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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성공업지구'''(開城工業地區, Kaesong Industrial Region, KIR)는 [[황해북도]] | + | '''개성공업지구'''<!--개성 공업 지구, 개성 공업지구-->(開城工業地區, Kaesong Industrial Region, KIR)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합작으로 추진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특구]]이다. '''개성공단'''<!--개성 공단-->(開城工團)이라고도 한다. 개성공업지구는 [[개성특급시]]와 [[황해북도]] [[판문군]]의 일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2002년에 [[북한]]이 세계적 규모의 산업 단지 조성과 남북 및 외국 기업의 유치를 통해 [[동북아시아]] [[지역]]의 중추적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지정하였다.<ref name="네이버">〈[https://ko.dict.naver.com/#/entry/koko/4cb5fa37d8e64dbfbaf645f6d9be7957 개성공업지구]〉, 《네이버 국어사전》</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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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개성시]]는 [[휴전선]]과 가깝기 때문에 [[남한]]에서 접근하기 좋은 위치이다. 이 점에서 남북이 함께 [[산업공단]]을 조성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취지는 남북 교류를 활성화하여 [[통일]] 후 일어날 충격을 대비하는 목적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한 북한 노동력을 활용해 경쟁력 있는 상품을 생산하고 북한 역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서로 [[윈윈]]을 목적으로 한 이해관계 때문이다. 개성공업지구는 [[개성특별시]]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개발 합의 당시에는 개성직할시 판문군 판문읍(봉동리)·삼봉리·전재리 지역이었는데, 개성공단 사업 직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개성공업지구와 판문점 인근이 개성특급시 관할이 되었다. 개성공업지구는 개성특급시의 [[도심]] 외곽에서 남동쪽으로 2 km ~ 6.5 km 사이에 위치하고, 군사분계선에서의 최단거리가 2.5km로 비무장지대에서 서쪽으로 고작 500m 떨어져 있으며, 그 규모가 개성시의 도심(都心) 면적을 능가한다. | |
개성공단 초기계획은 1990년대 초부터 있었다. 남포공단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북한]]이 [[소련]] 붕괴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면서 외화벌이 사업에 뛰어들려고 했고, 남한 기업인들의 투자도 받아서 산업 육성을 시키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1992년에 대우그룹이 북한 당국의 협조로 200만 평에 달하는 공단을 설립하기로 합의 보면서 남포공단 계획이 설립되었고 1995년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일부 옷 공장만이 완공되어 가동되는 선에 머물러 북한의 경제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후 공장 확장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남포공단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2000년에 현대아산(주)과 북한과의 실무합의가 시작됐으며, 2003년 6월 착공하였다. 2004년 6월 시범 단지에 식기 회사 리빙아트, 의류회사 신원 등의 15개사가 입주계약을 체결하였고, 2005년부터 업체들의 입주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2013년 4월~8월 한차례 중단되었으며, 2016년 2월 10일 가동을 전면 중단하게 되었다. | 개성공단 초기계획은 1990년대 초부터 있었다. 남포공단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북한]]이 [[소련]] 붕괴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면서 외화벌이 사업에 뛰어들려고 했고, 남한 기업인들의 투자도 받아서 산업 육성을 시키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1992년에 대우그룹이 북한 당국의 협조로 200만 평에 달하는 공단을 설립하기로 합의 보면서 남포공단 계획이 설립되었고 1995년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일부 옷 공장만이 완공되어 가동되는 선에 머물러 북한의 경제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후 공장 확장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남포공단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2000년에 현대아산(주)과 북한과의 실무합의가 시작됐으며, 2003년 6월 착공하였다. 2004년 6월 시범 단지에 식기 회사 리빙아트, 의류회사 신원 등의 15개사가 입주계약을 체결하였고, 2005년부터 업체들의 입주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2013년 4월~8월 한차례 중단되었으며, 2016년 2월 10일 가동을 전면 중단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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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30일 (일) 10:36 기준 최신판
개성공업지구(開城工業地區, Kaesong Industrial Region, KIR)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합작으로 추진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특구이다. 개성공단(開城工團)이라고도 한다. 개성공업지구는 개성특급시와 황해북도 판문군의 일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2002년에 북한이 세계적 규모의 산업 단지 조성과 남북 및 외국 기업의 유치를 통해 동북아시아 지역의 중추적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지정하였다.[1]
개요[편집]
개성시는 휴전선과 가깝기 때문에 남한에서 접근하기 좋은 위치이다. 이 점에서 남북이 함께 산업공단을 조성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취지는 남북 교류를 활성화하여 통일 후 일어날 충격을 대비하는 목적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한 북한 노동력을 활용해 경쟁력 있는 상품을 생산하고 북한 역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서로 윈윈을 목적으로 한 이해관계 때문이다. 개성공업지구는 개성특별시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개발 합의 당시에는 개성직할시 판문군 판문읍(봉동리)·삼봉리·전재리 지역이었는데, 개성공단 사업 직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개성공업지구와 판문점 인근이 개성특급시 관할이 되었다. 개성공업지구는 개성특급시의 도심 외곽에서 남동쪽으로 2 km ~ 6.5 km 사이에 위치하고, 군사분계선에서의 최단거리가 2.5km로 비무장지대에서 서쪽으로 고작 500m 떨어져 있으며, 그 규모가 개성시의 도심(都心) 면적을 능가한다.
개성공단 초기계획은 1990년대 초부터 있었다. 남포공단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북한이 소련 붕괴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면서 외화벌이 사업에 뛰어들려고 했고, 남한 기업인들의 투자도 받아서 산업 육성을 시키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1992년에 대우그룹이 북한 당국의 협조로 200만 평에 달하는 공단을 설립하기로 합의 보면서 남포공단 계획이 설립되었고 1995년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일부 옷 공장만이 완공되어 가동되는 선에 머물러 북한의 경제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후 공장 확장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남포공단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2000년에 현대아산(주)과 북한과의 실무합의가 시작됐으며, 2003년 6월 착공하였다. 2004년 6월 시범 단지에 식기 회사 리빙아트, 의류회사 신원 등의 15개사가 입주계약을 체결하였고, 2005년부터 업체들의 입주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2013년 4월~8월 한차례 중단되었으며, 2016년 2월 10일 가동을 전면 중단하게 되었다.
2013년 4월 3일, 북한이 남한으로의 출경은 허용한 채 개성공단으로의 입경을 차단하며 9일에 북한의 노동자들이 철수하였고 5월 2일에 남아있던 남한의 모든 관리 인력이 모두 철수함으로써 5월 31일부로 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 뒤, 남한과 북한 간의 7차례 실무협약을 통해 2013년 8월 14일 개성공단 재개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9월 10일, 남한의 일부 인원이 공단에 상주하게 되었고, 9월 16일부터 정상 가동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2016년, 북한의 4차 핵실험과 광명성호 도발로 인하여 2월 10일, 박근혜 정부의 대북제재 이행 발표로 가동을 전면 중단하였다.[2] [3]
기반시설[편집]
개성공업지구 관리 위원회가 밝힌 개성공단의 기반 시설은 다음과 같다.
- 철도 : 철도는 단선으로 남측이 문산읍에서 군사분계선까지 12km를 공사했고, 북측이 군사분계선에서 개성까지 15.3km를 공사했다. 남북 궤도 연결은 2003년 6월 14일이루어졌다.
- 도로 : 도로는 4차선으로 철도와 마찬가지로 통일대교~군사분계선~개성공업지구를 연결하는 구간을 남측과 북측이 각각 따로 공사를 완료했다. 최종 공사는 2004년 11월 30일이루어졌다.
- 전력 : 2007년 6월부터 남한에서 송전탑을 건설, 1단계로 10만 kw, 154,000V를 공급하며 부가세 없이 남측과 동일하게 공급된다.
- 통신 : 남쪽의 문산 전화국에서 북측의 개성 전화국을 경유하여, 개성공업지구의 입주 기업에 공급한다. 전화 요금은 남측 통화는 분당 0.4USD이며, 공단 내 통화는 3분에 0.03USD이다.
- 용수 : 2007년 9월을 기준으로 월고 저수지에서 하루 6만 톤을 공급하며, 이 외에도 하루 3만 톤을 처리할 수 있는 폐수종말처리장과 소각과 매립을 할 수 있는 폐기물 처리장이 각각 마련되어 2008년 4월 완공되었다.[3]
역사[편집]
- 군사분계선에서 서쪽으로 2.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판문점에서 서쪽으로 4km, 대한민국의 도라산역에서 서북쪽으로 7km 떨어져 있어서 서울 서부의 마포구나 은평구에서 자동차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개성공단 사업은 2000년 8월 22일 현대아산(주)와 북한과의 합의로 시작되었다. 2003년 6월 30일부터 1단계 330만 제곱미터가 개발이 착수되었으며, 2007년에는 1단계 분양 및 1단계 1차 기반 시설이 준공되어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2004년 발표된 당초 계획으로는, 2011년까지 총 2,000만 평의 부지 위에 800만 평의 공단과 1,200만 평의 배후도시를 계획하고, 70만명의 북한 근로자가 고용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중 공장면적은 800만평이며, 생활, 관광, 상업 구역 등이 1200만평이다.
- 식기 회사 리빙아트, 의류회사 신원 등의 기업들이 2004년 6월 14일 시범 단지에 15개사가 입주계약을 체결하고, 2005년 18개사가 입주한 이래, 2010년 1단계 100만 평을 조성했으며, 2단계 조성 계획은 지연되었다. 2010년 9월에는 4만 4천 명의 북한 근로자가 일하고, 매월 900명 정도 증가되었다. 개성공단 1단계 사업은 현대아산(개성사업단)과 한국토지주택공사(남북협력사업처)가 남측의 사업 주체로, 지도총국과 개성공업지구 관리 위원회가 북측의 사업 주체로 활동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7년 5월 25일 개성공업지구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2009년 12월에는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를 완공하였으며, 2010년 9월에는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를 위한 탁아소를 개원하였다. 그리고 2016년 2월 10일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을 중단시켰다. 이후 만약 개성공단이 재개된다면 250만 평 확장 후 2단계 사업이 시작되어 개발할 계획이다. 2단계에서 250만 평 확장 후 2단계 사업이 끝나면 3단계는 500만평 확장 예정이다.[3]
갈등[편집]
- 대한민국은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하여 2010년 5월 24일 대북 조치를 발표, 개성공단에 대한 신규 투자를 금지하고, 공단 체류 인원을 평소의 50 ~ 60 % 수준으로 축소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10년 5월 25일 조국 평화 통일위원회 담화, 5월 27일 총 참모부 중대통고문 등을 통해 강력히 반발하고, 5월 30일에는 북한 중앙특구 개발지도총국을 통해 공단 폐쇄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비난했다.
-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사건과 관련하여 11월 24일부터 개성공단으로 출정을 잠정 차단하고, 대한민국으로 귀환만 허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가 2010년 11월 29일부터 최소한의 출정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5.24 조치와 관련하여 개성공단 입주기업은 기존 주문 생산 계약이 취소되거나 축소되거나, 납품 지연 등에 따른 어려움이 있었다.
- 2013년 4월 3일, 북한은 개성공단으로의 출경을 금지하고 대한민국으로의 귀환만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고 이어서 대한민국 정부는 개성공단 내 국민보호를 위해 2013년 4월 26일, 개성공단 내 잔류 근로자 전원 철수 조치를 단행했다.
- 2016년 2월 10일, 핵 실험과 미사일 도발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는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남측 근로자들을 모두 철수시켰으며, 개성공단 입주기업도 철수했다. 또한 정부의 방침에 따라 단전·단수되었다. 북한도 다음 날인 2월 11일, 개성공단 폐쇄 및 개성공단 내 자산 동결, 17시(한국 시간 17시 30분)까지 남측 인원 추방 등을 남측에 통보했다.[3]
여담[편집]
대북 유화 정책을 긍정하는 쪽은 개성공단의 효과를 과장하거나, 부정하는 쪽은 단점을 과장하는 경우가 있다. 전자가 주로 진보였고, 보수는 후자였다. 그런데 개성공단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편을 가르기 어려운 상황도 있다. 개성공단이 체제선전의 효과가 있다는 시각이 있다. 이건 어느 쪽에 장점인지 알기 어려운데, [[문재인], 태영호가 둘 다 대북지원의 체제 선전 효과를 긍정한 적 있기 때문이다. 후자가 좀 더 상호주의에 근거한 공세적인 대북 정책을 추구하여, 제한적인 경우에서 지원을 찬성한다는 차이는 있다. 2009년, 현대아산의 유성진 씨는 북한에서 '공화국의 정치체제를 비난했다'라며 억류된 적 있었다. 실제로 북한 여성과 교제한 뒤에 북한의 정치체제를 비판하게 만들 사실을 알려준 뒤 탈북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데일리 NK는 2020년 6월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 폭파 당시 북중 국경지대의 사람들은 탈북자가 경제를 어렵게 한다는 체제 선전을 믿었지만, 개성 인근 주민들은 북한 당국을 비판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남한 주민과의 교류로 민주주의 의식이 커졌고, 남한이 물러가면 자신이 못살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 대한민국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개성시와 그 근교 주민들을 부유층으로 만들어내면서 한동안 개성을 북한내에서 부유한 도시로 만드는데 공헌했고 각종 남한산 물품들이 개성 평양간 고속도로를 통해 평양, 남포, 사리원 등 북한 주요 도시로 대대적으로 유통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1990년대부터 연변, 단둥 등 중국 동북지방을 통해 남한산 물품들이나 복제판 DVD 등이 알음알음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 당시에 중국 기준으로는 남한산 물품들이 심하게 비싼 감이 있었기에 남한산 물품들을 대대적으로 들여놓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던 만큼 고속도로를 통한 직접적인 유통망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이점이었다.
또한 상당수의 개성 주민들이 개성공단에 취직하면서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고 각종 남한산 떨이 물품이나 잡화물들을 팔아치우며 부수입으로 짭짤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북한의 통제를 받는 특성 때문에 남한 기업에서 근로자들에게 대 놓고 식의 갑질을 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남한기업에 대해서 더욱 긍정적인 이미지 플러스 효과가 있었으며 고난의 행군 이후로 제대로 개보수되지 않았던 상하 수도망도 대대적으로 확충되면서 이전보다 위생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하니 개성과 그 근교 주민들이 남한에 대해서 더 좋게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이 점에 있어서 개성공단은 단단히 제 몫을 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보는 물론 보수도 나름 고민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초코파이 지급도 금지하고자 하여 근로자의 근로 의욕을 감소시키는 북한 당국의 행태는 의문이다. 북한은 단순히 사장의 갑질을 막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근로자들에게 갑질을 해댔다는 것이다. 개성공단을 통해 시장 경제적 마인드를 북한 주민에게도 제대로 심어줄 수 있었다면 보수도 시장 경제의 가치를 내걸기에 환영했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진보 진영의 측면에서도 남북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개성공단 운영에 대한 평가와 재개와 같은 문제는 이런 사항이 얽혀 있다.[2]
정치적인 이슈[편집]
- 2008년 3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개성공업지구 내에 있는 대한민국 정부 공무원 11명의 철수를 요구했으며, 이에 대응해 대한민국 정부는 일부 공기업 직원들을 제외한 공무원들을 3월 27일 0시 55분에 철수시켰다.
- 2009년 5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특구 개발지도총국은 개성공업지구 내에 있는 대한민국 기업들에게 주어지던 모든 특혜 무효화를 선언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6.15 공동선언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6.15의 혜택을 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라며 이 같이 선언했다. 또한 정부 정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여당 일각에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는 의견도 있다.
- 2009년 5월 18일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의원은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배석한 한나라당 최고위원 회의에서 "북한의 의도만 따지고 있을 게 아니라 개성공단 철수를 건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며 회의장을 나갔다.
- 2009년 6월 18일 개성공단 기업 협회 대표단은 한나라당을 방문해 남북 관계 악화에 따른 경영난 해소를 위해 긴급 자금 611억 원을 지원하고 경협보험 한도를 확대를 요구하였다.
- 2013년 4월 9일 북한이 연초부터 시행한 핵실험 강행으로 핵위협이 심해진 가운데 남한 정부는 이에 강경한 입장을 내놓고 북한은 이에 대해 최종적으로 개성공단 폐쇄를 하면서 일방적으로 근로자들의 출입을 제한시켰다. 하지만 160여 일이 지난 2013년 9월 16일 개성공단이 다시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 2016년 2월 10일,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4차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광명성 4호 발사)에 대한 보복으로 잠정 중단을 결정하였고 개성공단에 공급되는 가스, 전력을 중단할 수 있다고 했으나, 결국 잠정적으로 가스 및 전력 공급을 중단했다. 2월 1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폐쇄 조치를 내렸고 남한 종사자들을 추방했다.
- 2017년 2월 9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개성공단이 재개되어야 하고 2천만 평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개성공단 폐쇄 1년을 앞두고 SNS에 올렸다.
- 2021년 10월 7일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아직 발표된 사실이 아닌 개성공단 폐쇄로 인한 아사자 대량 속출 소식이 유튜브에서 방송되었다. 개성 지역의 경우는 고난의 행군 시기로 유명한 1994년경에도 아사자가 발생한 곳이 전혀 아니었으나 장마당이 아닌 개성공단과 관련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생계 수단을 잃고 1994년 시절의 고난을 2016년부터 뒤늦게 겪었다고 한다. 굶주림이라는 것을 처음 겪으며 지역민들 중에 일부는 북한 당국의 굶주림 대응 방식을 전혀 몰라서 순진하게 개성공단 재운영을 북한 당국에 요청하였으며, 그 항의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한다.[3]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