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드 카슈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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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드 카슈미르(우르두어: آزاد کشمیر, Azad Kashmir)는 파키스탄이 지배하는 카슈미르 지역 가운데 하나를 말한다. [1][2]
개요[편집]
아자드 카슈미르의 면적은 13,297㎢이며 인구는 4,567,982명(2008년)이다. 주도는 무자파라바드이다. 동쪽은 인도령 잠무카슈미르주와 국경을 이루고, 북쪽은 파키스탄의 길기트 및 발티스탄과 접한다. 아자드 카슈미르는 우르두어로 "자유 카슈미르"를 뜻한다.
1947년 이후 파키스탄의 보호하에 자체 독립정부를 갖추고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흑연·보크사이트·규토·백악·지르콘 등의 광석이 채굴되며, 목각품·직물 ·양탄자 등의 수공업이 이루어진다. 무자파라바드에서 남서쪽의 아보타바드로 통하는 간선도로가 나 있다.[3]
자연환경[편집]
북부는 해발고도 3,800m의 히말라야산맥 기슭으로 이루어져 있고, 남부는 피르판잘산맥의 북서쪽 지맥에 해당한다. 산맥 사이로는 젤룸강·푼치강과 그 지류들이 깊은 협곡을 따라 흐른다. 푼치강 유역의 좁은 평야지역에서는 밀·보리·옥수수·기장을 재배하고 가축류를 방목하며, 고지대 계곡에서는 옥수수 재배와 임산물 생산이 많다.
역사[편집]
아자드 카슈미르 1947년 인도 분할 당시 영국은 군주국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고, 왕국은 인도나 파키스탄에 가입할지 아니면 독립을 유지할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잠무와 카슈미르의 마하라자 하리 싱은 자신의 주가 독립 상태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잠무주(현재의 아자드 카슈미르)의 서부 지역과 프런티어주(현재의 길기트 발티스탄)의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1947년 봄, 서부 펀자브의 라왈핀디 지역 경계 지역인 푼치에서 마하라자에 대한 봉기가 일어났다. 마하라자 정부는 농민에게 징벌적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지역 반란이 일어났고 정부는 잔혹한 탄압에 의지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근 제대한 병사들로 인해 늘어난 이 지역의 주민들은 마하라자의 군대에 반기를 들어 거의 모든 지역을 장악했다.이 승리 후, 무자파라바드, 푼치, 미르푸르의 친파키스탄 지도자는 1947년 10월 3일 라왈핀디에서 임시 아자드 잠무와 카슈미르 정부를 선포했다. 굴람 나비 길카르는 '미스터 안와르'라는 가명으로 무자파라바드 임시정부 명의로 성명을 발표했다.하지만, 이 정부는 스리나가르에서 안와르가 체포되면서 곧 무너졌다. 10월 24일 팔란드리에는 사르다르 이브라힘 칸의 지도 아래 아자드 카슈미르 제2차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10월 21일, 북서 프론티어 주에서 온 수천 명의 파슈툰 부족민들이 잠무와 카슈미르를 마하라자의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 들은 숙련된 군사 지도자들에 의해 이끌렸고 현대식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마하라자의 무너진 군대는 맹공을 견디지 못했다. 습격자들은 무자파라바드와 바라물라를 점령했다. 바라물라는 수도 스리나가르에서 북서쪽으로 32km 떨어진 곳이다. 10월 24일, 마하라자는 인도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마하라자는 그가 인도에 가입하지 않는 한 그를 도울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에 따라 1947년 10월 26일 마하라자 하리 싱은 군사 원조의 대가로 인도 정부에 국방, 대외 업무 및 통신의 통제권을 이양하는 가입 문서에 서명했다. 인도군은 즉시 스리나가르로 공수되었다. 파키스탄이 그 후에 개입했다. 인도군과 파키스탄군 사이에 전투가 이어졌고, 두 통제 지역은 현재 "통제선"으로 알려진 지역을 중심으로 다소 안정되었다. 1949년 인도령과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지역을 분리하는 정식 휴전선이 발효됐다.
1949년 인도와의 휴전 협정에 따라 파키스탄 정부는 휴전 당시 지배했던 카슈미르 북부와 서부 지역을 다음의 두 개의 별도 통제된 정치 조직으로 분할했다. 1955년, 푼치 봉기가 일어났다. 라왈라꼿 지역뿐만 아니라 푼치 지역의 다른 지역에도 집중되어 있었다. 1956년에 끝났다. 한때 파키스탄의 지배하에 있던 카슈미르 삭스감 지역은 길기트와 발티스탄의 북동쪽 국경을 따라 파키스탄에 의해 1963년 중화인민공화국에 잠정 양도되어 현재는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일부가 되었다.
1974년 임시헌법법은 48명으로 구성된 아자드 잠무와 카슈미르 단원제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1997년 4월 나와즈 샤리프 정부는 아자드 잠무와 카슈미르에 헌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이들 지역을 일방적으로 합병하는 것과 같다며 헌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했다.[4]
무자파라바드[편집]
무자파라바드는 파키스탄 아자드카슈미르주의 주도이다. 주(州)의 10개 현 중에서 동명의 무자파라드(Muzaffarabad) 현의 수도이기도 하다. 평균해발고도 724m, 수도 이슬라마바드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78.35km 거리에 있다. 기후는 반건조기후에 해당하며 연평균 기온은 27.3°C, 연평균 강수량은 157mm이다.
옛 지명은 우다브한다(Udabhanda)이다. 지명은 17세기 봄바 왕조(Bomba Dynasty)의 술탄인 무자파르 칸(Muzaffar Khan)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높은 산지에 둘러싸여 있으며 젤룸 강과 닐암(Neelam)강의 합류점을 중심으로 위치한다. 문화유산으로 무굴제국 지배 이전 16세기에 건축된 붉은 요새(Red Fort)와 무굴제국 시대에 세워진 검은 요새(Black Fort)가 있다. 2005년 10월에 발생한 파키스탄 북부 지진의 진원지와 가까워 큰 피해를 받았다.ref>〈두산백과 : 무자파라바드 〉, 《네이버 지식백과》</ref>
카슈미르 분쟁[편집]
카슈미르 분쟁은 대표적인 종교적 갈등으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할 때 생긴 3개 토후국(土侯國:영국 보호 아래 있을 때 인도제국을 형성하던 작은 전제왕국)의 귀속문제를 둘러싼 분쟁이 시초이다.
한 나라였던 인도와 파키스탄은 18세기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 힌두교 세력과 이슬람교 세력이 각기 분열된 독립운동을 벌였고, 1945년 종전과 함께 임시정부 구성을 둘러싼 종교갈등으로 1947년 힌두교의 인도와 이슬람교의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하였다. 그런데 분리독립 시 종족구성상 파키스탄에 가까웠지만, 이 지역의 힌두지도자가 인도에 통치권을 넘김으로써 1948년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생하였다.
1948년 전쟁은 1947년 말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카슈미르 무장부족집단이 수도인 스리나가르의 점령을 시도하고, 이에 대항하여 인도군이 뉴델리로부터 공수되면서 발생하였다. 인도측 자료에 의하면 당시 무장 부족집단의 규모는 약 5만 명으로, 이외에도 10만 명이 파키스탄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파키스탄은 전쟁 초기 자국의 연루 주장을 부인하였으나, 1948년 5월 정규군을 투입하여 양측간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
1948년 8월 유엔은 양측간 휴전을 중재하여 1949년 1월 휴전 협정의 효력이 발생하였으나, 파키스탄은 전쟁 후에도 자국점령 카슈미르가 독립정부임을 주장하였고, 인도는 1963년 자국점령 카슈미르 지역을 자국의 1개 주로 편입하였다. 1949년 휴전으로 서부 아자드(Azad) 카슈미르는 파키스탄령으로, 나머지 잠무(Jammu) 카슈미르는 인도령으로 분할되고 유엔이 통치권을 주민투표에 붙여 중재에 나섰지만 영토 다툼은 계속되었다.
한편 1962년 중국은 카슈미르의 동쪽을 침공하여 인도와의 전쟁 끝에 아커사이친(Aksai Chin) 지역을 중국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인도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 시절 1914년 영국이 그은 맥마흔라인(McMahon Line)을 국경선으로 주장하였고, 중국은 영국의 인도 통치 이전의 국경선의 회복을 주장하며 이후 국경분쟁이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두 국가간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1965년 4월에는 쿠츠(Rann of Kutch)지역에서 양측간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였는데, 1964년 인도의 수상 네루(P. J. Nehru)의 사망 후 인도의 정국혼란을 기회로 파키스탄은 인도 점령 카슈미르에서 비정규전을 실시하여 카슈미르를 국제적 문제로 비화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양측은 3개 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수행하여 상대방의 통신·보급로를 차단하는 한편, 인도는 파키스탄 점령지역인 라호르까지 진격하였다. 이 전쟁은 강대국의 압력으로 종결되었고, 소련의 중재로 1966년 1월 타슈켄트(Tashkent)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1987년 2월에는 인도측 카슈미르 국경지역에 파키스탄이 포격을 실시하여 약 100개의 마을주민들이 대피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후 양측이 합의하여 이 지역에서 철수한 병력은 각 5만 명으로 분쟁의 강도 및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후에도 현재까지 이곳에서의 크고 작은 분쟁과 교전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인도-파키스탄 간 카슈미르 국경 충돌은 대부분 정규군간의 교전이기 때문에 교전수위 및 범위가 조절되는 편이나, 양측이 지원하는 무장집단 또는 정규군에 의한 폭동·테러나 게릴라전이 빈발하게 발생하고 있고, 이로 인한 보복전이 자행되고 있어 평화적인 해결 전망은 어두워 보인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어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보유하기도 하였다.
중국과 러시아는 과거와 같은 직접적 개입·지원을 자제하고 있으나, 각각 파키스탄과 인도에 무기 및 군사기술을 제공하여 양측간 체제 경쟁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또한 중국과 인도는 국경 분쟁으로 인해 갈등 및 무력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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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아자드 카슈미르〉, 《위키백과》
- ↑ 〈아자드 카슈미르〉, 《나무위키》
- ↑ 〈두산백과 : 아자드카슈미르주〉, 《네이버 지식백과》
- ↑ 〈아자드 카슈미르〉, 《요다위키》
- ↑ 〈두산백과 : 카슈미르 분쟁 〉,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아자드 카슈미르〉, 《위키백과》
- 〈아자드 카슈미르〉, 《나무위키》
- 〈두산백과 : 아자드카슈미르주〉,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 무자파라바드 〉,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 카슈미르 분쟁 〉,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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