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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대성당'''(프랑스어: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카테드랄 노트르담 드 파리)은 [[프랑스]] [[파리]]의 시테 섬 동쪽에 있는 가톨릭 성당으로, 파리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다. 14세기에 완공된 프랑스 고딕 양식 건축물의 대표작이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관식과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노틀담의 꼽추)의 무대가 된 것 등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현대에도 파리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노트르담 대성당'''(프랑스어: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카테드랄 노트르담 드 파리)은 [[프랑스]] [[파리]]의 시테 섬 동쪽에 있는 가톨릭 성당으로, 파리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다. 14세기에 완공된 프랑스 고딕 양식 건축물의 대표작이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관식과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노틀담의 꼽추)의 무대가 된 것 등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현대에도 파리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2023년 4월 28일 (금) 03:42 기준 최신판

대주교의 다리에서 본 노트르담 대성당
노트르담 대성당 정면
노트르담 대성당 벽날개
노트르담 대성당 후진의 외부 모습

노트르담 대성당(프랑스어: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카테드랄 노트르담 드 파리)은 프랑스 파리의 시테 섬 동쪽에 있는 가톨릭 성당으로, 파리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다. 14세기에 완공된 프랑스 고딕 양식 건축물의 대표작이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관식과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노틀담의 꼽추)의 무대가 된 것 등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현대에도 파리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다만 단독등재는 아니고, 파리의 센 강변이라 하여 센 강 일대의 자연환경 및 그 주변 문화유산인 에펠 탑, 루브르 박물관, 앵발리드 등과 묶여서 지정되었다.

개요[편집]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 파리 시테 섬 동쪽 반쪽에 있는 프랑스 후기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회 건물로서 파리 대주교좌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흔히 프랑스 고딕 건축의 정수로 이야기된다. 이 대성당은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인 비올레르뒤크에 의해 파괴된 상태에서 보호되어 복구되었다. "노트르담"은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성모 마리아를 의미함).

노트르담 대성당은 최초의 고딕 성당 가운데 하나이며, 고딕 전 시대에 걸쳐 건설하였다. 대성당의 조각들과 스테인드글라스는 자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는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부족한 세속적인 외관을 더해준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세계에서 최초로 벽날개를 사용한 건물이기도 하다. 이 대성당은 원래 성가대석과 중랑(中廊) 주변에는 벽날개가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공사가 시작되고 (고딕 양식에서 유행한) 꽤 얇은 벽들이 점점 높아지면서 커다란 균열이 벽이 밖으로 밀릴 때 생겼다. 그래서 성당의 건축가들은 바깥벽 주변에 지지벽을 만들었고, 그 뒤에 비슷한 방법으로 추가되었다.

이 대성당은 유명한 도미니코회 신학자 장 바티스트 앙리 라코르데르가 1840년에 연 사순절 설교로 유명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요한 유명인이나 국가에 고용된 학자들이 설교를 한다. 하지만 청중들의 상당수는 외국인들이며, 이들만으로 관습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1790년경 프랑스 혁명의 급진적인 시기에 노트르담 대성당은 반기독교 사상에 의해 모독을 당했으며, 많은 성상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 19세기에의 다방면에 걸친 복원 작업이 완료되어 대성당은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2019년 화재가 발생 하여 내부 첨탑이 무너졌다. 프랑스 현지시간으로 2019년 4월 15일 오후 6시 50분쯤, 우리 시간으로 2019년 4월 16일 새벽 1시 50분쯤 보수 공사 중이던 첨탑 주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2024년 말까지는 복구공사를 마치고 재개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프랑스 당국이 밝혔다.

건설[편집]

건물의 정면부. 성모 마리아의 문, 마지막 심판의 문, 성녀 안나의 문.

지금의 대성당이 있던 곳에는 성 에티엔에게 봉헌한 작은 성당이 있었지만, 1160년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 1110 ~ 1196) 주교는 더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짓기 위해 파리대교구에 착좌하자마자 옛 성당을 가차없이 부수고 주변의 몇몇 가옥들도 함께 철거했다. 그리고 1163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초석을 놓으면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곳은 후진과 성가대석으로 1182년에 완공되었으나, 전체 공정의 절반도 채 끝내지 못한 상황에서 공사가 시작된 지 33년 후인 1196년 9월 11일 모리스 드 쉴리 주교가 선종했다. 대성당의 서쪽 정면은 1200년경~1225년에 완성되었고, 서쪽 정면의 탑 2개와 북쪽의 장미창은 1250년에 마무리되었으며, 나머지 부분에 대한 공사는 1250년부터 약 1세기 동안 진행되어 마침내 착공 183년 만인 1345년에 축성식을 거행했다.

백년전쟁의 와중인 1431년 영국의 왕 헨리 6세가 이곳에서 프랑스 왕으로 즉위식을 거행했으나 당시 파리 시민들이 잔 다르크를 적으로 여겨 싸웠을 만큼 영국에 우호적이었음에도 그들의 반발을 불렀다. 1456년에는 이 곳에서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재판을 교황청이 열어서 1431년 영국 측과 친영국파 프랑스 성직자들이 벌였던 종교재판으로 화형당한 잔 다르크의 이단 판결과 마녀 혐의를 무효화하여 복권했다. 그래서 잔 다르크 성녀의 성상이 이 성당 안에 있다.

18세기에는 성당이 어둡다는 이유로 성직자들이 스테인드 글라스를 일반 유리로 바꾸고 그로테스크한 가고일 상을 제거하는 등 신고전주의적인 취향에 따라 손을 보았다.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자 귀족문화, 종교문화 자체를 증오하는 시민들에게 에마뉘엘 이라는 종을 제외한 모든 종이 녹여지고, '옛 프랑스 왕으로 오인된' 성경 속의 왕의 조각이 목이 잘리는 등 각종 조각이 훼손되고 이신론자들의 신전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전근대 사회에선 이 성당이 프랑스의 기득권 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직자는 프랑스 귀족 계층에서 배출되었으며, 프랑스 귀족과 기득권층의 법률적 옹호기관인 고등법원의 관료 역시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혈연관계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때문에 이 대성당이 프랑스 혁명 당시 가장 먼저 공격을 받고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1804년 12월 2일에는 교황 비오 7세가 참석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황제 대관식을 이 성당에서 치루었는데, 이를 위해 대성당의 주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많은 정비를 하였다. 성당의 입구에는 신 고딕식의 나무 문을, 실내는 신고전주의 건축처럼 보이게 장식하였으나, 임시로 덧댄 것들이라 오늘날에는 남아있지 않다.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내부가 외양간으로 쓰여지는 등 성당의 사회적 가치는 심하게 손상되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빅토르 위고가 성당의 훼손, 파괴를 막으려고 쓴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이 인기를 끌면서 평가도 좋아졌으며, 건축가인 장바티스트 라쉬(Jean-Baptiste Lassus)와 외젠 비올레르뒤크(Eugène Viollet-le-Duc)에 의해 1845년부터 근 20여년 동안 복원에 들어간다. 스테인드 글라스와 성상들, 중앙 첨탑(flèche) 등이 이 시기에 복원되었다. 다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 시기에 만들어진 많은 것들은 뒤크의 취향에 따른 창작에 가깝다.

건설 연대
  • 1160년 : 모리스 드 쉴리(파리 교구장)가 원래의 대성당을 부수도록 명령하다.
  • 1163년 : 노트르담 드 파리 대성당의 초석이 얹혀지다 - 공사가 시작되다.
  • 1182년 : 후진(後陣)과 성가대석을 완공하다.
  • 1196년 : 중랑(中廊)을 완공하다. 드 쉴리 교구장이 선종하다.
  • 1200년 : 서쪽 정면의 작업이 시작되다.
  • 1225년 : 서쪽 정면을 완공하다.
  • 1250년 : 서쪽의 두 탑과 북쪽의 장미창을 완공하다.
  • 1250년 ~ 1345년 : 나머지 부분을 완공하다.

오르간[편집]

대오르간

오랜 시간에 걸쳐 대성당 안에 여러 개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지만, 처음에 설치된 오르간은 건물에 적합하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최초의 오르간은 당시 유명한 오르간 설치 전문가였던 프랑수아앙리 클리코에 의해 1700년대에 완성되었다. 클리코가 만든 페달 구획 안의 파이프 기구는 오늘날까지 오르간에서 소리를 낸다. 오르간은 19세기에 아리스티드 카베이에콜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다시 만들어지고, 크기도 커졌다.

노트르담의 오르간 연주자는 카바이에콜이 만든 가장 큰 오르간이 있는 생쉴피스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프랑스에서 가장 명성있는 오르간 연주자의 위치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오르간은 역사적으로 900종류로 분류되는 7800개의 파이프를 가지고 있다. 오르간은 109개의 오르간 스톱, 5개의 56건의 손건반과 한 개의 32건의 발건반을 갖고 있다. 1992년 12월, 3개의 근거리 통신망을 통해 오르간을 완전히 전산화하는 작업이 끝났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1900년부터 1937년까지 오르간 연주자였던 루이 비에른이다. 카바이에콜 오르간은 그의 연주의 음색에 따라, 1902년과 1932년에 조정되었다. 여기에 피에르 코슈로는 변경사항을 더 추가했는데(그 중 많은 것은 루이 비에른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오르간의 기계장치를 전기 작동방식으로 바꾸었다(원래의 카바이에콜의 오르간의 연주대는 영미식의 새로운 연주대로 교체되었으며, 원래 연주대는 남쪽 탑의 연단으로의 입구로 옮겨졌음). 또한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에 오르간 스톱들을 발건반 부분에 추가하고, 믹스처 스톱들을 다시 배열하고, 마지막으로 3개의 수평 리드 스톱(en chamade)을 추가하였다. 코슈로가 1984년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후, 장피에르 레구아이, 올리비에 라트리, 이브 데베르네이(1990년 사망), 그리고 필리프 르페브르 이렇게 4명의 오르간 연주자가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18세기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4명의 오르간 연주자를 두었던 관습의 부활로, 각각의 연주자는 1년에 3개월을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 1989년에 악기의 복구가 진행되어, 1992년에 완료되었다.

개축, 파괴, 그리고 복원[편집]

1548년 위그노들이 그러니까 개신교 신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대성당의 성상들을 우상숭배라고 여겨 대성당의 외관을 파괴했다. 루이 14세 때와 루이 15세 때에 전 유럽에 걸쳐 대성당들을 현대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을 개축하였다. 무덤과 스테인드 글라스는 제거되었는데, 다행히도 북쪽과 남쪽의 장미창은 파괴되지 않았다.

1793년 프랑스 혁명 때에 노트르담은 이성숭배에 봉헌된 뒤, 최고존재숭배에 봉헌되었다. 이 시기 동안 대성당의 많은 보물들은 파괴되거나 강탈당했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유다 왕들의 조각상들이 (봉건질서를 상징하는 프랑스의 왕들로 오인되어) 머리가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많은 머리들이 1977년에 인근을 발굴하면서 발견되었고, 지금은 클뤼니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시대에 제대에 위치해 있던 성모 마리아상은 자유의 여신상으로 교체되었다. 중요한 종들은 간신히 용해되는 것에서 피할 수 있었다. 성당의 내부는 말 먹이나 음식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사용되었다.

복원 계획은 건축가인 장바티스트앙투안 라쉬와 외젠 비올레르뒤크의 감독으로 1845년에 시작되었다. 플레슈(flèche, 첨탑의 일종)를 건립하고 시메르 갤러리(alerie des Chimères)의 키메라들을 추가하는 것을 포함하여 25년간 계속되었다. 비올레르뒤크는 자신의 작품에 언제나 서명을 했는데, 고딕 볼트(궁륭)를 닮은 날개 구조를 가진 박쥐를 같이 그려 넣었다.

1871년 파리 코뮌 시기에 노트르담 대성당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파리 코뮌이 민중들에 의해 자치가 실시된 사회주의 자치정부였기 때문이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독일이 창문을 폭격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1939년 9월 11일에 창문을 분리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이 창문들은 다시 복원되었다.

1991년 유지 및 복원 계획이 시작되었는데, 애초에는 10년간 지속될 예정이었으나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데, 낡은 조각상들을 청소하고 복원하는 것이 대단히 섬세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2019년 4월 15일 오후 6시 50분쯤, 우리 시간으로 2019년 4월 16일 새벽 1시 50분쯤 보수 공사 중이던 첨탑 주변에서 화재가 발생 되었다. 발생된 화재는 첨탑과 해당 첨탑을 받치고 있는 목재지붕을 무너뜨리고 약 10시간 만인 4월 16일 오전 4시경 진화되었다. 화재의 원인으로는 '전기회로 과부하'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성당 개보수를 위해 비계를 설치한 '유럽 에샤포다주' 회사는 전기회로 과부하에 따른 발화 가능성을 일축했다. 보수작업은 한 세대에 걸쳐 진행될 것인지 5년안에 보수가 될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주요 사건[편집]

  • 1185년 : 카에사리아의 헤라클리우스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대성당에 제3차 십자군을 요청함.
  • 1239년 : 생트샤펠이 건립될 동안 루이 9세에 의해 가시 면류관이 노트르담 대성당에 놓여짐.
  • 1302년 : 프랑스의 필리프 4세가 처음으로 삼부회를 염.
  • 1431년 12월 16일 : 잉글랜드의 헨리 6세가 프랑스의 왕위에 오름.
  • 1450년 : 파리에서 사람들을 잡아먹던 늑대들이 붙잡혀 대성당의 계단에서 죽임을 당함.
  • 1455년 11월 07일 : 잔 다르크의 어머니인 이자벨 로메가 교황청 대표단에게 자기 딸의 이단 판결을 번복해 달라고 탄원함.
  • 1558년 04월 24일 :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가 프랑스의 앙리 2세의 아들인 도팽(훗날의 프랑스의 프랑수아 2세)과 결혼함.
  • 1572년 08월 18일 : 나바르의 앙리(이후 프랑스의 앙리 4세가 됨)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함.
  • 1573년 09월 10일 : 앙리 드 발루아가 노트르담에서 전통적 자유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공위 기간에 제정된 종교적 자유에 대한 법을 존중하기로 맹세함.
  • 1804년 12월 02일 : 나폴레옹 1세와 그의 아내 조제핀의 대관식이 교황 비오 7세의 사회로 행해짐.
  • 1909년 : 잔 다르크를 시복함.
  • 1920년 05월 16일 : 잔 다르크를 시성함.
  • 1937년 06월 02일 : 500명의 당시의 재능있는 오르간 연주자들이 참석한 치열한 콩쿠르(심사위원 중에 샤를마리 비도르도 있었음) 끝에 루이 비에른이 노트르담 드 파리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됨. 비에른은 노트르담에서 열린 그의 마지막 연주회가 거의 끝나갈 때에 (그의 평생의 소원대로) 대성당의 오르간 앞에서 사망함.
  • 1944년 08월 26일 : 파리 해방을 축하하는 테 데움 미사가 대성당에서 열림.(내부 회랑과 내부 회랑 양쪽에서 저격총 사격으로 인해 미사가 중단되었다는 설명도 있음.)
  • 1970년 11월 12일 : 샤를 드골의 위령미사가 행해짐.
  • 1980년 05월 31일 : 그 날의 마니피캇이 끝난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대성당의 앞뜰에서 미사를 집전함.
  • 1996년 01월 : 프랑수아 미테랑의 위령미사가 행해졌다.
  • 2007년 08월 10일 : 파리의 명예 대교구장이었던 장마리 뤼스티제 추기경의 위령미사가 거행됨.
  • 2019년 04월 15일 :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발생

관람포인트[편집]

최후의 심판 문 (가운데) Portail du Jugement dernier[편집]

문 윗 부분의 부조는 아래쪽 연옥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천사의 나팔소리에 깨어 중간에 있는 ‘미카엘’ 대천사장에게로 가서 영혼의 무게를 잰다. 죄를 많이 지은 영혼은 악마에 의하여 오른편 지옥으로 끌려가고, 구원 받은 영혼은 왼편에서 하늘나라 보좌 위에 앉아 있는 예수님을 향하여 고개가 들려있다.

성모 마리아의 문 Portail de la Vierge[편집]

잘린 자신의 목을 들고 있는 '생 드니' 신부

이 문의 아름다운 부조는 중세 판화의 주요 모델로 등장하는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머리 위에는, 선지자들이 여호와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준 '언약의 궤 Arche d’Alliance'를 둘러 싸고 있는 모습, 예수님과 사도들이 애도하는 '마리아'의 임종,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 장면이 보인다.

중앙기둥 좌우에는 '세례 요한', '스데반 집사', 그리고 프랑스 초대 주교로 하나님을 증거 하다가 로마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몽마르트르'에서 순교한 '생 드니' 신부의 모습이 보이는데, 잘린 자신의 목을 들고 8 Km를 걸어가서 돌아가신다. '생 드니 Saint Denis' 신부님의 이야기에서 '몽 마르트르 (순교자의 산)' 이름이 유래되었고, 돌아가신 자리에는 세계 최초의 '고딕 양식' 건물인 '생 드니 성당'이 건축되었기에, 12-13세기 유럽에서는 아주 중요한 성지 순례 코스였다고 한다.

성녀 안나의 문 Portail de Sainte Anne[편집]

중앙 기둥은 5세기경에 파리의 주교였던 '마르셀 성인 Saint Marcel'이 괴물을 물리치고 파리를 구원한 내용이고, 좌우에는 왕, 왕비, 성자와 '스데반 집사', '생 드니' 신부,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중앙기둥 윗 쪽의 3단계로 구분된 부조에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루이 7세', '모리스 드 쉴리'에게 둘러 싸인 모습의 윗 부분과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조각한 중앙 부분의 부조는 노트르담 성당의 정면이 건설되기 60년 전인 1160년에 다른 성당에 사용되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으로 이 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에 하나이다.

미사를 드릴때, 파이프 오르간의 음율과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여기가 천국이 아닐까??

28대 왕들의 모습[편집]

정문 3개의 문 위에 위치한 왕들은 예수의 조상들 ; 유대, 이스라엘 왕들의 모습으로, 1793년 '프랑스 대혁명 때' 프랑스의 왕들로 착각하여 파괴하였던 것을, 프랑스의 마지막 왕 '루이 필립'때 건축가 '비올레 르 뒥 Viollet-le-Duc' 에 의하여 복원 된 것이다. 본래의 왕들의 모습은 '클뤼니 박물관' 에서 21개의 머리만을 볼 수 있다.

장미 창 Rosace[편집]

직경이 9.6 미터에 달하는 '장미 창'은 1220년부터 1225년에 걸쳐 완공 된 것으로, 인간이 이룩한 업적 중의 하나로 무려 7세기 동안이나 버텨왔다. 두 천사의 보좌를 받으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찬란한 후광과 같은 역할을 한다. 왼쪽의 아담과 오른쪽의 이브는 원죄를 속죄하는 모습으로 서있다.

종탑[편집]

지상에서 69 미터 높이로 건설된 두 종탑은 좁고 긴 16 미터 높이의 창들에 의하여 경쾌하게 보인다. 오른쪽에 종의 무게가 13 톤, 불알이 500 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엠마뉴엘 Emmanuel'이라는 종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 '꽈지모도 Quasimodo'가 울렸던 것이다. 이 종의 맑고 깨끗한 음색인 '파 올림'은, 17세기에 다시 주조할 때에 파리의 귀부인들이 보석과 은을 던져 넣어서 이 소리가 나오는 것 이라고 한다.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편집]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파이프 오르간 '로베르 드 꼬뜨 Robert de Cotte' 가 제작한 성가대석과,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님을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한 '피에타' 상 주위에 루이 13세, 루이 14세가 무릎을 꿇고 있다. 소리가 공명이 가장 잘 되는 고딕건축의 내부 공간으로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하여 들어오는 빛은 환상적이다.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과 녹색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쪽 장미 창은 1250년경 제작 당시의 모습을 간직 하고 있으며, 구약 성경의 내용을 담고 있고, 남쪽 장미 창은 복원된 것으로 붉은색이 주를 이루며 사도들과 순교자들에게 축복을 주는 신약 성경의 내용을 담고 있다.

루이 13세가 결혼을 하고 23년 만에 왕비가 아이를 잉태하자 성모 마리아에게 '이 아이가 왕위를 물려 받을 수 있는 사내 아이라면 성가대석을 아름다운 고전주의 양식으로 바꾸겠다' 라고 서원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태어난 루이 14세가 5살 때 루이 13세는 죽고, 1699년 부왕의 서원 기도를 존중하여,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성가대 석의 뒤 면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부활 후의 행적들이 조각이 되어 있다. 유난히도 성당 건물에 조각, 그림, 모자이크, 부조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중세 시대에는 글을 읽는 사람이 왕족, 귀족, 성직자들 이었기에 일반인들에게 글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성경 내용을 전하기 위하여 그림, 조각, 모자이크창 등이 중세 종교 건축물에 많이 생긴다.

노트르담 대성당 배면-동쪽 입면[편집]

동쪽 입면과 남쪽 입면을 동시에 감상하고 싶으면 다리를 건너가서, 센느강에 떠있는 선상 까페에서 커피나 맥주를 음미하며, 지나가는 센느강 유람선을 바라보는 것을 권한다.

'요한 23세의 광장'에는 1830년 2차 혁명 때 부속 건물을 헐어 버리고 정원으로 만들면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석상이 우뚝 솟아 있다. 이 광장에서는 '고딕 건축'의 꽃이라고 하는 '버팀벽'이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면서 육중한 돌 건축물을 경쾌하게 띄우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빗물을 뿜어 내는 이무기 석상들을 볼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 때 파괴되었던 높이 90 미터의 첨탑과 사방으로 12 사도의 모습이 청동으로 제작된 지붕은 안타깝게도 화재로 분실되었다.

교통안내[편집]

  • 주소: 6 Parvis Notre-Dame, Place Jean-Paul II, 75004 Paris
  • Cité 역(지하철 4호선)
  • Saint-Michel 역(지하철 4호선 또는 RER B호선 및 C호선)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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