의 상징을 표현하는 글귀를 써놓기도 한다. 화살 10개 내지 15개를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

깍지[편집]

활을 쏠 때 엄지 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에 끼는 장치이다. 활을 당길 때 깍지에 현을 얹고 당긴다. 깍지는 암깍지, 숫깍지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재질은 플라스틱, 물소뿔, 도자기, 금속 재질등 다양하다.

고침(稁砧)[편집]

볏집을 묶은 것을 말한다. 궁체를 확인하고자 고침(稁砧)쏘기를 할 때 주로 사용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사용하는 활터는 소수이며 보통 특수제작된 안전망이나, 솔포를 사용한다.

궁대[편집]

궁대는 활을 보관하는 천으로 된 긴 형태의 자루이다. 활을 쏠 때는 허리에 둘러 화살을 꽂을 수 있다. 궁대는 매는 방법은 외매듭으로 삼등분하여 좌궁은 좌측 뒷주머니에 우궁은 우측 뒷주머니에 매듭이 가도록 하면 된다.

복장[편집]

대한궁도협회에서 지정한 정규 대회의 복장은 상하의 모두 흰색이어야 하고 흰색 운동화를 착용한다. 경기복 상의에 소속 시도나 사정의 이름을 표기한다. 복장규정은 1970년대에 만들어졌지만 공식 대회에 모두 적용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이다. 흰색이라고 하더라도 운동복 차림이어야 하고 한복은 금지되고 있다.

우리활터에서 지정한 정규대회 복장은 상하의 한복착용을 권장하고 있으며 이외에 다양한 협회에서 활쏘기에 관하여 여러 의복들을 적용하고 있다.[1]

커뮤니티와 예절[편집]

사정은 그 지역의 궁도 모임인 사계(射契)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사계는 회원을 사원(射圓)으로 칭하며 자체적인 조직을 갖추고 예절을 중요시 한다. 사계의 구성원에는 우두머리인 사두와 부사두, 활쏘기를 가르치는 선생,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사무 등이 있다. 이 외에 활쏘기를 하면서 떨어진 화살을 줍는 사람을 연전꾼, 과녁을 맞추었는 지를 알려주는 고전, 편을 나누어 활을 쏠 때 자기 편의 관중 여부를 알려주는 거기한량과 같은 사람이 있다.

예절[편집]

국궁은 정신 수양을 강조하고 예절을 중시한다. 예로부터 다음과 같은 궁도구계훈이 전하여 온다.[23]

  • 정심정기(正心正己) 몸을 바르게 함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고
  • 인애덕행(仁愛德行) 어짐과 사랑으로 덕스러운 행실을 하고
  • 성실겸손(誠實謙遜) 정성스럽고 참되고 실속 있게 남에게 나를 낮추어 순하게 대하고
  • 자중절조(自重節操) 자신의 품의를 소중하게 하고 절개와 지조를 굳게 지키고
  • 염직과감(廉直果敢) 곧고 청렴하며 용감하고 결단성을 강하게 가지며
  • 예의엄수(禮儀嚴守) 예를 차리는 절차와 몸가짐을 엄하게 지키며
  • 습사무언(習射無言) 활 쏠 때는 말하지 말 것이며
  • 불원승자(不怨勝者) 나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말 것이고
  • 막만타궁(莫彎他弓) 남의 활을 당기지 말 것이다.

이 가운데 습사무언은 사정의 활마당 마다 비석으로 새겨져 있다.

새로 활을 쏘게 된 사람은 신입사를 하고 처음으로 과녁을 맞추면 관중례를 하였다. 사정에 도착하면 먼저 복장을 갖춰 입고 사대에 올라서기 전에 사정의 어른들께 인사를 올려야 한다. 다음으로 정간배례를 하는데 이는 초순을 쏘기 전에 정간을 향하여 절을 하는 예이다. 다음으로 활을 준비한 후 다른 사람들이 활을 쏘러 사대에 오를 때 같이 오르도록 한다. 사대에 올라서는 과녁을 향해 인사를 한 후 '활 배우러 왔습니다'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활 배우러 왔습니다' 라고 하면 '많이 맞히세요'등 덕담을 해준다. 사대에 올라 활을 쏠 때는 가장 연장자 또는 높은 분부터 좌측에서 순서대로 서서 쏜다. 활을 쏠 때는 잡담을 금하며 이는 남이 활을 쏠 때도 마찬가지다. 활을 한 순(5시)을 쏘면 다시 과녁을 향해 인사를 한 후 사대에서 내려온다. 이 때 다른 사람이 모두 다 쏠 때까지 기다려 모두 함께 퇴장할 수 있도록 한다. 일정 시간을 쉬고 다시 입장하며 몇 순을 쏜 후 화살을 주우러 갈 때는 모두가 함께 주우러 가며 함부로 사대 앞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한다.

정간례에 대해서는 필요없다는 의견도 있고 활터의 예절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1]

단계[편집]

국궁은 그 기본이 무예인만큼 단이 있어 궁도정신을 선양하고 유단자의 긍지를 진작시킨다. 승단급은 한번에 2계단급 이상이 허용되지 않으며 승단은 1년에 최대 2회까지만 허용된다. 승단 심사 때는 9순, 즉 45시를 쏘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다음의 심사기준에 의해 단을 부여 받는다. 5단 이상의 유단자에게는 ‘명궁’의 호칭이 부여된다.

승단심사표

  • 초단: 24중 이상
  • 2단: 26중 이상
  • 3단: 28중 이상
  • 4단: 30중 이상
  • 5단: 31중 이상
  • 6단: 33중 이상
  • 7단: 35중 이상
  • 8단: 37중 이상
  • 9단: 39중 이상
  • 10단: 41중 이상

이 외에도 활쏘기에 관련된 다양한 협회에서 다양한 승단방법을 적용하고있다.[1]

다른 나라 활들과의 비교[편집]

현대의 각궁은 기본적으로 민간 각궁이 베이스고, 조선군이 사용하던 전투용 국궁과는 재료나 방식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타국의 전투용 활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또한 이마저도, 개화기 ~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외형으로 보나 구조로 보나 전통 민간 활 유물들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성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각궁도 타국의 전통 활들과 비교하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다. 이로 인해, 근래 들어 각궁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단체들의 움직임이 많다.

다만 활의 장력이란 건 그냥 세게 만들고 싶으면 활몸을 두껍게 하면 되는 물건이라, 높은 파운드로 제작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활들 간의 우열을 가릴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장력이 강하단 건 그냥 그 활을 사용하는 사람이 장사였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타국 활들과 비교하기 앞서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조선의 경우 세조 시기에 천민이나 양인들 대상으로 뽑은 정예 보병 부대인 장용대라는 부대의 입대 조건 중 하나가 100근의 활을 당기는 것이다. 이는 현재 기준 약 141파운드에 달하는 강궁이다. 또한 왕이 이동할 때 호위하는 부대인 만강대의 선발 조건은 120근의 활을 당길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는 약 170파운드에 달한다. 명나라 천공개물에 나오는 활의 장력도 120근인데, 이는 약 158파운드에 달한다. 이처럼 전문적으로 활을 다뤘던 군인들은 장력 100파운드를 넘는 강궁을 다루는 경우가 흔했으며 활을 장력으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일단 유럽의 경우는 영국의 롱보우가 매우 유명하다. 동유럽에서는 훈족과 기타 유목민족들의 영향을 받은 헝가리의 각궁이 유명하다. 제작방식이 한반도의 각궁과 꽤 유사하다. 또한 역대 중국 왕조와 북방의 유목 민족들의 합성궁은 기본적인 제작방식이 한반도와 매우 유사성이 있다.

일본의 화궁은 목제 복합궁으로 약간 특이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평균 길이가 220cm 정도로 180 ~ 200cm 수준인 잉글리시 롱보우보다 더 큰 크기를 자랑하며 활 위쪽이 아래쪽보다 훨씬 긴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 크기 때문에 대궁(大弓, 다이큐)이란 이름이 붙었을 정도이다. 이러한 거대한 활은 헤이안~가마쿠라 시기 사무라이들의 상징과도 같은 무기로 무로마치 말기~에도시대에는 궁태궁(弓胎弓, 히고유미)이나 중등궁(重藤弓, 시게토 유미 등의 종류가 등장했다. 기마사격도 가능하지만 크기가 워낙 큰 만큼 휴대나 편의성 면에서 아무래도 불편함이 있긴 하다. 그리고 일본 활이 단일 목궁으로 제작하여 습기에 대한 내구성이 높다는 오해가 있는데, 사실 일본 활도 여러 나무들을 아교로 조합해 만든 복합궁이라 습기로 인해 아교가 녹을 가능성이 있어 옻칠 등 관리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일반적인 합성궁들처럼 습기에 약하다. 그리고 위력이 약하다는 편견도 있으나 각궁 같은 합성궁 수준은 아니어도 위력 자체는 무난하게 나온다.

최고의 활을 꼽을 때 언급되는 터키 각궁이다. 시위를 당긴 모습도 검색해보자. 시위가 없을 때의 독특한 모양이 유명하다. 시위를 걸면 명나라 장궁과 비슷한 선을 그리고, 당기면 한국의 각궁처럼 탄성이 높은 모양을 보인다. 활을 자주 쓴 민족답게 이밖에도 다양한 활이 있었다.

만주족의 만주 활은 유목민족의 활 중에서 가장 거대하며, 비거리는 짧지만 저장되는 운동 에너지(J)가 높아서 무거운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기마 사격에는 비거리가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발달한 특색이다. 궁기병들은 속력을 이용하여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목표물을 정확히 쏘고 지나치는 공격 이탈 능력, 무거운 화살을 이용하여 일격으로도 확실히 살상력이 보장되는 '빠른 단발 사격'이 가능한 활을 선호했다. 한반도에서도 기마병을 많이 편성했던 시대에는 투박한 만주 활을 닮은 국궁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국궁은 약간 작지만 부려놓으면 만주 활과 비슷한 형상이 된다. 특히, 한반도에서 기병의 편성 비중이 높은 시대일수록 닮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국궁은 만주 활과는 정반대로 고탄성 활이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조상들은 만주 지방의 활을 비교한 예시가 많다. "만주 활들은 너무 투박해서 크기에 비하면 성능이 웃음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습기에는 한국 활보다 훨씬 강하므로 단점만 보면 안 된다. 우리도 장마철에 쓸만한 활을 만들려면 본받을 점이 많다."라고 비평과 반성을 하고 있었던 점을 알 수 있다.

만주 활은 궁기병에게 중요한 짧은 Draw Length와 파괴력을 중시했고, 한반도의 국궁은 탄성이 높은 재료를 이용하여 비거리와 연사력을 중시했다. 즉, 국궁은 극단적인 탄성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탄력이 매우 낮은 만주 활과는 정반대의 특성을 지녔지만, 목재 복합궁은 쌍둥이처럼 닮은 거대한 장궁을 병용해서 만들었기에, 서로 밀접한 교류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2007년 한국내에서 열린 세계민속궁축전에서 한국 각궁과 더불어 120m 떨어진 과녁을 맞히는 데 성공한 유일한 활이었다. 대나무 재질인데도 뛰어난 성능을 보여줬는데, 이것은 부탄 지역의 특수한 대나무 덕분이다.

당시에 참석한 현대의 몽골, 터키, 헝가리 각궁은 부탄 죽궁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는 부탄에는 근대까지도 전투용 활의 맥이 남아있었으며, 현대까지도 활이 스포츠로서 발달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즉, 활은 사용자와 필요성이 갖추어져야 발전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재질이나 형태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활의 성능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교훈도 준다.[2]

현대 국궁[편집]

1899년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독일 제국의 황자이자 프로이센 왕국의 왕자인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은 한국의 전통 무술을 보여 달라고 고종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하인리히 황자는 그렇게 시연된 여러 무술 중 특히 궁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아예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국궁을 직접 쏴 보기까지 했다. 프로이센 왕국의 전통적인 군국주의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그는, 국가적으로 궁술을 장려해서 강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국민 스포츠로 자리잡게 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이에 고종 황제는 그의 제안대로 궁술 클럽 결성을 지원하였다.

이후 1910년 일제강점기 당시 '활쏘기 금지령'과 해방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하여 민간에 목/죽궁 관련 서민 활쏘기 문화는 사실상 사멸하였으며, 상류층의 문화인 각궁 활쏘기가 이어져 내려와 현대의 국궁의 기초가 되었다.

전국체육대회, 육사배 국궁대회, 전국대회는 아직 존재하지만 일부 국궁 매니아들만 즐기는 마이너한 스포츠가 되었다. 국궁신문의 일본 규도장 견학문 중에 저자의 모교에도 국궁장을 도입하자고 건의했다가 "양궁을 수련하면 실력에 따라 학교에서 장학금도 받고 아시안 게임, 올림픽 게임에도 나갈 수 있으며, 성적이 좋으면 국가로부터 평생 연금도 받으며, 양궁으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대우를 받는데 아무 전망도 없는 국궁을 수련하여 세월을 낭비할 학생들이 있겠는가?"라면서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는 씁쓸한 얘기가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한국 학교 중에 국궁을 가르치는 곳이 전무하지는 않지만, 마이너라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의 궁도 문화에 비해 한국의 국궁 문화가 많이 쇠퇴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일본의 경우 2015년 기준 일본 궁도(弓道)연맹의 가입 인구수는 약 14만 1000여명이다. 이 중 연령층을 살펴보면 약 7만1000여명(50%)이 고등학생으로 제일 많으며, 중학생이 1만 3000여명(9%), 대학생이 약 1만 4000여명(10%)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국궁인구는 국궁신문 등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약 3만 5천여명 가량으로 전국적으로 월에 1 ~ 2회 정도의 대회가 개최되고 지역대회까지 감안하면 매주 경기가 열릴 정도로 상당히 열성적인 취미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같은 계열의 양궁과는 달리 일반인의 취미로서의 접근성 자체는 더 좋은 편이라 아무래도 이쪽이 취미영역으로는 더 발전하기도 했다.

다만 상술했듯 일제강점기의 민족분열과 각종 근현대사의 풍랑으로 인해 통일된 규격을 갖춘 국궁의 표본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며, 각 활터마다의 전통이 모두 다르다. 현재 각종 단체, 수련의 방향이나 노선의 차이로 심하면 키배가 벌어질 정도로 분열이 심한 상태다. 대표적인 것은 사법 논쟁과 대한궁도협회의 부패 문제이다. 마음수양이 된다는 활을 배우는 기반 잡힌 성인들이 많은 단체에서 키배 벌이는 게 의외로 무시무시하다

국궁과 활쏘기 문화에 대한 논의들은 공통적으로 현대사회에서 활쏘기가 본질적으로 취미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한계를 보인다. 이 문단에도 인용된 국궁신문 기사의 필자는 "양궁을 하면 상도 타고 사회적인 보상이 있지만 국궁은 보상이 없어 활성화되지 못한다"는 지인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했다. 아무리 영세한 매체더라도 언론이라는 이름을 건 이상 취재원의 발언에 대해 일정한 검토가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국궁은 본질적으로 취미이다. 한국내의 양궁 동호인들에게도 활쏘기는 취미일 뿐이다. 중, 고등학생이 클럽활동을 하면서 엘리트 체육인으로서 성공할 가능성과 사회적 보상을 생각하는 경우는 없다. 전국 각지의 취미 축구인들이 축구선수로 성공하고 싶어서 공을 차는 것이 아니다.

또한 2021년의 시점에서 살피건대 취미 또는 동호인 집단의 규모 면에서는 한국내에서는 국궁이 양궁보다 널리 보급된 상태이다. 활쏘기를 하는 활터의 수만 보더라도 정규 사거리를 쏘는 양궁장을 찾기는 쉽지 않은 반면 국궁장은 약 360여곳으로 전국 각지에서 차량으로 1시간 이내에 접근이 가능하도록 흩어져 있다.

활터에 새로 유입되는 취미인구가 줄어들고 동호인 집단이 고령화되는 것은 2021년 현재 한국의 대중사회가 국궁 활쏘기를 매력적인 취미로 여기지 않거나 또는 매력을 느낄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또한, 활터 특유의 문화도 한몫한다. 현대사회에서 활쏘기와 같은 취미가 매력을 가지려면 건강 측면에서든, 재미 측면에서든, 이미지 측면에서든, 사교적인 측면에서든 사람을 끌어들일 이익이 보여야 한다.

지금의 국궁은 건강 측면에서든 (145m의 원사만 쏘는 방식은 운동량이 크지 않음) 재미 측면에서든 (처음 사대에 서려면 1달 이상 걸리는 등 재미를 느끼기까지 오래 걸림) 이미지나 사교적인 면에서든 (국궁을 한들 돈 있고 명예 있는 사람들과 사귀는 기반이 되거나 자신을 뽐낼 수 있는 것도 아님 ) 도움이 안되는 스포츠이다. 따라서 단지 '활쏘기'라는 무술 그 자체에 꽂힌 소수 매니아들의 취미가 되는 것이다.

활쏘기 취미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청소년기의 학교 클럽활동을 확대해 접촉 자체를 늘리고, 30m와 60m 등 근사 종목을 함께 수련하도록 해 재미를 느낄 지점을 늘려야 한다. 더하여 동적인 활쏘기 (일정한 코스를 따라 걷는 보사 등)를 늘려 걷거나 달리는 과정을 추가함으로써 운동량도 늘리는 방안을 고안하는 것도 고려할 법하다. 일본 궁도도 금방 지금의 위치로 올라온 것이 아닌, 1976년부터 지속적인 취미 활동 장려로 인한 결과이므로, 국궁이 남녀노소 가볍게 즐기는 전통 스포츠의 위치로 올라오려면 국제 대회 우승 등의 즉각적인 결과를 바라지 말고 장기적으로 지원해 나가야 할 것이다.[2]

배우는 단계[편집]

국궁을 배워보고 싶다면, 각 지역마다 꼭 하나씩은 있는 국궁활터를 찾아가면 된다. 서울, 수도권부터 지방까지 웬만한 구, 군 단위마다 활터가 존재한다. 이렇듯 배울만한 곳은 꽤 있지만 실제로 쏘는 데에는 상당한 숙련이 필요하다. 보통 145m 사대에서 쏘기에 장력이 몇 십 파운드는 되기 때문에 의외로 힘과 기술을 많이 요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안 힘든 일 없다지만 장난감으로 생각하고 입문했다가는, 생각보다 만만찮은 활에 좌절할 수도 있다. 물론 활터에 찾아가 처음 찾아왔다고 하면 요식으로 30여 분 간단히 쏘는 법을 가르쳐 준 뒤, 실제 화살을 걸고 쏠 수 있게 해주는 곳도 더러 있다. 이 경우에는 양궁 과녁이나 스티로폼을 덧댄 훈련용 과녁이 있는 발시 및 근사 훈련장을 따로 만들어서 해결한다. 그러나 처음을 잘못 배울 경우, 자세가 잘못되어 손목 안쪽이 피멍투성이가 되는 등 대세 흥미를 잃을 수 있으므로, 도전해보고 싶다면 인내를 갖고 배워보도록 하자.

일단 원사가 가능한 40-60파운드대 활을 당길 수 있게 되어도 안전사고를 내지 않을 만한 실력이 되어야 사대에 설 수 있게 허락해주는 경우도 있다. 서울 내 활터로 예를 들자면, 황학정은 도서관 및 학교와 붙어있기 때문에, 황학정에서는 사대에서 안전하게 습사 가능한지 검증하는 시험을 따로 본다. 석호정은 원사하다가 삐끗하면 화살이 속으로 그대로 사라져버리며, 육사 국궁장(화랑정)은 알다시피 엄연히 군사시설인 사관학교 내부에 있어서 잘못 쏘면 상당히 골치아파진다.

사실 활터의 진입장벽이 높기때문에, 나이가 어린 학생등은 쉽게 접근하기는커녕 아예 회원 자체로 받아주질 않는다. 사실 받아주더라도 구세대의 문화를 견디기가 힘들다.

이 또한 현재 활터문화의 문제 중 하나로, 국궁의 존속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쳐나가야 할 문제다.

현대인들은 활쏘기를 재미있는 취미이고, 스포츠라고 여기나, 국궁장에서는 궁도는 예절이면서 또 운동이라고 묘사한다. 딱히 활쏘기만의 예절이 있는 것은 아니고 후배가 선배에게 깍듯하게 하거나 사대에 줄 맞추어 서는 것 등을 예절이라고 말을 한다. 그래서 궁도장에선 나이가 어린 사람일수록 부담이 집중된다. 단순히 운동을 즐기고 싶더라도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사범 또는 구사가 신사에게 무례하고 일방적이어도 달리 해결할 길이 마땅치 않다. 승단이나 경기에 관심이 없는 입문자에게 경기복부터 구매하게 하거나 높은 파운드의 활을 다루게 하여 다치게 하는 일도 발생한다. 때문에 나이 최소 50대 이상이고, 시간과 여유가 있는 사람이 국궁장을 즐기는 편이다.

현재는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접장이 되기까지 계속 비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신사가 사대에서 과녁에 1발 명중하면 초시례라고 하여 국궁장에 한턱을 쏘거나 또는 국궁장에 기부를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2발, 3발, 1순 5발을 모두 맞추어 접장이 될때까지 계속 비용이 들어간다. 3발 삼중례부터 시작하거나, 또는 5발 오중례때 돈을 내는 등 국궁장 마다 다르다.이런 부분은 회원 가입할때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경우도 많으니 잘 알아보는 것이 좋다.

  • 집궁
처음 활을 잡는 것을 국궁 용어로 집궁이라 한다. 집궁례를 치르는 활터도 있지만 보통은 생략하는 듯. 집궁을 한 신사는 우선적으로 활줄 매기와 풀기 등 기본적인 장비 사용법과 궁도구계훈, 집궁제원칙 등 국궁의 기본부터 배우고 시작한다.
  • 빈활 당기기
본격적으로 초보자용 활(대략 20 ~ 30파운드)을 사용하여 빈활을 당기는 단계를 시작한다. 아마도 시위를 끝까지 당기지 못하고 팔이 떨리는 자신을 보며 옛 궁수들의 마음을 느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18 ~ 20 파운드 정도 되는 활은 초등학생들이 대회에서 사용하는 수준의 강도밖에 되지 않는데, 자세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으면 성인 남성이라도 끝까지 당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국궁이 팔만을 써서 당기는 것이 아닌, 하반신의 지지와 등근육, 뱃심 등 포괄적으로 힘이 들어가야 하는 운동이기에 그렇다. 여하간 이런 식으로 겨우 궁력(활을 당기는 힘)이 길러지면 단계적으로 더 강한 새로운 활(40 ~ 50파운드)을 써서 다시 이 단계를 밟는다. 그동안 쓰지 않던 근육을 계속해서 써야 하니 이 쑤시고, 깍지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엄지손가락에 걸리는 장력이 장난이 아닌지라 상당히 고달프다. 게다가 살을 직접 내지도 않고 설령 시험삼아 몇 발 쏴본다 한들 아직 자세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신사들은 과녁 가까이 살을 보내는 것 조차 어렵기 때문에 상당히 지루한 과정이기도 하다. 젊은 신사들은 이 과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두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한다. 어느 정도 궁력을 완성시켰다 판단될 때, 사범님의 허가를 통해 주살을 내는 단계에 들어간다.
  • 고침(稁砧)쏘기
고침(稁砧)이란 볏짚을 엮은 것이다. 고침(稁砧)쏘기는 볏짚을 묶은 것에 활을 쏘아 궁체와 활쏘임을 연습하고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볏짚에 꽂히는 화살 기울기를 통하여 궁체가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유추 할 수있다. 과거에는 볏짚을 묶어서 사용하였으나 현재 국내에서는 주로 폼타겟을 이용하거나 안전그물망 혹은 특수그물망으로 제작된 솔포를 이용하여 고침(稁砧)쏘기를 연습한다. 동아시아에서 활을 쏘는 기본 연습 법 중 하나이며 집궁 순간부터 활을 놓을 때까지 계속 연습하는 법 중 하나이다. 다만, 고침(稁砧)쏘기를 하지 않는 국궁장도 상당수 존재한다.(아마 궁체보다는 과녁을 잘 맞히면 그만이라는 풍토가 영향을 준듯 하다.)
  • 주살내기와 첫 습사
주살이란, 줄+살의 합성어로 줄을 매달아 회수하기 편하게 만든 화살을 말한다. 본격적으로 사대에 오르기 전에 주살을 내게 되는데, 최초로 살을 매겨 쏴봄으로서 사대에서의 두려움을 줄이고 완전히 당겨 활시위를 놓는 연습을 하는 일종의 트리거 훈련 방식이 되기도 한다. 한번 쏘고 나서 회수가 편리하기 때문에 진짜 화살을 쏘게 된 때에도 자세 연습을 위해 한번쯤 쏴보는 것도 좋다.
그렇게 주살연습을 어느 정도 끝내면 드디어 첫 사대에서 습사(習射)를 실시할 수 있다. 기본 자세를 숙지하고 성실하게 연습에 임했다면 빠르면 한 달 안에 과녁 근처로 화살을 보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과녁을 정확히 조준하고 명중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시 연습이 필요하며, 적어도 수 개월은 꾸준히 습사를 실시하여 자세를 완벽히 몸에 익혀야 비로소 원하는 방향으로 살을 보낼 수 있게 된다.
  • 자기수련
이후 습사를 시작하여 평균 1순[32] 중 2발 정도 맞히게 되면 자신과의 싸움 단계가 된다. 국궁은 대련이고 뭐고 없는 철저히 1인 무예기에 좀 외로울 수도 있다. 자세를 제대로 잡고 마음을 다스리며 호흡도 다스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될 것이며, 결국에는 계속 쏴보면서 연습하는 게 제일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사다성(多射多省)이라 했다.
그래도 한계의 벽에 부딪혀 나아갈 길이 없다면, 선배 접장님들이나 사범님께 여쭈는 편이 좋다. 경험자의 말을 따른다는 점도 있지만, 자신의 잘못은 남이 보는 눈이 가장 정확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연습하여 1순을 전부 명중시키게 된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드디어 몰기(沒技)를 한 것이다. 몰기한 신사는 접장이 되어 승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승단을 하는 데 별다른 제한은 사실상 없지만 이 정도의 실력은 되어야 승단에 용이하다.활 수련에 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이곳에서 볼 수 있다.[2]

국궁 장비와 각종 가격 일체[편집]

  • 활 / 화살: 국궁을 하는데 빠져서는 안 된다. 카본 등 합성섬유로 만든 개량궁과 전통의 각궁이 있으며, 대한궁도협회 공인 4단 이상부터는 대회에서의 각궁 사용이 의무화되며, 대회에서 동일 점수가 나올 경우 각궁 / 죽시 사용자를 우대한다. 마찬가지로 화살 또한 카본 개량살과 대나무살(죽시)이 있다. 가격대는 각궁 / 죽시 쪽이 압도적으로 비싸다. 개량궁 / 살은 각각 25만원/1만원대지만 각궁 / 죽시는 대략 75만원 / 4만원대. 개량궁의 경우는 공장제지만 각궁 메이커는 개인제작인 경우가 많기에 가격대와 퀄리티가 아주 다양하다. 활을 한 장 사면 메이커마다 다르지만 보통 활가방, 활을 싸는 궁대, 줌통피, 추가 활시위 등이 죄다 따라온다.
개량활과 각궁의 경우 대한궁도협회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나갈 것이라면 대한궁도협회에서 인증한 공인된 개량궁/각궁을 사용하여야 대회에 나갈 수 있다.
  • 깍지: 역시 국궁에서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다. 엄지손가락에 껴 엄지에 집중되는 활의 압력을 줄이고 손가락을 보호하는 역할이다. 가격대는 대략 3만원 가량. 손에 끼는 물건이기 때문에 전국대회장 같은 곳에서 파는 깍지를 직접 껴 보고 맞추어 사는 것이 좋다. 손가락은 인체 말단 부위기 때문에 아침의 굵기와 저녁의 굵기가 약간 다르다.(심하면 플라스틱 깍지 1호 정도.) 또 뿔 깍지는 날씨에 따라 사이즈가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여유가 있다면 크기를 약간 달리해서 여러 개 갖춰두는 것이 좋다. 깍지 수급이 생각보다 힘들기 때문에 신사들이 곤혹을 치르는 경우가 의외로 있다.
  • 과녁: 현대에는 거대한 과녁이 유명하다. 과거에는 나무 사이에 천을 걸거나, 가죽을 씌우고 동물 모양의 그림을 그려서 썼다고 한다. 연구기사 당연히 국궁장으로 가면 설치되어 있다. 습사용이라고는 해도 국궁은 장력에 비해서 탄력이 상당하므로 아무 데서나 과녁을 놓고 쏘려고 하면 안된다.
  • 입회비: 국궁장에 입회할 때도 대한궁도협회에 등록비 겸해서 내는 입회비가 있고, 국궁장 사용료로 내는 월회비 등이 있다. 국궁장 자치로 운영되고 있기에 회비는 각 지역마다 모두 다르다. 현재 전국에 산재한 370여곳의 대부분 활터가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대한궁도협회 동호인들이 무상으로 임차하여 사용하면서 회원이 아닌 사용에 제한이 따르거나 입회를 받는 행위 등을 하고 있다.[2]

대회[편집]

국궁만을 사용하는 대회로는 전국체육대회의 궁도 종목, 육사배 국궁대회, 전국대회 등이 있다.

국민생활체육궁도연합회의 주도로 세계민족궁협회(World Traditional Archery Federation·WTAF)이란 단체가 설립됐는데, WTAF는 2005년부터 세계민족궁대축전(World Traditional Archery Festival)이라는 행사를 2015년까지 개최하였다. 1회 축전에서는 국궁을 포함해 각국의 전통 활을 시연하는 정도였지만 2회 이후로는 각국 선수들이 자국의 전통 활과 전통 복장을 가지고 대결을 펼치는 대회가 되었다고 한다. 외국 선수가 한국 국궁을 가지고 와서 경기를 치른다든가, 경기가 끝난 뒤 한국 국궁을 사서 귀국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다고 한다.

1회 세계민족궁 대축전은 충남 천안 종합운동장에서 개최되었고 그 일부 행사로 독립기념관 주변에 있는 궁도장 시설 천안정에서 각 나라의 민속궁을 동시에 시범하는 행사도 개최되었으나 이후 대회에서는 대한궁도협회의 영향을 받는 기존 활터 사두들이 시설 사용을 불허하여 종합운동장 등에서만 대회를 주최하여 오고 있으며 민족궁 대축전에 참여하는 궁사들도 기존 사정이 아닌 학교 운동장 등에서 습사를 하여 참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한궁도협회는 민족궁대축전에 대해 초기부터 부정적 입장이었으나 2016년 대한궁도협회와 생활체육궁도연합회가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체육단체 합리화 지시에 의해 통합됨으로서 형식상 민족궁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로 입장이 바뀌었다. 이후 명확한 입장 표명은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없는 상태. 세계민족궁대축전 행사는 2015년 청주에서 마지막으로 개최된 이후 중단되었다.

활쏘기대회에서 전통 장비를 보존하려는 시도는 다양하게 시도되는 중이다. 각궁의 경우는 사용법을 배우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각궁대회를 치르고자 해도 지원자가 많지 않아서 상금을 크게 올린다든지 하는 여건의 변화가 없으면 치르기가 어렵다. 그래서 다루는 기술을 배우는데 시간이 걸리는 각궁의 경우는 자유롭게 하되,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죽시를 대회의 조건으로 거는 대회도 있다. 온깍지동문회에서 주관하는 <온깍지 활쏘기 한마당>에서는 이런 조건을 감안하서 대회를 치른다.

대회주최측에서는 고민이 그것이다. 각궁죽시 조건을 걸면 참가자가 적고, 개량궁카본살을 허용하면 전통성이 상실된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화살부터 죽시로 바꾸고 차차 각궁대회로 나아가도록 중간단계의 유도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죽시를 대회 조건으로 내세운 온깍지동문회의 대회는 눈여겨볼 만한 일이다.

기사(騎射, 말 타고 활 쏘기)를 전문으로 하는 한민족전통마상무예격구협회라는 단체에서는 세계기사연맹(World Horseback Archery Federation, WHAF)라는 국제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WHAF는 2004년부터 세계기사선수권대회(World Horseback Archery Championship)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각국에서 활동하는 기사 수련자들이 대거 참가한다고. 이 대회 역시 선수들이 한국 국궁(단 크기가 작은 동개활 사용) 등 자국의 전통 활을 가져 와서 쓴다.[2]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이동: 1.0 1.1 1.2 1.3 1.4 궁도〉, 《위키백과》
  2. 이동: 2.0 2.1 2.2 2.3 2.4 2.5 국궁〉, 《나무위키》
  3. 이동: 3.00 3.01 3.02 3.03 3.04 3.05 3.06 3.07 3.08 3.09 3.10 3.11 3.12 3.13 3.14 국궁/재료와 종류〉,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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