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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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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Russia)
러시아(Russia)
러시아(Russia) 위치
모스크바 시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라흐타 센터
크렘린(Kremlin) 궁은 1156년 이 지역의 영주였던 돌고루키에 의해 처음 세워졌으며 그 후 14세기 증축을 거쳐 15세기 이반 3세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웅장한 석조 건축물의 면모를 다지게 되었다. 이곳은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의 궁전이었으며, 구소련 시절에는 소련 공산당의 의회가 설치된 곳이었다. 오늘날에는 러시아의 대통령 관저와 정부기관이 위치한 권력의 중심지이다.
크렘린 궁의 북동쪽에 위치한 붉은 광장은 레닌의 묘, 바실리블라제누이 성당 등 역사적인 건축물들 사이에 둘러 쌓여 있다. 특히 이곳은 차르의 선언과 각종 시위, 처형 등 러시아 역사를 장식한 많은 일들이 일어난 곳이다. 오늘 날의 붉은 광장은 러시아의 역사를 피부로 느끼려는 관광객과 근처 백화점을 찾는 인파가 몰리는 러시아의 주요 관광지이다.
러시아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성바실리 성당은 47m 높이 팔각형의 첨탑을 중앙에 두고 주변에 8개의 양파 모양 지붕들이 배열되어 있다. 예배당을 형성하는 4개의 다각탑과 그 사이 4개의 원형탑까지 총 9개의 탑이 무질서한 배열 속에 조화로움을 이루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러시아(Russia)는 유럽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가진 연방제 국가이다. 수도는 모스크바(Moscow)이다.

국토 면적이 17,098,246km²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이며, 지구상에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육지의 8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의 국토는 무려 11개의 시간대에 걸쳐 있으며, 14개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인구는 약 1억 4,500만 명으로 세계에서 9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유럽 최대의 인구 대국이다.

1945년 UN 창설 당시부터 원년 회원국 중 하나로,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연방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권리와 의무를 모두 승계받아 현재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다. 이에 더해 막대한 천연자원 보유량 및 세계 2위 군사 강국이자 세계 최대 핵보유국이라는 위상을 이용하여 전 세계 각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강대국이기도 하다. G20 참가국이며, 한때 G8의 참가국이었다. 또한 중국,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상하이 협력 기구의 회원국이다. 독립국가연합과 유라시아 연합을 창설해 주도하고 있는 국가기도 하다. BRICS에서 R은 러시아에 해당한다.

개요[편집]

러시아는 극동에서 동부 유럽의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나라이다. 9세기 루시에 국가 기원을 두며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대제국을 이루다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으로 거듭났다. 1990년 고르바초프의 냉전종식 정책으로 각 공화국들에 민족주의 분규가 일어나면서 1991년 12월 31일 소련이 해체, 독립국가가 되었다.

정식명칭은 러시아 연방(Российская Федерация, Russian Federation)이다. 수도는 모스크바 (Москва, Moscow)이며, 공용어는 러시아어이다. 국가를 이루는 인종과 문화가 다양한 다민족 국가이며, 인구의 대부분인 75%가 러시아 정교회를 종교로 갖고 있다. 1946년 초대 상임 이사국이었던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구 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의석을 승계하여 1991년부터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동유럽 지역 상임 이사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북쪽에 위치한 극동지방부터 동부유럽에 걸쳐 자리한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로, 북쪽으로는 북극해(Северный Ледовитый океан, The Arctic Ocean), 동쪽으로는 태평양(Тихий океан, Pacific Ocean)과 면한다. 남쪽으로 북한(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중국(China), 몽골(Mongolia), 카자흐스탄(Kazakhstan),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조지아(Georgia), 서쪽으로는 우크라이나(Ukraine), 벨라루스(Belarus), 라트비아(Latvia), 폴란드(Poland), 리투아니아(Lithuania), 에스토니아(Estonia), 핀란드(Finland), 노르웨이(Norway) 등의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는 연방 공화국으로, 총 85개의 연방 주체들로 국가가 구성된다. 연방 구성 주체는 공화국, 자치주, 자치구, 지방, 주, 특별시 등 6개의 단위로 나뉜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 Saint-Petersburg),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 Sevastopol)로 구성된 3개의 연방 특별시를 포함하여 22개의 공화국, 9개의 지방, 46개의 주, 1개의 유대인 자치주와 네네츠, 추코트, 한티-만시, 야말로-네네츠 4개의 자치구가 러시아 연방 공화국을 구성한다.

헌법에 의거한 민주주의 국가로 국민직선제를 기반으로 하는 6년 임기의 중임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 과거 구 소련에서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공산당 일당 독재에 의해 국가가 통치되었으나,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과정에서 대통령제를 도입하면서 러시아의 예하 공화국들도 대통령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러시아 연방 정부는 2014년 러시아 전역의 시간을 조정함과 동시에 서머타임(summer time)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이에따라 러시아 연방은 UTC+2부터 UTC+12에 이르는 총 11개의 시간대에 속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Москва, Moscow)는 대한민국의 서울과 -6시간의 시차가 난다.

주요 도시는 수도인 모스크바를 포함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보시비르스크(Новосибирск, Novosibirsk), 예카테린부르크(Екатеринбург, Ekaterinburg), 니즈니노브고로드(Нижний новгород, Nizhnii novgorod), 카잔(Казань, Kazan), 첼랴빈스크(Челябинск, Chelyabinsk), 옴스크(Омск,Omsk), 사마라(Самара, Samara), 로스토프나도누(Ростов-на-дону, Rostov-on-don), 우파(Уфа, Ufa),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Vladivostok),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Khabarovsk) 등 이다.

상징[편집]

국호[편집]

국호의 유래는 러시아인의 근간인 동슬라브인, 혹은 그들이 사는 땅을 가리키는 단어인 '루스(Русь / Rusʹ)'이다. 자국어 국호인 '로시야(Росси́я / Rossíja)'는 중세 그리스어로 '루스'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던 '로시아(Ῥωσσία / Rhōssía)'에서 유래한다. 현대 러시아어에서는 강세와 모음약화로 인해 'Росси́я'를 '[rɐˈsʲiɪ̯ə](라시여)'에 가깝게 발음한다. 현대 러시아어에서는 전치사 в-가 결합된 вв [vː], мм [mː], нн [nː], 어두 cc [sː]를 비롯해 새로운 음이 만들어지거나 병합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표기상의 이중자음은 자음 겹침이 일어나지 않는 단자음과 같이 발음한다. 따라서 Росси́я의 경우도 Роси́я로 쓰는 것과 발음이 같은 셈인데 이를 굳이 Росси́я로 표기하는 것은 그리스어 어원을 중시한 것이다.

한국 표준어에서 차용한 영어식 표현인 러시아는 16세기 무렵에 사용된 현대 라틴어식 표현인 '루시아(Russia)'가 어원이며 전통적인 중세 라틴어식 표현은 '루테니아(Ruthenia)'이다. 2005년 제정된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러시아어 국호를 따라 '로시야'로 쓰는 것이 맞겠지만 이미 굳게 정착한 표기를 뒤집기 힘들어서인지 지금도 표준 표기는 '러시아'이다. 북한 문화어로는 러시아어에서 직접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로씨야'를 쓴다.

원래 러시아라는 명칭은 전통적으로 국명이라기보다는 지역명이었으며 루스와 구별되는 이름은 아니었다. 이는 벨라루스를 일컫는 다른 이름인 백러시아, 우크라이나 남부를 일컫는 소러시아, 벨라루스 서부 지역을 가리키는 흑러시아 등의 이름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동슬라브족 국가 중 하나였던 모스크바 대공국이 15세기 이후 동슬라브족이 중심이 된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고 지역을 거의 통일해 '루스' 혹은 '러시아' 지역의 대표 국가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지배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국호를 루스 차르국(Ру́сское ца́рство)으로 바꿨고, 이후 표트르 대제가 그리스어 어원의 '로시아'를 채용해 러시아 제국(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ия)을 선포했다. 이후 '러시아'가 지금까지 국명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를 한자로 옮긴 이름으로는 '노서아(露西亞)'와 '아라사(俄羅斯)'를 예로 들 수 있다. 전자는 일본어 한자 음차, 후자는 중국어 한자 음차에서 비롯한 것이다. 노서아란 음차는 러시아어 '로시야(Росси́я / Rossíja)'를 옮긴 것이고 아라사란 음차는 고전 몽골어 '오루스(ᠣᠷᠤᠰ᠋ / Оrus)'를 차용한 만주어 '오로스(ᠣᡵᠣᠰ / Oros)'에서 유래한다. 몽골어로 '루스'도 아니고 '오루스'가 된 이유는 몽골어에도 두음 법칙 비슷한 것이 있어서 어두의 유음(r, l)을 꺼리기 때문. 다만 한국어의 ㄹ→ㄴ 두음 법칙과는 달리 어두 모음을 첨가함으로써 유음이 어두에 놓이는 환경을 피한 것이다.

한국어에서 한 글자로 줄여쓸 땐 '러'라고 한다. 아주 가끔 노서아에서 따온 '노(露)'를 쓰기도 한다.(노어노문학과 등) 1990년대 후반까지 신문에서 한자를 자주 병용했을 때만 해도 신문기사 표제에서는 이 나라의 약칭을 '露'라고 적었다. 2021년 기준으로도 여전히 '露'로 약칭하는 기사를 찾아볼 수는 있지만 거의 '러'라고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먼 과거엔 아라사에서 따온 '아(俄)'도 있었지만 아관파천 한 단어를 제외하고는 사장된 표현이다.

이렇게 대다수 언어에서는 '루스'에서 따온 말을 쓰지만 일부 언어에서는 다른 데서 유래한 말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핀란드어에서는 러시아를 '베내얘(Venäjä)'라고 하는데 이는 게르만인들이 슬라브인을 부르던 말인 '비니다즈(*winidaz)'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작 루스에서 따온 말인 '루오치(Ruotsi)'는 스웨덴을 가리킨다.

공식 국호는 '러시아 연방공화국'이 아니라 '러시아 연방'이다. 러시아에서는 소련 이래로 '공화국'이라는 용어를 독립 국가의 한 형태로 사용하기보다 정치적 연합체(주로 연방 국가)를 구성하는 단위로서 사용하였다. 소련부터가 소비에트라는 사회주의 체제를 수용한 공화국들의 연합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은 15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필요에 따라 다시 내부에 공화국을 설치하는 식이었다. 미국을 '미연방'이라 부르고 공화국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와 비슷하다. 미국도 주마다 공화국이란 이름만 안 붙었지 엄연히 하나의 나라들이 연방을 이룬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소련이 해체되고 그것을 구성하던 공화국이었던 러시아가 독립국이 되자, 독립국이면서 스스로를 공화국으로 부르는 건 기존의 관행과 충돌하기에 '러시아 연방'이 공식 국호로 채택되었다. 어차피 지금 러시아 연방 내에도 공화국들이 연방을 구성하는 단위의 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어서 국호에서 뭔가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을 구성하던 공화국 산하에 설치된 자치공화국들도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에 러시아로서는 여기에 빌미를 주지 않을 필요도 있었다. 만약 러시아가 러시아 연방공화국이나 러시아 공화국 같은 식의 국호를 채택했을 경우 러시아 산하의 자치 공화국의 주민들에게 "러시아나 우리나라(자치공화국)나 똑같은 공화국인데 왜 우리가 러시아의 일부로 묶여 있는 거지? 그냥 독립하면 안 되나?" 식의 생각을 부추길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안 쓰고 '공화국'보다 상위인 정치적 연합체라는걸 강조하기 위해 러시아 연방을 국호로 채택했다고 볼 수 있다.

국기[편집]

러시아 연방 국기

러시아 연방 국기(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флаг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는 위에서부터 흰색, 파란색, 빨간색의 가로선으로 이루어진 삼색기(Триколор)이다.

1705년 표트르 1세에 의해 백청적 삼색기가 지정되었다. 원래는 국기가 아닌 상선(商船)에서만 사용하였던 상선기였다. 1858년 로마노프 왕가의 상징인 검정-노랑-하양의 흑황백 삼색기가 러시아 제국 최초의 국기로 지정되었으나 백청적 삼색기도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다 1883년 알렉산드르 3세가 해상 뿐만 아니라 육상에서도 사용할 것을 공표하면서 공식 국기로 승격되었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빨간 바탕에 흰 글씨의 국기로 대체되었고, 러시아 제국 시절의 국기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후 소련 해체 직전인 1991년 8월 22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기를 삼색기로 재지정했으며, 그 후에 러시아 연방도 1993년 12월 11일까지 이 국기를 썼다. 이때의 국기는 지금 국기와는 다르게 중간 부분이 파란색이 하늘색에 가까웠다. 소련 시절의 국기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더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계엄령까지 선포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던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를 제외하고는 러시아 정부에서 금지하고 있지는 않아서 지금도 소련 시절의 상징물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 국기를 썼던 러시아 제국이 슬라브 민족의 가장 영향력있는 국가였던 만큼, 러시아 국기에서 착안한 청(靑)-백(白)-적(赤) 조합이 범슬라브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슬로바키아, 체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의 국기가 러시아와 유사한 것은 이러한 이유. 이런 나라들은 국기에 자국의 국장을 반영해 러시아 국기와 구분한다.

국장[편집]

러시아 국장

러시아 제국에서 유래한 국장인 쌍두독수리를 사용한다. 러시아 제국은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동생의 딸과 결혼한 이반 3세가 이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자신의 국새에 쌍두독수리를 쓰기 시작하면서 쌍두독수리를 국장으로 사용한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혈통을 받아들이면서 러시아가 동로마 제국, 즉 로마 제국의 계승자이며 동시에 기독교의 계승자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방패 한가운데의 은빛 갑옷에 망토를 두른 채 용을 무찌르는 기사는 성인 게오르기우스이다. 이는 자유와 독립 수호를 위한 러시아 시민들의 결심과 용기를, 쌍두독수리 세 왕관은 러시아 연방과 그 주체들의 주권을 대표하며, 독수리의 발톱이 움켜쥐고 있는 금빛 보주와 지팡이는 통일된 러시아 연방과 러시아 연방의 권력을 상징한다.

국가[편집]

현대 러시아 연방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국가는 총 두 개가 있다. 처음 사용되었던 국가는 1991년 소련 붕괴 직후부터 2000년까지 사용되었던 〈애국가〉이며, 두 번째는 2001년부터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국가다. 2001년부터 사용되고 있는 국가는 〈소련 국가〉에서 가사만 바꾼 곡인 〈러시아 연방 국가〉이다.

〈러시아 애국가〉 (1991–2000)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며 소련의 15개 공화국이 모두 독립한 후, 대부분의 국가들이 새로운 국가를 제정했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도 새로운 국가로 '애국가'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 '애국가'는 가사가 붙어있지 않아서 기악 연주만 가능한 국가였기 때문에 이래저래 불만이 많았었다. 이러한 불만은 러시아 국민 대부분이 인지하고 있었던지라 1993년과 1998년에 두 차례 가사 공모를 한 바 있으나, 합의 부족으로 공식 채택하는 데 실패했다. 현재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가사 있는 음원은 비공식 가사이다.

〈러시아 국가〉 (2001–)

2000년 러시아 대통령이 된 블라디미르 푸틴은 전임자인 보리스 옐친과 달리 구 소련에 대해서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1991년 소련의 붕괴를 재앙이라고 여기며 소련으로의 회귀를 추구했다. 푸틴이 집권했을 당시 러시아 경제가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은 소련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간파하고 있던 푸틴은 구 소련의 국가 〈소련 국가〉를 부활하기로 하고, 그 때까지도 생존해있던 소련 국가의 작사가 세르게이 미할코프(Сергей Михалков)[2]에게 가사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완전히 배제하는 재개작을 의뢰하였고 마침내 가사를 새로 쓴 것으로 교체한 러시아 연방 국가는 2000년 12월 30일[3]부터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국가로 제정되었고, 2001년 신년사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용되었다.

참고로 구 소련 국가 역시 중간에 한 번 변경된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은 인터내셔널가를 국가로 사용했다. 하지만 원래 프랑스 작품인 이곡은 지나치게 프랑스 풍이었고, 이 곡을 좋아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로 결심했는데, 그 모델이 된 곡은 바로 스탈린을 미화하기 위해 만들었던 Жить стало лучше이라는 곡이었다. 이 곡의 가락을 바탕으로 좀더 웅장하게 개작하여 1944년부터 새로운 국가로 사용했다.

의용군 진행곡처럼 엄격한 제창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는 경우 기립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용군 진행곡의 경우 반드시 엄숙하게 연주, 제창되지만, 러시아 국가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유연하게 연주되고, 상당히 많은 형태로 변주되기도 한다.

러시아가 스포츠 강국이기 때문에 올림픽에서 자주 연주되는 국가 중 하나였지만, 러시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로 인해 2018 평창 동계올림픽, 2020 도쿄 올림픽,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는 연주되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벨라루스와 함께 월드컵 등에서도 출전금지 당하여 스포츠 관련 행사에서는 당분간 들을 일이 없어졌다.

지리[편집]

세계 최대의 면적을 가진 러시아의 영토는 유라시아 대륙 북부와 발트해 연안으로부터 태평양까지 동서로 뻗어있다. 국토의 북쪽은 북극권에 속해 인구가 희박하나, 남쪽에 가까워질수록 많아진다. 유럽 지역과 아시아 지역(시베리아)의 거의 대부분은 광대한 평원으로 남부의 스텝과 북부의 툰드라 지대가 펼쳐져 있다.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의 남쪽 국경에는 유럽 최고봉의 엘브루스 산을 포함한 카프카스 산맥이 있고,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는 우랄 산맥이 있다.

국토를 둘러싼 바다에는 북극해의 일부인 바렌츠해, 백해, 카라해, 랍테프해, 동시베리아해와 태평양의 일부인 베링해, 오호츠크해, 동해, 서쪽의 발트해와 서남쪽의 흑해가 있고, 해안선은 37,000km에 이른다. 이러한 바다에 위치한 러시아의 중요한 섬은 프란츠요제프 제도, 노바야젬랴섬, 세베르나야젬랴 제도, 노보시비르스크 제도, 브란겔섬, 사할린섬, 쿠릴 열도가 있다.

러시아 영내의 주요한 강에는 유럽 쪽의 돈강, 볼가강, 카마강, 오카강, 아시아 쪽의 오비강, 예니세이강, 레나강, 아무르강 등을 들 수 있다. 부라야트의 바이칼호는 세계 제일의 수심으로 유명하다.

지형[편집]

중간의 우랄산맥을 제외하면, 러시아의 지형은 남동쪽으로 험준한 산악지대가 발달하였고 북서쪽으로는 광활한 평지가 펼쳐져 있어 흡사 커다란 반구형의 극장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 지형적 특성에 따라, 러시아는 콜라-카렐리야 지역·러시아 평원·캅카스 지역·우랄산맥·서(西)시베리아 저지·중앙 시베리아 고원·남부 산악지대·동부 산악지대로 구분된다. 콜라-카렐리야 지역은 핀란드 국경을 접한 유럽러시아의 북서부 지역이다. 카렐리야 지역은 고원지형을 이루나 해발고도는 낮다. 대부분 200m 이하의 구릉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곳곳에 빙하호와 늪지가 발달하였다.

콜라반도에는 히비니산(1,191m)을 제외하고는 해발고도 300m 미만의 낮은 구릉이 발달하였다. 러시아 평원은 서쪽 국경선으로부터 동으로 우랄산맥까지, 북극해로부터 남으로 캅카스 지방과 카스피해까지 펼쳐진 대평원이다. 광활한 평원의 서쪽과 남쪽으로 발다이구릉, 스몰렌스크-모스크바고원, 중앙러시아고원, 프레몰가고원 등 400m 미만의 저산지가 분포해 있다. 이 고원들 사이로 드니프로강·돈강·드비나강 등이 흐르면서 그 주위에 범람원을 이루고 있다. 특히 발다이구릉은 해발고도 300m 내외의 빙하성 산지로서 볼호프강·드비나강·볼가강 등의 분수계 역할을 하고 있다. 러시아평원은 대부분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안정된 기반암 위에 엷은 충적층이 덮인 지형구조를 보여주는데, 충적층이 두꺼운 곳에는 석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캅카스 지역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쿠반저지와 쿠마저지 및 카스피해 연안저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으며 북쪽으로 러시아평원과 연결된다. 특히 카스피해 연안은 해수면 이하(-27m)의 낮은 저지대이다. 쿠반저지와 쿠마저지 사이에는 평균 해발고도 400m의 스타브로폴고원이 있다. 한편 캅카스 지역 남단에는 험준한 캅카스산맥이 동서로 발달해 있어, 러시아와 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 사이의 국경선 역할을 한다. 우랄산맥은 북극해 연안에서 카자흐스탄에 이르는 총 길이 약 2,080km의 습곡산맥으로서 러시아평원과 서시베리아저지를 구분해주고 있다.

북쪽의 나로드나야산(1,894m)을 비롯해 해발고도 1,500m이 넘는 산은 소수이고 그 사이로 낮은 산들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랄산맥은 큰 교통장애 요소가 되지 못하며, 일찍부터 주요 교통로가 발달해 왔다. 서시베리아저지는 우랄산맥에서 동쪽의 예니세이강까지, 북극해에서 남쪽 알타이산맥까지 펼쳐져 있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 저지는 오비강과 이르티시강이 형성한 거대한 범람원으로서 늪지가 많다. 대부분 해발고도 100m를 넘지 않는 저지이다.

취락은 주로 비교적 높은 남반부에 발달하였다. 중앙 시베리아 고원은 예니세이강과 동쪽의 레나강 사이에 발달한 고원지대로서 대부분 해발고도 400∼700m의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니세이강과 레나강의 지류가 고원 사이로 흐르면서 골짜기를 이룬다. 중앙시베리아 고원 북쪽으로는 비랑가산맥과 푸토란산맥이 있으며, 남쪽에는 바이칼리아산맥이 있다. 이들 산맥은 비교적 높은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에는 야쿠티아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남부 산악지대는 카자흐스탄의 동쪽 국경선에서 바이칼호에 이르는 지역으로, 알타이산맥, 동·서 사얀산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산맥들은 해발고도 2,700∼4,200m의 험준한 산지로서, 정상부에서는 평탄한 고원을 이룬다. 또한 정상부의 만년설이 녹으면서 예니세이·오비·이르티시강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한편 바이칼호는 단층작용으로 형성된 거대한 호수로 최대 수심이 1,616m에 이른다.

동부 산악지대는 동쪽의 바이칼호로부터 야블로노비산맥, 스타노보이산맥, 주그주르산맥, 콜리마산맥, 추코트산맥으로 이어져 베링해까지 연결된다. 한편 베르호얀스크산맥과 체르스키산맥은 남북으로 뻗어 각각 주그주르산맥·콜리마산맥과 만난다. 이 산맥들은 해발고도 2,000∼3,000m 사이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대 유럽 지괴와 북아메리카 지괴가 충돌하면서 형성된 습곡산지이다. 한편 동부산악지대의 동쪽지역은 화산이 집중 분포해 있다. 특히 캄차카반도와 쿠릴열도는 활발한 화산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환태평양화산대의 일부이다.

하천[편집]

러시아의 큰 하천은 주로 중앙아시아 지역의 남단에 발달한 산악지역에서 발원하고 있으며, 그중 카스피해로 유입되는 볼가강을 제외하고는 대개는 북류한다. 대체로 상류지역에 해당하는 급경사 부분은 짧은 반면, 유로의 대부분이 평원 위로 흐르고 있다. 예를 들어 오비강은 하류 쪽 약 3,000km의 낙차가 불과 90m이며, 볼가강 하류 3,000km의 고도차도 350m에 지나지 않는다.

유량의 계절적 변화는 매우 커 풍수기(豊水期)인 5∼6월에는 연간 유량의 약 1/2이 흐르고, 나머지 기간은 거의 항행이 어려울 정도로 유량이 적다. 따라서 주요 하천 곳곳에 건설된 댐의 전력생산이 큰 지장을 받고 있다. 이들 강들은 1년 중 많게는 8∼9개월, 적게는 3∼4개월 정도 결빙하여 수로교통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제약을 주고 있다. 더구나 교통수요는 주로 동서방향으로 발생하는 데 비해 하천은 대부분 남북으로 흐르고 있어 교통수단으로서의 기여도는 낮을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운하를 건설하거나 동서방향의 철도망을 건설하여 주요 하천들을 서로 연결하는 교통체계를 마련하고자 노력해 왔다. 한편 대규모 하천이 남북으로 길게 흐르기 때문에 해빙기가 되더라도 하구 쪽은 얼어 있는 경우가 많아 자주 범람한다. 이는 농업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주요하천은 발전용수, 농업용수, 교통로, 공업용수로서 그 경제적 가치는 매우 크다. 따라서 대규모 토목사업을 통해 그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볼가강 개발과 예니세이강 유역변경공사이다. 볼가강 개발은 수력발전 및 홍수조절 목적 외에, 남쪽의 볼고그라트에서 북쪽의 트베리를 거쳐 직접 범(汎)유럽 운하 하천망과 연결되는 수로교통망을 구축하려는 목적도 있다. 예니세이강 유역변경공사는 안가라강으로 유로를 바꿔 낙차를 이용, 대량의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생산된 전력은 인근의 이르쿠츠크 공업지역뿐만 아니라 서부지역에 공급된다. 또한 이 공사는 시베리아 남부지역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나아가 오비강을 거쳐 유럽 러시아의 하천망과 연결하려는 거대한 토목사업이다.

기후[편집]

러시아는 시베리아로 대표되는 추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 유명한 동장군이란 말이 본디 러시아의 겨울을 이르던 말임은 물론이다. 대부분 지역이 추운 것은 사실이되,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큰 나라답게 남부는 외려 따뜻한 곳도 있다.

가령,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흑해 연안 소치의 2월 평균기온은 6℃이며 아열대기후로 제주시의 6.4℃와 비슷하다. 게다가 여긴 일년 내내 강수량이 고르고 연간 강수량도 1,700mm를 넘어 한국 기준으로도 다우지에 속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기후가 온화하여 차나무가 자라기 좋아 러시아 국산 차를 생산하는 지방이기도 하다.

내륙의 모스크바 역시 서울특별시보다는 춥지만 강원도 대관령, 북한 평안북도 신의주시, 라선시와 비슷한 정도(1~2월 평균기온 -7.5℃)의 기온으로, 극한의 환경까지는 아니다. 북아시아(시베리아)도 인구 대개가 몰려 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선 지역은 그리 춥지는 않다. 모허 국경지역은 -30℃ 내외로 엄청나게 춥다.

반대로 한반도에 한파가 닥칠 때 서울이 모스크바보다 잠시 기온이 낮을 때가 있어 러시아 겨울날이 별것 없다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상대적으로 온도가 높다 해도 습도 역시 높아 빠르게 체온이 떨어져 얼어죽기 딱 좋고, 목숨이 지장이 갈 정도가 아니더라도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만 러시아가 전체적으로 겨울이 조금 길기는 하지만, 1년 내내 추운 것도 아니고 여름은 충분히 덥다. 30℃를 넘는 지역도 많고, 2010년 7월 칼미키아의 우타에서는 45.4℃라는 러시아 역사상 최고기온이 기록되었다. 오이먀콘에서 기록된 최저기온이 -71.2℃이니 무려 116.6℃의 차이가 난다!

소련 이전 러시아 제국 시절, 그리고 현재 러시아는 세계적인 곡물 수출국이다. 즉, 황무지만 있는 게 아니라 농사 짓기 좋은 땅도 많다.

물론 북극권에 가까운 시베리아 북쪽으로 올라가거나 동쪽으로 갈수록 극한의 추운 기후를 자랑한다. 야쿠츠크의 1월 평균 기온은 -40℃, 베르호얀스크는 -45.9℃, 오이먀콘은 -51.3℃다. 각 도시의 위엄에 대해서는 문서를 참조. 한국의 추운 겨울의 원인이 바로 시베리아에서 내려오는 시베리아 기단 때문이다.

러시아는 9월 중하순부터 5월까지 겨울일 정도로 추운 나라인데도 워터파크가 있다. 물론 100% 실내이다.

지구 온난화의 수혜를 보는 나라이다. 일단 시베리아 남쪽부터 농사 가능한 온대지역이 북상 중인 추세인데 캐나다나 알래스카보다 영향을 받는 곳이 훨씬 넓어 이득을 제일 많이 보고 있다. 더구나 점점 열리고 있는 북극항로의 통행세를 기대하는 눈치이다. 동아시아의 한중일이 싱가포르행 남쪽 항로보다 훨씬 가까운 지름길이 될 북극항로의 주 수혜자가 될 예정이다.

식생과 토양[편집]

러시아는 위도에 따른 식생대가 매우 뚜렷하다. 툰드라, 타이가, 혼합림·낙엽수림 지대, 스텝 등이 넓은 지역에 걸쳐 발달해 있다.

⑴ 툰드라 지대:북극해 연안을 따라 핀란드 국경에서 베링해까지 동서로 펼쳐져 있으며, 전체 면적의 약 5%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는 월평균기온이 0℃ 이상인 달이 3∼4개월에 불과하고 그것도 10℃를 넘지 않는다. 지표는 극히 한랭하여 하부의 토양층은 영구 동토를 이루고 여름에는 곳곳에 습지가 형성된다. 혹독한 기후, 짧은 성장기간, 토양의 영구 동결로 농업은 불가능하며, 다만 선태류·지의류·양치류 외에 일부 관목이 자라고 있을 뿐이다.

⑵ 타이가(삼림대) 지대:툰드라 지대 남쪽에 분포해 있으며 국토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툰드라와는 달리 여름에는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이곳에는 주로 전나무·낙엽송·가문비나무 등 침엽수림이 발달해 있지만, 남쪽에는 자작나무·떡갈나무 등 활엽수림도 있다. 봄과 가을의 빈번한 서리, 습지, 척박한 토양 때문에 농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타이가의 대표적인 토양인 포졸은 표층의 부식질이 쉽게 용탈되기 때문에 매우 척박하다.

⑶ 혼합림·낙엽수림 지대:타이가 지대 남쪽에 분포하며 서쪽 국경에서 동쪽의 노보시비르스크까지 전개된다. 이 지대는 서쪽의 경우 남북으로 길게 발달한 반면 동쪽으로 갈수록 그 폭이 좁아지는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타이가 지대에 비해 하계가 길고 온난하며, 동계 역시 상대적으로 짧고 기온도 높은 편이다. 연강수량은 400∼600mm에 불과하지만, 증발량이 적고 하계에 집중되어 곡물농업에 적합한 기후조건을 가진다. 그 결과 많은 지역이 개간되어 농지로 이용되고, 삼림은 극히 일부 지역에만 남아 있다.

주요 수종은 참나무·가문비나무와 같은 침엽수림과 서양물푸레나무, 단풍나무, 느릅나무 등의 활엽수림이 분포해 있다. 이 지대의 토양은 스텝의 토양보다는 비옥도가 떨어지지만 타이가의 포졸보다는 비옥하다. 즉 영구 동토가 없고 배수도 양호하며, 상대적으로 토양의 여과성이 떨어지고 토양층이 두껍다. 뿐만 아니라 많은 영양분을 가진 빙하성 퇴적물질이 이곳에 집중 퇴적되어 토양의 비옥도를 높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곳에는 다양한 농작물이 재배되고 목축업이 성행하는 등 스텝 지역과 더불어 러시아의 중요한 농업지역이 되고 있다. 토지생산성이 높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이곳에 인구가 집중 분포해 왔다. 이 지대 남쪽에는 삼림과 스텝이 혼재되어 있는 삼림 스텝 지대(forest-steppe)가 동서로 길게 서(西)시베리아 지역까지 분포해 있다. 문자 그대로 삼림과 스텝의 점이지대이다.

⑷ 스텝 지대:서쪽 국경에서부터 동쪽의 시베리아 알타이산맥까지 뻗어 있다. 이 지역은 하계가 온난하고 무상기일이 길지만, 연강수량이 200∼500mm에 불과하다. 따라서 건조한 기후에 잘 견딜 수 있는 곡물을 재배하는 한편 가축사육을 많이 한다. 토양은 흑색의 체르노좀(chernozyom)으로서, 부식질이 매년 쌓이는 반면 거의 용탈되지 않아 토양 속에 영양분이 많다. 특히 토양 속에 함유된 석회분이 토양을 중성으로 만든다. 이 지대는 러시아의 곡창지대로 밀·사탕무·해바라기 등의 농작물 재배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야생동물[편집]

영토가 넓어서 불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고 인도 다음으로 야생 호랑이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형 초식동물 말코손바닥사슴도 널리 서식하며, 비교적 온화한 극동부에는 자라와 가물치도 서식한다. 또한 북극권하고도 가까워서 북극곰이나 바다코끼리도 서식한다.

여담으로 공룡화석이 많이 발굴되는 이웃나라 몽골과 중국,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과는 달리 이 나라에선 특이하게 페름기에 살던 단궁류의 화석이 많이 발견된다.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수궁류인 이노스트란케비아나 에오티타노수쿠스, 울레모사우루스 등의 수많은 단궁류들이 러시아에서 발굴되었다. 그 외 스쿠토사우루스같은 파충류도 발견되었다. 이처럼 러시아에는 많은 수의 페름기 생물들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역사[편집]

고대[편집]

러시아라는 지명이 역사상 나타나기 훨씬 전에 중앙아시아, 트랜스코카서스, 흑해 연안 등지에는 발달된 문명이 존재하였다. 러시아의 초원지대에서는 사르마티아인, 고트족, 흉노족, 불가족, 아바르족, 카자르족 등이 차례로 지배하였으나 러시아역사의 주인이 되지는 못하였다.

반면 러시아의 삼림지대, 즉 동북부지대에 살고있던 슬라브족이 서쪽 유럽으로 이동한 서슬라브족과 동쪽으로 이동한 동슬라브족이 동서방향으로 확장하면서 오늘날 러시아의 주류민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8세기 경 동슬라브족은 드니프로강과 볼호프강 및 볼가강 상류지역으로 유입하여 정착하고 있었으며, 작은 도시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9세기 경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바이킹의 후손인 바랑고이(Varangian)족이 이 지역으로 확장해 오게 되었고, 이들은 슬라브족을 자주 침탈해오는 유목민인 카자르족으로부터 막아주기도 하면서 북쪽의 노보고르드(Novgorod)와 남쪽의 키이우(Kyiv)를 중심으로 분리하여 슬라브족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바랑고이족은 서서히 슬라브 원주민과 동화되어 나갔다.

부족 형태 및 대륙 이동 시기를 거쳐온 슬라브인들은 882년 바랑고이족의 올레그(Oleg)에 의해 최초의 국가 형태인 키이우 공국으로 통합되어 역사에 등장한다.

키이우 공국

키이우 공국은 뛰어난 전략적 위치를 바탕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도시국가 형태의 주변 공국들을 지배하였다. 988년 키이우의 왕 블라디미르가 동방정교회로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국가통합수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054년 키이우 왕가의 분열로 블라디미르·모스크바·노브고로트 등 여러 도시국가가 독립하면서 키이우 공국은 크게 쇠퇴하였다. 그후 키이우는 여러 이민족으로부터 침입을 받다가, 13세기 타타르인(몽골인)의 침입으로 결정적으로 멸망하였다.

몽고지배와 모스크바공국[편집]

중국중앙아시아를 정복한 몽고족징기스칸을 계승한 오코타이칸은 바투에 명하여 유럽 원정을 시작하였다. 바투는 1223년 아조프 근처의 칼카강의 전투에서 키이우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유럽으로 계속 진군하였으나 칸의 계승문제로 회군하였다. 그러나 1238년에서 1240년에 걸친 재침입으로 키이우 전역은 240년간에 걸친 몽고족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몽고의 지배는 각 지역의 통치자들이 공물과 세금을 바치고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몽고족의 지배는 그동안 러시아와 유럽과의 연결을 단절시켜 유럽의 시대적 흐름에 뒤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몽고의 지배하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한 것은 모스크바 공국이었는데, 모스크바 공국의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몽고의 침입 때 저항하지 않고 몽고의 지배를 인정함으로써 몽고로부터 대공의 칭호와 다른 공국들보다 월등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공국 간에 대공위를 번갈하가면서 물려주던 키이우 공국의 전통적인 윤번제(로타제) 방식에 따르지 않고 부자세습을 함으로써 키이우 공국과 분리되고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러시아가 몽고족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부터이다. 그는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과 혼인을 함으로써 비잔틴의 계승자이고 그리스정교의 수장임을 주장하였으며, 북쪽의 전통적인 공국인 노보고로드 공국을 지배하는 등 러시아 지역을 합병해나갔다. 마침내 1480년에는 몽고와의 주종관계를 공식적으로 종결하는 선언을 하였으며, 러시아 전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함으로써 전제군주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법률과 행정조직을 만들고 새로운 토지소유제를 도입하였으며 크레믈린 궁을 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다음 세대의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이 시기에 도입된 토지소유제는 제정러시아시대까지 사회적 불만의 근간이 되었던 농노제의 탄생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반 4세는 쯔아(짜르:Tsar)라는 전제군주의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귀족세력과의 권력투쟁을 위해 귀족회의체인 두마(Duma)에 대항할 성직자, 도시자본가 등으로 구성된 회의체를 만들면서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의 사후에 벌어진 왕위계승전, 농민반란으로 모스크바 공국은 위태로워진 상태에서 1610년 폴란드의 침입으로 망하게 된다. 폴란드는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등 위세를 떨쳤으나, 러시아인들은 국민군을 조직해 저항하면서 폴란드군을 물리치게 되며 로마노프 왕조를 열게 된다.

로마노프왕조와 표트르대제[편집]

러시아를 서구화시킨 표트르 대제

폴란드의 침입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이 무너지고 국민군과 젬스키 소보르(zemskii sobor)라는 국민회의체에 의해 새로운 왕으로 옹립된 인물은 이반 4세의 조카인 17세의 미카엘 로마노프였으며, 이때부터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된다. 국민군과 의회의 지지속에서 1613년에 출발한 로마노프왕조는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에 형성된 짜리즘 혹은 쯔아리즘(tsarism)으로 불리우는 전제군주 체제로 서서히 복귀하였으며, 1905년의 입헌군주제로 왕조를 유지하다가 1917년 소비에트정권에 의해 멸망하였다. 미카엘의 즉위 10년 뒤에는 왕조가 안정되면서 회의체의 대의기구의 역할이 약화되고 이후의 왕들은 전제권이 강화하면서 폴란드에 의해 점령당했던 영토를 회복하거나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왕(짜르)인 표트르(피터) 대제(재위 1689~1725)는 대대적인 영토확장 정책을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대대적인 조선사업을 일으키고 크리미아 반도쪽으로 남진정책을 폈으나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이후에 북진정책을 실시하여 스웨덴을 굴복시키고 발틱연안으로 나아가 서구로 나가는 수로를 확보하였다. 그는 다시 서쪽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표트르 대제는 현재의 러시아 영토 대부분을 지배하는 최초의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1703년 네바강 하구 부근에 상트페테르부르크(후에 레닌그라드로 바꾼 후 최근에 다시 원래의 지명으로 복귀)를 건설한 뒤, 1713년 제국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한편, 표트르 대제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개혁을 단행하면서 유럽과 본격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가 외부세계로 진출하는 창구역할을 하였으며, 이곳을 통해 무역이 성행하였다. 또한 이 무렵부터 우랄산맥 일대에 철강과 군수공업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해군의 창설과 군의 근대화 및 행정조직개혁 등이 표트르 대제 때 이루어졌다. 그의 대외적인 개혁정책의 핵심은 서구화정책이었다. 대내적으로 1721년 러시아 정교의 교구를 폐지하면서 신성종교의회로 대체함으로서 교회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공고히하였다.

로마노프왕조와 전제군주제[편집]

표트르 대제의 사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극도의 혼란상이 나타났고, 이 틈을 타서 귀족층은 그들의 힘을 확대하였고 농노제가 확대되는 등 농촌과 농민의 피폐가 더 심각하여 농민들의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남편인 표트르 3세의 왕위를 계승한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는 독일 출신으로, 당시 유럽의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재위 기간 중 푸가초프의 반란과 같은 대규모 반란을 겪었고 프랑스혁명과 같은 대변혁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수적인 전제정치를 강화하였다.

심지어 그는 국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을 사유화하고 농노로 전락시키기도 하여 농민들의 반감을 샀다. 대외적으로 표트르 1세의 팽창정책을 계승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렸는데, 1783년 크림반도를 장악하고 1791년 오스만튀르크를 굴복시켜 흑해 캅카스 지방과 지중해로 진출하였고,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의 분할(1772년, 1793년, 1795년)에 참가하면서 서쪽으로 영토를 더욱 확장시켰으며, 동쪽으로도 우크라이나·시베리아·극동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의 알래스카까지 진출하였다.

19세기 로마노프 왕조는 알렉산드르 2세 전까지 강력해진 전제군주체제를 유지하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경찰을 만들고, 자문기구인 국가회의와 각료회의를 설치하였다. 그 시기 대외적으로는 나폴레옹 1세가 유럽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하였던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시키기 위해 베를린칙령(대륙봉쇄령)을 발표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에 대해 영국과의 통상을 금지하였다. 영국에 농산물을 수출하여 외화를 획득하였던 러시아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마침내 대륙봉쇄령을 깨뜨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을 촉발시켰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르 1세는 여세를 몰아 비엔나 회의를 주도하면서 핀란드, 베사라비아 등을 획득하면서 유럽에서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러시아에 자유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농노해방 등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유럽의 시민혁명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12월 장교단의 반란과 같은 소규모 반란들이 일어났다. 특히 니콜라스 1세 때는 러시아의 전제군주제와 농노제에 회의를 품는 지식인들이 늘어나고 서구의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러시아의 낙후성에 대한 비판이 강해졌다.

로마노프왕조의 몰락[편집]

19세기 중반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러시아의 개혁은 크림전쟁의 패배로 인한 국제적인 위상의 추락에서 나왔다. 크림전쟁(1853-1856)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차지하여 흑해로의 진출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었으나,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는 프랑스·영국·이탈리아가 오스만 제국에 가세하면서 러시아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전쟁은 러시아의 패전으로 파리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종결되었지만 러시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때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국내적으로 개혁과 근대화를 약속하였다. 그는 1861년 농노를 해방하고 1864년 지방자치기구를 설치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인 개혁은 오히려 농민이 더욱 지주에게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불만은 브나로드운동과 같은 농촌개혁운동이나 나로드니크(인민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싹트게 하였다.

전제군주제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음에도 이후의 러시아의 전제군주(짜르)들은 비밀경찰에 의한 감시와 통제, 암살과 같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지하 반체제 세력은 사회혁명당을 만들어 토지의 공동소유, 소수민족의 자치권 인정 등을 주장하였다. 러일전쟁패배(1905) 이후 전제군주제의 몰락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 사건은 시위·폭동·총파업 등 총체적인 혼란을 가져와 로마노프 왕조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였다. 니콜라스 2세는 1905년 10월선언을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인정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 형식상 입헌군주제이지만 여전히 황제는 절대권을 행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프랑스와 삼국협상을 맺고 있던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하였으나, 독일침입에 대비한 초토화작전의 실패로 경제가 파탄이 나고 반전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그 결과 국민적 불만이 폭발하여 일어난 1917년의 3월 혁명(구력 2월)으로 니콜라스 2세가 퇴위하면서 로마노프왕조는 막을 내린다.

소비에트정권 수립[편집]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패배로 인해 빈곤에 찌든 인민들의 시위와 파업이 계속되었다. 1917년 3월혁명(구력 2월)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자, 이에 대항하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대표들로 구성된 볼셰비키혁명 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마침내 1917년 11월 7일(러시아 구력으로 10월 25일)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파가 임시정부를 전복시키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레닌은 혁명 직후, 주요 산업 및 은행의 국유화, 신분제 폐지, 인민재판소 설치, 의회의 해산 등과 같은 혁명적 입법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신생 소비에트 정권은 부르주아와 지주 등 우익 백군(白軍), 즉 반(反)혁명세력의 봉기와 연합국(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의 개입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에 레닌은 모든 기업의 국유화·노동의무제·곡물징발제·식량배급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전시(戰時) 공산주의' 정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소비에트 적군(赤軍)을 동원하여 내란을 종식시켰다.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농민의 반발과 경제복구의 실패 등으로 오히려 신생 소비에트 정권을 위기상황으로 몰았다. 이에 1921년 레닌은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lan:NEP)'을 채택하면서, 자유농 인정·농산물 판매 허용·사기업 인정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신경제정책으로 경제가 신속히 복구되었고 인민의 생활수준도 다소 향상되었다. 한편 레닌은 고전적인 마르크스의 명제에서 벗어나 러시아 한 나라만이라도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전개하였다. 이는 러시아혁명 후 주변국가에서 기대했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소비에트 정권의 안정 자체가 시급한 현실에 대한 전략적 대응으로서 나온 이념 수정이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과 일국 사회주의론은 격렬한 이념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당내 갈등의 와중에 22년 스탈린은 당 총서기로 임명되었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캅카스(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아르메니아)로 이루어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소련)이 탄생되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을 거치는 동안 신생 소비에트 정권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서부지역의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때 상실한 영토는 1939~1945년에 소련이 회복하는 영토보다 많았다.

스탈린시대[편집]

레닌과 스탈린 (1922년)

러시아에서는 1924년 레닌의 사망으로 권력을 잡은 스탈린이 트로츠키파(派)를 숙청하고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그는 일국 사회주의 건설과 소련의 온전한 경제적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에서의 자본주의적 요소를 제거하는 한편, 공업화와 농업근대화를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 사기업을 폐지하고 국가 주도의 제1차 5개년계획(1928∼1932)과 농업의 집단화가 실시되었다. 이는 신경제정책의 실질적인 폐지를 의미한다. 스탈린은 계속된 2·3차 5개년 계획기간에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또한 1937년에는 농업집단화를 완료하여 토지의 99%를 콜호스 소유로 만들었다.

한편 스탈린은 정치부문에서는 강권정치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확고히 하였다. 즉 1936년 스탈린헌법이라 부르는 소비에트 헌법을 제정하고, 공산당 지도자·인텔리겐치아·농민 등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전까지, 1924년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 1929년 타지키스탄, 1936년 키르키스스탄·카자흐스탄, 1940년 몰디비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가 각각 소련연방에 가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로 스탈린은 매우 현실적인 외교노선을 취했다.

즉 1939년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중립을 취해, 서부 지역에서 상당한 영토를 얻었다. 그러나 1941년 독일이 침공하자 순식간에 모스크바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스탈린은 서부의 공장시설을 소개(疏開)하여 우랄·시베리아에 군수산업을 일으키는 한편, 새로운 군부대를 창설하여 반격하였다. 1945년 5월 독일의 패전 이후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벌여 북한과 사할린 및 쿠릴열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였지만, 2000만 명 이상이 희생당하고 국가재산의 약 30%가 손실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은 전쟁 복구에 나서 1950년대 초에는 경제가 전전(戰前)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한편 종전 후 동유럽과 중국의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세계는 미·소를 양극으로 하는 '냉전체제'로 전환되었다.

흐루쇼프 시대[편집]

스탈린이 죽고 말렌코프가 잠시 집권할 때즈음 드넓은 시베리아에서 석유가 터져나오며 소련은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 되었다. 석유를 수출하기 위해 소련은 1950년말부터 서방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석유, 천연가스를 필두로 한 자연 수출, 그리고 공산권 위성 국가들의 소비를 위한 자동차 등 중공업 등을 기반으로 소련은 양대 강국이 되었다. 1957년에는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연이어 개를 우주에 보냈으며, 1961년에는 최초의 유인 우주 탐사를 실행해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겉모습과는 달리 원자재에 국가수입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자동차나 VHS 기기같은것을 구할려면 몇달에서 몇년씩 기다려야하고 지방 소도시에서 물자공급이 제대로 안되다보니 주요 대도시로 물건을 사려고 일부러 여행가는 등 소비재 부문은 구입에 오랜시간 기다려야되는 경우가 많은 등 경제체제가 워낙에 빈약한 면도 있었다. 이 시기의 소련 경제사정을 비꼬는 공산주의 유머 시리즈도 많다. 또 소련인들은 자국의 빈약한 공산품에 불만을 품어 많은 서방제 생활용품이 암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었다. 1980년대 기준으로 치면 월급이 200루블인데 청바지 하나에 100루블씩 하는 식이었다.

개혁적, 진보적 흐루쇼프 시대에 소련은 전성기에 이르렀지만 사실 이 시절에도 과거 대숙청의 부작용으로 트로핌 리센코처럼 공산당에 아부하는 사이비 과학자들이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하면서 비과학적인 농업정책으로 흉작이 발생하는 등 흉작이 발생해서 외국으로부터 대량의 곡물을 수입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말 이후 소련의 산유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를 만회할 수 있었다.

브레즈네프 시대[편집]

이후 18년 동안 이어진 반동적, 보수적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코시킨 개혁이 실패로 돌아기고 이 시기부터 경제성장률이 3% 안팍에 그치며 경제가 정체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오일 쇼크가 터졌고, 오일 쇼크 최대의 수혜자는 당사자 중동이 아닌 소련이었다. 오일 쇼크로 석유 가격이 4배 폭등하자 세계 최대 산유국 소련의 경제 역시 다시 침체기를 벗어나게 되었다.

고르바초프 시대[편집]

1982년 브레즈네프가 사망하자 집권한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 정권은 기본적으로 브레즈네프 노선을 답습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명에 그쳤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은 소련사회에 대변혁을 초래하였다. 그는 경제침체와 외교적 고립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내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대외적으로는 글라스노스트(개방)라는 실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국내 경제발전을 위해 국가통제체제를 완화하고 기업과 지방의 자율권을 확대하는 동시에, 시장경제제도 도입과 무역확대를 추진하였다. 또 관료주의의 축소, 권력의 지방분산, 인민대표회의 창설, 대통령제의 도입 등 정치개혁을 실시하였다. 1989년 최초로 다당제 선거가 실시되었고 1990년 고르바초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집권했던 80년대 초반에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국방비가 폭증하여 재정부담이 급속히 늘어났으며 석유가격이 81년 고점을 찍은 이후 80년대 중반 폭락하면서 소련의 국가재정수입이 줄어들면서 경제가 더 침체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 속에 다음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개방만이 소련이 살 길이라 생각했고,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펼쳤다. 개방 정책이 효과를 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소련의 재정은 1985~86년경 이미 붕괴 상황에 이른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86년 체르노빌이 폭발하여 소련 경제에 치명타를 먹였고, 1989년 동유럽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었다. 먼저 발트 3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며 소련에서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는데, 과거 이러한 움직임을 군대를 이용해 강경 진압했던 소련 지도자들과 달리 고르바초프는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하였고, 오히려 이러한 소련의 모습에 동유럽 모든 나라에서 민주화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며 1990년 소련의 각 공화국들이 소련에서 독립을 선포했고, 동유럽의 공산정권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고르바초프는 소련내 각 공화국의 자치권을 보장하면서 소련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혼란 속에서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폭락했고 소련은 급격히 와해되고 있었다. 1991년 소련 군부의 8월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주도권을 잡았고, 1991년 말 고르바초프는 소련 해체를 선언하였다.

러시아 연방 출범[편집]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 아래 소련 내 각 공화국의 독립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다. 1990년 2월 구소련 공산당 중앙위총회에서 '인도적·민주적인 사회주의를 꾀하며'라는 정치강령을 채택함으로써 공산당 일당독재가 부정되고 복수정당제가 열렸으며 당과 국가를 분리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1990년 3월에는 임시 인민 대의원대회에서 헌법개정이 이루어지면서 대통령직이 신설되었고 고르바쵸프는 구소련 공산당서기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구소련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싹터온 개별 공화국의 민족주의와 자립요구는 러시아중심의 구소련공산당을 등식을 깨고, 1990년 6월 러시아가 독자적인 러시아 공산당을 출범시키고 주권선언을 하는 데 기여하였다. 당시 러시아 최고회의의장이었던 옐친은 제28차 공산당대회 토론회에서 확실한 복수정당제로의 이행, 당명의 변경 등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대회폐막 하루전인 1990년 7월 12일에 공산당 탈당을 선언하였다. 이 사태 이후 구소련연방의 해체가 촉진되었다.

1991년 6월 러시아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옐친은 공산당의 이념적 독재를 폐기하고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없애는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보수파 및 구소련 연방의 대통령인 고르바초프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1년 8월 19일 보수파의 쿠데타시도가 옐친에 의해 진압되면서 옐친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옐친은 연방정부를 무력화하고 러시아공화국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하여 1991년 10월 러시아공화국의 독자적인 경제개혁을 추구할 수 있는 3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들은 대통령 포고령이 헌법 및 기타 법률과 동등한 권한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무효화할 수 있도록 하여 옐친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확대시켰다. 또한 공화국 간 거래에 국제가격을 적용하고 연방에 대한 재정지원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연방정부를 기능불능상태에 빠지도록 하였다. 마침내 1991년 12월 11개 공화국이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에서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독립국가연합) 결성에 합의함으로써 구소련은 완전히 해체되고 1992년 1월 1일자로 러시아를 비롯한 각 공화국은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러시아공화국과 옐친[편집]

옐친은 1992년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위해 상품이나 서비스 가격을 자유화하고 중앙집중식 자원분배제도의 폐기하였다. 그러나 생산의 독점화 등의 이유로 물가상승과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사정의 악화를 이유로 1993년 보수세력들은 옐친 탄핵안을 제출하였다. 옐친은 가까스로 탄핵안이 부결되자, 국민투표를 통하여 국민들의 신임을 재확인하고 사유화와 경제자유화를 더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렇지만 보수파가 입법부인 두마(Duma)를 장악하여 개혁을 거부하자, 옐친은 의회를 해산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하면서 민영화 또는 사유화를 위한 지속적인 개혁을 진행하였다.

1995년 러시아의 경제는 안정을 찾고 약간의 성장을 보이면서 긍정적인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1997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997년 불어닥친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국가부채시스템을 손상시키면서 러시아 경제를 붕괴위기까지 몰고 갔는데, 러시아의 엄청난 해외부채는 과거 구소련의 부채였다. 실업과 국민생활수준의 저하 문제가 심각해진 가운데, 1999년 체첸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체첸반군의 활동이 거세졌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러시아 안보회의 서기가 된 푸틴은 체첸분리주의자들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둠으로써 옐친의 천거로 총리가 되었다. 옐친은 1999년 12월 31일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푸틴을 대통령 권한대행에 임명함으로써 푸틴시대를 열어주었다.

중앙집권화 푸틴시대[편집]

블라디미르 푸틴

새로운 세기를 맞으며 옐친은 당시 총리였던 푸틴에게 권력을 이양하였고, 2000년에 푸틴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다.

푸틴은 옐친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러시아는 가즈프롬 등 민영화된 에너지 기업들을 다시 국유화시키면서 에너지 수익을 세수로 확보하여 경기 회복에 나섰다. 푸틴 정부는 2000년대 유가 상승으로 크게 호황을 맞았으며, 이렇게 확보한 세수로 외국에 있던 채무를 처리하고 대침체 당시 자국이 다시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돈을 꿔 주는 채권자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푸틴은 러시아 연방의 민주주의를 말살했고, 정적들을 죽이고 언론을 탄압해 가며 독재자로 군림하였다. 푸틴은 2008년 자신의 임기가 끝나자 바지대통령을 내세워 집권한 이후 헌법을 개정하여 6년으로 증가시켰으며, 2020년에는 부정선거를 무릅쓰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임기를 초기화하면서 사실상 종신 집권 독재자로써 자리잡게 되었다.

푸틴은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소련 해체로 인해 축소된 영향력 회복에 힘쓰는 한편, 총리 시절부터 해 오던 네오 나치를 필두로 한 극우 민족주의 운동을 나시같은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흡수하였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패권적인 행보에 나섰으며,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하였다.

여기에 2014년에는 크림 위기와 돈바스 전쟁에 사실상 개입해 친서방 노선을 타는 우크라이나를 무력 압박하고, 2022년에는 1월 카자흐스탄 반정부 시위 진압, 2월 돈바스 지역에 공식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는 등 중앙아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구 소련권에 물리적으로 영향을 주며 옛 초강대국으로의 회귀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비슷하게 명분없는 전쟁 선포 및 군사적 무능 노출, 총동원령 선포 등으로 사실상 독재와 부패로 약화된 자국의 실상을 전세계에 노출시키며 국내/국제적 위신이 크게 실추되고 우크라이나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저항을 맞이하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정치[편집]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공산주의를 폐기하고 1993년에 제정된 러시아 연방 헌법에 의거해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이원집정부제, 연방제 국가다.

그러나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실질적으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독재국가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독재국가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푸틴 집권 이후로 계속 독재국가로 분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은 23년 집권중이며 부정선거, 언론 탄압이 심한 편이다. 또한 푸틴을 견제해야 할 야당들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나 자유민주당 모두 내부 운영이 권위주의적으로 진행되는 등 사실상 원내의 대부분의 정당이 대놓고 반민주주의 성향이기에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들어설 가능성이 굉장히 낮으며 사실상 민주주의와는 영 거리가 먼 국가이다.

푸틴이 그래도 민주주의를 형식상으로는 버리지 않던 2010년대에는 민주주의 지수가 전세계 130위권을 기록했지만, 2020년대 들어 120위권대로 상승했다. 그러나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 통제가 강화되었고 결국 2022년 기준으로 146위로 하락했다.

그래서 2011년 12월부터 2013년까지는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2017년에도 잠깐 반정부 시위가 나타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2020년 7월에 하바롭스크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다시 나타났다. 물론 러시아에서 제대로 영향력 있는 반정부 정치활동을 하려면 불법 시위 말고는 거의 방법이 없고 이마저도 시도했다가 목숨이 위험할 수 있어서 정치적 자유도는 낮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행정[편집]

국가 체제는 연방제이나, 국가원수인 대통령(임기는 6년이며 재선 가능)이 행정의 중심이다. 헌법상 러시아의 대통령은 국정전반에 걸쳐 강력하고 포괄적인 권한을 부여받고 있다. 1993년 12월 12일 국민투표를 통해 공식 채택된 신(新)헌법은 프랑스의 드골 헌법을 모방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소련 붕괴 이전에는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당의 활동영역을 일부 제한하고 있다. 즉 새 헌법은 하원인 두마에 입법권과 예산심의권·조약체결권 등을 부여하고 있으나 상원인 연방회의의 승인을 반드시 거치도록 규정하였다. 또 대통령이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3분의 2이상의 찬성이 있을 때만 이를 뒤집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에 반해 대통령은 총선거 실시권은 물론 국회해산권도 갖게 되어 있으며 의회의 대통령에 대한 견제는 거의 불가능해져 탄핵의 경우에 하원의원의 재적 3분의 2의 찬성으로 이를 확정하도록 하고 있다. 러시아의 대통령은 러시아의 총리(의회의 신임을 필요로 한다.)를 포함한 정부의 요직의 지명권·임명권과 의회의 동의를 얻지 않고 정령(대통령포고령)을 발포하는 권한을 가져, 군대와 국가 안전 보장 회의의장을 겸한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위해서는 과반의 득표를 얻어야 하는데 과반에 도달하지 못하면 가장 높은 득표를 획득한 두 후보간에 결선 투표를 행한다.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기 위해서는 의회 내 정당의 추천을 받거나 유권자 200만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선거는 러시아의 10개의 시간대에 걸쳐 치른다. 2008년 기준으로 러시아의 유권자 수는 1억 900만 명 정도이다.

입법[편집]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만큼 연방의회가 존재한다.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어 하원인 국가두마와 상원인 연방평의회로 나뉜다. 이 중 국가두마는 러시아 제국 시절 두마를 계승한다.

국가두마의 의석은 450석이며,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각각 절반(225석)씩 배분해 각 지역의 선거구에서 의원이 선출된다. 소선거구제 도입 이래 첫 총선인 제7대 국가두마 의원 총선이 2016년 9월에 치러졌는데, 통합 러시아가 압승을 거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정선거 신고 건수가 2천여 건에 달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게리맨더링이 있었다.

과거 러시아 국가두마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만을 시행하고 있었으나, 이 때 치러진 선거에는 많은 사람이 공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과거 러시아 국가두마가 완전 비례대표제를 했을 당시에는 봉쇄조항으로 7% 이상을 득표하지 못한 정당은 비례대표 의석을 얻을 수 없어 군소정당의 국회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2011년 러시아 총선 사태와 같이 투표결과도 조작했다는 의혹이 크다. 정작 원내 야당들이 지리멸렬하기에 이 제도가 통합 러시아의 독주를 도왔다. 제7대 국가두마 의원 선거에서 소선거구제를 도입하면서 이 기준은 5%로 낮아졌다. 또한 득표율 3%가 넘으면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온다.

무소속 후보도 정당 비례대표 명부에 들어갈 수 있지만, 무소속 후보의 비율이 50% 미만이어야 한다. 이렇게 의원직을 유지한 의원으로는 대표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조레스 알표로프 전 의원(무소속, 공산당 비례대표)이 있다.

현재 국가두마 의원의 임기는 5년이다.

상원인 연방평의회는 연방주체 85곳(공화국 22, 주 46, 지방 9, 연방시 3, 자치구 4, 자치주 1)에서 각각 2명씩 의원을 보내 정원 의석은 총 170석이다. 공식적으로 모든 의원이 무소속이며, 의원은 연방주체의 의회에서 한 명을 선출하고, 나머지 한 명은 연방주체의 수장이 한 명을 지명하고 의회의 동의를 얻어 선출된다.

사법부[편집]

법원의 경우 소련 시절 형사법 내용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여 법을 만들었다. 옐친 정권에서 사법 개혁을 추진했던 세르게이 파신에 따르면 피고인의 99.6%가 유죄라고 한다. 재판방식은 판사가 검사처럼 공격적으로 심문하여…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또한 메드베데프 총리는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언론인들의 대담 중 연못에서 잉어 7마리를 낚았다고 징역 6개월(!), 핸드폰 훔쳤다고 2년형(!)이 선고된 가혹한 판례를 언급해가면서 아예 무죄 판결이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인식이 판사들 사이에 퍼져있다는 점을 매우 비판했다. 특히 가정폭력 같은 경우 가벼운 형벌이나 벌금형으로만 그치며 아예 처벌을 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무엇보다 러시아 사법부는 다른 공공기관과 마찬가지로 뇌물수수같은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사법제도를 불신하는 편이다.

처벌 수위는 구소련 시절의 형량에서 사형과 유배형만 없애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사형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무기징역은 가석방이 가능한데 사형이 폐지된 뒤에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만 가석방을 거부하면 그만이라 별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징역의 상한은 징역 25년. 단 여성은 무기징역의 선고가 불가능한 대신 징역 30년까지 선고 가능하다. 18세 미만은 러시아 소년법 규정에 따라 징역 10년까지만 가능하고, 14세 미만은 형사처벌 하지 않는다.

행정구역[편집]

수도는 모스크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주요 도시도 존재한다.

러시아는 85개의 연방 구성체로 이루어진 연방 국가다. 연방 구성체 내 상당수 지역에는 비러시아계 민족들을 포함되어 있지만, 이러한 공화국에는 연방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에 대한 제약이 있어, 연방 정부로부터 극히 제한을 받고 있다. 현재 22개 공화국, 46개 주, 9개 지방, 1개 자치주, 4개 자치구, 3개 연방시로 구성되어 있다. 푸틴 집권 이후에는 한때 지방장관 상당수를 임명제로 선출했으나 2012년 5월 간선제를 도입하여 10월에 선거를 치렀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중앙정부의 각 연방 구성체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2000년 5월 13일에 전 국토를 7개로 나눈 연방관구를 설치했으며 책임자는 간선제를 채택하였다. 2010년 1월 19일 남부연방관구로부터 분리되어 북캅카스연방관구가 신설되었다. 2014년 3월 21일 크림연방관구가 신설되었지만 2016년 7월 28일을 기해 남부 연방관구에 합병되면서 폐지되었다. 이로써 현재 8개의 러시아 연방관구가 있다.

주요 도시[편집]

러시아는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도시의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왔다. 현재 러시아는 수도 모스크바를 필두로 인구 100만 이상의 수위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니즈니노브고로드, 노보시비르스크, 예카테린부르크, 옴스크, 첼랴빈스크 등 총 12개이며 50만 이상 도시는 33개이다.

외교[편집]

방대한 영토와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1세계 서구 국가들과 대립과 동맹 해온 역사가 길다. 서구권 국가들에게는 19세기(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는 해인 1815년)부터 신성동맹, 삼제동맹, 러불동맹, 삼국협상, 연합국, 상임이사국 등 유럽 대륙의 정세 역학에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였다.

국경선이 넓은 만큼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국가도 매우 많다. 동쪽으로는 러일전쟁도 치렀으며, 아직까지도 쿠릴 열도를 두고 영토분쟁이 진행 중인 숙적 일본, 냉전 당시 최대 주적이었고 현재도 러시아를 포위하는 미국,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으로 인한 아무르강 이북 지역과 연해주를 상실해 앙금의 여파가 남은 중국, 서쪽으로는 건국 초기부터 부딪쳐 온 스웨덴, 핀란드, 독일, 폴란드, 영국, 프랑스,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타타르멍에부터 악연을 맺기 시작한 몽골, 흑해 진출이나 중앙아시아 진출 과정에서 꼭 넘어뜨려야만 했던 튀르크인의 나라인 튀르키예소련 붕괴 후 골칫거리가 된 조지아 등이 모두 역사적인 적국이다. 특히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전면전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마주쳤고, 영국은 그레이트 게임 시절부터 러시아를 끊임없이 견제한 서구권 최대의 숙적이다. 러시아는 이러한 서구권으로부터의 외교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중남미의 좌파 국가들과 이란, 북한 등의 반미 성향 국가들에도 손을 뻗쳐서 미국을 견제하고 포위망을 뚫으려고 한다. 또한, 미국, EU의 견제와 제재를 받자 중국과 연합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가 가까워졌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과는 별개로 소련 시절부터 유엔 상임이사국이면서 세계적으로 미국, 중국과 더불어 국제 정세를 단독으로 논할 수 있다고 평가받는 강대국이다.

또한 오랜기간 유럽 내 권력 구조의 균형을 잡아온 국가로 나폴레옹 전쟁, 러불동맹, 삼국 협상, 독소전쟁 등 유럽에서 특정 세력이 강대해지며 폭주하는 것을 저지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종교 개혁 이후 독일이,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가 하나가 어그로 끌면 견제가 들어오는 유럽 전통상 지정학적으로 유럽 동쪽 변두리에 치우친 특성은 영국과 마찬가지라 유럽 전역의 국제적 견제 없이 거대세력을 형성하기에 유리했다. 그레이트 게임은 미영 패권경쟁이고 국제적 견제는 공산주의 혁명 소련 이후인데 20세기 중반 공산주의 이후로도 나치 독일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와 맞서서 일시적인 자유진영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빠른 핵개발로 인하여 공산주의 이념갈등에도 불구하고 대전쟁은 억제할 수 있었다. 근대 러시아는 폴란드오스만 제국의 약체화 독일의 오랜 분열, 스웨덴 제국의 몰락 근세 이후로 열강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나 7년 전쟁에서 결정적인 평화협상과 독일 통일 당시 삼제동맹과 같이 러시아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유럽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러시아의 오랜 역사적 행보에 대해 키신저가 유럽 권력 구조의 균형을 잡아준 보증인이라 평하며 "서방이 순간의 분위기에 휩쓸려 그런 러시아의 지위와 역할을 잊어버리는 것은 치명적"이라며 "유럽 지도자들은 장기적인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유로마이단 사태 후 제재가 시작되면서 친중 외교로 기울었으며, 브렉시트튀르키예 쿠데타, 시리아 내전 등을 이용하여 입지를 강화했다.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고강도의 경제제재보다 러시아 경제를 더 위협하는 것은 2014년 말 시작된 사우디발 유가 치킨 게임이다. 저유가가 수년째 장기화되면서 경기침체를 겪자 러시아는 경제 사정이 나빠져 잇달아 시위가 증가했다. 계속되는 서방의 잇따른 외교적 공격으로 친서방파와 반푸틴 세력들은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친푸틴으로 돌아서기까지는 안 해도 푸틴을 향했던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중이다.

정교회의 지원과 함께 (동방)정교 문화권과 친선 관계를 가지려 하고 있다. 특히 유럽연합 가입국이자 NATO의 핵심 멤버이기도 한 그리스, 불가리아와 문화적으로 동질감이 두텁다.

반목하고 있는 유럽 연합 내에서도 같은 정교문화권인 그리스나 불가리아에다가, 정교회권은 아니지만 이탈리아와도 친선 관계가 좀 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푸틴과 매우 친밀했었고 후임 마테오 렌치 집권 이후에도 시리아 내전 러시아 공습에 대해 신규 제재를 하려고 하는 유럽연합 결정이 이탈리아, 그리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미러관계 측면에서 보자면 버락 오바마가 반러성향이 강했다면 도널드 트럼프는 상당히 반중친러적인 걸로 유명하다. 이로 인해 그동안 반목하던 미국과의 관계도 좋아질 가능성이 점쳐졌다. 친러 고립주의 트럼프의 당선으로 서방 유럽은 비상이고 러시아와의 관계 모색을 도모하기도 했다. 헝가리는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고 불가리아, 몰도바 대선에서 친러파 후보가 승리했다. 하지만 몰도바는 대통령은 친러지만 의회가 반러라서 의견 충돌이 잦아 쉽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2018년 라트비아 대선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선에서 친러 후보가 당선되고 라트비아에서는 친러정당인 화합당이 1위를 차지했다.

이런 흐름 때문인지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사태로 인한 경제 제재 이후 처음으로 핀란드, 노르웨이와 다시 경제협력을 하게 되었다.

트럼피즘의 부상과 함께 유럽 좌파 진영 내에서는 러시아 푸틴 정권이 극우 민족주의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환대받는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독러관계는 미러관계보다 좀 더 복잡하다. 매일경제 오늘날에도 독일인들은 동서독 통일이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 관련해서 다소 복잡한 감정을 보여주고 있다.

2018년 초에 영국에서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을 놓고 영국과 러시아간의 갈등과 외교관 추방이 서방국가들의 러시아 외교관 추방 동참으로 확대되면서 러시아측은 반발했다. 그리고 러시아측은 서방국가들의 러시아 외교관 추방조치에 맞불정책으로 유럽 연합의 각 회원국의 수만큼 외교관을 추방하고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은 북극과 북미를 오가는 연습비행을 실시했다고 밝히는 등 추가적인 보복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거기에다 러시아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의 경제제재에 맞서 보복조치를 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러시아는 서방의 대러제재에 맞서서 對서방 식료품 금수조치 제재를 2019년말까지 연장했다. 또한, EU가 다시 2020년까지 대러제재를 연장하자 러시아측도 2020년까지 對서방 식료품 금수제재를 2020년말까지 연장시켰다. 2020년 12월 10일에 유럽연합은 크림 반도를 합병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6개월 연장했다.

러시아는 나토와 갈등이 심해지면서 결국 나토와의 민간협력 및 군사분야협력을 중단했다. 또한, 나토는 냉전 당시의 유물이며 1991년 당시에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함께 해체되어야 했다고 밝혔다.

유럽평의회에는 5년동안 활동하지 못하는 제재를 받았지만, 5년만에 복귀했다.

2020년 3월 26일에 푸틴 대통령이 코로나19의 팬데믹 사태와 관련 심각한 전염병 피해국에 대해 기존 제재를 일시적으로 해제해주자고 제안했다.

폴란드 등 9개국과 미국이 2차 세계 대전 종전 75주년 기념일인 5월 8일에 공동성명을 내고 러시아를 겨냥해 제2차 세계 대전 역사를 왜곡하고 타국의 주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전반적으로 러시아는 서방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으며 일부 권위주의 독재 성향 국가가 아닌 이상 일반적인 유럽 국가에서 러시아는 이미지가 매우 안 좋다. 러시아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와 성소수자 탄압 등을 호감있게 바라보는 일부 서방 극우나 우파 포풀리즘이 아닌 이상 대부분 싫어한다. 또한 러시아가 막장스러운 자본주의와 부정부패로 빈부격차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서방 온건 좌파들도 현재 러시아를 좋아하는 부류는 거의 없다. 다만 최근 들어 유럽 난민 사태 등으로 인해 유럽에 극우가 강세를 보이면서 친러성향도 어느 정도 있다.

2021년 3월에 중국을 방문중인 라브로프 장관은 EU와는 더 이상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다고 밝혔다.

러시아와 미국, EU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와 갈등을 빚고 있는 나라에 대해 블랙리스트 명단을 만든다고 밝혔고 푸틴 대통령이 서명했다. 러시아와 갈등을 겪고 있는 나라들에 대해선 러시아 주재 공관의 러시아인 채용을 제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와 EU의 갈등이 심해지는 가운데, 독일과 프랑스가 러시아-EU 정상회담을 제안했는데, 폴란드와 발트 3국은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러시아는 2021년 7월 2일에 푸틴 대통령이 서명한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에서 한반도중동, 북아프리카 등과 함께 긴장 고조 지역으로 지목하고 북한과 같은 이웃 국가들이 분쟁 진원지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력할 것이라는 입장을 확인했다.

9월 29일에 러시아가 아프리카 4개국에 대한 제재조치를 실행하기 위한 새로운 전문가 위원회 선정 명단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미 남수단, 콩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유엔제재 위반에 대한 조사가 늦어지고 있다고 유엔의 외교관들은 말했다.

나토가 러시아 정보장교로 밝혀진 외교관 8명을 추방하자 러시아측이 반발해 새로운 제재를 한다고 밝혔다. 2021년 11월 1일부터 벨기에 브뤼셀의 나토 주재 러시아 대표부가 업무를 잠정 중단한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사회는 러시아를 비판하고 있다. 이에 미국과 캐나다, 호주, 영국, EU는 러시아 제재를 실시한다고 밝혔고 일본, 대한민국, 대만, 싱가포르도 동참한다고 밝혔다. 이렇듯 러시아와 서방권간의 갈등이 커지고 있으며 각국에서 반러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가 대러 제재를 풀때까지 가스공급 중단을 선언했다.

국력[편집]

병력수는 징병제로 90만 명의 상비군 대군을 유지하고 있다(5위) 액티브 국방비 지출은 2020년 기준 8위다.

핵무기 보유량 1위 국가고 ICBM SLBM 기술 모두 가지고 있으며, 미국과 마찬가지로 유인우주선, 우주도킹우주정거장 개발도 자력으로 할 수 있는 나라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과 상호확증파괴를 유지할 수 있는 대규모 핵무기와 비대칭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마크 밀리 미군 합참의장은 러시아가 미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핵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미국의 유일한 존재적 위협(existential threat)이라고 말했다.

군사무기 수출은 2위이다. 특히 AK-47는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정평이 나있으며, 모잠비크의 국기에도 그려져 있을 정도로 반서방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GDP는 11위 정도인데,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사태로 인한 서방의 경제제재와 셰일가스와 사우디의 증산에 따른 유가 파동 여파가 크다. PPP는 6위다. IMF 투표권 9위, 금 보유고 5위, AIIB에서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발언권이 높다. 외환보유고는 4위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데, 발언권이나 영향력은 미국 다음이다. 전체적인 국력 자체는 중국이 우위에 있지만 중국은 자국 이익을 제외하면 러시아보단 대외 개입을 자제하는 편이다.

국방[편집]

제2차세계대전 직후 소비에트 연방군은 총 병력은 1000만명이 넘었고 1987년, 소비에트 연방군은 총 병력 500만 명으로, 재래식 무기, 비대칭 무기 등을 포함하여 미국과 전 세계 군사력 1위를 앞다투는 강력한 국가였다. 그 후 소비에트연방군이 러시아 연방군으로 승계되면서 병력 및 무기를 상당수 감축하였다. 2010년 중국이 세계 군사력 2위였으나 2011년 이후 세계 군사력 순위 2위다.

이후 러시아연방군은 통합군 체제 아래서 육군, 해군, 공군, 전략로켓군, 공수군, 항공 우주군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핵무기체계에 있어 여전히 미국과 함께 양강을 구축하고 있다.

러시아는 모든 병과에서 세계 제 2위의 군사력을 자랑하며 T-80UM1, T-90AM 등 3세대 전차 1,500대 이상과 MIG-29K, Su-35BM, MIG-31BM, Su-34, Tu-95MS 등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다. S-400 지대공미사일을 보유 중이며, 차세대 S-500도 개발 중이다. 5세대 스텔스기 T-50 FAK FA를 실전 배치할 것이다. 그리고 미그-31BM을 북극권에다 배치한다. 현재 총 병력은 130만 명이다.

2009년 1월 1일부터 복무 기간이 12개월인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육군, 해군, 공군의 복무기간은 동일하다. 그 외 전략로켓군, 공수군, 항공 우주군은 모병제로 충당한다. 러시아군은 유일하게 미국과 전면전이 가능한 군대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징집병은 전투병과에 투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헌법에선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으며, 종교적 신념이 군복무와 다른 경우에는 다른 것으로 대체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조지아와의 전쟁 이후에 러시아는 국방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군인 수도 150만 명 이하로 줄이고 있다. 또한 장기적으로 완전히 모병제로 전환할 계획이다. 현재 러시아는 전차가 무려 32,950대로 세계 1위이며, 전투기 또한 2,749대로 세계 3위이다. 군함은 현재 233척을 보유하고 있다. 현역병도 130만명이며, 견인포의 수도 3만문으로 세계 1위다. 그러나 재정문제로 전차는 4,000대 정도만이 구동할 수 있다. 러시아는 미 함대를 요격할 수 있으며 특히 키로프급 순양함은 300발의 어뢰와 미사일을 실을 수 있다. (현재 니미츠급 항공모함을 제외하면 가장 크다. 3척도 재취역 시킬 예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지수다.) 러시아의 항공모함은 쿠츠네초프 항공모함이 있다. 또한 러시아의 차기 항공모함 (ATAKR급)은 2015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푸틴은 2020년까지 핵잠수함을 24척 보유하겠다고 밝혔으며 2013년부터 일부는 취항하고 있다. 러시아 공군은 2020년까지 신형전투기 600대를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2014년 1월 3일에 러시아 해군은 신형 군함 40척을 도입했다.

경제[편집]

러시아 GDP 변화.

석유, 가스가 아랍 산유국처럼 많으면서도 러시아의 명목 1인당 GDP는 중진국 개도국 수준이며. 총 GDP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고 구매력 평가 PPP GDP는 높은 편이나 2020년 구매력 평가 예측치 기준 독일과 엎치락 뒷치락하는 수준이다. 그나마 독립국가연합에 소속된 국가 중에서는 부유한 편에 속하는 나라이기도 하고, 러시아어가 통하기 때문에, 주로 독립국가연합 출신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향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2021년 기준 명목 GDP는 1조 6475억 6800만 달러로 세계 11위, PPP GDP는 4조 4474억 7700만 달러로 세계 6위이다.

이러한 경제력은 자국 내에서 생산되는 방위산업 제품이나 IT 소프트웨어 등에선 큰 이점과 수출 경쟁력을 가져다 주지만 수입산 제품이나 해외 선진국을 목표로 한 관광 등에선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다준다. 소련 해체 이후 옐친 시대에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를러 1998년에 1인당 GDP가 1,330달러까지 추락하였고, 이후 푸틴의 집권 이후 2000년대 자원의 슈퍼 사이클에 힘 입어 경제가 반등하여 1인당 GDP가 2013년에는 15,974달러까지 올랐으나 2014년 이후로 유로마이단 사태로 일어난 서방제재와 석유가격 하락으로 경기가 침체되어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 초반대에 머물고 있다. 러시아 경제의 고도화와 병폐 해소의 개선이 되고 있지 않는데, 고질적인 심각한 부패와, 선진국에 비해 낮은 소득 수준, 극심한 부의 불평등 문제는 시간이 흘러도 개선되지 않고 정체된 상황이다. 러시아의 강점은 소련 시절부터 이어온 막대한 방위산업 기반과 방대한 핵전력 및 군사력, 발달한 과학 기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 풍부한 에너지 연료, 원자재 등 천연자원이다.

특히, 러시아는 온갖 종류의 천연자원을 풍부하게 보유한 자원대국으로서, 자원을 통해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세계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75조 달러의 가치에 해당하는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그만큼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소련 해체 이후 초토화된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었던 것도 2000년대 초기 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천연자원 수출에 힘이 붙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2008년의 금융위기 때도 일시적인 충격만을 입고 원자재 가격의 힘으로 바로 회복할 수 있었다.

러시아 경제의 큰 문제점은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겪는 경제제재이다. 러시아는 주요 무역 파트너인 서방과 지정학적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에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 무역 관계도 언제든지 어그러질 수 있다는 위험을 안고 있다. 특히, 2014년 크림 위기는 서방이 러시아에 무거운 경제제재를 가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는 러시아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2020년대까지도 러시아 경제에 대단히 무거운 족쇄가 되고 있다.

서방 경제제재가 일으키는 문제점은 러시아 금융이나 에너지 기업, 인사 등에 대한 제재 뿐만 아니라, FDI 유입 저해와 서방 첨단기술 및 부품의 금수조치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 경제와 산업이 고도화되고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를 차단함으로 제조업 증진 및 산업 고도화에 큰 손해를 끼치고 있다. 글로벌 공급 사슬망이 형성되면서 어느나라 제품이건 외국의 부품과 기술이 사용되는 구조를 띄는데, 러시아는 이러한 프로세스를 따르는데 문제가 많아 수입대체산업같은 자국 제조업 발전 프로젝트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기 힘든 실정이다.

설상가상으로 셰일 혁명을 시작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증산 경쟁을 실시하면서 유가가 폭락하여 러시아 경제는 휘청이고 있다. 그래도 2016년 하반기부터 유가가 배럴당 50달러선을 넘나들고 구조조정이 효력을 얻으면서 경제가 회복세에 접어들기는 했다. 그러나 여전히 1~2%의 실질경제성장률을 기록중이라 2년간 축적된 GDP 하락세를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 임금을 받는 러시아인의 평균 월급이 한화로 약 71만 원이다. 직종별로 차이가 커서 러시아의 빈부 격차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대거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소련 시절에 아파트와 별장을 무상으로 나누어준 영향으로 자가 주택 소유자 비율이 높고, 생필품과 공공요금이 싸기 때문에 실질 구매력은 상당하기 때문이다. 유가 폭락과 크림 반도 합병 이후 서방의 경제 제재, 코로나 19 사태 와중에도 2022년 기준 러시아의 1인당 PPP는 3만 502달러로 중국의 1만 7206달러, 멕시코의 1만 8804달러, 태국의 1만 8073달러에 비해 아직 우위이다. 비교 대상으로 삼은 세 나라 모두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지니계수가 높은 나라들이다.

지역별로도 경제력 차도 심해서 모스크바, 샹트페테르부르크는 한국과 비교해도 크게 뒤쳐지지는 않는 수준이지만 태국이나 그 이하의 소득인 지역도 상당수이다.

그래도 당초 모라토리엄 소리가 나왔던 것과는 다르게 대외채무를 성공적으로 구조조정하고 국가 채무비율도 10%대 정도의 낮은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는 등 재정과 채무수준은 건실하게 운용한데다가 되려 수입에 의존했던 상당수 공업 제품들과 식료품도 자급자족하면서 경상수지 흑자도 일단 유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제재제와 저유가의 후폭풍으로 수입품의 가격이 급속히 올라간 관계로 단기적으로 생활물가가 급상승하여 생활비가 크게 오른 것은 변함이 없다. 게다가 이후로도 물가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봉급수준이 크게 올라간 것도 아닌지라 실질 급여수준은 정체되어 2010년대 전반기 수준이 유지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2021년 기준으로 러시아 실질임금은 5년 연속 추락했으며, 이로 인한 국민의 삶의 질도 하락한 것으로 분석됐다. 그래도 2018년도에 유가상승으로 2012년 이후 처음으로 재정흑자를 달성했는데 재정수입을 더 늘리겠다고 부가가치세와 연금지급 연령을 높였다는 점 때문에 국민들 반응은 썩 좋지가 않고, 부가세 인상의 여파로 2018년에는 가처분 소득의 신장이 기대되었지만 1% 아래의 미미한 수준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경제불황과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해 러시아의 경제상황이 나빠지자 푸틴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고, 2019년 들어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가 자주 생기고 있다.하지만 러시아의 국가지수인 모스크바 RTS지수를 보면 2008년 경제위기 이후 580선까지 떨어졌었으나, 2022년 6월 기준 1000~1100포인트로 500포인트 가량 상승하긴 했다. 즉, 일단 외환보유고를 늘리고 기업들이 회생하는 등 안정성을 유지했지만, 그 대가로 내수시장을 희생했다는 것.

결국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대러시아 경제 제재로 급속한 경제난에 시달릴 가능성이 생겼다. 당초에 물가폭등에 시달릴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물가는 고금리와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로 일단 잡을 것으로 예측되지만 서방기업 대규모 철수와 고금리로 인한 기업의 투자위축으로 올라가는 실업률이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디플레이션 현상으로 이어져서 일본식 장기 경기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이 되었다.

현재까지 러시아 경제상황을 보면 디플레이션이 아닌 높은 인플레이션과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이며 고물가 저성장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 2월 이후 러시아의 물가상승률은 유럽연합이나 미국의 2배 가까이 되며 2022년 2분기 러시아의 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여 경기침체와 고물가가 현실화 되고 있다.

서방이 경제제재를 시작한지 1년이 거의 다 되었지만 러시아는 중국, 인도, 튀르키예,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에서 서방의 금수물품들을 확보하면서 무역규모를 거의 회복했다. 또한 국제통화기금(IMF)은 2023년 러시아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3%에서 0.3%로 상향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서방의 경제제재도 한계를 보기 시작했다.

금융과 화폐가치[편집]

러시아 루블러시아연방중앙은행에 의해 독점적으로 발행된다.(러시아 연방 헌법 제75조) 러시아연방중앙은행 총재는 2022년 현재 엘비라 나비울리나이다.

러시아가 자원의 저주에 빠졌다는 평가와 자원의 저주까지는 아니라는 평가가 갈리지만 자원의존형 경제의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에 대비해서 러시아 경제 당국이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제 정책적 수단은 금 보유고를 늘리는 것이다. 러시아는 2000년대 들어 유입된 막대한 외화로 금 보유고를 늘리는데 안간힘을 썼으며, 2014년 세계 6위의 금 보유국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국가별 금 보유량 외환보유고 중 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이상인 경우, 해당 통화는 안정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한다. 이처럼 러시아가 금 보유량을 늘리는 이유는 자국 화폐의 교환 가치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며, 경제의 주춧돌이 되는 화폐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2014년 12월 국제유가 하락으로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2013년 12월 대비 절반으로 추락하는 통화 불안정성을 보여 주고 있다.

특이한 점은 IT 산업이 나름 발달하여, 서구 금융시장에서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HTS 등 중 러시아에서 개발된 것이 많은 편이다. 대한민국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FX마진 거래용 MetaTrader 및 시스템 트레이딩용 TradeStation, MultiCharts 등이 러시아인이 개발한 것이다. 그리고 바이러스 백신으로 많이 사용되는 카스퍼스키 엔진 또한 러시아 회사의 작품 또한, 세계 정상급 수준의 IT 기업 얀덱스가 있으며, 러시아 및 동유럽판 페이스북 브콘탁테를 보유 하고 있으며, 러시아판 아마존으로 불리우는 와일드베리즈 쇼핑몰 등등 IT 산업이 탄탄하며,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 할 정도로 기반이 탄탄하다.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은 중간수준이고 국민들 생활수준은 서방 선진국들은 물론이고 발트 3국에 비해서도 뒤쳐지는 편이지만 구매력은 생각외로 큰 편이라고 평가받으며 지하경제까지 감안하면 가처분 소득은 서방 선진국들에 비해서 크게 뒤쳐지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물가가 소득수준에 비해서 크게 싸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구매력이 높은 것은 소련 시절의 유산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인데 소련 시절에 러시아에서는 집과 별장을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했기 때문에 인구도 소련 붕괴 이후로 감소세이고, 평균수명도 짧아지다보니 집을 상속받는 가정이 많아 자기집 보유율이 높아서 집세부담을 걱정하는 가정이 적은데다가 공공요금도 아직은 크게 싼 편인지라 소득이 증가하면 바로 소비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대다수 러시아인들이 적은 봉급에도 높은 소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이것도 계층별로 달라서 2천만 명이나 되는 빈민층들은 낮은 최저임금과 연금수령액 때문에 그리 여유있게 생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대도시로 이사한 사람이나 집을 구하려는 젊은층들도 높은 집세와 날이 갈수록 오르는 물가와 집값 때문에 여러모로 여유있게 생활하기가 힘든 건 마찬가지다.

농업[편집]

소련 시대에 비해서 훨씬 사정이 나아진 얼마 안 되는 분야 중 하나다.

러시아는 구소련 영토의 약 4분의 3을 차지한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10년 가까이 쇠퇴한 뒤, 러시아 농업이 조직적·기술적 현대화로 개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춥고 척박한 북부 지역은 주로 가축에 집중하며, 비옥한 체르노젬 지대인 남부 지방과 시베리아 서부는 곡물을 생산한다. 소련 시대에는 처녀지 개간 운동 같은 뻘짓 하다 실패하고 경쟁자인 서방에서 식량을 수입하는 처지였지만 21세기 들어 러시아는 곡물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다만 농작물과 축산물을 자급자급했다고는 하지만 치즈같은 가공식품류는 2015년 이전까지는 의외로 수입이 많았다. 크림 사태 이후 2014년 서방의 경제 제재와 루블화 평가 절하가 발생되면서 수출 경쟁력이 생기면서 주요 곡물의 국내 생산에 박차를 가했고, 2016년 러시아는 소련의 곡물 생산 수준을 넘어섰고, 그해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이 됐다. 밀 수확량 자체는 중국과 인도에 뒤 이은 세계 3위이며 미국보다 훨씬 많다.

2018년 유엔식량농업기구 자료에 의하면 세계 1위의 보리와 귀리, 사탕무 생산국가이다. 세계 3위의 밀과 호밀 생산국이다. 2020년 기준 전세계 밀의 24.1%를, 전세계 보리의 14.2%를 점유하고 있다.

크림 사태 이후에는 전례 없는 국가적인 지원과 유럽산 식품의 수입 금지 덕분에 러시아에서 연중 채소 생산이 가능한 비닐 하우스 농법이 크게 각광을 받으면서 비닐 하우스 농사붐이 크게 일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 농업부 자료에 따르면 최근(2016년 기준) 3년간 러시아의 비계절 채소 생산량이 18% 증가했으며 이러한 추세대로라면 러시아 농업부 추산으로 2020년까지 러시아에서 비닐하우스를 1500헥타르 면적에 새로 건설될 텐데, 그렇게 된다면 동계 시즌 러시아의 국내 채소 수요를 거의 충당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2022년 식량·에너지 위기가 일어나자, 러시아는 2022년 대러시아 경제제재를 풀면 러시아의 밀과 비료를 수출할 준비가 돼 있다고 주장하며 러시아의 농업자원을 협상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

광업[편집]

석유, 천연가스, 원자재[편집]

세계 1위의 산유국이다. 사실 러시아는 19세기부터 산유국 랭킹 2위 밖으로 벗어나 본적이 거의 없었다. 러시아가 산유국 2위 밖으로 밀려난 것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 몇년, 그리고 1991년 소련 연방 해체 후 몇년 정도에 불과하다. 드넓은 시베리아에서 나는 석유, 천연가스를 비롯한 각종 천연자원, 원자재는 러시아 국력의 원천이며, 냉전 시절 소련이 미국과 경쟁할 수 있었던 근간이었다.

현재도 러시아는 여전히 세계 1위의 산유국으로서 이란이나 이라크의 2~3배에 달하는 산유량을 자랑한다. 이러한 오일머니가 있지만 국가경제가 지나치게 석유 등의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에 유가가 하락하거나 석유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 이를 반영한 것인지 2011년 10월 24일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러시아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변경하였다.

때문에 재정구조는 취약한데 수출 금액의 70% 가량이 석유와 천연가스가 대부분인 천연 자원 대금이다. 때문에 브릭스 중에선 재정구조가 가장 취약한것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자원수출형 경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부존 자원에 경제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나마 러시아 정부당국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해서 전체 GDP 대비 외채비중이 낮기는 하고 외환보유고를 세계 수위권으로 보유하고 있다.

실제로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서구의 경제제제 및 유가하락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치명타를 입고 있다. 그리고 재정 수입 중 에너지 부문이 46%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2016년 말부터 북극지방의 석유를 개발하면서 영국 파이넨셜타임스 추정 20조달러에 이르는 유전을 가지게 되었다. 때문에 러시아 경제의 석유의존도는 앞으로도 장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가 유럽을 압박할 수 있는 원동력이 전적으로 이 에너지 부문에서 얻는 수익 때문이다.

귀금속[편집]

러시아는 사하 공화국 등에서 세계적인 규모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보유 중이다. 이를 관리하는 기업이 알로사이며, 2016년 민영화되었다. 알로사는 러시아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95%와 전세계 다이아몬드 추출량의 27%를 차지한다.

러시아의 금광 업체인 폴리우스(ПАО "Полюс")는 2019년 금 생산량 284만 온스를 기록하여 세계 10대 금광 업체 중 하나이다.

2018년 12월 시베리아에서 매장량 1700 톤에 달하는 금광이 발견되었다.

노르니켈(Норникель, Nornickel)은 세계 최대의 니켈팔라듐 채굴 및 제련 업체이다.

공업[편집]

항공·우주[편집]

소련시절부터 투폴레프, 안토노프, 일류신을 비롯한 여객기 및 수송기와 미그, 수호이, 야코블레프 등의 고등전투기를 설계하는 등 항공우주산업이 발달한 국가이며 현재는 국영 지주회사인 로스테흐놀로기야 산하의 통합항공기제작사와 통합 항공기엔진회사,[36] 러시아 헬리콥터 등으로 통합 정리되었다. 수호이와 일류신의 민항기는 러시아 국적 항공사인 아에로플로트의 기체로도 사용된다.

러시아는 미국 다음으로 군용기 분야에 있어서는 제조량이 세계 2위, 헬리콥터 제조량은 세계 3위이다.

탈냉전 이후 전투기는 서방권 비행기 제조사들에게 밀리지만, 그래도 항공우주 지식은 과거부터 연구를 많이 해서 개발도상국이나 자체 전투기 기술이 없는 선진국들에게 전투기를 제조하여 판매하기도 한다.

미국, 중국 등의 국가들과 함께 세계에서 매우 선진적인 우주 기술력을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세계 최초의 우주인이 러시아에서 탄생될 만큼 냉전과 여러 설계국의 경쟁으로 막강한 기술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발사체 분야에서는 아직도 미국이 부족한 부분도 있을 정도로 우주선 제조 기술은 미국 다음이다. 대중적으로 미국의 NASA가 잘 알려져있으나, 러시아의 로스코스모스도 세계 주요 우주기구이다.

철강·비철[편집]

광활한 영토와 세계 2위의 철광석 매장량과 텅스텐 매장량 등의 수많은 금속자원을 가진만큼 제철 분야와 비철 분야의 산업이 발전되어있다. 대표적인 제철회사로는 세계 17위로 세계 13위인 현대제철과 비슷한 규모의 NLMK(Группа НЛМК/Novolipetsk Steel/노볼리페츠크 스틸), 메첼(Мечел/Mechel)등이 있다

루살은 세계 3위의 알루미늄 제련 및 제품 생산 공급 업체이다.

차량·이륜차[편집]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에 속한 아브토바즈, 고급차를 생산하는 아우루스, 군용 차량을 생산하는 UAZ 등이 있으며 IMZ 우랄과 같은 오토바이 제조사도 유명하다.

방산·무기[편집]

러시아의 군수(방위) 산업은 250만~300만 명을 고용해 전체 제조업 일자리의 20%를 차지한다. 러시아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재래식 무기 수출국이다. 러시아 최대 화기 제조업체인 칼라시니코프는 전체 소형 화기의 약 95%를 러시아에서 생산하며, 전세계 27개국 이상에 공급하고 있다.

에너지·운수[편집]

아람코와 세계 1위, 2위를 다투는 정유사인 가즈프롬이 러시아의 회사이며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있는 대륙국가이기 때문에 도로와 철도를 이용한 운수업과 항공기를 통한 운수업이 발전되어있다. 로사톰 역시 세계 1위의 원자력 기업으로 에너지 전환에 있어서도 매우 유리한 입장에 위치해 있다.

컴퓨터·정보[편집]

러시아를 포함한 구 공산권에서 유명한 포털업체인 얀덱스가 러시아의 회사이며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여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의 국가에서도 사용하며 최근에는 자체적인 안드로이드 스마트폰도 출시했다. 게임회사도 유명하다

  • 가이진
  • 1C Company

제지·섬유[편집]

러시아는 세계 삼림의 5분의 1 이상을 보유한 세계 제1의 삼림국이다. 그러나 유엔식량농업기구와 러시아 연방 정부의 2012년 연구에 따르면, 러시아 산림의 상당한 잠재력이 저활용되고 있어서 러시아의 임업 생산물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4%에도 미치지 못한다.

무역[편집]

1988년 이전까지 소련은 매년 40∼5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으나, 1989년 이후 적자로 돌아섰다. 소련은 초기에는 자급자족 위주의 정책으로 무역규모가 미미했으나, 냉전체제가 강화되면서 사회주의국가 및 제3세계국가와 교역을 확대하였다. 사회주의국가와 제3세계국가와의 교역은 구상무역 방식이 주종이며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다. 1980년대 들어 소련은 선진국과 본격적으로 교역하기 시작하여 무역은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자국(自國) 상품의 취약한 경쟁력, 그로 인한 경화(硬貨) 부족 때문에 무역규모는 급격히 하락하였으며, 특히 수입규모가 현격하게 줄었다.

1993년 러시아의 무역규모는 700억 달러(수출 430억 달러, 수입 270억 달러)로서 160억 달러의 무역적자(CIS 공화국과의 거래 제외)를 나타내었고, 1997년 무역수지는 368억 달러 흑자를 기록하는 등 경제 상황이 좋아졌다. 1998년 모라토리엄의 선언으로 경제상황이 아주 나빴으나 1999년 이후 국제 석유가격이 고가로 유지되고 루블 절하에 의한 수입 대체산업의 회복 등으로 인하여 플러스 성장을 함에 따라 무역도 호조를 보였다. 2000년에는 수출 1030억 달러, 수입 339억 달러로 691억의 무역흑자를 기록하였다.

1993년 러시아의 주요 무역상대국은 145개국에 이르며, 이는 1950년의 45개국에 비해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지역별 분포를 보면, 구(舊)코메콘 국가와 기타 사회주의 국가가 전체 무역의 약 28%를 차지하고 있으며, 선진국과의 무역거래는 전체 무역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과거 소련의 경우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개발도상국과의 교역은 12.7%이며 매년 급속하게 신장되고 있다. 2000년 무역 상대국 1위는 독일이며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미국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석유, 천연가스, 철·비철금속, 기계·설비 등이 주요 수출품이며, 기계·설비, 식료품, 농산물 등이 주요 수입품이다. 최근 러시아는 무역의 구조개선 및 확대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 일환으로 우선 비효율적인 중앙집권적 무역제도를 지양하고, 기업과 지방정부에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1988년에는 과거 대외무역을 주관해온 대외무역부를 국가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와 통합하여, 대외경제관계부(MVES)를 신설하였다. 대외경제관계부의 역할은 주요 전략상품에 대해 지도·감독을 하는 것이고, 그 통제방식도 완화하였다. 또한 종래의 구상무역방식에서 경화결제(硬貨決濟)방식으로 전환하였다. 이 때문에 과거 주요 무역상대국이던 구(舊)공산국가와 제3세계국가와의 무역거래가 급속히 줄었다. 다만 소련에 속해 있던 신생 독립국가들의 경우, 오랜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를 바탕으로 당분간 무역거래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루블화의 태환성 확보를 위한 국내 가격구조 개선과 외국자본의 적극 유치 등을 실시하고 있다.

2006년 기준 수출 규모는 총 317.6 억달러로 주요 수출품으로는 원유, 천연가스, 목재, 금속, 화학 및 군수 관련 제조용품이다. 수출 상대국으로는 네덜란드가 1위로 10.3%, 그 뒤로 독일(8.3%), 이탈리아(7.9%), 중국(5.5%), 우크라이나(5.2%), 튀르키예(4.5%), 스위스(4.4%) 순이다. 총 수입규모(2006)는 171.5 억달러로 기계류, 소비자 공산품, 의약품, 육류, 설탕, 가공 금속류 등으로 수입 상대국으로는 독일이 1위로 13.6%, 우크라이나(8%), 중국(7.4%), 일본(6%), 벨라루스(4.7%), 미국(4.7%), 이탈리아(4.6%), 대한민국(4.1%)이다.

교통과 통신[편집]

러시아는 거대한 영토, 혹독한 기후, 자원의 편재 등으로 원활한 수송체계의 마련은 경제발전의 관건이지만, 현재까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자원이 적재적소에 공급되지 못하고 중도에 부패·파손·분실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주요 소비재 공급부족현상과 그로 인한 인플레의 원인은 생산능력의 부족뿐만 아니라 수송체계의 비효율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철도는 러시아의 수송수단 중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철도의 화물운송 분담률은 전체 화물의 절반이 넘는다. 그러나 여객 수송 분담률은 이에 다소 못미친다. 최근 경제침체로 화물발생량이 크게 감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석유 및 가스 수송관의 역할이 높아지면서 철도의 화물수송 분담률은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장거리수송에서 철도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 2005 기준 러시아의 철도 총길이는 87,157km이며, 일반 수송이 아닌 특수산업목적의 철도의 30,000km의 철도가 별도로 존재한다. 한편 철도는 독립국가연합 소속 국가 및 발트3국(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그리고 그루지야 등과 단일 체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국가가 직접 운영하고 있다. 도노선의 분포는 매우 불균등하며, 유럽 시아의 철도밀도는 매우 높은 반면, 시베리아와 극동지방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바이칼~아무르 철도(BAM)의 간선 외에 소수의 지선이 있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트토크에서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상트 페트르부르크까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할 수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은 중국을 횡단하는 TCR, 중국과 몽고를 거치는 TCMR, 한국횡단철도(TKR) 등과의 연계가 주목받고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1916년에 완성되어 1937년에 복선전철화되었으며, 승객과 화물 운송량이 세계적이며 유라시아 대륙의 물류운송에서 동맥의 역할을 한다. 이미 러시아는 1970년대 초반부터 상업화하여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컨테이너항을 건설하여 일본에서 유럽으로 가는 화물을 TSR을 통해 수송해왔다. 우리나라도 이때부터 유럽으로 가는 물량의 일부를 보내기 위해 이를 사용하고 있다. 2006년에는 러시아가 북한과 함께 하산에서 북한의 나진까지 철도를 현대화하는데 합의를 함으로써 TSR은 한반도 깊숙이 연결되고 있다.

고속도로망은 발달되어 있는 편이 아니며,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포장률이 낮다. 도로의 화물운송 부담률은 낮은 편이며, 100km 이내의 단거리 수송이 대부분이다. 최근 자동차 생산대수가 크게 늘면서 도로의 여객수송 분담률이 커지고 있다. 자동차 정비시설 및 서비스업체 부족은 도로운송체계 발전에 큰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2004년 기준 총 연장은 871,000km으로 이 중 포장도로는 738,000km이고 비포장도로는 133,000km이다.

내륙수로의 화물수송 분담률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거대한 하천이 다수 있으면서도 내륙수로교통이 잘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결빙 및 유량부족, 그리고 범람 등 기후적 요인 외에도 화물 발생이 주로 동서방향인 데 비해 유로는 주로 남북으로 뻗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가강·레나강·예니세이강 등은 주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내륙수로는 주로 화물운송에 이용되고 있으며, 화물의 대부분은 석유와 곡물이다. 수운 총연장은 102,000km이다(2005).

한편 해운은 수송수단으로서의 역할이 미미하다. 현재 주요항구로는 북극해의 아르한겔스크, 발트해의 벤트스필·클라디페다, 흑해의 노보로시스크·투압세, 카스피해의 바쿠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항구는 항만시설이 매우 낙후되어 있어 현대화 작업과 시설확충이 시급한 실정이다.

러시아의 항공교통은 자동차교통보다 훨씬 급속하게 발전해 왔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항공이 여객수송의 20% 가량을 담당하고 있으나 세계 최대 항공사인 아예로플로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항공사는 영세하며, 항공사의 90% 이상이 파산상태이다. 또한 대부분의 항공기는 비행수명을 초과한 노후 항공기이며, 공항시설도 매우 낙후되어 있다. 1994년 현재 공항은 2,517개이며, 최근 러시아는 노보시비르스크·쿠루모추·하바롭스크 등지에 새로운 국제공항을 건설할 계획이다.

시베리아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송하기 위해 석유 수송관 72,283km와 가스 수송관 156,285km가 설치되어 화물수송량의 약 35%를 담당하고 있다. 이 수송관들은 시베리아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유럽러시아와 유럽 각국에 공급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2006년 러시아 국영회사 가즈프롬이 에너지 공급원을 무기로 유럽 가스공급 중단을 협박하면서 에너지 차원이 아닌 안보, 정치, 경제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고 있다.

통신 역시 서구에 비해 매우 낙후되어 있다. 전화보급률이 극히 낮으며, 회선부족과 통신상태 불량으로 국제통화시 어려움이 많다. 최근 러시아 정부는 통신분야 투자를 확대하고 있지만, 전화 가입신청자가 1000만 명 이상이 적체되어 있는 실정이다.

인문사회[편집]

인구[편집]

인구는 2022년 기준 약 146,240,000명(크림반도 제외시 143,820,00]명)으로 세계에서 9번째로 많다. 하지만 그 넓은 국토에 비하면 적다. 미국 인구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며 방글라데시보다 인구가 적다. 국가별 인구 순위와 국가별 인구 밀도 순위를 참조한다. 멕시코와 인구수가 비슷한데 러시아가 약 16,000,000명 더 많다.

면적과 인구를 대비해 보면 인구 밀도는 km²당 8.36명으로 한국의 1/60 정도로 굉장히 낮다. 물론 국가 전체로 일반화하면 곤란하다. 사하 공화국은 인구밀도가 km²당 0.3명이고 싱가포르보다 4,300배나 넓은데 인구는 싱가포르의 1/5도 못 된다. 유럽 부분의 인구밀도는 km²당 27명으로 비교적 높다.

어쨌든 한국 같은 국가들과 비교하자면 인구밀도가 낮긴 낮아서 서울, 델리와 마닐라의 km²당 인구밀도가 각각 17,000명, 25,500명, 42,000명인 것과는 달리 모스크바 시의 인구밀도도 km²당 4,000명에 불과하며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모스크바주의 인구밀도도 km²당 150명 정도다. 참고로 충청북도의 인구밀도가 km²당 210명이다.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은 이유는 대부분의 국토가 미국, 유럽에 비하면 무척 척박하고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지속된 인구감소도 한몫한다. 1987년 2.2명이던 출산율이 1988년부터 조금씩 떨어져 1991년 소련 붕괴 후 의료보건체계와 사회보장제도가 붕괴하고 고물가에 따른 예금가치의 추락이 겹쳐 출생률 감소가 가속화해 평균수명도 같이 줄어들어 1993년에는 출산율 1.5명선이 붕괴하고 사망자수도 연 200만 명선을 넘어 매년 -0.4% ~ -0.6% 정도의 인구감소 추세가 2008년까지 이어졌다. 2009년부턴 출산율의 증가와 평균 수명의 증가, 구 소련 지역으로부터의 이민자 유입으로 인구가 증가한다. 이후 2013년부터 이민을 제외하고도 인구가 증가세였으나 2016년부터 다시 줄어든다. 크림 반도의 인구는 제외한다.

출생률로 보면 2015년 러시아의 1,000명당 출생율은 13.3명에서 2019년엔 10.1명이고 이것은 한국(8.6명)보다 높지만 중국(12.1명), 미국(12.4명)보다 낮다. 아무튼 2010년대 중반 이후 출산율이 브레이크 없이 감소해 장기적으로 인구가 감소한다.

2017년 러시아 정부가 저출산 대책으로 젊은 가구에게 64억 파운드를 준다. 2020년 1천만 외국인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준다.

러시아는 1990년대-2000년대 초반 저출산에도 평균 수명이 낮아 고령화 문제는 유럽이나 일본보다 덜하나 2010년대 이후로 사망률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평균 수명이 증가함에 따라 2022년 고령 인구가 16%로 이미 고령 사회다. 중위 연령 역시 2022년 40.8세로 40대다.

평균수명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은 WHO 통계에 따르면 72.99세로 이는 북한(72.89세)이나 방글라데시와 비슷한 수준이다. 북한과 러시아의 경제 수준 차이를 고려하면 이해가 가기 힘든데, 이는 러시아 남성들의 평균 수명이 터무니없이 짧아 평균값이 확 내려가서 그렇다.

러시아 여성들의 평균 수명은 78.15세로 높은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정상 범위인데 반해 남성들의 평균 수명은 겨우 67.62세[63]에 불과해 남녀 평균 수명이 10년이나 차이 난다. 즉, 평균적으로 러시아 여성들은 사별 후 무려 10년 동안 혼자 살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다른 나라의 4~5년보다 훨씬 높다. 러시아에서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짧은 이유로는 보드카를 비롯한 음주 문화도 영향을 끼친다. 오죽하면 스푸트니크 V 백신이 2개월 금주 권장때문에 러시아 내에서 접종률이 떨어진다고 할 정도. 개발진은 3일만 금주해도 된다고 해명까지 했고, 전문가들도 포도주까지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소용이 없어서 남는 물량을 해외에 처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여성들의 평균 수명이 70대 후반 정도는 되기에 노인 인구는 꾸준히 늘어 어느새 전체 인구의 14.3%나 되어 벌써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0~14세 유년층 인구는 전체의 17.1%로 아직은 노인 인구가 유소년 인구를 추월하지는 않았지만 그 격차가 불과 3% 이내로 많이 좁혀진 상황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노년층 인구가 유년층 인구를 추월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민족[편집]

러시아인은 러시아 민족 또는 러시아 국민을 말한다.

흔히 다민족 국가라 하면 미국, 캐나다를 떠올리는데 러시아도 대략 120개 민족이 있는 다민족 국가다.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하다. 러시아인 이름에 아시아계 이름이 있다. 이것도 스탈린의 강력한 러시아 동화 정책, 강제 이주와 굴라그로 대표되는 억압으로 조금 줄어든 수준이다.

2022년 인구 조사 결과 러시아인이 인구의 81%, 약 1억 1,500만이며 볼가 타타르인, 우크라이나인, 바시키르인, 추바시인, 체첸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벨라루스인, 불가리아인, 폴란드인, 카자흐인, 타지크인, 우즈베크인, 투르크멘인, 키르기스인, 아제르바이잔인, 핀인, 카렐인, 독일인, 시베리아 타타르, 사미인, 카라차이인, 발카르인, 조지아인, 쿠미크인, 쿠르드족, 몽골족, 루마니아인, 부랴트인, 체르케스인, 조지아인, 아바르인, 다르기인, 칼미크인, 코미인, 마리인, 사모예드족, 나나이족, 에벤키족, 축치인, 야쿠트인,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크림 타타르족, 하카스인, 니브흐족, 아이누족 등 엄청나게 많다. 고려인도 50만 명 정도 있어 약 0.3% 정도다. 러시아 내에는 그 넓은 영토에 걸맞게 모두 120개 소수 민족이 있으며 550만 타타르인과 200만 우크라이나인부터 98명 콜라 노르웨이인까지 그 수도 다양하다.

러시아 흑인, 5만 명의 인도인, 일부 파키스탄인, 심지어는 아프가니스탄 내전 당시에 러시아에 피난 온 일부 아프가니스탄 피난민도 산다. 러시아 흑인의 역사는 의외로 길어 18세기에 이미 장군을 배출했다. 유명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흑인의 후손이다. 곱슬머리에 그 흔적이 있다. 조상이 카메룬의 귀족인데 푸시킨도 자기 집안의 이러한 내력을 자랑스러워했다. 현재 러시아에 사는 흑인의 규모는 약 4만에서 7만이다. 그 외 러시아에도 구소련출신의 우크라이나,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에서 온 이주 노동자가 많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이주 노동자는 러시아에서 3D 업종에 종사하지만 러시아 내에서 차별을 받고 심지어 러시아 내 스킨헤드에 의해 살해당한다.

언어[편집]

공용어이자 국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러시아어다. 하지만 전부가 러시아어를 모어로 하는 것은 아니라서, 러시아 인구의 약 92%인 1억 3천만명만이 러시아어를 모어로 삼는다. 이는 러시아가 다민족 국가인 특성상 러시아인을 제외하고도 소수민족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이 소수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어족도 인도유럽어족, 북서캅카스어족, 우랄어족, 고아시아어족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또한 러시아가 연방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체(공화국, 민족 자치구 등)는 러시아어 이외에도 따로 공용어를 지정하여 사용한다. 타타르 공화국의 타타르어, 사하 공화국의 야쿠트어가 대표적인 예.

하지만 러시아어의 세가 워낙 강력하다보니 지금은 소수민족 상당수가 자신의 민족어를 점차 잊어버려서 언어학자들은 발등에 불이 붙은 심정이라고 한다. 그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죽으면 그 언어는 그대로 사멸하니까. 2009년 유네스코는 러시아 내 언어 136개가 사멸 위기에 처해있다고 밝혔다. 그러다보니 러시아내 소수민족들의 언어들은 러시아 정부의 특별 기금으로 보호를 하는 것을 마련하고 있다.

관련 자격증으로는 러시아 교육부가 주관하는 공인 시험인 토르플(ТРКИ, Тестирование по русскому языку как иностранному)이 있다. 토르플은 한국슬라브문화원 산하 토르플센터, 계명대학교 등에서 응시가 가능하다. 그외 기타 기관에서 실시하는 시험으로는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외국어능력시험인 FLEX,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 주관 언어능력시험 SNULT, OPIc 러시아어가 있다.

종교[편집]

우선 정교회는 동로마 제국의 선교사들이 전교해,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통치하는 키예프 루스[71]의 국교가 되었으며 1037부터 1448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임명한 그리스인 대주교가 통치했다.

러시아의 4대 대표 종교는 유대교, 정교회, 이슬람, 불교이다.

소련이 1991년 붕괴되고 세워진 러시아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는 다양한 종교 활동이 보장된다. 다만, 1,000여 년의 세월 동안 러시아 민족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러시아 정교회가 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비율의 신자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정교분리를 표방하지만, 러시아 정부와 정교회가 매우 사이가 가까우며, 사실상 정교회가 러시아 제1종교이자 국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련 해체 이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이후 지난 20년 동안 종교를 믿는 러시아인은 급증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어느 정도 혹은 매우 종교적이라고 응답한 러시아 성인들은 1991년 11%에서 2018년에 70%로 증가했다. 그리고 "신을 믿는다"고 응답한 러시아인들은 같은 기간 동안 38%에서 75%로 상승했다.

2016년의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의 종교는 정교회 71%, 무종교 15%, 이슬람 10%, 응답거부 5.5%로 집계되었다. 정교회 신자들은 주로 슬라브계 러시아인(русские)들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무슬림들은 북캅카스, 타타르스탄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다. 소련 시절 국가 무신론 정책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 비율이 높은 편이다.

교육[편집]

러시아의 교육 제도는 11년제이며, 소련 시절부터 실시되어 왔다. 의무 교육이며, 유치원 또는 어린이집에서 고등학교까지는 무상교육이 실시된다. 초등학교는 3~4년, 중학교는 5년, 고등학교는 2~3년이다. 대학교는 5년제에서 공식적으로 4년제로 바뀌었다. 주요한 대학교로 모스크바 대학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극동 연방 대학교, 민족 우호 대학교가 있다. 외국어로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쓴다. 최근에는 한국어가 제2외국어 정규 과목으로 신설되었고, 중국어, 일본어 등의 아시아계 언어를 제2외국어 교과목으로 추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문화[편집]

예술[편집]

초기 러시아 예술은 주로 성화나 프레스코화에 치중되어 있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강대국으로 떠오르자, 테오파네, 안드레이 루블레프, 디오니시우스 등의 예술가들이 이름을 널리 떨쳤다.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는 1757년에 처음으로 설림되었고, 이반 아르구노프, 드미트리 레비츠키,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 등의 아카데미 소속 예술가들이 이름을 알렸다.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리얼리즘 화풍의 화가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는데, 이반 시시킨, 이반 크람스코이, 바실리 폴레노프, 아이삭 레비탄, 바실리 수리코프, 빅토르 바스넷소프, 일리야 레핀, 보리스 쿠스토디예프 등의 리얼리즘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상징주의 예술이 인기를 끌었는데, 주로 미카일 부르벨, 쿠즈마 페트로프보드킨, 니콜라스 로리크 등이 활동하였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인기를 끌었는데, 이 시기의 유명한 예술가들로는 일 리지츠키, 카지미르 말레비크, 마르크 샤갈 등이 있다. 아방가르드 사조는 소련 시기까지 이어졌고, 소련 출신의 예술가들에는 어니스트 네이즈베츠니, 베라 무크니나 등이 있다.

건축[편집]

러시아의 기원이 된 동슬라브족들은 나무를 건축재료로 능숙하게 사용하였는데 이후로 전통적인 러시아의 건축물은 목재로 지어졌고 집의 지붕이나 배의 고물에도 목조장식을 붙혔다.

키이우 시대에는 기독교가 도입되고 교회건물이 생겨나면서 비잔틴문화가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이에 따라 건축재료에 있어서 석조건물이 나타났으며, 건축의 내부장식에서도 그리스식의 회반죽이 마르기전에 수채화법으로 그리는 프레스코, 조개껍질이나 유색금속가루를 부착하는 모자이크가 도입되었다.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인 989년에 최초의 목재 대성당이 노브고로드에 세워졌으며, 991년에 키이우에 최초의 석재 교회건물이 세워졌다.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받아 건축된 대표적인 건물은 11세기에 건축된 성 소피아 대성당인데, 비잔틴식의 여러개의 돔(dome)을 가지고 있으며, 모자이크 등으로 장식되었다.

몽고의 지배기의 러시아의 중심은 키이우에서 모스크바공국이 주도하는 북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수즈달과 블라디미르 지역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된다. 몽고지배 초기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사암이 사용되거나 당시 서구 교회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도입되기도 하였으며 비잔틴의 영향으로 반구형의 지붕과 둥근 돔으로 된 교회들이 있었다. 그러나 몽고지배하에서 영향을 키운 모스크바 대공국이 강성해지면서 러시아 건축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이반 3세(1462~1505)는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써 강성해진 모스크바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석조건물로 된 거대한 국가적 교회를 짓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러시아의 낙후된 건축술을 서구의 그것만큼 끌어올리게 된다. 그는 고대도시 블라디미르에 있는 석조로 된 작은 건물인 초기의 우스펜스키 사원을 모방하여 모스크바에 새로운 사원을 러시아의 건축가들에 의해 짓게 하였으나 붕괴하자, 당시 건축이 발달하였던 이탈리아에 사신을 보내 아리스토텔 피오라반티를 초청하여 우스펜스키 사원을 새로 지었다.

이반 3세가 명한 대로 초기의 우스펜스키 사원을 보고 만들어진 이 사원은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다섯개의 머리와 원형의 정문을 차용하여 건설된 것이었다. 이러한 양식은 러시아 스타일과 그리스정교적인 스타일을 결합한 것으로 서구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이탈리아 건축가의 초빙은 이반 3세가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로서 로마에서 르네상스 교육을 받은 소피아와 결혼을 하면서 그녀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탈리아 건축가의 성공으로 피오라티, 쏠라니 등과 같은 더 많은 이탈리아 건축예술가들이 러시아로 초빙되었으며, 크렘린궁의 재건축, 아르항겔스키 사원 건축 등을 맡게 된다. 유럽의 건축가들은 러시아적 전통에 익숙해지면서 러시아 건축가들과 함께 더 많은 교회 건물들을 건설했다. 당시 연대기의 작가들은 십일조교회, 성 소피아 대성당 등의 석조건출물이 동슬라브족의 역사에서 민족적 의의를 가지는 사건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 전통적인 스타일의 목조건축물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반 4세는 짜르(tsar)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강력한 전제군주가 되었는데, 카잔과 아스트라칸에서의 타타르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러시아 건축가 바르마와 프스닉에게 성 바실리 사원을 짓게 하였는데, 이 건물은 장대하고 독특한 매격으로 명성이 높다. 기본적으로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따르지만 제각기 다른 양파 모양의 돔에 러시아 전통 문양이 조각된 원추형의 지붕은 러시아 건축 스타일의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로마노프 왕조에 이르면 17세기말부터 러시아 건축의 변화가 일어난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정책으로 서구의 예술적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전통으로부터 이탈이 일어난다. 러시아적 전통이 무시되고 서구의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의 건축이 새로운 수도가 된 상트페트로그라드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독일 패턴에 따라 계획되었으며, 독일, 프랑스의 서구예술가들에 의해 장식되었다. 19세기에는 상업적, 군사적인 면을 중시하는 독일의 고전적 건축스타일이 지배했다. 그러나 교회건축은 여전히 전통적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결합된 건축양식이 주를 이루었다.

소비에트 혁명 이후 구소련의 건축에서는 건축미학의 기준이 구질서와는 다르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반영하고 기술적인 기능주의와 이념적 형태주의를 통합하는 건축운동 즉 아방가르드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선전선동 예술을 위한 실험실 예술이라는 정신과 실용적인 물품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과 이념을 결합하였다는 뚜렷한 건축적 성과는 없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문학[편집]

러시아 문학은 고대 동슬라브족의 연대기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데, 이후 중세를 거쳐 차츰차츰 발전을 거듭하였다. 18세기의 계몽기 러시아에서는 주로 미하일 로모노소프와 데니스 폰비진이 등장하여 러시아 문학계를 이끌었으며, 19세기 초에는 바실리 주코프스키와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등장하였다. 특히 푸시킨은 현재까지도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시인들 중 하나로 칭송받고는 한다. 이후에도 러시아에서는 미하일 레르몬토프, 니콜라이 네크라소프가 등장하여 위대한 시들을 연이어 발표하였고, 알렉산더 오스트롭스키, 안톤 체코프 등 극작가들이 등장하였으며 니콜라이 고골, 이반 투르게네프,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소설가들이 등장하며 러시아 문학의 정수를 빛냈다. 이후 이들의 뒤를 이어 콘스탄틴 발몽, 발레리 브류소프, 비아체슬라프 이바노프, 알렉산더 블로크, 니콜라이 구밀료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안나 아흐마토바, 드미트리 메레시콥스키 등의 시인들이 활동하였으며, 소설가들 중에서는 이반 부닌, 막심 고르키 등이 이름을 알렸다.

러시아 철학은 19세기에 그 절정기를 맞았는데, 니콜라이 다닐렙스키, 콘스탄틴 레온티에프 등이 이 때 활동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유명한 러시아 철학가들 중에서는 블라디미르 솔로비예프, 세르게이 불가코프, 불라디미르 베르나츠키 등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대부분의 주요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은 러시아를 등지고 말았고, 이후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에 걸맞는 예술들을 위하여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이 등장하였다. 소련 시기의 주요 예술가들 중에서는 미하일 숄로호프, 예프게니 쟈마찐 등이 있다. 이외에도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예프게니 예프셴코, 안드레이 보츠네센스키 등이 있다.

요리[편집]

러시아 요리는 주로 생선, 캐비어, 버섯, 베리류, 꿀, 가금류 등을 주로 사용하여 만든다. 그 외에도 밀, 수수 등 곡류들도 가장 자주 사용하는 식재료들 중 하나인데, 러시아에서는 주로 이 곡물들을 이용하여 빵, 팬케이크, 시리얼 등을 만들어 먹고는 한다. 또한 그 외에도 크바스, 맥주, 보드카 등 주류를 제조하는 데에도 이용한다. 러시아에서 가장 대중적인 빵은 흑빵이라고 한다. 러시아에서 대중적인 요리들로는 보르쉬, 생선을 넣고 만드는 수프인 우하, 양배추를 넣고 만드는 수프인 시, 토마토 소스와 고기를 넣고 만드는 솔랸카, 차가운 수프인 오크로시카 등이 있다. 종종 수프와 샐러드에 넣어 먹는 크림류인 스메타나 등도 있다. 그 외에도 치킨 키예프, 펠메니, 꼬치류인 샤실리크 등이 있다. 이외에도 고기에 양배추를 넣어 만드는 요리 등도 유명하다.

스포츠[편집]

러시아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는 당연히 축구이다. 소련 시절의 소련 국가대표팀은 유로 1960에서 승리하며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유럽계 챔피언십을 거머쥔 바 있고, 유로 1988에서도 결승전까지도 진출하였다. 1956년과 1988년에는 소련이 올림픽 축구전에서 금메달을 딴 적이 있고, 소련이 해체되고 만들어진 모스크바 팀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축구 대표팀도 각각 2005년과 2008년에 유럽 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다.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유로 2008은 준결승에 진출하기도 했고, 2018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는 동유럽에서 열린 첫 축구 월드컵이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아이스 하키가 매우 대중적이다. 그 실력도 매우 뛰어나서 1993년, 2008년, 2009년, 2012년에 우승을 거두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2014년에도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 외에도 밴디, 즉 러시아 하키도 매우 유명하여, 소련 시절에는 1957년과 1979년 사이에 있는 모든 밴디 국제전에서 우승을 하였을 정도였다. 러시아는 농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유로농구전 2007에서 우승을 거두었으며 유로 리그에서도 2006년과 2008년에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자동차 경기인 포뮬라 원도 점차 인기를 끌고 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어왔다. 전체 메달 합산 개수에서 3위일 정도이다. 라리사 라티니나는 여성으로서 가장 많은 개수의 금메달을 거두었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알렉산더 포포프는 세계 최고의 수영선수들 중 하나로 칭송받는다. 또한 싱크로나이즈에도 세계적인 수준이며, 피겨스케이팅에도 실적이 좋다. 또한 마리아 샤라포바와 같은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들을 배출해낸 국가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1980년 하계 올림픽을 모스크바에서, 2014년 동계 올림픽, 그리고 2014년 동계 패럴림픽을 소치에서 개최하였다.

영화[편집]

러시아에 영화가 도입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연극의 중간에 삽입되었으나, 1896년에 러시아 최초의 전용 영화관이 개설되었다. 당시 러시아와 프랑스는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영화업자들이 러시아에서의 배급을 둘러싼 점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자적인 영화를 생산하지 못했다.

1904년에 러시아 최초의 영화사가 설립되었는데, 빠떼 프레르와 고몽(Gaumont)이라는 회사였다. 빠떼 프레르라는 회사에 많은 이익을 남겨준 영화는 <예수의 생애와 수난>이라는 영화였으나 종교적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903년에는 구쯔만이 영화사를 설립하고 모스크바에 두개의 극장을 개관하였다. 러시아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주로 프랑스에서 수입된 것이었는데, 1908년부터 프랑스 영화는 연극배우들이 등장하는 예술영화가 들어왔다. 영화관의 숫자는 매년 증가하였으며 이로 인한 수입의 증가는 러시아의 독립적인 영화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1910년에 상트 페트로그라드에는 22개의 영화관이 개장했고, 총 84개 정도의 영화관이 운영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외국영화사들과의 경쟁이 없어지자 러시아의 영화제작은 활기를 찾았고, 러시아 영화산업이 번영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영화제작의 양은 늘어났지만 질적인 성장이 없어 오히려 관객의 분노를 자극하기도 하였으며, 오히려 프랑스와 영국 등의 선전용 영화물이 범람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문을 닫고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었다. 러시아 영화산업은 대형회사의 독점은 없어졌지만 새로운 변화는 없었다. 1917년 11월부터 소비에트 정권이 등장하면서 소비에트영화기구가 탄생하여 영화산업에 대한 정부의 관리가 시작되었으며, 소비에트 영화는 교육과 계몽에 집중되었다. 1919년 8월 레닌이 직접 서명한 ‘영화산업 국유화 포고’가 발효한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러시아 영화는 러시아문학의 고전작품을 영화화하는 등 소련국영 체제 아래에서 발전하였다.

1924년 러시아 영화의 역사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는 감독들이 등장하였는데, 에이젠스테인은 <파업>이라는 작품을 통해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영화를 창출하였는데 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 등의 영화적 은유와 이미지가 충만한 영화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러시아의 영화는 소비에트사상을 얼마나 반영하는가라는 명분 즉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스탈린 사후 1961년에는 해빙기가 찾아와 공식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깨뜨리고 형식과 내용의 자유를 추구하여 큰 변화를 일으켰으며 수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1985년 고르바쵸프의 개방정책으로 러시아 영화의 예술성이 드러나는 과거 상영금지작들과 바실리 피출의 <리틀베라>, 끼라 무라토의 <운명의 뒤바뀜> 등 기념비적인 영화들이 발표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대한관계[편집]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이 일본 및 청나라와 함께 조선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한-러 관계가 본격화된 것으로 본다. 대한민국과 러시아의 외교 관계는 1885년 7월 7일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최초로 수립되었고,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적극 활용했다. 러시아도 조선을 남하정책의 교두보로 여겼기 때문에 양국의 관계는 적극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는 1896년 고종이 친일정부를 피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아관파천으로 이어졌으며,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 내에서 독점적으로 누렸던 권리를 일본과 나누어 가지며 각종 이권을 챙겼다. 이에 조선에서는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고종은 375일 만에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조선은 1904년 5월 조선과 러시아 간 체결되었던 모든 모든 조약과 협정의 폐기를 선언하였고, 이를 계기로 양국 간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러시아는 1905년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였다.

한국전쟁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이 북한을 지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줄곧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대한민국과 소련은 미하일 고르바초프(Михаил Горбачёв, 1931~)의 등장과 함께 해빙기를 맞게 되었다. 1989년 12월 양국은 영사처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앞서 4월에는 소비에트연방상공회의소 서울사무소가 개설되었으며, 7월에는 한국 무역진흥공사 모스크바사무소가 개설된 바 있었다. 1990년 12월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공식 방문하여 무역협정 및 과학기술 협정, 이중과세방지 협정, 투자보장 협정 등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해체되면서 대한민국과 러시아는 경제·문화·과학 분야에서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고, 1992년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Борис Ельцин, 1931~2007)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1993년 이후 러시아 내에 민족주의 정서가 확산되면서 러시아 정부는 자국민들에게 강대국으로서의 위치를 재확보할 것을 요구받았고, 이에 러시아는 서방과의 공조가 아닌 독자적 입장에서 한반도 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러시아는 양국의 우호관계 속에서 1995년 9월 '조·러 상호원조 및 우호협력 조약'을 폐기하였는데, 이는 6·25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의 자동 군사개입 조항을 담은 조약이었다. 이후 대한민국과 러시아 간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져 러시아의 각종 대규모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또한 러시아의 관세 특혜국이 되었으며, 어업협정의 체결로 러시아 수역 내 어획권을 확보하였다.

1998년 대한민국과 러시아는 양국의 외교관을 맞추방하는 최악의 외교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방러하여 21세기를 향한 미래지향적 동반자적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에 양국이 합의하였고, 2001년에는 블라디미르 푸틴(Владимир Путин, 1952~)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9년부터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가스공사 통영생산기지를 통해 국내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산 원유의 수입으로까지 이어졌으며,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러시아에 대규모 조선소와 자동차 공장 등을 적극적으로 설립하였다. 2010년에는 한러 수교 20주년을 맞이하였고, 이와 같은 활발한 한러관계의 연장선 상에서 대한민국과 러시아는 2014년부터 관광 목적 입국 시 무비자 입국에 합의하게 되는 외교적 결실을 맺었다. 2016년 한-EAEU 공동연구가 완료된 결과 양자 간 교역에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으며, 석유·천연가스 등 에너지 산업부문의 공동 개발과 항공우주·신소재·기계 분야의 과학기술 협력도 긴밀하게 진행 중에 있다.

2018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이후 19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푸틴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양국은 최적의 실질 협력 파트너임을 재차 확인함과 동시에 미래 성장 동력 확충·유라시아 극동 개발·국민복지 증진 등 3개 분야를 중심으로 발전 방안을 논의하였다.

현재 대한민국과 러시아 간에는 각국의 수도를 연결하는 서울-모스크바 노선의 직항 항공기가 운항 중이며, 그밖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유즈노사할린스크, 야쿠츠크, 울란우데, 노보시비르스크, 이르쿠츠크 등으로 가는 항공 노선이 있다. 러시아 영공을 통과하는 시베리아 횡단 항로가 열린 결과로, 과거보다 서울에서 유럽의 주요 도시를 쉽게 방문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해운 또한 러시아로 연결되는 다수의 정기 노선들이 개설되어 운항 중이다.

한국인은 러시아에서 관광 등의 목적으로 60일 이내 단기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며, 특히 미국과 러시아 두 나라를 동시에 무비자 협정으로 맺은 국가는 대한민국, 칠레, 브루나이 뿐이다.

2020년 8월 주한 러시아 대사관 페이스북에서 장문의 글이 올라왔다. 광복절을 기념하여 소련이 2차 대전에서 추축국 패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하는 내용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좋은 편이다. 지리적인 거리 때문인지 평소 러시아가 극동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나, 역사적으로 그나마 한국과 직접적으로 접점이 있는 유럽 국가이다 보니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도 한국을 대부분 잘 알며 최소한 한국이 아시아 선진국이라는 인식은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공산품부터 시작해 초코파이, 마요네즈, 도시락 등 식생활에서도 한국의 입김이 있고 요즘에는 동남아시아 처럼 한류가 널리 정착한 정도는 아니지만 K-POP이나 각종 한국산 온라인 게임과 e스포츠 강국인 한국의 면모가 많이 알려지고 있기에 젊은 세대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한국 인지도는 점점 늘어난다.

러시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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