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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8일 (금) 03:46 기준 최신판

타워브릿지(Tower Bridge)
타워브릿지(Tower Bridge)
타워브릿지와 전경

타워브릿지(Tower Bridge)는 영국 런던 시내를 흐르는 템즈강 위에 도개교현수교를 결합한 구조로 지은 다리다. 런던탑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1886년에 착공을 시작하여 1894년에 완성한 이 다리는 완공된 첫 달에만 655번이나 다리가 들어 올려졌다. 현재는 1년에 약 200번 정도 다리가 들어 올려진다. 처음에는 수력을 이용해 개폐했지만 오늘날에는 전력을 이용하고 있다.

타워브릿지는 그 독특한 형태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이 바로 알아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런던의 상징이다. 중세 형식의 외관 때문에 아주 오래 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이 다리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호레이스 존스(Horace Jones)와 존 울프-배리(John Wolfe-Barry)가 설계했다. 런던 시내 템스강의 가장 하류에 건설된 교량으로 타워의 양 측경간은 현수교이며, 중앙 경간은 선박의 통행을 위한 도개교와 보행자를 위한 고가 거더교가 설치돼 있다. 화강암으로 마감된 고풍스러운 외관과 달리 타워의 실제 구조물은 철골로 되어 있다. 여러 모로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공학의 유산 중 하나다.

개요[편집]

타워브릿지는 템스 강 양측을 잇는 길이 244.1m(801ft)의 복합교량이다. 다리 중심의 양쪽에는 높이 64.9m(213ft)의 두 개의 타워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사이는 경간장 61.0m(200ft)의 이엽 도개교로 도개 시 최대 42.5m(139ft) 높이의 선박까지 통행을 가능하게 하며, 각 타워와 강둑 사이는 경간 82.3m(270ft)의 현수교로 이루어져 있다. 멋진 생김새로 유명한, 런던을 대표하는 다리이다. 건축가 호레이스 존스 경(Sir Horace Jones)과 토목공학자인 존 울프 배리 경(Sir John Wolfe Barry)의 주도로 1894년에 완공되었다. 2017년 6월에 준공 123주년을 맞이했다.

한국 부산의 영도대교와 달리 다리가 들어올려지는 시간은 비정기적이다. 그리고 도개에 맞춰서 배가 통과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사실 다리가 금방 올라갔다 내려와버리기 때문에(들어올리는 데 5분이면 충분하다.) 엄청난 볼거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왕 타워브릿지를 보러 간다면 들어 올려지는 시간에 맞춰서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리 바로 앞에서 보다는 아래에 설명할 런던 타워 쪽에서 봤을 때 도개장면이 훨씬 눈에 잘 들어온다.

두 개의 타워 및 옛 기계실은 현재 타워브릿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다리를 들어올리는 도개 장치는 원래 증기기관을 사용했으나, 1974년 전기 유압 모터로 대체되었다. 이로 인해 도개 장치 크기가 크게 작아져서 기존에 덩치 큰 증기기관을 넣었던 기계실은 쓸모가 없어졌다. 이 기계실은 현역 시절 그대로 보존되어 관람이 가능하다. 박물관 관람 도중에는 윗부분의 두 개의 타워 사이에 있는, 수면에서 43.6m(143ft) 위에 위치한 높은 보행교로 지나갈 수 있으며 전망이 좋다.

템즈강 자체는 한강에 비하면 매우 폭이 작은 강으로, 걸어서 타워브릿지를 건너가는 것은 매우 쉽다.

오래된 다리라서 그런지 제한이 좀 많다. 통행속도는 시속 20마일(약 32 km/h), 차량 무게는 18톤으로 제한된다. 다리 진입 전에 단속 카메라가 있다.

다리의 노후화로 인해 2016년 10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이 기간동안은 차량, 버스, 자전거, 사람 전부 타워브릿지를 건널 수 없었다. 대신 그 기간동안 강을 건너는 페리를 무료로 운영하였다.

이 <타워 브릿지>가 워낙 유명한 런던의 상징인 탓에, 이름부터 진짜 "런던"이며 노래도 있는 <런던 브리지>로 간혹 오해받는다. 그런데 진짜 런던 브리지는 정말로 볼품없게 생긴 현대식 다리다.

다리의 건설 배경[편집]

런던은 19세기 내내 이곳 템스강의 하류에 다리를 세우는 것을 고민했다. 이곳보다 약간 상류에 있던 런던브리지의 정체가 심각했을 뿐 아니라 런던 동부 지역이 개발됨에 따라 교통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다리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선박 통행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다리의 형식, 재정 조달 등에 대한 논란까지 일어 오랜 시간을 허비하다 결국 1876년에 이르러서야 다리 건설이 진지하게 추진됐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경우에도 다리가 선박의 통행에 지장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며 이 문제의 해결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낮은 다리는 선박의 통행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고, 높은 다리는 진입로의 경사가 심해 차량의 통행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완공 후 뿐 아니라 다리를 건설하는 동안에도 선박의 통행에 지장을 줘선 안 된다는 제한 조건으로 인해 시공 중 목재 가시설이 필요한 석조 아치교는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외됐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고 다리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 1876년 '특별교량터널위원회(Special Bridge or Subway Committee)'가 설치돼 설계 공모를 실시했다. 이때 50개가 넘는 설계안이 제출됐다. 그러나 이런저런 논란을 거치면서 무려 8년이 지난 후인 1884년이 되어서야 존스와 배리의 설계안이 채택됐다.

다리의 형식 못지않게 재정 조달에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1883년 시 건설국은 다리 건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에 석탄과 와인에 대한 관세 징수를 연장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거부됐다. 결국, 다리의 위치가 당시 시의 경계를 약간 벗어나 있었지만 13세기부터 런던브리지의 통행료와 다리 위의 건물 임대료를 모아두었던 런던 시의 '교량주택기금(Bridge House Estates)'으로 재원을 조달했다.

역사[편집]

다리의 건설[편집]

1886년 6월 21일, 드디어 다리의 기공식이 열렸다. 역사적인 첫 번째 돌이 놓이고 다리 공사가 개시됐다. 이 행사는 여왕을 대신해서 웨일스 왕자가 참석했다. 그리고 당시의 동전과 신문 등을 담은 타임캡슐이 돌 밑에 장착됐다. 이 돌은 지금도 북쪽 교대의 상류 쪽에서 볼 수 있다. 런던 시는 존스와 배리에게 다리 건설의 감독을 맡기지만, 1887년 존스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배리가 건설 감독을 맡아 다리를 완성하게 된다.

원래 공사 기간은 4년으로 허가됐는데, 두 번의 연장 끝에 결국 8년이 걸려 다리가 완공됐다. 공사가 지연된 원인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법적인 것이었다. 공사 중 선박 통행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계약 조건 때문에 교각 2개를 한꺼번에 건설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다리의 상부 구조를 건설하는 중에도 선박의 통행을 위해 도개교의 날개를 세우고 공사를 진행했다. 다리의 규모와 설계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공사 중 사망자는 10명에 불과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대단한 인명 피해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성공적인 공사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리의 개통[편집]

<타워브리지의 개통>. 윌리엄 와일리, 1895년, 캔버스에 유채, 런던 길드홀 미술관 소장

1894년 3월 27일, 공사 중 세워져 있던 도개교의 날개를 처음으로 내리고 다리 건설이 종료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다리의 공식적인 개통은 무거운 하중을 이용해 다리의 안전을 검증한 후인 6월 30일에 거행되었다. 개통식에는 8년 전 교각 기초의 첫돌을 놓았던 웨일스 왕자 (훗날 에드워드 7세)가 참석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수 만 명의 인파가 열광하는 축제의 일환으로, 빅토리아 시대 가장 위대한 공학의 개가로 인정받기에 합당한 새 타워브리지의 개통이 웨일스 왕자에 의해 엄숙하게 선언되었다."

1894년 7월 2일자 <타임스(The Times)> 지는 개통식 행사를 이같이 보도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과 강을 가득 채운 선박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실의 행진이 벌어졌다. 왕자들이 탄 마차가 다리를 지났다 다시 돌아오자 선박의 통행을 위해 도개교를 들어 올렸다.

다리가 들어올려지는 동안 트럼펫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부근의 런던타워에서 발사되는 축포와 템스강에 모여든 온갖 선박들이 내는 경적음으로 일대는 완전히 소음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화려하게 장식된 12척의 증기선이 다리를 지나 항해했다. 그중 한 척에서는 군악대가 국가를 연주하고 있었다. 실로 성대한 축하 행사였다. 이 행사 장면은 영국의 풍경화가 와일리(William Lionel Wylie)의 그림에 잘 담겨 있다.

"왕자가 손을 대자 육중한 도개교는 잠에서 깨어나는 거인의 팔처럼 서서히 하늘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수많은 깃발로 장식된 마차들이 인파를 헤치면서 긴 개선 행진을 거행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종소리와 대포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위대한 타워브릿지의 개통이 선언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다리 개통을 마친 직후 런던 시장은 남작(Baron) 작위를 받지만 교량을 성공적으로 건설한 교량 공학자 배리는 1897년이 되어서야 기사(Knight) 작위를 받았다는 점이다. 배리는 1년 후 이름을 울프-배리(Wolfe-Barry)로 개명했으며, 훗날 영국토목학회 ICE의 회장을 역임했다.

다리의 보수 및 유지 관리[편집]

도개교를 걷는 사람들
타워브릿지의 보행교 내부

타워브릿지가 개통된 직후에는 다리의 운영을 위해 8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 다리 책임관(Bridgemaster)과 관리 기술자(Superintendent Engineer)는 아예 타워에서 상주했다. 관리시설이 현대화된 지금은 13명이 기본적인 유지 관리를 맡아서 한다.

개통 당시는 선박의 통행을 위해 썰물 때는 도개교를 두 시간 동안 열어놓도록 했다. 그래서 보행자들이 기다리지 않고 다리를 건널 수 있도록 다리 상부에 통행로를 건설한 것이다. 그러나 이 규칙은 오래지 않아 느슨하게 되었고 시에서 기대했던 것처럼 통행로의 사용이 많지 않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행교를 이용하는 것 보다는 도개교가 다시 닫히기를 기다렸다가 다리를 건넜다.

승강기나 계단을 이용하여 타워를 올라가서 보행교를 건넌 후 다시 승강기나 계단을 이용해 내려오는 것이 힘도 더 들었지만 시간도 더 오래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 보행교는 산책을 하거나 런던 시의 경치를 조망하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장소였으나 1910년경에는 사용자가 거의 없어지자 폐쇄돼버렸다.

다리는 크고 작은 보수가 여러 차례 수행됐으나 1976년에 이르러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이때 원래 장착되어 있던 증기 기관이 전기 설비로 교체됐고 다리의 도색도 새롭게 했다. 건설 당시는 빅토리아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적갈색이었고 나중에 회색으로 바뀌었으나, 이때 다리를 청색과 백색, 그리고 부분적으로 붉은색과 금색으로 도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철거됐던 주철 장식들도 대부분 이때 복원됐으나 현재는 주철 대신 가벼운 복합 재료로 교체됐다. 탑의 승강기도 현대적인 것으로 교체했고, 보행교는 유리로 마감해 밖이 잘 보이도록 했다.

한편, 2012년에 개최된 런던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2008년부터 4년간 다리가 새로이 보수됐다. 이 기간 동안 보행교도 함께 보수됐고 새로운 조명이 설치됐다.

다리의 기술 및 공법[편집]

다리의 설계[편집]

현수교 설계안. 1862년 발로우와 리차드슨이 제안한 현수교 설계안
존스의 타워브리지 설계안

다리 건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한참 전이던 1824년 영국 현수교의 선구자인 사무엘 브라운(Samuel Brown)이라는 기술자가 현수교를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50년 가까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가 1870년대에 들어 그의 설계안이 진지하게 재검토되면서 온갖 다양한 안들이 제시되고 논의되었다. 1876년에 설치된 특별교량터널위원회가 실시한 설계 공모에는 50개가 넘는 설계안이 제출됐다. 여기에는 당시 유명 토목 기술자이던 베이잘게트 경(Sir Joseph Bazalgette)의 거대한 단경간 강 아치교도 포함돼 있었다. ‘타워브리지’라는 이름도 바로 이 베이잘게트의 설계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때 제안된 다양한 설계안 중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소위 '두플렉스(Duplex)' 다리다. 프레더릭 버넷(Frederic Burnett)이 제안한 이 설계안에 의하면 중앙에서 다리가 각각 스윙 구간이 있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그래서 배가 통과할 동안 다른 갈래를 이용해 마차와 보행자가 통행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다. 수로와 육로의 교통이 쉼 없이 운행하는 것이야말로 당시 기술자들에게 최대의 과제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여러 가지 안들을 놓고 논란을 거듭하던 중 결국 시의 책임 건설관 존스의 설계안이 선택됐다. 그의 설계안은 두 개의 주탑을 건설하고 그 사이에 아치형 도개교를 설치해 선박을 통과시키도록 하는 높은 다리였다. 주탑 사이의 공간에 금속 아치를 건설하고 이 아치를 통해 도개교를 체인으로 끌어올리고 내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안은 아치 때문에 도개교의 날개를 높이 들어 올릴 수 없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토목 기술자 배리가 등장하여 존스의 설계가 개선되었다. 아치교를 통해 도개교를 줄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증기 기관을 사용해 독자적으로 도개교를 들어 올리도록 개선한 것이다. 이 개선된 설계안이 의회에 제출되었고, 1885년 ‘타워브리지 조례’가 왕실의 승인을 얻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다리는 양측은 체인 현수교, 중앙의 보도교는 캔틸레버-거더교, 그리고 중앙의 도로교는 도개교로서 3가지 형식이 복합된 매우 독특한 교량으로 탄생했다.

다리의 시공[편집]

교각의 기초는 주철 케이슨을 하상에 8m 정도 근입하고 콘크리트로 채웠다. 그 위로 폭 24m, 높이 62m인 교각과 주탑이 세워졌다. 교각은 벽돌 조적으로 건설됐고 표면은 화강암으로 마감됐다. 거대한 규모만이 아니라 타워브리지의 교각과 주탑은 일반 교량에 비해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 높이 세워진 고가 보행교의 하중과 고정 구간의 현수 체인의 하중뿐 아니라 도개교의 개폐를 위한 균형추와 기계 설비를 장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탑은 철골로 건설됐다. 중앙의 도개교 구간에서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을 버텨야 하기 때문이었다. 양 측경간은 강철 현수 체인 케이블을 주탑과 양측 교대의 탑에 고정했다. 각각 1,100t에 달하는 도개교의 날개를 들어 올릴 수 있도록 증기 기관을 사용한 수압 개폐 장치가 주탑 내에 장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건설 당시 선박의 통행을 방해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에 도개교를 세운 상태로 주탑을 시공했다는 점이다.

도개 구간의 고가 보행교는 주탑에서 내민 두 개의 캔틸레버를 중앙에서 거더로 연결했다. 고가 보행교는 타워브리지 건설의 승인 조건으로 ‘의회 조례’가 명시

도개교의 설치와 운영[편집]

공사 중인 타워브리지. 1892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타워브리지. 보행교의 거더가 이어져 있다.

도개교의 개폐를 위해 증기 기관을 사용한 유압식 기계 설비가 설치됐다. 그리고 도개교가 열려 있을 때 사람들을 고가 보행교로 올려 보내기 위한 계단과 승강기도 설치됐다. 도개교의 날개를 들어 올릴 때 필요한 동력을 줄이기 위해 날개의 아래 부분에 철과 납을 이용한 130t에 달하는 균형추를 달았기 때문에 도개교 날개의 총 중량은 각 1,200t이 넘게 됐다.

모든 유압 설비는 암스트롱 경(Sir William Armstrong)의 회사가 설치했다. 모든 기계 설비 가동을 위한 증기 기관은 다리의 남쪽 진입 도로 아래에 설치했다. 만약을 대비해 모든 설비는 2개씩 설치했다. 건설 당시 날개를 들어 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2분이었다. 이 증기 기관은 1976년 전기 설비로 교체됐으나 원래 사용하던 증기 기관도 폐기하지 않고 전시되어 있다. 지금은 다리를 들어 올리는 데 약 1분 정도 걸린다.

개통 당시에는 하루 20회 정도 도개교를 들어 올렸고 첫 한 해 동안 무려 6,160회를 기록했다. 지금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보통 하루에 두세 번 정도로 줄었다. 도개교의 열림 각은 최대 87°이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35° 이상은 열지 않는다고 한다. 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전통은 다리 위의 자동차 통행보다 선박의 통행에 우선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97년 런던을 방문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토니 블레어 수상과 오찬 후 다리를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글래디스'라는 선박을 위해 도개교를 들어 올리는 바람에 그의 자동차 행렬은 반으로 잘리고 클린턴이 탄 차량은 정지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예기치 못한 경호사고에 클린턴의 경호원들이 진땀을 뺐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 타워브리지의 대변인은 "미국 대사관에 연락을 취했으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변명했다고 한다.

다리의 외관[편집]

타워의 모습은 중세의 성을 닮았는데 이는 근처에 있는 런던타워와 닮게 하려는 의도적인 것이다. 타워는 화강암으로 덮여 있지만 현대식 강 골조 건물에 덧붙인 커튼 월처럼 하중을 받지 않는다. 원래 설계안은 타워를 붉은 벽돌로 마감하는 것이었으나 배리가 건축 자문을 의뢰한 조지 스티븐슨이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했고 결국 화강암으로 마감하게 됐다. 주탑에 창과 발코니 등을 첨가해 주탑의 외관을 장식했는데 결과적으로 영국식이라기보다는 스코틀랜드의 성 모습에 가깝다.

다리의 역할, 상징 및 의미[편집]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는 타워브리지를 "인간의 노력이 빚어낼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상징물"이라고 칭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타워브리지를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공학적 개가라고 칭송했지만 사실 건축학적으로는 그리 후한 점수를 받지 못했다.

특히 중세의 성을 연상시키는 타워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한편에서는 타워의 철골을 포스브리지(Forth Bridge)처럼 그대로 노출시켜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 역사적인 장소에 철골이 그대로 노출되면 경관을 해친다면서 반대했다. 1894년 <빌더(The Builder)> 지는 "우리가 아는 한 가장 괴물 같고 기만적인 건축적 사기"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눈에 익숙해져 괜찮아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1909년 <타임스> 지는 다리가 "거대한 괴물 같은 고딕 장난감을 닮았다"라고 썼다. 이로부터 한참 후인 1952년에도 건축사학자인 페브너(Nikolaus Pevsner) 같은 이는 "황폐한 고딕 타워"인 "거대한 구조물이 런던의 스카이라인에 큰 피해를 주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타워브리지처럼 공학적인 구조물이 예술적으로 고상한 척 하기 때문에 볼썽사납다"

1924년 조지 버나드 쇼가 한 독설이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타워브리지는 빅토리아 고딕식 외벽을 뜯어내고 유리로 둘러싸자는 제안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루기도 했다. 한 시대가 만들어낸 조악함을 다른 시대의 조악함으로 교체하자는 이 땜질 처방은 그러나 실현되지 않았다. 그 무렵 영국의 저명한 조각가 길(Eric Gill)은 이렇게 말했다.

"문화가 철골 구조에 고딕 외관을 씌어놓은 것 같은 것이라면 사기다. 타워브리지처럼… 문화가 진정한 것이고 신성한 것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삶을 위해 실제로 하는 행위의 산물이어야 한다. 약에다 설탕을 입히는 것처럼 무언가로 덧칠해서는 안 된다."

아무튼 타워브리지는 1980년대에 들어 스스로 일종의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온갖 비난과 악담에도 불구하고 타워브리지는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다리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런던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자리매김 하면서 지금은 파리의 에펠탑이나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관광[편집]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탑 위로 올라가면 유리 통로로 된, 2개의 탑을 연결하는 인도교가 나오는데 브리지 아래의 템스 강은 물론 멀리 런던의 경치를 바라보기에 더할 나위없는 최고의 전망대다.

템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중 가장 야경이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 만큼 밤 하늘을 배경으로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타워 브리지는 빼놓을 수 없는 런던의 명물이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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