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토바즈
아브토바즈(AvtoVAZ, АвтоВАЗ)는 1966년에 설립된 러시아의 자동차 회사이다. 초기에는 VAZ라고 불렸다. VAZ(ВАЗ)의 의미는 Volga Automotive Plant(Во́лжский автомоби́льный заво́д)의 약자로 불가 자동차 공장을 의미한다. 라다(Lada)는 아브토바즈의 제품을 수출할 때 사용되는 수출 전용 브랜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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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편집]
아브토바즈는 구 소련 시절 때부터 시작된 러시아 자동차 회사이다. 소련이 본격적으로 자국 자동차 산업에서 승용차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소련이 공산권의 맹주가 되면서 1960년대 이래 크게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소련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자국의 인민들에게도 공급할 수 있는 값싸고 튼튼한 소형 승용차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에 1966년 이탈리아 피아트(Fiat)와의 합작으로 '볼가 자동차 공장'(VAZ)을 설립했다. VAZ는 단순히 자동차를 소련의 인민에게 보급하기 위한 역할뿐만 아니라 외화벌이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하지만 수출을 위해서는 기존의 VAZ 대신에 새로운 브랜드가 필요했다. 그래서 라다 브랜드가 탄생했고, 이는 수출할 때 쓰이는 브랜드가 되었다.[1]
역사[편집]
1970년대[편집]
1970년대에 소련의 경제 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은 새로운 자동차 공장 건설을 요구했다. 이 공장은 소련에서 처음으로 경차를 대규모로 생산하여 소련 인민들을 위한 접근 가능한 소비자 차량을 생산할 것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1966년 7월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약 800km 떨어진 볼가 강 부지에 공장을 건설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건설된 댐으로 침수된 오래된 마을을 대체하여 새로운 정착촌을 이곳에 건설했다. 새로운 도시의 이름은 이탈리아 공산당 소속이었던 팔미로 톨리아티의 이름을 따서 톨리아티로 명명되었다. 아브토바즈는 자동차 및 공장 설계에 대해 이탈리아 자동차 제조업체인 피아트(Fiat)와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아브토바즈 프로젝트는 사회주의 노력의 역동적인 위업으로 추진되었으며 광범위한 지역의 청년 노동자들과 기술 전문가들을 모았다. 공장의 첫 번째 조립 라인은 1970년에 가동되었다. 같은 해 4월 19일, 첫 번째 자동차가 톨리아티의 생산 라인에서 출고되었다. 피아트 124를 모델로 한 VAZ-2101 이름의 4도어 소형차였다. 1972년 아브토바즈는 해치백인 VAZ-2102와 더 빠르고 강력한 쥐굴리(Zhiguli) 버전인 VAZ-2103의 두 가지 추가 모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해에 공장과 그 기업은 이미 43,000명의 직원을 고용했고 몇 년 후 그 숫자는 100,000명을 넘어섰다. 1973년 말까지 3개의 생산 라인이 모두 생산 능력에 도달하여 연간 660,000대의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아브토바즈는 1973년 영국에서 첫 번째 자동차를 판매한 후 곧 유럽 시장을 위해 오른쪽 스티어링휠이 있는 모델을 만들기 시작했다. 수출된 자동차는 라다(Lada)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자동차는 저렴한 가격 때문에 해외에서 잘 팔렸다. 해외 시장에는 독일, 프랑스, 벨기에, 헝가리 및 터키가 포함되었다. 국내에서도 자국 내 기업 경쟁이 거의 없어 잘 팔렸다. 1977년 니바(Niva)라고 불리는 VAZ-2121은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다. 이것은 아브토바즈 엔지니어가 완전히 개발한 최초의 자동차였다. 니바는 오프로드 기능을 갖춘 사륜구동 차량이었다. 북극에서 사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건을 견딜 수 있는 입증된 능력을 갖추었다. 아브토바즈는 또한 1984년에 최초의 전륜구동 차량인 VAZ-2108 3도어 해치백을 선보였다. 이것은 서양식 세단의 사마라(Samara) 제품군의 첫 번째 멤버였다. 1987년 사마라 라인은 5도어 버전인 VAZ-2109로 개선되었다. 사마라 라인을 위해 새로운 복합 단지가 건설되었지만, 클래식 쥐굴리는 여전히 아브토바즈 차량의 대부분의 판매를 차지했다.
1980년대[편집]
1980년대 중반까지 7개의 생산 부서가 설립되어 주조, 하위 조립, 소형 프레스, 최종 조립, 기계 제작 및 정밀 공구를 포함한 자동차 생산의 모든 단계를 제공했다. 아브토바즈는 쥐굴리가 실제로 평균 소비에트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동차였기 때문에 매우 수익성이 높은 기업이었다. 그러나 아브토바즈는 1970년에 생산된 첫 쥐굴리 이후 15년 동안 변화를 하지 않았다. 1986-90년의 12차 5개년 계획으로 시작하여 아브토바즈는 독립과 경제적 책임의 "세 기둥"에 따라 운영될 예정이었다. 위에서 받아쓰는 종이서류를 줄여 현장 관리자에게 더 많은 의사 결정 권한을 부여해야 했다. 이익에서 공제 비율도 몇 년 전에 미리 설정되어 계획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근로자는 탁월한 작업에 대해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 그 대가로 아브토바즈는 정기적인 일정에 따라 새 모델을 출시하고 모든 개발 비용을 자체 이익으로 지불하고 효율성과 수출 경쟁력을 개선하기 위해 생산 라인 교체를 시작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전체 체제를 재편하지 않고 경제의 한 부분을 개혁하기는 어려웠다. 아브토바즈는 개발 비용을 지불할 돈이 있었지만 하청업체가 여전히 이전 방식으로 운영되어 정부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필요한 공급을 확보할 수 없었다. 아브토바즈는 1986년 초에 필요한 구성 요소가 부족하여 처음으로 생산 라인에서 자동차를 철수해야 했다. 회사는 아브토바즈 하청업체에서 필요한 프로젝트를 관료들이 승인하도록 하기 위해 정부 규제 기관과 그 어느 때보다 얽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1986년 4월 아브토바즈의 경제 및 기획 이사는 과거의 규칙과 절차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소련 체제 이후[편집]
1990년대 초, 1980년대 후반의 경제 실험은 소비에트 체제의 완전한 붕괴로 인해 실패하게 되었다. 아브토바즈는 소비재 수출 사업을 수행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유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일부 기업보다 더 잘 준비했었다. 그러나 생산 라인은 그 어느 때보다 비효율적이었고 노동력은 부풀려졌으며 차량은 경쟁 제품보다 구식이었다. 라다를 만드는 데는 약 450시간이 소요되었지만, 토요타(Toyota)의 경우 15시간이 걸렸다. 전형적인 자본주의 회사는 많은 직원들을 구조조정을 했지만, 아브토바즈가 그렇게 하는 것은 회사가 톨리아티 주민의 약 4분의 1을 고용했기 때문에 톨리아티에서 용납할 수 없는 황폐화와 불안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토바즈의 장기적인 생존을 보장하려면 상당한 자본 투자가 필요했다. 이러한 이유로 아브토바즈 경영진은 회사를 민영화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외국인 투자자를 찾는 아이디어를 홍보했다. 1991년 공산주의가 붕괴하기 직전에 이 회사는 미국 회계법인 관리직들을 고용하여 회사를 평가하고 서양인이 이해할 수 있는 회계 계정을 생성했다. 한편, 아브토바즈는 회사의 지분 30%를 구매하기 위해 피아트와 협상 중이었다. 그러나 서구화된 계정을 생성하려는 이 초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아브토바즈 직원들은 1993년 1월 1일부터 회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기로 했다. 원래의 민영화 계획에 따라 직원들은 자본의 51%를 얻게 되었으며, 4분의 1은 러시아 시민에게 경매로 넘어갔고 나머지 대부분은 기업 투자자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까지 소비에트 민영화의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이후, 정확한 소유권은 불분명했지만, 대부분의 회사는 아브토바즈 경영진과 정부가 통제하는 법인에 의해 소유된 것처럼 보였다. 아브토바즈는 계속해서 외국인 투자자를 찾았고 1993년에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소속의 회계사들을 고용하여 국제 표준에 맞는 재무 계정을 준비했다. 감사 결과, 러시아인 1,000명당 자동차가 76대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되었으며, 이는 아브토바즈가 성장하고 투자 수익을 제공할 여지가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피아트는 곧 러시아 회사의 지분을 사는 데 관심을 잃었다고 발표했다. 그 결과, 러시아 자동차 재벌들은 1993년에 기금을 모으고 톨리아티에 새 공장을 건설할 야심 찬 계획을 세운 컨소시엄으로 전국 러시아 자동차 연합(AVVA)을 설립했다. 초기 러시아 자본주의의 가장 악명 높은 보리스 베레좁스키는 연합의 지도자였다. 연합은 많은 소액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았지만, 공장 자금을 조달할 만큼 충분히 모금하지 못했다. 대신 신차 개발에 투자했다. AVVA는 아브토바즈의 자회사이자 주요 주주가 되었다. 한편 베레좁스키는 모스크바 지역에 아브토바즈 차량을 유통하기 위해 로고바즈(LogoVAZ)를 설립했으며 1990년대 중반 대리점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1994년 초에 아브토바즈는 원자재 부족으로 인해 생산을 중단하고 100,000명 이상의 근로자를 구조조정을 해야만 했다. 결국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기 위해 수출 수익을 사용했다. 그러나 현금 흐름은 매우 부족했다. 많은 러시아 회사와 마찬가지로 아브토바즈는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데 몇 달 뒤처져 있었다. 이는 1994년 가을에 파업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1994년과 1995년에는 생산량이 약 500,000대 이하로 떨어졌다. 당시 러시아는 외제 자동차 수입을 제한했었지만 많은 차량이 불법으로 수입되고 있었다. 아브토바즈는 1990년대 후반까지 파산 위기에 처해 있었다. 회사는 세금 체납액으로 5억 달러 이상을 빚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1996년 국제통화기금(IMF)이 정부의 세금 징수 기록이 좋지 않아 러시아에 대한 지급을 중단했을 때 정부는 아브토바즈에게 외국 투자자를 찾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일부분의 지분을 국가에 양도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997년에 회사는 향후 10년 동안 세금 부채를 상환할 계획에 대한 담보로 과반수 지분을 정부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부채가 탕감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분은 2001년에 아브토바즈에게 반환된 것으로 보인다. 이코노미스트(Economist)와 모스크바 타임스(Moscow Times) 의 보고서에 따르면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마피아가 아브토바즈 차량 배포의 대부분을 통제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유통망이 붕괴 후 조직범죄는 아브토바즈의 일부 고위 관리자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보도에 따르면 마피아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일부 차량을 받을 수 있어 아브토바즈가 고통받는 동안 이익을 얻었다.
1998년 이후[편집]
1998년 8월 러시아를 뒤흔든 재정 위기는 아브토바즈에는 큰 경제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루블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에 아브토바즈는 생산 투입에 대해 더 적은 비용을 지불했다. 루블 표시 자동차는 이제 수입차의 4분의 1 정도였다. 또한 회사는 위기가 닥치기 직전에 몇 가지 새로운 모델을 도입했다. VAZ-2110 또는 라다 110은 1996년에 도입된 현대화 된 4도어 세단이었다. 더 큰 5도어 해치백인 라다 211은 1998년에 도입했다. 아브토바즈는 또한 러시아 마피아들의 범죄행위를 막기 위해 범죄 유통 활동을 단속했다. 1999년 아브토바즈는 유통 관리를 개선하고 물물교환 시스템을 모든 투입물에 대한 현금 지급으로 대체했다. 자동차를 철강으로 거래하던 시대는 끝났다. 2001년 2월 외국인 투자자와의 거래가 마침내 성사되었다. 3억 3,200만 달러 가치의 합작 투자에서 제너럴모터스(GM)는 기존 아브토바즈 시설 옆에 건설될 새로운 공장에서 니바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의 업데이트된 버전을 만들었다. 이 차량은 쉐보레(Chevrolet) 니바로 알려졌다. 첫 번째 모델은 2002년 9월 조립 라인에서 출시되었다. 위기 이후 러시아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아브토바즈는 1999년 이후 점차 이익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사업이 안정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중고 수입의 증가로 인해 2002년과 2003년에 판매되지 않은 차량의 과잉으로 인해 회사는 짧은 기간 동안 교대 근무를 줄였다. 현금 흐름이 여전히 문제였고 회사는 국내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003년 아브토바즈는 우선 주주에 대한 10% 지급 요건을 제거한 새로운 헌장을 통과시키려고 할 때 주주와 분쟁을 겪었다. 그러나 생산량은 연간 700,000대 이상의 정상 수준으로 돌아갔고 라다는 여전히 전체 자동차 판매의 약 4분의 3을 차지했다.[2]
주요 차량[편집]
쥐굴리[편집]
쥐굴리(Zhiguli)는 피아트(Fiat) 티포(Tipo)로부터 시작된 피아트의 명작 소형차, 피아트 124를 VAZ에서 특허를 도입해서 생산한 자동차이다. 차명인 쥐굴리는 볼가강 근처에 위추힌 쥐굴리 산맥에서 가져왔다. 라다 쥐굴리는 원본인 피아트124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훨씬 높은 최저지상고를 가지고 있고 엔진의 동력 전개 특성도 저회전에서 최대토크가 발생하도록 변경되어 있다. 이는 러시아의 혹독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련은 생산 개시 초기부터 이 차를 구 소련의 연방 국가들과 그 후신인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수출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캐나다와 북유럽에도 수출을 진행했다. 이탈리아 피아트가 1974년도에 124를 단종시키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각 서유럽 수출길에도 올랐다. 서유럽 시장에서 라다 쥐굴리는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실적을 올렸다. 그리고 이 차는 세계의 수많은 피아트 124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동차들 가운데 가장 오래 생산된 자동차이기도 하다. 라다 쥐굴리는 VAZ 시절부터 아브토바즈로 재편되고 난 이후인 2012년까지 무려 42년에 걸쳐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라다 쥐굴리는 러시아의 낙후된 자동차 산업 기반을 보여주는 근거로도 비치고 있었다.[1]
니바[편집]
니바(Niva)는 1977년부터 생산해 온 사륜구동 SUV이다. 차명인 니바는 러시아어로 들판을 의미한다. 시베리아의 혹한지대와 러시아의 끝없는 평원을 누빌 수 있는 SUV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라다 니바는 아브토바즈의 첫 독자개발 모델이기도 하며 초도 생산이 개시된 이래 40주년을 넘긴 장수 모델이기도 하다. 이 차는 당대의 SUV 상식이었던 바디온프레임 대신 승용차의 모노코크 차체구조를 채택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는 최초로 모노코크 차체구조를 적용한 크로스오버 SUV인 토요타 RAV4보다 2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이는 라다 사마라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얻은 데이터를 참고로 동시에 개발이 진행되었다. 여기에 상시 사륜구동과 차동기어 잠금장치로 구성된 사륜구동 시스템을 적용하는 등 당시에는 선진적인 구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혹독한 도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차였기에 튼튼한 구조 강도와 우수한 사륜구동 시스템이 필수였다. 따라서 라다 니바는 개발될 때부터 60cm 깊이의 강을 도하할 수 있고 1m 정도로 쌓인 눈 속을 뚫고 지나갈 수 있으며 58도에 달하는 등판각을 지닐 수 있도록 설계했다.[1]
사마라[편집]
사마라(Samara)는 1984년도에 처음 등장한 전륜구동 해치백 승용차이다. 이 차는 1970년대 독일의 폭스바겐(Volkswagen) 골프(Golf)를 위시한 전륜구동 해치백의 바람에 주목하여 개발되었으며 라다 니바의 설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차는 당초 기술제휴 관계에 있었던 피아트가 아닌 독일 포르쉐(Porsche)와의 공동개발로 만들어졌다. 이 당시 피아트는 VAZ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간주하고 기술협력을 거부했으며 이에 소련은 독일에 독소전쟁의 전쟁 배상을 명분으로 포르쉐와의 공동개발을 이끌어냈다. 라다 사마라는 포르쉐의 기반설계를 바탕으로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다양한 신기술이 적용되었다. 현대적인 3도어 해치백 스타일의 외관과 전륜구동계,맥퍼슨스트럿 전륜 서스펜션과 토션빔 후륜 서스펜션, 소련 자동차 최초의 랙앤피니언 스티어링 시스템, 플라스틱 범퍼와 알루미늄 도어, 크럼플존(Crumple Zone) 설계 개념이 적용된 차체 구조 등 당대의 기준에서는 상당히 현대적인 구성으로 완성되었다. 라다 사마라는 탄탄한 기본설계 덕분에 당대 소련 내에서 상당한 고성능 자동차로 통했으며 해치백 모델 외에서 세단형, 심지어 랠리카까지 만들어졌다. 라다 사마라는 2011년까지 생산되었다.[1]
그란타[편집]
그란타(Granta)는 2011년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소형 승용차로 국민차 쥐굴리의 후속 차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차는 르노(Renault)와 공동으로 개발된 승용차로 2004년 출시한 칼리나(Kalina)의 플랫폼을 바탕으로 개발되었으며 러시아 내수시장과 수출시장 모두를 공략하기 위해 기존 러시아제 승용차보다 한층 향상된 감성 품질과 패키징으로 태어났다. 라다 그란타는 차량의 설계와 생산 방식 역시 한층 현대적으로 진화를 이루었다. 라다 그란타는 과거와 달리 처음부터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설계 방식을 도입하여 개발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고 서방에서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로봇을 이용한 조립공정까지 도입했다. 이 덕에 라다 그란타는 현재 러시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자동차들 중 가장 현대적인 생산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차종 중 하나다. 토종 러시아 자동차들의 투박함에서 벗어난 현대적인 외관 스타일과 더불어 저가형 소형차가 가져야 할 간소한 구성의 실내를 가진 라다 그란타는 소형차의 미덕에 충실한 저렴한 가격과 실속있는 구성으로 인기가 있다.[1]
엑스레이[편집]
엑스레이(X-ray)는 아브토바즈가 개발한 현대적인 스타일의 소형 크로스오버 SUV 모델이다. 2015년 처음 등장한 이 소형의 크로스오버는 아브토바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가장 새로운 설계와 디자인을 가진 양산차다. 이 차는 라다 그란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르노와의 기술협력을 통해 개발에 돌입했다. 차명인 엑스레이는 크로스오버(X-over)와 레크리에이션(recreation), 활동(activity), 젊음(youth)의 의미가 담겨 있다. 라다 엑스레이는 기본형과 크로스 두 가지 형태로 생산된다. 기본형은 전체적으로 매끈한 MPV와 유사한 느낌을 주며 크로스 모델은 SUV로서의 감각을 보다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라다 엑스레이 크로스 모델은 차체 하단의 블랙 몰딩 패널과 더불어 차체 후방 하단에 마련한 메탈 스키드 플레이트, 상부 루프랙, 그리고 전용의 전면부 디자인을 적용하여 한층 강인하고 스타일리시한 감각을 자랑한다. 라다 엑스레이는 라다 그란타와 더불어 러시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설계되고 생산되는 소형 크로스오버 모델로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1]
각주[편집]
- ↑ 1.0 1.1 1.2 1.3 1.4 1.5 모토야, 〈50주년 맞은 러시아 자동차 산업의 중추, '라다'의 자동차들〉, 《네이버 포스트》, 2020-08-07
- ↑ 〈AVTOVAZ Joint Stock Company History〉, 《fundinguniverse》
참고자료[편집]
- 모토야, 〈50주년 맞은 러시아 자동차 산업의 중추,'라다'의 자동차들〉, 《네이버 포스트》, 2020-08-07
- 〈AVTOVAZ Joint Stock Company History〉, 《fundinguniverse》
- 라다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lada.ru/en/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