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전놀이
차전놀이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하는 민속놀이의 하나이다. 경상북도 안동에서는, 두 편을 나누어 동채에 탄 장수의 지휘 아래 수백 명의 장정이 동채로 상대편을 공격하여 상대편 동채를 먼저 땅에 닿게 한 편이 이기며, 춘천 ㆍ 가평 등지에서는, 마을별로 편을 갈라 외바퀴 수레를 서로 부딪쳐 먼저 떨어지는 쪽이 진다.[1]
목차
[숨기기]개요[편집]
차전놀이는 경상북도 안동지방에 전해내려오는 민속놀이이다. 1969년 1월 7일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동채싸움이라고도 한다. 차전놀이는 1937년까지 연중행사로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낮에 강변 백사장이나 벌판에서 거행되다가 일제에 의하여 금지되었다. 8·15광복 후 1958년 건국 10주년 기념행사로서 공보부가 전국 민속예술 제전을 개최하면서 다시 부활하였고, 1966년에는 안동농업중고교 학생이 본격적 차전놀이를 연출하였다. 1969년에는 '사단법인 안동차전놀이 보급회'가 설립되고 이 해에 안동 차전놀이가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차전놀이의 대표격이 되었다.
안동차전놀이의 유래는 통일신라 말에 후백제(後百濟)의 왕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 왕건과 자웅을 겨루고자 안동으로 진격해왔을 때 이곳 사람들은 견훤을 낙동강 물속에 밀어 넣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팔짱을 낀 채 어깨로만 상대편을 밀어내는 차전놀이가 생겼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견훤이 쳐들어왔을 때 이 고을 사람인 권행(權幸) · 김선평(金宣平) · 장정필(張貞弼)(이들을 모신 3태사묘가 안동에 있어 지금도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이 짐수레와 같은 수레 여러 개를 만들어 타고 이를 격파한 데서 비롯한 놀이라고도 한다.
놀이는 먼저 부정을 타지 않게 정성껏 베어 온 길이 20 ∼ 30척의 참나무를 X자 모양으로 묶어 동채를 만들고 끈으로 단단히 동여맨 다음, 가운데에 판자를 얹고 위에 방석을 깔아 동여맨다. 동채 머리에는 고삐를 매어 대장이 잡고 지휘할 수 있게 하고 판자 뒤에는 나무를 X자 모양으로 하여 4귀를 체목에 묶어 동채가 부서지거나 뒤틀리지 않게 한다. 동채꾼은 대장 · 머리꾼 · 동채꾼 · 놀이꾼으로 이루어지며 대체로 25 ~ 40세의 남자 500여 명이 동서로 갈리어 승부를 겨룬다. 동부의 대장을 부사(府使), 서부의 대장을 영장(營將)이라고 하며 승부는 상대편 동채가 땅에 닿거나 동채를 빼앗으면 이긴다.[2]
역사[편집]
안동 지방에서 내려오는 전승에 따르면, 후삼국시대 말기인 930년에 지금의 안동에서 고려와 후백제가 고창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당시 후백제의 왕 견훤은 지렁이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졌는데, 그는 모래땅에 진을 치고 있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지렁이로 변해 모래 속으로 재빨리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왕건 입장에서는 그것 때문에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는데, 이때 안동 출신의 권행, 김선평, 장정필 세 사람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윽고 고려군과 후백제군은 합전교(合戰郊, 現 안동시 송현동)에서 결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 세 사람은 견훤이 지렁이의 화신이라는 데에서 꾀를 내어 안동 사람들로 하여금 낙동강에 소금을 풀게 하고 큰 나무를 묶어서 앞으로 진격하게 하였더니 견훤이 강에 빠져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창 전투는 승리하게 되었고, 후삼국통일의 향방을 가르게 되었다. 왕건을 도와 고창 전투를 승리로 이끈 권행, 김선평, 장길 세 사람은 각각 성씨를 하사 받아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지며, 왕건은 이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하여금 동쪽을 평안케 했다 하여 고창에서 안동(安東)으로 지명을 고쳤다. 차전놀이는 고창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 안동 사람들 놀이로 만든 것이라 한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전승력이 약화되어 온전한 전승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922년 안동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관심 속에서 소규모로 재개되었다. 하지만 양편의 싸움이 워낙 격렬하여 차전의 연행을 엄금시켰으나, 1936년 음력 2월말 경북선 철도의 개통에 즈음해서 한편의 참여 인원을 500명으로 제한한다는 조건 하에 차전의 연행을 허가했다. 인원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이 참여하여 전개한 이 차전은 놀이도구인 동채가 등장하기도 전에 앞머리꾼들의 싸움이 벌어져서 몇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막을 내렸다.
본격적인 차전의 전승은 중단되었지만 약식동채를 이용한 소규모의 차전은 읍내 각 마을의 청소년 또는 읍외의 오천과 금소 등지에서 1940년대 초반까지 전승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의 해방 이후의 혼란,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 이상 차전의 전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6년 안동중학교 개교 2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던 당시 교장이었던 박순호 교장의 노력과 및 교사들이 나중에 초대 기능보유자가 된 김명한의 도움을 받아 차전을 재구성함을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렇게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안동고등학교 학생들에 의해 부활했다. 이 공로로 박순호 교장은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그 3년 후인 1969년 1월 7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안동차전놀이보존회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다.[3]
상세[편집]
동채싸움은 놀이기구인 동채의 형태와 놀이의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현재 문화재로 전승되고 있는 약식동채를 이용한 '째기동채싸움'으로, 전통사회에서는 청소년들이나 읍외의 마을 사람들이 채택하였다. 또 하나는 정식동채를 이용한 '정(본)동채싸움'으로, 동채의 하부에 '올림대'라고 하는 바퀴모양의 부속장치가 달려 있고 대규모의 인원이 참여하는 읍치(邑治)의 놀이판에서 채택하였다. 이 형태의 동채싸움은 20세기 초에 전승이 단절되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동채싸움의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머리꾼'이라고 하는 수십 명의 전위대(前衛隊)들이 강한 몸싸움을 벌여 상대편의 진용을 흐트러뜨린 뒤 양 편의 동채가 공중에서 맞부딪혀 먼저 땅에 떨어지는 쪽이 패하게 된다. 이와 같은 놀이방식은 20세기 이후의 약식동채를 이용한 놀이에서 확인된 것으로 그 이전의 동채싸움에 대한 문헌들은 다른 양상의 놀이 방식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동채싸움은 원래 대보름에 연행하였지만 지금은 매년 10월 초에 벌어지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 연행하고 있다.
동채싸움에 관한 기록은 다른 대동놀이에 비해 많이 남아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08년에 편집이 완료된 권기(權紀)의 『화산지(花山志)』이다. 이 책의 풍속조에 "차전은 석전과 같다. 동채를 서로 부딪혀 부서지는 쪽이 진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소략한 기사는 17세기의 동채싸움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다. 먼저 "석전과 같다."는 대목이 주목된다. 이 말은 차전과 석전이 같은 놀이라는 것이 아니라, 놀이의 시공간 · 참여집단 · 편구성 · 주술종교적 성격 등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 "매년 대보름에 부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가운데 개울을 기준 삼아 좌우로 편을 가르고, 돌을 던지며 서로 싸워 승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일년의 풍요를 점쳤다."고 석전을 소개하고 있다.
안동의 세시놀이로서 석전은 첫째, 매년 대보름에 행해진다. 둘째, 부내(府內)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참여한다. 셋째, 부의 가운데를 흐르는 내[川]를 중심으로 각 편(동부와 서부)을 구성한다. 넷째, 승패의 결과로 한 해의 살림살이를 점친다. 차전 역시 석전과 마찬가지였으므로 당시의 차전은 부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부치(府治)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내를 중심으로 좌우로 편을 구성하고 매년 대보름에 행했으며 점세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싸움의 방식이다. 당시의 차전은 각 편의 차가 접근전을 펼쳐서 먼저 부서지는 쪽이 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놀이기구를 맞닥뜨린다는 점에서 당시의 동채싸움은 오늘날의 것과 비슷하지만, 승부의 결정 방식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동채싸움이 공중에서 맞부딪혀서 내리눌러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데 비해 17세기에는 상대편의 동채와 격돌하기는 하되 그것은 누르기 위한 격돌이 아니라, 부수기 위한 격돌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싸움 방식이 오늘날과 확연하게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공중에서는 기구의 형태상 부서질 만큼의 격돌이 어렵다는 점에서 지상에서 승부를 겨루는 방식이었을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다음으로 18세기의 동채싸움이다. 이 시기에 안동 읍치 동채싸움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읍외(邑外) 지역인 임하면 금소리의 차전을 관찰하고 쓴 임만휘(林萬彙)의 '차전시(車戰詩)'를 통하여 추론이 가능할 따름이다. 그의 문집 『만문유고(晩聞遺稿)』에 전하는 차전시 "벼락치듯 빠른 놀림 이길 틈 엿보며, 엎치락뒷치락 좋을 때 좋은 시비, 나갈 때나 물러설 때 하해를 물꼬튼 듯, 솟구쳐 오를 때엔 새매가 나는 듯, 한바탕 버마재비짓에 바람이 뒤따르고, 곂곂의 사람숲엔 달빛이 비추이네, 서북편이 이겼는가 개선소리 놀랍구나, 골골의 젊은 장정들 춤추며 돌아가네." 하는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금소의 동채싸움은 분명히 공중에서 동채를 이동시키며 싸움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사람이 을러멘 동채는 공중에서 대단히 민첩한 기동력을 발휘하여 새매와 같이 움직이고, 각축을 벌이는 모습이 마치 버마재미가 싸우는 것 같았다. 이로 보아 적어도 18세기 말 ~ 19세기 초에는 읍외 지역의 차전이 이렇듯 공중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의 안동 읍치 동채싸움을 보여주는 자료로는 초남(焦南) 이계수(李啓秀)의 '차전가(車戰歌)'가 있다. 총 70행에 이르는 칠언고시(七言古詩)인 이 자료는 19세기 전반의 동채싸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읍치 동채싸움은 읍외 지역의 구성원까지를 포괄하는 초대형의 차전으로 읍성 남문 밖의 개활지에서 남녀노소가 운집한 가운데 관의 후원과 관심 속에서 펼쳐졌고 포상이 뒤따랐다. 놀이도구로는 오늘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정동채와 마찬가지로 하부에 바퀴 또는 그에 준하는 장치를 부착함으로써 수레에 근접한 형태의 도구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놀이도구가 이러하므로 싸움의 방식도 약식동채를 이용해 공중전을 벌이는 오늘날의 차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고 지상전 또는 지상전과 공중전이 혼합된 형태의 싸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4]
변천과정[편집]
전통사회에서 이와 같은 양상으로 전승되었던 동채싸움은 20세기에 이르러 몇 번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첫 번째의 변화는 일제의 탄압으로 동채싸움의 연행이 중단됨으로써 정동채싸움은 막을 내리고 약식으로 만든 소규모의 동채를 이용한 싸움만이 전승되었다는 점이다. 1922년 안동에 거주하던 일본사람들의 관심속에서 소규모의 째기동채싸움이 벌어졌었다. 이 싸움이 워낙 격렬하게 진행되고 마침내 투석전으로까지 번져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일제는 이를 이유로 동채싸움의 연행을 엄금하였다. 지역민들의 수차에 걸친 요구에도 불구하고 연행을 허락하지 않던 일제는 1936년 음력 2월 말 경북선 철도의 개통에 즈음하여 한편의 참여 인원을 500명으로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동채싸움을 허가하였다. 인원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이 참여하여 전개한 이 싸움은 동채가 등장하기도 전에 앞머리꾼들의 싸움이 벌어져서 몇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막을 내렸다.
그 이후 읍외의 북후면 옹천리와 임하면 금소리 등에서 째기동채싸움의 형태로 가끔씩 연행되었던 동채싸움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승이 단절되었다. 그러던 것이 1966년 안동중학교 개교 2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던 교사(권정수 · 강창원)들이 나중에 초대 기능보유자가 된 김명한의 도움을 받아 약식 동채싸움을 복원함으로써 동채싸움은 새로운 전승의 국면을 맞게 된다. 이후 1967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다음해에는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마침내 1969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원 · 전승되는 과정에서 동채싸움은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우선 정동채를 이용한 싸움은 인명 피해의 위험 부담 때문에 채택되지 않았다. 이 싸움은 머리꾼들이 격렬한 싸움을 전개하여 상대편의 동채를 완력으로 부수어버리거나, 상대편의 동채 위에 자기편의 동채를 얹은 뒤 사람들이 함께 내리눌러서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육박전이 불가피한 관계로 부상자의 발생은 필연적이었다. 1966년 복원 당시 안동중학생들이 놀이꾼으로 참여하였고, 다음해부터는 안동고등학생들이 차전의 주체가 됨으로써 학생들을 위험에 노출시키기는 어려웠다. 또한 기념행사 · 민속경연대회 등의 참가를 목적으로 공연 위주로 구성되다 보니 화려한 싸움의 과정이 요구되었다. 정동채는 화려한 공중전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가능한 째기동채가 채택될 수밖에 없었으며, 놀이의 방식도 양편의 동채를 마주 걸어서 공중으로 수차례 솟구쳐 오르고 회전하다가 상대편의 동채를 내리눌러 땅에 먼저 닿는 쪽이 지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사실상 청소년들 또는 읍외의 옹천 · 금소 등지에서 행해진 째기동채를 이용한 싸움도 마주 걸어서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따위의 움직임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문화재 지정을 전후해서 나타난 화려한 공중전은 새로운 동채싸움의 탄생을 알려주는 것이었다.[4]
규칙[편집]
동채와 동채를 서로 맞닿게 하고 경기를 진행한다. 상대편의 동채를 눌러 앞머리를 땅에 닿게 하거나, 상대편의 동채에 머리꾼들이 올라가 상대편의 동채를 빼앗으면 결정승으로 하며, 자기 편 동채의 앞머리가 상대방의 앞머리보다 높이 올라간 상태로 우세를 오랜 시간 유지할 경우 판정승으로 한다.
판정승의 경우는 보통 오랫동안 승패가 결정이 나지 않는 경우에 그렇게 하는 편이다. 즉, 우세는 유지하고 있으나 머리꾼이 상대편 동체를 빼앗지 못 한 경우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3]
참가인원 수 및 편가르기[편집]
참가인원은 딱히 정해진 것은 없으나, 대체로 25 ~ 40세의 남자 수백 명씩 참가했다. 그리고 관전하는 사람은 거의 수천 명이 모이므로 넓은 공터를 필요로 했는데, 대보름 무렵에는 농작물이 없기 때문에 넓은 보리밭이나 백사장에서 진행했는데, 주로 낙천교에서 태화동 앞까지의 긴 백사장에서 주로 진행했다고 한다.
편가르기는 지금의 안기천로를 기준으로 안동을 동서로 갈라 편성을 한다. 이때는 거주지 위주가 아니라 태어난 곳을 기준으로 편이 갈렸는데, 그래서 비록 한 가족일지라도 태어난 곳이 다르면 이때만큼은 다른 편에 서는 경우가 있다.
동부의 깃발은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東部(동부), 王建軍(왕건군), 靑龍(청룡), 朱雀(주작), 與旗(여기) 등으로 쓰며, 서부의 깃발은 파란 바탕에 흰 글씨로 西部(서부), 甄萱軍(견훤군), 白虎(백호), 玄武(현무), 營旗(영기) 등으로 쓴다.[3]
선수 구성[편집]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을 동채꾼이라고 하는데, 동채꾼은 대장, 머리꾼, 동채꾼, 놀이꾼으로 이루어진다. 각 역할은 다음과 같다.
- 대장
- 대장은 동채 위에 올라서 차전을 지휘하는 사람으로, 담력이 세고 신체가 튼튼하며 통솔력이 있는 사람을 선출한다. 동부의 대장을 부사(府使), 서부의 대장을 영장(營將)이라고 한다.
- 대장은 왼손으로 고삐를 잡아 떨어지지 않게 하고 오른손으로 수신호를 하며 지휘를 한다. 오른손바닥이 앞을 향하게 하고 뒤에서 앞으로 흔들면 전진, 반대로 오른손바닥을 뒤를 향하게 하고 앞에서 뒤로 흔들면 후진, 오른팔을 빙빙 돌리면 좌회전, 왼팔을 빙빙 돌리면 우회전이다. 이때는 예외로 오른손으로 고삐를 잡고 왼손으로 수신호를 한다. 오른팔꿈치를 90도로 하고 내렸다 올렸다 하면 정지의 신호이다.
- 수신호 말고 구호로도 명령을 하는데, 전진할 때 "밀어라', 후진할 때 "빼라", 회전할 때 "돌아라" 라고 한다. 깃발을 흔들며 수신호를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대장은 상대편 대장과 동채를 잡아선 안 된다.
- 머리꾼
- 머리꾼은 맨 앞에서 동채를 지고 가는 사람들로, 대개 힘이 센 사람들로 구성된다. 돌격할 때 차머리를 높게 들어야 하고, 상대편 동채가 내리누르면 버틸 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맨 앞줄에 1명, 그 뒷줄에 2명, 그 뒷줄에 3명이 나란히 선다.
- 차머리를 높게 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상대편 동채를 누르기 위함도 있지만, 동채가 아래로 눌렸을 때 상대편 머리꾼들이 타고 올라와 동채를 빼앗는 걸 막기 위함이다. 반대로 상대편 동채가 눌리면 머리꾼들은 재빠르게 상대편 동채로 올라가기를 시도하게 되는데, 그러면 상대편 머리꾼들도 이를 방어하게 된다.
- 머리꾼들은 팔짱을 끼고 어깨로만 밀 수가 있으며 손을 써서는 안 된다. 또, 상대편의 대장을 공격해서는 안 되고, 상대편의 대장이 떨어졌을 때는 잠시 경기를 중단하고 상대편 대장이 다시 동채에 오르면 경기를 재개한다. 또, 머리꾼이 넘어지면 대장의 수신호에 따라 상호 후퇴하여 수습한 다음 다시 경기를 재개한다.
- 머리꾼끼리 몇 번이고 격돌하여 상대편의 대열을 돌파할 수가 없을 때에는 후퇴하였다가 다시 전진도 하고 측면에서 공격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럴 때에는 재빨리 머리꾼들이 대열의 위치를 바꾸고 대장의 지휘에 따라 동채꾼들 역시 동채의 위치를 빨리 바꾸어야 한다.
- 동채꾼
- 동채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로, 앞채꾼과 뒷채꾼으로 구성된다. 앞채꾼은 머리꾼보다 뒷쪽에 있으며, 머리꾼과 달리 동채를 떠나서는 안 된다. 다만 상대편의 동채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 앞채꾼들은 머리꾼들과 함께 상대편의 동채를 잡고 뜯으며 위에 올라탈 수 있다.
- 뒤채꾼은 가장 뒤에서 동채를 움직이는 사람들로, 돌격할 때는 뒤에서 힘을 싣는 역할을 하며, 후퇴할 때는 동체를 힘껏 잡아당긴다. 동채가 회전하게 될 때는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동채는 앞을 높게 들어야 하므로 뒤로 갈수록 동채를 낮게 메야 한다.
- 놀이꾼
- 놀이꾼은 앞놀이꾼과 뒤놀이꾼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동채를 메지는 않고 대개 응원을 하는 편이지만, 때때로 경기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앞놀이꾼은 머리꾼 행세를 하기도 하고, 뒤놀이꾼은 뒤채를 보호하며 동채꾼이 넘어졌을 때 수습하는 역할을 한다.[3]
진행 과정[편집]
경기 전[편집]
발의[편집]
차전놀이는 상당히 큰 행사로서, 준비 또한 상당 기간 동안 공을 들여 한다. 보통 추수가 끝나면 각 마을의 원로들은 모임을 가져 차전놀이 거행 여부를 결정하고, 결정되면 상대편에 통보하는데, 상대편은 통보를 받으면 거절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렇게 차전놀이의 거행이 결정되고 난 이후에는 임원을 선출하여 각자 역할을 정하고 재원을 구하는 등,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다.[3]
재목 선정[편집]
우선 사람을 인근 고을에 보내어 동채 만들 재목을 물색하게 되는데, 동채는 참나무로 길이 10m 쯤 되는 곧고 튼튼한 나무를 구하여야 한다. 좋은 재목을 구하기 위하여서는 안동 뿐 아니라 멀리 영양, 청송, 봉화까지 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좋은 재목이 물색되면 부정과 잡귀를 막는 의미로 그 주변에 금줄을 쳐서 무단으로 출입하지 못 하도록 한다.
정월 초순에는 임원 일동과 목수가 목욕재계를 하여 심신을 깨끗하게 한 뒤 산신과 나무에 술을 올리고 축문을 읊으며 신에게 나무를 벨 것을 고하는 고사를 지낸다. 산신의 노여움을 사면 나무를 베거나 운반할 때에 사람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때,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정함이 없어야 한다. 상중이거나, 아내나 며느리가 아이를 낳거나, 살생을 하였거나, 부정한 일에 관여하였던 사람들은 참여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나무를 베고 나면 안동으로 운반을 하는데, 인근의 관원은 자기의 관할구역을 통과하는 데에 협력을 한다.[3]
동채 만들기[편집]
이 과정을 거쳐 안동으로 운반된 목재는 정월 12일부터 동채로 제작된다. 약 20여 척 정도 되는 두 개의 나무를 같은 길이로 자른 후 불에 알맞게 굽는 과정을 거치며, 이후에는 힘 센 장정 3 ~ 4명이 물을 뿜어가며 힘차게 당기고 떡메로 견고하게 다듬는다.
그리고 두 개의 나무를 약 2m 정도 되는 간격으로 벌리고 삼, 칡, 모발 등을 합하여 세 개의 선으로 꼬아둔 줄로 차머리를 X자형으로 묶는다. 그리고 차머리에 고삐를 매어 위에 올라선 사람이 잡고 지휘할 수 있도록 하며, 사다리처럼 생긴 동채 위에는 사람이 올라설 수 있도록 널판으로 방석만한 자리를 마련한다.
판자 뒤에는 몽둥이 두 개를 가로로 대고 4귀를 체목에 묶어 동채가 부서지거나 뒤틀리지 않게 한다.[3]
째기동채싸움[편집]
차전놀이가 열리는 정월대보름 전, 아이들은 정초부터 작은 동채를 만들어 차전놀이를 하며 마을의 사기를 고취시킨다. 이를 째기동채싸움이라고 하는데, 째기동채는 작은 동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인들은 작전을 짜는 등 차전놀이 준비의 막바지에 이른다.[3]
경기 당일[편집]
우군맞이[편집]
정월대보름 전날부터 당일 오전까지 각 편의 사내들이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시내를 누비며 풍물을 치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당일 오전부터는 째기동채에 사람을 올려 태워 경기 장소에 모이게 되며, 머리꾼끼리 서로 밀며 훈련을 한다. 오후가 되어 멀리 동채가 보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하고, 동채는 전진하다가 10m 사이에서 서로 멈춰 전열을 가다듬는다.[3]
경기 진행[편집]
경기가 시작되면 서로 치열하게 밀어붙인다. 경기는 수백 미터씩 밀고 밀리며 몇 시간을 지속된다.
그리고 승부가 나면 이긴 편은 승리의 기쁨으로 짚신을 벗어 하늘에 던지고 상대편 동채를 뜯어 해체한다. 패한 측은 주저앉아 땅을 치고 원통해한다. 승패가 나면 승자는 의기양양하여 동채를 메고 "월사, 덜사" 하고 춤추며 시위를 벌인다. 경기가 끝나고 해가 지고 나서도 이 행렬은 계속된다.[3]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