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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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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용산(龍山)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앙에 있는 자치구이다. 서울 한강 북쪽의 중간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성동구, 서쪽으로는 마포구, 북쪽으로는 남산을 경계로 중구, 남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강남구·서초구·동작구와 접한다. 중앙으로 둔지산이 구릉성 지형을 형성한다. 서울역에서 한강대교에 이르는 한강대로가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한강대로 주변은 상업지구와 업무지구를 형성한다.[1][2]

개요[편집]

이름이 용산인지라 우스갯소리로 드래곤 마운틴 (Dragon Mountain)이라고 부르면서 드립을 하는데, 사실, 용산의 어원은 정말로 '높은 언덕' 을 의미하는 '산(山)' 에서 따온 이름이며, 실제로 용산구는 서울 시내에서 높은 언덕이 많은 고지대에 속한다. 그래서, 2022년 수도권 폭우 사태에서도 강남구 지역에서는 침수 피해가 심했던 것과는 다르게 용산은 고지대라서 그렇게 큰 피해가 없었을 정도였다. 주한미군에서는 용산을 영어로 드래곤 힐(Dragon Hill)이라고 부르며 용산 기지에 있는 주한미군 전용 호텔 이름도 Dragon Hill Lodge이다.

용산 이름의 뜻은 용산역에 가면 볼 수 있는 바로 옆 "드래곤힐스파"에서도 잘 드러난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이 지역의 언덕을 가리켜 '용이 나타났고 해서 용산(龍山)이라 했다'고 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화나루 동쪽 언덕의 산형이 용이 있는 형국이라 생긴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 충숙왕의 아들 중에서 용산 원자가 있는데, 바로 이 용산에서 낳았다 하여 용산원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적어도 고려 시대 후기에는 이 지명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용산구의 경부선 및 한강 대로 연선 지역은 1914년 성저십리 폐지 당시 유일하게 경성부에서 이탈하지 않았던 사대문 밖 지역이다.또한 백곡 김득신이 해저무는 용산 한강변에서 급히 배를 돌리는 어부를 보며 쓴 <용산>이라는 5언절구의 한시도 전해져 온다.

서울시 법정 도시계획인 2030서울도시기본계획(서울플랜)에 따라 용산구는 3도심을 매개하는 7광역중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용산역 인근이 중심지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용산구는 한남동 위주로 일본인 인구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 이후 대통령실과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가 용산구에 위치하게 되면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거주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언론 등에서는 대통령이나 대통령실 측을 용산이라고 돌려 표현하기도 한다.[3]

역사[편집]

용산 지역에서 선사문화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한강변의 암사동 유적·응봉 유적 등을 통하여 볼 때 한강변의 용산구 일대에도 선사시대 인류가 살았을 개연성은 높다. 용산구를 포함한 한강 유역을 무대로 최초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진국(辰國)과 삼한 사회의 마한(馬韓) 그리고 초기 백제였다. 기원전 1세기 말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백제가 되었다. 이들은 한강 유역의 경제성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생산 활동과 인구 증가를 이루었고 보다 큰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475년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남평양이 설치되었다. 553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래 신라 삼국통일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신라는 전국에 9주를 설치했고 용산구를 포함한 서울지방은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한산주는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용산 지역을 포함한 서울지방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면서 한주(漢州)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의 활동으로 태봉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918년 왕건이 국왕에 추대되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漢陽郡)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940년(태조 23)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성하고 주·군·현를 개칭함에 따라 한양군은 양주(楊州)로 편제되었으며, 용산 지역은 양주 관할구역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도제(道制)가 실시되어 양주는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고 절도사가 배치되어 좌신책군(左神策軍)이 되었다. 현종 9년에 양주는 양광도에 속하게 되었고, 1067년(문종 21) 양주는 남경으로 승격되어 고려 삼경제의 하나로 운영되었으며, 1069년에 신경기(新京畿)에 편입되었다. 그 후 다시 양주가 되었다가 1101년(숙종 6) 남경개창도감이 설치되어 남경후보지를 물색할 때 한강 연안의 용산방면을 비롯한 동대문 밖의 노원역, 도봉산 아래 해촌방면, 삼각산 면악 남쪽 지역 등이 거론되었다. 이중 경복궁 부근 면악 남쪽으로 결정이 되어 연흥전·천수전 등의 궁궐 건물이 마련되었다. 이때 남경의 관할구역은 동서로는 대봉에서 안산에 이르고, 남북으로는 사리에서 북악산에 이르는 지역으로, 바로 사리 일대가 용산 한강변이었다.

한편 1284년(충렬왕 10) 과주의 용산처를 부원현으로 승격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언제부터인가 용산 지역이 남경으로부터 과주로 이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1298년(충렬왕 34) 남경을 한양부로 격하시키면서 나타나는 고려 한양부 소속의 고봉현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1394년(태조 3) 한양천도로 한성부 관할구역이 될 때까지는 과주 부원현 용산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경기좌도에 속하여 과전과 공신전의 반급지역이 되었다.용산 지역에는 고려시대 지방을 잇는 22도의 하나인 청교도(靑郊道)의 한 역으로 청파역(靑波驛)이 있었는데, 이 역은 한성과 삼남지방을 잇는 역이었다. 또 충숙왕은 제국대장공주와 함께 용산강에 행차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었고, 행궁에서 용산원자(龍山元子)를 낳기도 하였다. 한편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지방으로 피난갈 때 이곳 한강변 나루인 사평도를 건너기도 하였다.용산은 고려 말 과주(果州)에 속했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으로 서부의 용산방(龍山坊)이었다. 한편 오늘날 용산구 지역은 용산방과 더불어 남부 한강방과 둔지방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 용산방에는 마포구지역도 포함된다.

1789년 용산 지역에 해당하는 용산방·한강방·둔지방의 호구를 살펴보면, 용산방은 4647호에 1만 4915명, 한강방은 406호에 1145명, 둔지방은 1,241호에 3,589명으로 한성부 인구의 약 20만 명의 1할에 해당하는 인구가 분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1476년(성종 7) 용산강 북쪽 언덕 귀후서 뒤편의 폐사지를 중수하여 용호독서당을 개설하고 사가독서를 실시하여 홍문관 학사들을 공부하게 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퇴각을 차단하는 전장이었으며, 원효로 심원정을 회담장소로 하여 조선측을 외면한 채 명나라 군사와 왜군이 화전교섭을 벌이기도 하였고, 용산강에서 강화회담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용산강은 조선 초기 수로전운소가 설치되는 등 한강수운의 중심지였으며, 후기에는 마포에 그 기능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효창공원 일대는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효창원이 마련되어 왕실묘역으로 이용되었으며, 한강변 서부이촌동 모래사장은 새남터라 하여 군사 연무장과 사형장으로 이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와서·귀후서·전생서·서빙고 등의 관아가 있었고, 청파역과 이태원, 노량진·서빙고나루터·한강진이 있어 주요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용산구는 1896년 4월 한성부 용산방·한강방·둔지방으로 시작하여 1910년 10월 경기도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1911년 4월 5부 8면제 실시에 따라 용산면·한지면이 되었다. 1914년 4월에는 용강면·한지면이 경기도 고양군에 속하였다. 그러나 업무처리 곤란과 주민의 불편에 따라 1914년 9월 다시 경성부 용산출장소를 설치하고 용산일대를 관할하게 하였다. 1931년 경성부 직할이 되었으며, 그 후 경성부의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고 주거지역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경성부 본청 행정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43년 6월 ‘구제’를 실시, 행정기관으로 용산구역소를 설치하고 ‘구장’이 관할하게 되었다. 원효로 방면을 구용산, 한강로변을 신용산이라 부르는데, 구용산은 조선 말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다툼 무대였고, 각국 인들의 거류지로 조성되어 지금도 효창·청파동과 원효로 등지에는 일본식 목조의 낡은 가옥이 남아 있다. 즉 1884년(고종 21) 10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된 후, 1887년 선교의 자유가 인정되자 원효로를 중심으로 프랑스·중국·일본인 등이 들어와 종교 및 상업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역에서 한강철교에 이르는 신용산 지역은 조선시대까지 홍수피해가 잦아 낮은 지대에는 인가가 거의 없는 벌판이었다. 그러나 도심과 가깝고 한강 수운을 이용해 인천과의 연결이 용이하며 평탄하고 넓은 이 지역은 일제의 식민통치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

1888년 8월 한강에 증기선이 운항되었고,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이자 양옥건물인 용산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00년 1월 서계동~청파동~원효로4가에 이르는 전차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에 의해 군사기지와 철도기지가 세워져 식민통치와 대륙침략의 거점이 되었다.광복 후 서울특별시 용산구가 되었으며, 현재 36개 법정동과 16개 행정동으로 구획되어 있다. 그간 경제발전과 인구변동 등으로 여러 차례 관할 구역의 조정이 있었으며, 1995년 7월 1일 민선 제1기 출범을 계기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로 접어들었다.1945년 광복이 되면서 일본군이 주둔했던 신용산 지역에는 자연스레 한국군과 미국군의 사령탑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2006년 들어 미군기지의 이전과 더불어 민족공원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 육군본부 이전 자리에는 전쟁기념관이 조성되었고, 용산가족공원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건립되어 있다. 또 미국대사관의 이전 결정과 초고층 아파트의 건립으로 이 일대의 경관이 크게 변모되고 있다. 최근 들어 용산 지역에 대한 개발 잠재력에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면서 의욕적인 지역 개발 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용산 일대는 철도시설과 군사시설이 집중되어 있던 곳으로 한국전쟁 때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반면 용산동2가는 흔히 해방촌이라 부르는데 한국전쟁 전후 월남한 사람들이 집단으로 판잣집을 짓고 살던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2001년 확정된 서울특별시 지구단위 개발계획에 따라 서울역에서 한강대교에 이르는 100만 평의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용산역이 경부고속철도 중앙역사와 신공항철도 출발역으로 선정되어 이 지역에 대한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용산역 일대 철도정비창을 포함한 21만여 평이 쾌적한 환경과 업무의 편리성을 도모하고 민간 설계 공모와 외자 유치를 통해 첨단 국제 업무 단지로 조성될 계획이다. 또 한강로 일대에 최첨단 업무시설과 컨벤션센터, 외국인전용 주거시설, 공원 녹지시설 등이 2011년까지 체계적으로 개발될 것이다. 즉 주한미군이 반환하는 여러 시설부지에 관광·문화관련 시설과 종합행정타운이 건립되면 용산구는 명실상부한 서울의 부도심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그리고 용산구 지역에는 가봉을 비롯한 41개국의 대사관이 위치하여 한국 현대 외교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4]

자연 환경[편집]

남산의 연봉(連峰)에서 남서쪽 사면과 산록을 차지하며 남쪽으로 한강에 이르고, 남산 주변을 제외한 대부분이 해발 50m 이내의 낮은 평지를 이룬다. 남산은 화강암으로 된 잔구로서 서쪽의 효창운동장 뒷산과 마주하며, 이 사이를 만초천(蔓草川)이 남류하면서 하구에 소규모의 삼각주를 형성했으나 현재는 부지로 조성되어 있다. 제방이 없었던 일제강점기 초까지만 해도 한강이 범람했을 때는 물이 신계동과 삼각지까지 미쳤고, 하안에는 이촌동의 넓은 범람원이 퇴적되어 한강 백사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용산 일대는 대부분 선캄브리아기의 경기편마암복합체로 되어 있으며, 북동부 일부에 쥐라기 대보화강암이 분포한다. 한강 연안에 제4기 충적층이 동서로 길게 분포되어 있다. 용산구의 북쪽은 남산이 있어 그 지맥인 둔지산 줄기가 구의 중앙을 지나며, 응봉 줄기가 구의 동쪽에서 성동구와 경계선이 되고, 서쪽으로는 마포구와 경계를 이루는 용산 줄기가 뻗어 있다. 그 사이에 만초천이 흘러 한강으로 유입된다. 따라서 한강이 구의 남쪽 경계를 이루며 둔치에 백사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용산강·노량진·서빙고나루·한강진 등의 포구가 발달하였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바탕으로 한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도시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3.3℃, 1월 평균기온은 -1.5℃, 8월 평균기온은 26.1℃, 연 강수량은 1,449.1㎜이다.[4]

교통[편집]

KTX 노선에서 기점이 되는 중요한 민자 역사 이고 수도권 전철 1호선과 경의중앙선이 교차하고 근처로 서울 지하철 4호선이 지나는 용산역이 있으며, 서울 지하철 6호선이 구 중앙을 관통하지만 1호선과 6호선 환승이 안 된다는 문제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교통 편리 지역은 한남동이다. 비록 광역 철도는 경의중앙선만 지나가지만, 한남대교가 있어서 강남권으로 가는 시내버스, 분당 등으로 가는 광역버스가 모두 한남고가차로 북단에서 정차한다.[3]

관광[편집]

용산구의 관광자원은 남산에서 한강을 바라보는 경관과 어우러진 자연이 으뜸이다. 남산공원은 세계에서 세 번째 높은 N서울타워가 있어 수도서울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멀리 인천 앞바다에서 개성 송악산에 이르기까지 전망할 수 있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서울야경을 볼 수 있는 서울의 관광명소이다. 또 서울성곽이 지나고, 남산도서관과 역사적 위인들의 동상과 시인 김소월의 시비 등이 있는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그리고 1968년 개원한 남산식물원이 있는데, 이곳은 곧 철거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이촌 지구를 포함한 한강공원은 세계대도시에서 볼 수 없는 수려한 경관과 많은 수량을 보여주는 곳으로 어느 관광자원보다 우수한 자연경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거북선나루터가 있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의 전함 거북선을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 제작·전시하여 청소년들에게 역사와 호국정신을 함양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지금은 남해로 옮겨졌다.

아울러 옛 나루터에 건설된 원효대교,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동작대교, 반포대교와 잠수교, 한남대교 등은 넓은 강폭을 이어주는 경관과 더불어 야경의 아름다움은 관광자원의 질을 높여주고 있다.1994년 육군본부 자리에 개관한 전쟁기념관은 선열들의 호국전쟁에 관한 소중한 자료와 역사적 교훈들을 발굴, 종합적·체계적으로 정리, 보존하고 있으며, 각종 대규모 야외행사를 개최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효창공원은 민족의 성지로 조성되어 있고, 축구전용경기장 등이 있어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방문하고 있다. 또 5천년 한민족사의 정수가 전시되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그 정원과 이어진 용산가족공원 등이 있어 1년 365일 관람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관광코스로 원효로 백송~남이장군 사당~효창공원~숙명여대박물관~전쟁기념관 코스, 원효로 백송~용산신학교~용산전자상가~새남터성당~거북선나루터 코스, 서빙고 부군당~동빙고 부군당~김유신장군 사당~보광동 무후묘~용산가족공원~전쟁기념관 코스, 남산타워~남산식물원~남산공원~안중근의사당~서울 한양도성 코스 등이 개발되어 있다.

관광 숙박시설로 해밀턴호텔, 이태원 호텔, 캐피탈호텔, 그랜드하얏트호텔, 크라운관광호텔, 가야관광호텔 등이 있으며, 관광쇼핑 장소로 이태원 관광특구와 용산전자상가가 있어 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10월 문화의 달을 전후하여 용산문화원 뒤뜰에 있는 천연기념물 백송을 보호하고 알리며, 용산구민의 문화원 준공을 기념하여 백송문화제가 열린다. 또 매년 10월 17일에 구민의 날 기념행사인 지역향토문화행사로 남이장군대제를 거행하여, 우리 전통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4]

산업[편집]

용산의 경제권은 서울역에서 남영역에 이르는 권역, 삼각지에서 용산역·이촌동에 이르는 남부권역, 원효로 일대, 이태원 권역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숙대 입구 일대의 여러 학교와 학원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상권과 한남동 순천향병원 주변의 작은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그 외 서빙고동의 뉴코아백화점, 한남동의 현대시장, 후암시장, 신용산시장, 만리시장, 신흥시장 등의 재래시장이 있다. 특히 이태원관광특구는 서울의 이방지대라 불리는데 이곳 1.4㎞의 이태원로 양 길가의 구두·의류·가방 등을 파는 상가와 숙박업소·음식점·유흥오락시설과 무역상·여행대리점·관광호텔 등 2000여 개의 점포가 밀집해 있어 외국인 관광객뿐 아니라 내국인까지 유인하는 새로운 상업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다.한강로3가에 있던 용산청과물시장은 서울의 채소·과일을 공급했는데,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이 세워지면서 이전해 가고, 그 자리에는 용산전자상가단지가 들어섰다. 이곳에는 컴퓨터·통신기기·가전제품·조명기기·공구 등을 취급하는 6,000여 개 업체가 밀집해 있다. 지하철 1·4호선이 만나는 지점으로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유통기지가 되고 있다. 또 한강로2가 용산우체국에서 미군부대에 이르는 일대에는 용산보세타운이 형성되어 외국인 고객을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다.[4]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용산구〉, 《위키백과》
  2. 용산〉, 《나무위키》
  3. 3.0 3.1 용산구〉, 《나무위키》
  4. 4.0 4.1 4.2 4.3 용산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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