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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8일 (금) 03:4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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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투알 개선문(Arc de Triomphe, Arc de Triomphe de l étoile)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개선문이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죽은 프랑스 병사들을 기리기 위하여 지어졌다. 1836년 7월 26일에 완공되었다.
21세기 에펠 탑과 함께 프랑스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들 중 하나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68혁명 등 프랑스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함께한 프랑스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다.
일반인에게 개선문이라 했을 때 떠올리는 일반적인 건물이다.
개요
에투알 개선문은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서쪽 끝, 샤를 드골 광장 한복판에 위치한 거대한 개선문이다. 개선문의 위치는 총 3개의 아롱디스망에 걸쳐있는데, 남서쪽으로 16구, 북쪽으로 17구, 동쪽으로 8구가 자리하고 있다. 에투알 개선문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으며, 개선문 아래에는 당시 전쟁에서 프랑스가 거둔 모든 승전보들과 지휘관들의 이름이 양각되어있다. 개선문 아래에는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는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위치하여 있다.
에투알 개선문은 1806년에 건축가 장 샬그랭에 의하여 처음 설계되었으며, 군중들에게 최대한 애국심을 끓어오르게 하기 위하여 장대하고 우아한 신고전주의를 채택하여 개선문의 모양을 만들었다. 에투알 개선문은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을 본따 지었으며, 그 높이는 약 50m, 너비는 약 45m, 그 깊이는 22m이다. 1919년에 제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약 3주 후 개선 퍼레이드를 벌일 때, 비행사 찰스 고드프로이가 자신의 비행기를 몰아 개선문의 아치를 통과하여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은 멕시코시티에 개선문이 약 67m의 높이로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개선문이었으며, 1982년에 완공된 평양 개선문은 에투알 개선문의 모습을 본땄으며 그 높이는 60m로 에투알 개선문보다 약간 더 높다. 이후 파리에 세워진 신개선문은 약 110m의 높이이고, 프랑스어로 '개선문'이라는 뜻은 없지만 에투알 개선문과 거의 비슷한 용도로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개선문이라고 불린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아치 구조물이다. 개선문의 바로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는데 사계절 등불이 꺼지는 일이 없고 헌화가 시드는 일이 없다.
파리의 상징적인 건축물의 하나로, 단순히 개선문이라고 말하면, 파리의 이 개선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 세계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샹젤리제 거리가 시작, 12개의 거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있어 그 모양이 지도 위에서 빛나는 "성 = étoile"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광장은 "별의 광장 (Place de l' Étoile, 에투알 광장)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의 정식 명칭은 Arc de triomphe de l' Étoile이다. 다만 현재 이 광장은 샤를 드골 광장(Place Charles de Gaulle)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승리의 아치'(Arc de Triomphe)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개선문 자체는 전승 기념비이다. 따라서 개선문은 파리 시내에도 카르제르 문, 셍 드니 문, 셍 마땅 문 등 다수 존재한다.
샹젤리제 거리와 이 개선문의 연장선에 라데팡스는 "라 그랑데 아치"(La Grande Arche 또는 (Arche de la Défense)가 있는데, 이것은 전승 기념비가 아니므로 정식 이름에 "triomphe"가 있지 않다. 그러나 샹젤리제 도시 축에 있는 카르제르 개선문, 개선문에 이은 제 3번째의 문 (arc, arche)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프랑스의 나라 표어인 "자유, 평등, 우애"(Liberté, Égalité , Fraternité)에서 딴 '우애의 큰 아치'(La Grande Arche de la Fraternité)의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건축 양식을 본 딴 신고전주의 건축의 대표작이다.
역사
에투알 개선문은 1806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하는 데에 성공한 직후, 나폴레옹에 대한 지지가 그 정점에 달했을 때에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승리에 고무된 파리의 시민들은 나폴레옹의 업적에 걸맞은 거대한 기념물을 짓고자 하였고, 이로 인하여 새로운 개선문 건설이 의회에서 결의된 것이다. 워낙 거대한 대공사였기에 지면을 다지는 데에만 2년이 걸렸고, 이때문에 정작 나폴레옹이 1810년에 마리 루이즈 여대공을 데리고 파리로 개선하였을 때에는 제대로 공사를 시작하지도 못한 터였다. 결국 나폴레옹이 개선식을 치를 때에는 나무로 완성된 개선문의 형태를 그 자리에 세워서 이를 이용하여 개선식을 진행했다. 1811년에는 공사를 총감독하던 장 샬그랭이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장 니콜라스 휴요트가 공사 총감독이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황제는 개선문의 건설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개선문 공사 지연을 문제 삼으며 건설을 독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승승장구도 잠시,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군대가 호레이쇼 넬슨 제독에게 대패하고 나폴레옹의 인기가 점차 시들해지자 나폴레옹을 기리기 위한 목적이었던 개선문 공사도 점차 시들해졌다. 결국에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폐되고, 쫒겨난 부르봉 왕가가 돌아와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개선문 건설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부르봉 왕가의 새로운 국왕이었던 루이 18세는 개선문 건설에 관심도 없었고, 혁명 전후 혼란스러운 프랑스 정계 탓에 이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기적적으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기 위하여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를 몰아내려 들었으나, 또다시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세인트헬레나 섬에 완벽하게 유배되면서 나폴레옹이 꿈꾸던 그의 치세 하에서의 개선문 완공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1840년에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은 뒤, 그의 시신이 파리로 운구되어 4년 전 완공된 개선문을 통과하였으니 죽어서라도 자신을 위해 지어졌던 개선문을 통과하겠다는 소원은 풀었다 할 수 있겠다.
1916년에는 베르됭 전투가 치러지기 바로 전날에 개선문이 들고 있던 검이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정부가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여 바로 치웠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919년 8월에는 찰스 고드프로이라는 이름의 비행사가 개선문 사이의 아치를 비행기를 몰아 성공적으로 통과하면서 상당한 명성을 얻기도 했다. 이게 당시로서는 대단했던 것이, 아치의 너비는 14m, 높이는 30m도 채 되지 않았는데 꽤 큰 부피의 복엽기를 몰고 이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장 나바르라는 비행사도 이를 시도하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숨지기도 했다.
개선문은 건설 이후부터 쭉 그 목적에 맞게 프랑스 군인들이 개선식을 치르는 장소, 그리고 매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기념 퍼레이드 장소로 자리매김하였다. 다만 프랑스 군대만이 이 곳에서 개선식을 치른 것은 아니라서, 가장 대표적으로 나치 독일이 1940년에 이 곳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바라보는 앞에서 거대한 군대 개선식을 치른 바가 있다. 이 개선식은 아직까지도 사진과 기록이 무수히 남아있을 정도로 성대히 치러졌으며,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에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혔다. 다만 프랑스 군대가 2차 세계대전 후반인 1944년에 파리 수복에 성공하고 8월 29일에 미군과 함께 다시 개선문 아래에서 개선식을 치르면서 이 자존심을 조금 회복하기는 했다. 그래봤자 일부지만. 참고로 개선식을 진행할 때에는 아치 바로 아래에 묻혀 있는 무명용사들의 묘 때문에 이를 밟고 지나갈 수는 없다는 이유로 아치 자체를 통과하지는 않으며, 대신 개선문 주변의 환상도로를 크게 한바퀴 도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심지어 히틀러도 이 전통을 존중했다.
종전 후에도 개선문은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이나 국가기념일 등 대규모 행사에 주로 등장하면서 프랑스의 상징으로 굳게 자리매김했다. 다만 60년대에는 도로 차량들의 매연 탓에 하얀 개선문의 석재들이 지나치게 검은색으로 변색되어 나중에 한 번 대규모 청소 작업을 실시한 적도 있었다. 1995년에는 알제리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서 개선문 주위에 폭탄을 설치하여 17명의 중상자가 발생한 적도 있다. 같은 해의 프랑스 전승기념일(2차대전 유럽전선 종전일, 일명 V-데이)에는 프랑스측에서 독일 군대를 초청해서 프랑스군과 함께 독일 육군 군악대가 개선문에서 행진하는 일이 있었다.
한편 2018년에 일어난 노란 조끼 운동으로 인하여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면서, 이때 개선문 일부가 조금 파손되었다고 한다.
2021년에는 설치미술가 크리스토 자바체프(1935∼2020)의 유작으로 포장이 이뤄지기도 했다.
구조
에투알 개선문의 높이는 50m, 너비는 45m이며, 깊이가 22m 정도 된다. 또한 정면의 거대한 아치는 그 높이가 29.19m, 너비가 14.62m이며, 측면의 상대적으로 작은 아치는 높이가 18.68m, 너비가 8.44m이다. 이처럼 워낙 높이가 높고 거대하다 보니 1938년에 멕시코시티에 혁명 기념문이 세워지기 전까지 몇 백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개선문이기도 했다. 또한 평양에 지어진 평양 개선문 역시 이 에투알 개선문의 모습을 기본적으로 본따 지은 것이다. 참고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개선문은 파리의 라데팡스 지구에 지어진 '신개선문'으로, 이 역시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개선문은 건축가 장 샬그랭이 옛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양식을 답습하여 신고전주의식으로 지었으며, 참고로 개선문의 하단부에 세워져 있는 조각상들은 개선문과 일체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제작되어 마치 트로피처럼 그 곳에 전시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기둥들 하나씩마다 조각상이 1개씩 세워져 장식되어 있는데, 그 이름들이 각각 '1810년의 승리', '저항', '평화', 그리고 '1792년 출발'이라고 한다. 이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1792년 출발'로, 프랑스 혁명 당시 이웃의 왕정국가들이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선포하자, 마르세유 지방 등에서 의용군이 일어난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여성으로 의인화된 프랑스가 국민들을 이끌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조각상의 모습은 프랑스 육군 원수의 벨트 장식 도안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한편 개선문 아치 안쪽의 천장에는 혁명 전쟁 당시 프랑스 측에서 승리한 영광스러운 전투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으며, 안쪽 벽에는 프랑스 혁명 시기와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를 위하여 싸웠던 660명의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들 중 558명이 프랑스 제1제국의 장군들이라 할 정도로 대부분 거물들이다. 참고로 전투 도중 전사한 장군들의 이름 아래에는 밑줄이 쳐져 따로 구분된다. 참고로 개선문에 새겨진 전투들은 무조건 프랑스가 승리한 전투들만 기록되어 있어, 나폴레옹이 대패하고 그의 몰락을 재촉했던 워털루 전투 같은 치욕스러운 전투들은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개선문 바로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묘'라고 하여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사한 이들을 기리는 묘가 세워져 있다. 1920년에 처음으로 세워졌으며, 절대 꺼지지 않는 불이 늘 타오르고 있다. 물론 몇 년 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이후에는 1, 2차 가릴 것 없이 두 대전에 참여해 사망했던 이들을 기리고 있다. 매년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인 11월 18일에 이 곳에서 행사를 열어 이들의 넋을 기린다고 한다. 참고로 원래 무명용사의 묘는 팡테옹에 만들어질 예정이었으나, 파리 시민들의 강력한 주장과 편지 캠페인 등으로 인하여 결국 이 개선문 아래에 묘가 만들어져 안장되었다. 묘지의 명판에는 프랑스어로 ' ICI REPOSE UN SOLDAT FRANÇAIS MORT POUR LA PATRIE 1914–1918', 즉 '이 곳에 조국을 위해 싸운 이들이 잠들다 1914-1918'이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여담으로 1961년에는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이 곳을 찾아 샤를 드골 대통령과 함께 묵념하는 행사를 치르기도 했는데, 불과 2년 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후 그의 아내 재클린 케네디가 무명용사의 묘 곁에서 타오르는 성화를 기억해내고 이 성화의 불을 빌려와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싶다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 드 골 대통령이 성화를 가지고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상세 조각들
개선문의 기둥들에 조각된 4개의 주된 조각군들은 다음과 같다.
- Le Départ de 1792 - 다른 이름으로는 라 마르세예즈가 있다. 8월 혁명으로 프랑스 제 1공화국이 탄생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이 곳에는 날개를 단 자유의 여신이 시민들을 독려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제 1차 세계대전에 자원적으로 참전하러 떠난 이들, 그리고 1915년에 프랑스에 자금을 돌려준 이들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다.
- Le Triomphe de 1810 - 쇤브룬 조약을 기념하고 있다. 승리의 여신이 나폴레옹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 La Résistance de 1814 - 프랑스 저항을 기념하고 있다.
- La Paix de 1815 - 파리 조약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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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의 파사드에 새겨진 6개의 조각들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묘사한 것들인데, 이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Les funérailles du général Marceau (마르소 장군의 장례식), Henri Lemaire (남쪽 파사드, 우편).
- La bataille d'Aboukir (아부키르 전투), Bernard Seurre (남쪽 파사드, 좌편).
- La bataille de Jemappes (제파페스 전투), Carlo Marochetti (동쪽 파사드).
- Le passage du pont d'Arcole (아르콜 다리 전투), Jean-Jacques Feuchère (북쪽 파사드, 우편).
- La prise d'Alexandrie, (알렉산드리아의 함락), John-Étienne Chaponnière (북쪽 파사드, 좌편).
- La bataille d'Austerlitz (아우스터리츠 전투), Théodore Gechter (서쪽 파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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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단순한 문이 아니라 내부에도 공간이 있어 전시품도 있고, 겉보기와 달리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다. 관광객들은 보통 에펠 탑에서 야경을 보려고 하지만, 파리라는 도시를 이해하고 싶다면 개선문에서 전망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일단 에펠 탑은 입장료가 너무 비싸고, 에펠 탑 전망대에서는 에펠 탑을 볼 수 없다.
또한 파리의 지형은 거의 평지인 데다가, 건축물의 고도를 제한하고 있어서, 언덕 마루에 우뚝 솟은 개선문의 높이에서도 가려지는 시야 없이 충분히 도시를 조망할 수 있다. 더구나 개선문을 원의 중심으로 하여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유명한 대로들(샹젤리제 거리 등)을 360도 파노라마로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서쪽 신도심지구인 라 데팡스 지역의 신개선문(Grande Arche de la Défense)을 볼 수 있는데, 파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지는 상징성과 대칭적 구도를 흥미롭게 비교해볼 수 있다.
지도
동영상
참고자료
- 에투알 개선문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paris-arc-de-triomphe.fr/
- 〈에투알 개선문〉, 《위키백과》
- 〈에투알 개선문〉, 《나무위키》
- 〈에투알 개선문〉,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 김진 여행작가, 〈여행 & 건축 이야기 파리의 3대 개선문〉, 《대한경제》, 2018-11-01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